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고교동문산악회 탐방] 전주 성심여고 산악부

월간산
  • 입력 2007.09.05 09:1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6년 여고산악부로서 첫 지리산 등반 나서
김규승 초대 교장과 곽귀훈 교사가 주도
초기 전국대회 성적 대구 신명여고와 양분

고교 동문산악회 탐방 다섯 번째로 전주의 성심여고 산악반을 찾았다. 서울의 양정고, 대구의 계성고, 광주의 광주일고, 부산의 경남고에 이어 전라북도 전주의 성심여고가 대상이 됐다. 전주의 고교 산악부는 현재까지 존속하는 학교는 전무하지만 성심여고는 6·25 직후부터 산악활동을 시작한 이래 최근까지 학교에 산악부가 존속하는 등 그 역사성에 무게가 실렸다. 남자고교가 아닌 여자고교의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다른 지역에 비해 전북지역의 활동은 다소 미약하지만, 초기의 역사를 재조명해본다는 의미로 전주지역의 산악활동에 성심여고가 얼마나 중심적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성심여고 지리산 연례등반. 2006년 10월 2학년 학생들이 천왕봉에 올라 기념촬영 했다.100여 명의 여학생들이 정상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다.
성심여고 지리산 연례등반. 2006년 10월 2학년 학생들이 천왕봉에 올라 기념촬영 했다.100여 명의 여학생들이 정상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화제다.
성심여고 산악부는 그 역사성만으로 보자면 우리나라 여자고교에서 대구 신명여고와 더불어 단연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도 전부터 산악활동에 나섰기에 여고 산악부의 선구자적 위치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심여고는 52년 설립됐다. 초대 교장으로 김규승 교사가 취임한다. 김규승 교장은 성심여고 산악부 역사를 얘기할 때, 나아가 전북 산악계의 역사를 언급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인생이 산이었고, 산과 더불어 살다가 영원히 산으로 간 교장이었다.

지리산 첫 등반 당시 제석봉의 우거진 숲.
지리산 첫 등반 당시 제석봉의 우거진 숲.

김 교장의 주도로 성심여고 산악부는 56년 10월 등반대를 조직하여 첫 지리산 등정에 나섰다. 김규승 교장, 곽귀훈 지리교사 등 직원 5명과 당시 고3년생이던 윤한순, 김영원(김규승 교장의 딸), 신은주, 허옥순과 고2년생인 유호종, 장덕순, 김양례 등 7명의 학생 포함 총 12명이 3박4일 일정으로 장정에 올랐다.

지금은 눈에 띄는 게 차(車)지만, 당시엔 전차나 기차, 버스도 변변찮아 쉽게 타지도 못했고, 한번 타려면 여러 시간 기다리는 건 예사였다. 이들은 기차로, 버스로, 걷고 걸어서 겨우 지리산에 도착했다. 학생들 복장은 희거나 검은 광목천의 체육복에 스웨터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갔다. 교사들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도 있고, 중절모를 쓴 사람도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등산대라고 할 것도 없지만, 당시로서는 지리산 등반 그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이들은 하봉, 중봉을 거쳐 천왕봉 정상을 밟고, 제석봉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와 실상사에 묵은 뒤 전주로 돌아왔다. 파격적이었지만 첫 산행치고는 성공적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리산이나 한라산, 설악산 등반 그 자체가 화제가 됐다. 특히 지리산은 빨치산 잔당들이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우려로 많은 사람들이 꺼려했다. 이를 여고 산악부가 지도 한 장 달랑 들고 교사들과 함께 등반했으니 화제가 되고도 남았다.

1)56년 지리산 첫 등반. 2)60년 지리산 종주. 3)61년 60㎞극복 등행대회 출전. 4)60년대 중반 김규승 교장과 운장산에서. 5)60년대 후반 곽귀훈 교사가 졸업생들을 데리고 의암댐에서. 6)96년 모악산에서 학생들과 함께.
1)56년 지리산 첫 등반. 2)60년 지리산 종주. 3)61년 60㎞극복 등행대회 출전. 4)60년대 중반 김규승 교장과 운장산에서. 5)60년대 후반 곽귀훈 교사가 졸업생들을 데리고 의암댐에서. 6)96년 모악산에서 학생들과 함께.

