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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새 연재 한국의 산신(山神) | (1·上) 지리산] ‘마고’는 태초의 신이자 무속 최고 神

월간산
  • 입력 2016.01.22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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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할미·성모천왕 등은 여신, 반야·법우화상은 남신… 시대 따라 명칭도 변화

노고단은 ‘노고할미’로도 불리는 지리산의 3대 봉우리 중의 하나다. 고대부터 산신제를 지낸 장소로 유명하며, 연중 많은 등산객이 찾는 봉우리다.
노고단은 ‘노고할미’로도 불리는 지리산의 3대 봉우리 중의 하나다. 고대부터 산신제를 지낸 장소로 유명하며, 연중 많은 등산객이 찾는 봉우리다.

한국의 산에는 신(神)이 있다. 어떤 신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종교전문가와 무속인들은 “한국의 모든 봉우리마다 산신이 있다”고까지 말한다. 언제부터 신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도 역시 없다. 역사적으로 대충 추정할 뿐이다.

일반적으로 신은 고대사회에서 자연신에서 시작됐을 것으로 본다. 인간이 자연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던 고대사회는 천둥·번개·폭풍우 같은 자연현상, 그리고 해와 달·별 같은 자연의 신비스런 순환 하나하나에 전부 위압감을 느끼고, 이들에 신령(神靈)이 깃들어 있다고 여겼다. 고대인들은 이들에 각각 제사를 지냄으로써 위안을 얻었다. 지금 이러한 형태를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으로 부른다. 이를 구체적으로 동물신·식물신·자연신·지신(地神) 등의 형태로 나눌 수 있다.

천신은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다. 바람·비·구름 등과 같은 자연현상을 전부 통제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까지 관장한다고 봤다. 천신을 하늘의 아들, 즉 천자(天子)로 여겼다. 그 천자가 사는 곳이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산의 봉우리였다.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는 단군도 하늘의 아들이었고, 그 단군이 죽은 뒤 아사달의 산신이 되어 태백산에 자리를 잡고 살게 됐다고 전한다.

종교학자들은 신화와 샤머니즘·토테미즘을 종교의 직전단계로 여긴다. 종교의 직전단계는 기존에 미신으로 치부됐던 민속신앙과 무속신앙, 산신신앙을 전부 포함한다. 이러한 신앙에서 조금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한 신앙이 종교다. 역으로 보면 민속신앙과 무속·산신에 그 민족의 정신과 혼령이 가장 많이 녹아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신으로 터부시하는 건 우리 민족과 수천 년 동고동락해 온 정신의 자취를 없애는 일이라고 종교전문가들은 말한다.

한국의 산신은 원래 천신(天神)이었고 천자였던 단군에서 시작한다. 천신숭배에서 산신숭배, 그리고 자연신에서 인격신으로 변화하는 중요한 터닝포인트가 되는 순간이다. 산신은 천신의 분신 내지는 화신이었다. 산신을 천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천신이 강림한 곳이 산 정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건국신화에 그대로 나타난다. 단신신화가 그렇고, 신라의 박혁거세도 천상에서 산악으로 하강했다고 전한다.

우리 조상들은 많은 토착신들을 모셔 왔다. 현재까지 이들을 총망라해서 파악한 바로는 불교·무속·문헌신에 나온 신은 126신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 신들이 등장한다. 중국이나 인도의 신화에서 유래한 신과 고조선 이래 왕조에서 숭상했던 신들까지 포함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산을 다니다보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신을 보고 들을 수 있다. 특히 산신은 이 126신에 포함되지 않은 신이 절대 다수다. 이들은 인간으로 살다 신격화된 인물도 상당수다. 앞으로 ‘한국의 산신’ 연재를 통해 우리가 흔히 산에 가서 볼 수 있는 산신각이나 칠성각, 독성각, 삼성각 등에 나오는 신들은 누구이며, 왜 신이 됐는지를 파악하고자 한다. 지리산부터 시작해서 수천 봉우리의 모든 산신을 두루 섭렵할 수 없지만 우리가 들을 수 알 수 있는 정도까지 최대한 제공할 수 있도록 하겠다. <편집자註>

신라통일 후 오악으로 산악숭배 정착

지리산은 누가 뭐래도 한국 최고의 명산 반열에 속한다. 일부 풍수지리전문가는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의 안산(앞산의 개념)이 백두산이고, 백두산의 안산이 지리산이다”고 말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그만큼 지리산은 명산이다.