56년 겨울엔 10월의 지리산 첫 등반기세를 몰아 김규승 교장이 다시 교직원과 학생 등 8명을 데리고 덕유산을 찾았다. 57년부터 성심여고 산악부의 본격 산행이 시작됐다. 주말이나 휴일엔 빠지지 않고 산을 찾았다. 당일 코스로는 모악산, 경각산, 만덕산 등을 찾았고, 1박2일 코스로는 내장산, 위봉산성 등 숙박이 가능한 사찰이 있는 곳을 등반했다. 김 교장의 산에 대한 애정으로 인해 산악부 학생들은 물론이고, 전교생들의 소풍이나 수학여행 코스로 산을 택하기도 했다.

2년생들의 수학여행으로 경주나 해인사 등을 경유하는 코스 대신 화엄사~노고단~천은사로 2박3일 갔다오는 파격을 선보이기도 했다. 김 교장이 아니면 못할 결단이었다. 이 행사는 어린 여학생들을 데리고 산에 다니며 외박한다는 사회적 눈총과 학부모들의 반대에 부딪혀 2년간 하다 중단됐다.

58년엔 성심여고 강당에서 지금의 전북산악회 전신인 전주산악회가 발족됐다. 초대 회장은 김규승 교장이 맡았고, 총무는 곽귀훈 교사가 맡았다. 이들은 성심여고 산악부를 이끈 쌍두마차였다. 60년 들어서 김규승 교장은 또 한번 사고(?)칠 계획을 세운다. 여름방학을 이용, 교사 4명과 학생 5명이 지리산 종주를 감행했다.

56년 10월3일 첫 지리산 천왕봉을 밟았을 때 감격스런 일출장면을 담았다. 왼쪽 손가락 뻗은 사람이 김규승 교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곽귀훈 교사.
56년 10월3일 첫 지리산 천왕봉을 밟았을 때 감격스런 일출장면을 담았다. 왼쪽 손가락 뻗은 사람이 김규승 교장,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곽귀훈 교사.
화엄사에서 1박하고, 노고단을 거쳐 임걸령에서 야영한 후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잠시 하산한다, 다시 세석으로 올라가 하루를 묵고, 천왕봉을 거쳐 실상사에서 저녁을 먹고 전주로 돌아왔다. 이 사실은 지리산 종주만으로 기사가 되던 때였으니, 출발 직후 일간지 스포츠면 1단 기사로 실렸다.

60km 극복대회 2연패 등 60년대 전성기 구가

성심여고 산악부는 이 때까지 독자적인 활동으로 산악활동을 꾸준히 해왔다. 당시엔 전국 단위의 대회도 없었고, 다른 학교와 연합해서 활동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나 59년부터 대구 팔공산에서 전국 60㎞ 극복 등행대회를 개최하기에 이른다. 성심여고 산악부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60년 대회에 여고 기록이 없었다. 대회본부엔 61년부터 여고부 기록이 정리돼 있었다. 대구 신명여고의 2연속 우승을 지켜만 봤던 성심여고는 63년엔 기어코 우승기를 빼앗아온다. 당시의 주요 멤버들은 강애자, 조정희, 김명희, 정현숙, 이상숙, 황삼심, 한송희, 전점순, 은명복, 김현옥, 김정희, 김일정 등이 주축을 이뤄 활동했다.

당시 활동했던 김일정은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산악활동이라는 걸 사실 잘 몰랐다. 자연이 좋아서 올라갔고, 지도교사가 잘 이끌어주고 귀여움을 받으니 그냥 잘 따랐을 뿐이었다.” 겸손인지, 남성과 여성의 차이인지, 남성 지배사회에서 여성의 사고관인지 헷갈렸다. 남자 같으면 분명 다른 답이 나왔을 것이다. 어쨌든 전성기를 예고한 우승이었다.

1)96년 내장산에서 재학생들과 함께한 한상훈 교사. 2)2004년 당시 재학생들이 천왕봉에서. 3)2006년 천왕봉 북쪽에서 한자리 모인 학생들.
1)96년 내장산에서 재학생들과 함께한 한상훈 교사. 2)2004년 당시 재학생들이 천왕봉에서. 3)2006년 천왕봉 북쪽에서 한자리 모인 학생들.