지리산도 고대로부터 산신으로 숭배됐겠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고, 삼국시대부터 조금씩 등장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중요한 산악숭배대상으로 정착한다. 산악숭배는 중국의 오악과 거의 동일하다. 중국의 오악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한나라 때 오행사상과 더불어 중원을 통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경 근처에 있는 산을 중심으로 오악을 정했다. 일종의 황제의 영토를 선포하는 정치적 행위였다. 그 오악에는 오행사상과 유불선 3교를 융합한 민간신앙을 숭배하는 장소로 활용하면서 민심을 얻는 통치 도구로 삼았다.

중국의 힘을 빌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중국의 오악을 그대로 옮겨와 통치기반으로 삼았다. 즉 정치적 요구에 따라 산악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오악은 왕조에 따라 영토의 경계에 따라 다소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리산은 언제나 남악(南嶽)이었다.

신라의 오악은 새로 편입된 지역의 호족 세력을 상징하기도 했다. 동악인 토함산은 석탈해가 산신으로 모셔진 석씨 세력의 상징적 산이었다. 중악은 압독국이 있었던 팔공산 지역으로 신라가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는 길목에 있는 산이었다. 남악인 가야산은 가야세력을 상징하며, 서악인 계룡산은 백제세력을, 북악인 태백산은 고구려 세력을 염두에 두고 오악으로 정했다. 오악의 제사를 매개로 각 지역 세력을 신라에 편입하고 의례의 주관자인 국왕의 권위를 내세웠다.

1960년대 초 지리산 천왕봉에 있었던 선도성모와 남산신상 앞에 고인이 된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씨와 지리산 최초 등산회인 ‘연하반’ 초대회장을 지낸 우종수씨(오른쪽)가 앉아 있다.
1960년대 초 지리산 천왕봉에 있었던 선도성모와 남산신상 앞에 고인이 된 지리산 호랑이 함태식씨와 지리산 최초 등산회인 ‘연하반’ 초대회장을 지낸 우종수씨(오른쪽)가 앉아 있다.
이처럼 오악은 출발부터 국가적 진호와 깊은 관련성을 가진다. 오악에 대한 제사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평안과 발전을 비는 것이었다.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호국신앙의 반영으로 산신에게 치제(致祭)했다. 이와 동시에 전국 각 방면의 지역 세력을 진압하려는 목적도 가졌다. 

국가 제사의 대상이었던 지리산 산신은 마고, 성모, 천왕, 성모천왕으로 불리는 인격적 여성신이었다. 나라에서는 제사를 통해 신라의 사회적 안정을 다지려는 통치행위였다.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을 나눠서 大祀·中祀·小祀로 삼았다. (중략) 중사 오악 東은 토함산이며, 南은 지리산(당시엔 地理山)이다. 西는 계룡산이고, 北은 태백산이며, 中은 부악(공산이라고도 한다)이다.’

위 내용은 <삼국사기> 권32 제사지에 나온다. 이 시기는 대체적으로 신라의 9주가 창설된 신문왕 5년(685) 직후로 추정한다. 중사(中祀)로서 지리산에 제사 지내는 산신은 성모, 천왕, 성모천왕, 마고 등이었다.

<삼국유사> 선도성모수희불사편에도 나온다.