64년 대회에 다시 신명여고에 우승기를 빼앗겼으나, 65년부터 2연속 우승하는 쾌거를 이룩한다. 성심여고 산악부의 시대가 온 것이다. 60년대는 성심여고가 전북 산악활동에 항상 그 중심에 있었다. 61년 대구 대회에서 돌아와 광주팀과 무등산에서 암벽훈련을 실시한다. 이를 계기로 체력을 더욱 다지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63년엔 학교 소강당에서 전북 산악팀들의 해외원정 갔다 온 장비를 전시했다. 산악운동에 더욱 불을 댕긴 격이었다. 67년엔 변완철, ‘권금성 털보’로 유명한 유창서 등을 초청해 대둔산에서 3박4일간 암벽훈련을 하기도 했다. 산악운동에 가속이 붙었다.

대구 팔공산 등행대회에 자극받은 전북 산악계는 전국대회를 열기로 하고, 그 첫 대회를 61년 지역 신문사와 공동으로 개최했다. 3인1조로 군용 배낭에 모래 3㎏씩 넣고, 모악산을 넘어 가장 빠른 팀이 우승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성심여고도 이 대회를 꾸준히 참가했음은 물론이다. 이 대회는 86년 22회 대회를 끝으로 참가팀도 줄고, 지역 산악계의 지원도 미약해 결국 끝을 맺는다.

96년 학생들이 한 해 등산일정을 기록해놓고, 다녀온 소감을 적은 글들이 눈에 띈다.
96년 학생들이 한 해 등산일정을 기록해놓고, 다녀온 소감을 적은 글들이 눈에 띈다.

60년대는 성심여고 산악부뿐만 아니라 전북 산악계도 전성기를 맞이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68년 전주산악회 초대회장에 김규승 교장과 전문 산악인 수준에 가까운 나호진 검사가 전주지검으로 발령받아 왔고, 그 해에 산을 좋아하는 엄병건 전주시장도 부임해왔다. 각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산을 찾으니, 전북지역에 산악 붐이 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규승 교장에 의해 지속적으로 유지돼온 성심여고 산악부는 79년 두주불사에 ‘밑 빠진 항아리’라는 별명을 가진 김 교장의 예기치 않은 사망으로 쇠퇴의 길로 방향을 튼다. 이와 더불어 입시제도의 변화로 학교에서도 많은 시간이 드는 산악부 활동을 반대하기 시작한다. 긴 휴지기에 빠진다. 

90년대 들어 등산 마니아 한상훈 교사의 부임으로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듯했다. 학교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산악체험 행사를 가졌다. 모두들 궁금해 했고, 즐거워했다. 참가하지 않은 학생들조차 기웃거렸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 교사는 과거와 같이 성심여고 산악부의 화려한 부활을 꿈꾸고 있었지만 더 이상 발전할 수 없었다.

학부모들의 자녀진학에 대한 희망은 다른 모든 변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오로지 공부만을 위한 환경이 최우선이었다. 교사들도 거기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국체전에 등산종목이 생겼으니 출전해보자’는 한 교사의 제의에 모두들 반대했다.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학교 산악부인 푸르메 활동도 접은 지 3년쯤 됐다.

한상훈 지도교사는 “입시 위주의 교육이다 보니 교사로서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때로는 등산이 공부보다 좋을 때도 있다”며 “언젠가 성심여고 산악부가 부활하면서 대학입시 성적도 상위권에 오르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글 박정원 차장대우 jungwon@chosun.com
/ 사진 성심여고·곽귀훈님 제공

왜 성심여고인가?
 
60년대 전후 많은 학교에서 산악활동
최근까지 산악부 있고 역사 깊어 선택

전북 전주엔 50년대부터 여러 학교에서 학생산악운동 붐이 일기 시작했다. 50년대 중반의 성심여고에 이어, 60년대까지 전주공고, 전주고, 영생고, 전주여고, 전주농고 등에서 산악부가 막 활동을 시작했거나 태동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 학교출신들에 연락을 취했다. 다들 전화 받을 준비는 하고 있었다. 고교동문 산악회 탐방 월간山 시리즈로 ‘전북 차례가 되면 우리 학교가 소개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해봤다고 했다. 그들 결론은 한 마디로 ‘안 된다’였다.

먼저 전주공고. 초기엔 많은 활동을 했지만 학교 산악부가 없어진 지 오래됐다고 난감해 했다. 초기의 활동 몇 년 정도만 흔적을 찾을 수 있지 70년대 이후로는 역사도 없고, 연속성이 없다고 했다. 이어 전주고도 마찬가지. 지금 누군가 상당한 시간을 내어 일일이 당시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찾고 기록도 정리해야 하는데, 그럴 사람이 없다고 했다.

영생고, 전주농고 등도 별 차이 없었다. 다만 신흥고를 두고 약간 고민스러웠다. 산악활동을 겸한 보이스카우트가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었다. 학교 역사도 100년이나 됐다. 그러나 보이스카우트의 역사가 일천했다. 80년 졸업생이 1기였다. 지금도 매년 한번씩 당시 지도교사였던 김일한 교사의 주도로 모이는 건 관심을 끌만했다. 하지만 전주 지역의 고교 산악역사성을 먼저 한번 훑어보자는 의미가 크게 작용해 성심여고를 선택했다. 


지금 성심여고는…

학생들 100여명 매년 지리산 천왕봉 등반행사 가져
김낙완 교장 “호연지기·정체성·자신감 키우는 데 산악체험이 최고”

성심여고는 산과의 인연이 꽤 깊은 것 같다. ‘영원한 산사나이’ 초대 김규승 교장의 영향이 아마도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규승 교장은 52년부터 세상을 떠난 79년까지 27년간 교장직을 맡으며 학생들을 산으로 이끌었다. 대과없이 학교를 잘 이끌었으니 그만큼 오래했으리라. 우스갯소리로 그는 직업이 교장이었고, 취미와 특기는 등산이었던 듯하다. 그와 함께 근무하며 산에 한번 따라가 보지 않은 교사가 없지 않을까 싶다.

김낙완 교장(사진 왼쪽)과 한상훈 교사가 학교 산악부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낙완 교장(사진 왼쪽)과 한상훈 교사가 학교 산악부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낙완 현 교장도 김규승 교장이 타계하기 전인 77년 이 학교에 교사로 부임했다. 김규승 교장의 산행에 몇 차례 따라간 적도 있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지난 2002년 9대 교장에 김낙완 교사가 취임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김 교장은 취임 후 매년 학생들을 지리산 천왕봉 정상까지 등산을 정례화하고 있다. 2학년 학생들이 수학여행을 떠난 사이 남은 학생들을 이끌고, 체험 활동하던 행사를 지리산 청학동 전통 예절교육과 등산으로 바꿨다. 학생들에게 호연지기를 키우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강도 높은 교육으로 변화를 준 것이다. 지금이 5년째다.

100여명의 학생들이 한꺼번에 지리산에 오르니, 2~3km 이르는 행렬도 볼만하다. 교사들이 사전에 현장 답사를 다녀와서 중간에 쉼터 몇 곳을 정해놓고 장장 9시간 동안 강행군한다. 중간에 탈락자도 더러 있지만 내려오면 모두들 뿌듯해 한다. 처음엔 학부모들과 일부 교사들의 반대도 많았다. “천왕봉까지 등산은 너무 힘들다”, “공부할 시간에 웬 등산이냐”, “사고라도 나면 책임질 자신 있느냐” 온갖 원성이 들어왔다.

김 교장은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과감히 시행했다. 한번 해보니 학생들 반응은 뜨거웠다. “등산이 이렇게 좋은 줄 몰랐다”, “체험학습보다 훨씬 더 좋은 경험이었다.” 모든 학생들의 산악체험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많은 고비를 넘겨야 할 사전 극기훈련 격이었다. 

학생들은 이 경험을 대학진학 때 자기소개서를 쓰면서 빠뜨리지 않은 주제가 됐다.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교사들도 이제는 천왕봉 연례등반을 소중한 학교행사로 받아들이고 있다. 학생들 진학지도에 도움될 뿐 아니라 사제간의 끈끈한 유대관계 형성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훌륭한 매개체가 되기 때문이다. 학부모들까지 지원에 나섰다. 전문 등산가 수준의 학부모 4명이 학생들의 천왕봉 등산 때 가이드를 맡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김낙완 교장은 “김규승 교장의 좋은 뜻을 받들고, 여학생들의 자신감 키우는데 좋은 지리산 연례등반을 계속 이어갈 것”이라며 “앞으로 학교의 산악 역사뿐 아니라 모든 연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성심역사관을 만들어 더욱 역사 깊은 명문 학교로 키우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