 ‘진평왕조에 지혜라는 비구니가 있었다. 현행(顯行)이 많은 여자로 안흥사에 거주했다. 새로이 불전을 수리하려다 힘이 미치지 못했다. 꿈에 한 여선(女仙)이 자태가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고 주옥으로 수식하고 와서 위로하면서 가로되, “나는 선도산 신모(神母)다. 네가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뻐하여 금 십근을 시주하여 돕고자 하니 마땅히 내 자리 밑에서 금을 취하여 주존삼삼을 분식하고 벽상에는 오십삼불과 육류성중과 제천신과 널리 오악신군을, 그리고 매년 춘추이계의 십일에 선남선녀를 모아 일체의 중생을 위하여 점찰법회를 베풀어 항규를 삼아라” 했다. 지혜가 놀라 깨어 무리를 데리고 신사좌하에 가서 황금 일백육십 양을 파서 얻어 일을 추진 성취하니 모두 신모의 지도한 바에 의한 것이다. 그 사적은 있으되 법사는 폐지됐다.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로서 이름은 파소(婆蘇)이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부왕이 편지를 소리개발에 매어 부쳐 가로되 소리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했다. 파소가 편지를 보고 소리개를 놓으니 이 산에 날아와 멈추므로 드디어 집으로 와선 지선이 됐다.’

신도산 신모는 원래 경주 선도산의 산신이다. 중국 제실의 딸로서 파소(婆蘇)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일찍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내왕하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신라가 중국의 삼산오악제도를 차용하면서 중국계 산신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토함산 선도산 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가져와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마고산신(할미)으로 변형된다. 마고는 사실 신라가 통일하기 이전의 지리산 산신의 전형인 셈이다. 보통 마고할미 전승은 해남·강진·옹진 등 주로 해안 도서지방에서 현재까지 내려오는 지역전설로서 거인신화의 대표적인 사례다. 제주도의 선망대(설문대) 할망이나 안가닥 할미 전승도 이에 속한다. 내용이나 성격상 여성거인전승(女性巨人傳乘)으로 통칭한다. 거인전승은 단순한 지역전설로서 별다른 서사내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고할미의 키나 덩치가 커서 깊은 바다가 무릎이나 속곳에 닿았고, 흙을 모아 산과 섬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서해안과 남해안에 폭넓게 분포하던 마고할미 전승이 지리산에 나타난다. 지리산 마고할미는 천왕봉의 성모천왕이라는 인물로 그려진다. 성모천왕은 마고할미, 노고로도 불리며, 이후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로 변신한다.

성모천왕은 몇 군데 기록이 전한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과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상에 전하는 말로는 지리산의 옛 엄천사에 법우화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산간에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 홀연히 이상스럽게도 물이 불어 그 근원을 알고자 천왕봉 꼭대기에 올랐다. 키가 크고 힘이 센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은 스스로 성모천왕이라 말하고, 인간세상에 귀양 내려와 군과 인연을 맺고자 물의 술법을 적용했다 하면서 스스로를 중매했다. 드디어 부부가 되어 집을 짓고 사는데, 딸 여덟을 낳았으며 자손이 번식했다. 모두 무술을 가르쳤는데 금방울과 부채를 쥐고 춤을 추고 아미타불을 창하고 법우화상을 부르고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무업(巫業)을 했다. 이 때문에 세상의 큰 무당은 반드시 지리산에 가서 성모천왕에게 기도해서 접신했다고 한다.’

 이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과 인간이 어울려 같이 웃고 같이 즐기며 같이 우는 모습과 유사한 장면이 연상된다. 바로 신의 인간화된 모습이다. 신도 인간처럼 부부인연을 맺고 집을 짓고 자식을 낳고 산다는 신의 인간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성모는 더 이상 신이 아니라 친근한 이웃집 여인으로 비춰진다. 여기서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지리산 산신에 도교가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 도교의 최고 산신인 벽하원군은 두 보조자와 6명의 수행원을 거느린 여신이다. 8명의 딸을 낳은 성모천왕과 벽하원군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중국 오악에도 그렇지만 우리나라 산에도 도교와 불교가 그대로 나타난다. 도교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중국에서 도교는 거의 서민종교이면서 민중신앙이다. 도교는 노자와 황제를 교주로 삼으면서 노자의 도가와는 조금 다르다. 후한 말기 장도릉이 창시한 오두미교라 불린 도교는 7세기 당나라 때 번성기를 맞는다. 이렇게 보면 한반도에는 그 이후에 건너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교는 신라에 4세기 후반에 들어왔다.

1 천왕사 산신 탱화. 남성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남녀 산신이 각각 한 마리씩 호랑이를 타고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나타내지 않는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된 특징이 나타난다. 지리산의 남녀 산신을 보여 주려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2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산신 탱화. 단군 시조의 모습과 도교적 상징인 구름 모자와 머리와 어깨 위에 새를 앉혀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1 천왕사 산신 탱화. 남성적인 특징을 보여 주고 있으며, 남녀 산신이 각각 한 마리씩 호랑이를 타고 있어 절대적인 역할을 나타내지 않는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혼합된 특징이 나타난다. 지리산의 남녀 산신을 보여 주려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2 쌍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된 고대 산신 탱화. 단군 시조의 모습과 도교적 상징인 구름 모자와 머리와 어깨 위에 새를 앉혀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신인화된 여산신은 중국 도교와도 비슷

따라서 애초 마고에서 시작된 지리산 산신은 <삼국유사>에 성모로 변한다. 그 성모는 신라시조인 혁거세와 왕비인 알영을 낳은 신모로 표현된다. 이러한 성모신앙은 통일신라기에 지리산에 영향을 미쳤고, 이후 고려시대에 지리산 성모천왕이라는 신격을 얻게 된다. 그 영향력은 불교국가인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설과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설을 유발시키는 계기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최초의 국가로 간주한다. 한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바로 ‘마고지나(麻姑之那)’라는 것이다. 마고지나는 ‘마고의 나라’라는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1만2,000년 전에 건국했다고 한다. 신빙성은 둘째 치고라도 어쨌든 마고할미는 지리산 산신의 원형으로 봐도 무리 없을 것 같다.

한국의 126신 중에서 마고는 무속신 중에서 최고의 신으로 분류된다. 마고는 태초의 음(陰)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상징된다. 하늘과 태양이 양(陽)의 세계라면, 음은 마고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여성신으로 간주된다. 여성신이 있으면 반드시 남성신이 있기 마련이다. 앞에서 언급한 이능화의 <조선무속고>과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나오는 법우화상은 대표적인 지리산 남신이다. 남신은 자연스럽게 천신에서 인격신으로 변화한 것이다. 숭배대상의 중요한 변화이자 신격의 인간화가 이뤄졌다. 이는 신과 인간이 둘이 아니라는 신인불이(神人不二)라는 점에서 서양의 고대문명과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다른 표현으로 ‘신인(神人)복합’과 ‘영·신(靈身)복합’이라고 한다. 이는 한국인의 신관(神觀)뿐만 아니라 신화를 보는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사회 지배이데올로기가 산신까지 바꿔

인간화된 지리산 남성신은 법우화상 외에 또 있다. 역시 권태효의 <한국의 거인설화>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지리산에 키가 36척(약 1,080cm)에 다리가 15척이나 되는 마고 혹은 마야고라는 여신이 있었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 노고라 불리는 천신의 딸이다. 마고할미는 반야봉에서 불도를 닦던 반야라는 남신과 사랑을 나누고 결혼했다.

 그들은 천왕봉에 살면서 딸만 8명을 낳았다. 그러다 반야는 곧 돌아온다고 길을 떠난 뒤 돌아오지 않았다. 기다리다 지친 마야고는 긴 손톱으로 나무 밑동을 끓어 버렸다. 지리산의 나무들은 모두 껍질이 벗겨지고 말았다. 마야고는 이제나 저제나 반야를 기다리며 나물에서 실을 뽑아 반야에게 줄 옷을 지었다. 그러던 중 반야는 구름으로 화하여 지리산으로 돌아왔지만 마야고의 앞에 머물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화가 난 마야고는 반야에게 주려던 옷을 갈기갈기 찢어 나뭇가지에 걸어놓았다. 갈기갈기 찢어진 옷이 바람에 날리어 반야봉으로 날아가니 바로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고 전한다.
후세 사람들은 반야가 불도를 닦던 봉우리를 반야봉이라 불렀고, 그의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 그 후 마야고는 천왕봉에 좌정하여 성모신이 됐다.’

지리산 남신에 반야가 등장한다. 구체적인 이름을 가진 남성신으로는 법우화상과 반야가 전부다. 애초에 등장한 천신이 남성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단지 하늘의 아들로 숭배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천신에 대한 기록이나 신화는 전하는 바가 없다.

지리산 산신의 근원은 천신이었지만 여성신인 마고할미, 성모천왕과 혼인을 한 남성신 반야, 법우화상 등을 거치면서 신라 이후부터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설과 마야부인설 등 더욱 다양해진다. 이는 불교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가 숭배하는 산신까지 바꿔버렸다.
 
신라에 불교가 유입될 4세기 후반 신라는 산신과 천신, 칠성신 등 다양한 형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신라에 유입된 불교는 최대한 토착신과 융합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까지 절대적이었던 산신각과 칠성각을 사찰의 중심 공간인 대웅전 뒤에 배치함으로써 사람들이 대웅전 앞을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불교적으로 동화시키기 위한 포석도 감안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불교는 고려시대 들어서 더욱 번성기를 맞는다. 산신의 구체적인 모습까지도 변화시켜 버렸다.  <지리산下에 계속>

지리산 산신제 지내는 구례 남악사
지리산 산증인 우두성 구례문화원장

1 구례 유림회에서 남악사를 올리고 있다. 구례 산신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2 구례 문화원장 우두성씨가 구례 남악제와 산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1 구례 유림회에서 남악사를 올리고 있다. 구례 산신제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2 구례 문화원장 우두성씨가 구례 남악제와 산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지리산 산신제는 현재 구례·산청에서 지낸다. 구례는 군에서 적극 지원하고 문화원에서 직접 주최한다. 산청에서는 덕산 두류산악회에서 지낸다.

구례는 지리산남악제를 가장 일찍 시작해서 해마다 4월 20일 곡우 전후해서 열린다. 광복 후 유지와 군민들이 지리산신제를 봉행했다는 역사성을 내세워 2015년 71회째를 지냈다. 매년 주제는 ‘천년의 역사 속으로 떠나는 여행’. 신라 때부터 이어온 행사를 구례가 앞장서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 즉 역사성을 앞세우고 있다. 특히 국가적 제사를 지냈던 지리산신사가 천왕봉이 아니라 노고단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신라 시절 천왕봉에 있었던 제장을 고려시대에는 노고단 또는 노고단 근처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이승휴의 <제왕운기>를 제시한다.

‘노고단이라는 곳은 우리 태조가 일찍이 여기에서 기도하여 지리산신의 감몽을 받았으므로 남악사를 남원 소의방(지금 구례 산동면 당동) 당촌으로 옮겨 세웠다. 길상봉(노고단)은 또한 문수봉이라고도 하는데, 지리산 세 개의 봉 가운데 조봉인 까닭에 남악사를 이곳에 세운 것이다. 그 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사실의 진위여부를 차치하더라도 구례군은 지리산산신제에 있어서는 제일 앞서는 건 사실이다.

산신제의 위패는 ‘智異山之神(지리산지신)’ 또는 ‘智異山大大天王天淨神菩薩(지리산대대천왕천정신보살)’ 이를 줄여 ‘智異山大大天王(지리산대대천왕)’이라고 쓴다.

남악제례는 유교식으로 진행한다. 산신과 유교는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제사방식과 복식 등 엄격한 고증을 거쳐 확인했다고 한다. 다른 지역의 산신제가 불교식 또는 무교식 산신제를 지내는 것과는 구별된다. 2005년 남악제에는 전국의 유림 대표가 참여하기도 했다. 유교식 산신제를 계승하는 전통 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됐다.

유교식 산신제는 조선시대 국가제사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가 주조형 산신제는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 그것을 구례군이 재현해서 지내고 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도 동시에 펴고 있다. 역사적 근거가 충분치 않아도 산신제의 역사성과 전통성을 강조하며 남악제의 정통성을 내세우고 있다.
우두성 문화원장은 “구례군의 당초 계획은 2015년 연말쯤 지리산남악제를 국가지정 문화재 무형유산으로 문화재청에 신청할 예정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마무리가 조금 미진해 2016년으로 해를 넘기게 됐다”고 말했다. 구례군은 2011년 ‘지리산남악제의 역사와 문화’라는 주제로, 2013년엔 ‘지리산 남악제의 전승과 축제연구’에 관한 학술심포지엄을 3번이나 개최하는 등 2003년부터 지리산남악제를 무형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고 우 원장은 덧붙였다. 현재 남악사는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난 1984년 2월 29일 지정된 상태다.

매년 4월 곡우 때만 되면 구례에서는 “삼가 주찬을 갖추어 민관이 함께 모여 정성을 드리오니 지리산신이시여! 영원토록 흠향하옵소서”하는 고축문이 지리산 자락에 울려 퍼진다.

지리산 산신상에 얽힌 사연과 수난사
중산리 천왕사에 봉합된 여 성모석상 보존… 남 산신상은 알 수 없어

지리산 산신은 어떤 모습일까?
우두성 구례문화원장은 “지리산 산신은 남신과 여신상 두 가지 모습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의 선친인 지리산의 살아 있는 전설이자 지리산 최초의 등산모임 ‘연하반’ 초대회장인 우종수씨와 지리산 호랑이로 통하는 함태식씨가 산신각 앞에서 함께 찍은 빛바랜 흑백사진을 보여 준다. 이미 고인이 된 두 사람은 등을 보이며 산신각을 바라보고 있다. 산신각은 1,000여 년 됐다는 여성 산신상과 음각으로 만든 남성 산신상 한 쌍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1955년 5월 5일 ‘연하반’이 창립됐으니 그 사진은 1960년쯤 된 듯하다.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패한 왜군이 도주하면서 성모석상을 칼로 내리쳤다고 전한다. 그 모습이 선명하게 전한다. 이 사진은 1970년대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 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고려 말 황산대첩에서 패한 왜군이 도주하면서 성모석상을 칼로 내리쳤다고 전한다. 그 모습이 선명하게 전한다. 이 사진은 1970년대 이전에 찍은 것으로 추정된다. / 사진 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여 산신상, 즉 천왕봉 성모석상은 어깨에 칼로 잘린 흔적이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에 크게 패한 왜군 패잔병들이 지리산에서 도망치면서 그 화풀이로 성모석상의 어깨를 칼로 마구 난도질하면서 부서졌다고 한다. 어깨에 선명하게 표시가 남아 있다.

일제시대에도 성모석상은 수난을 당한다. 일제는 한민족의 숭배 대상이었던 성모석상을 벼랑 아래로 굴러 내버렸다. 산청에 살던 한 처녀가 굴러떨어진 성모상을 자기 집에 모셔놓았다. 그런데 그녀는 신통력을 갑자기 얻었는지 곧 무당이 됐다고 전한다.

다시 천왕봉에 모셔진 성모석상은 1970년대까지 숱한 기도객이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또 어느 종교단체의 집회에 참가했던 사람들에 의해 다시 벼랑 아래로 내던져지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14년의 세월이 잊혀진 채 흐르는 듯했다. 1986년 6월 진주의 비봉산 과수원에 숨겨져 있던 성모석상의 두상 부분을 산청 덕산두류산악회와 국립공원관리공단, 천왕사 세 단체 대표가 진주 사람을 설득해서 다시 산청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세 단체 대표 중의 한 사람인 천왕사의 혜범스님이 천왕봉 남쪽 통신골에서 몸통 부분을 찾아내 봉합작업을 마친 뒤 천왕사 경내에 아예 이전하지 못하게 콘크리트로 접합, 고정시켜버렸다. 이에 두류산악회에서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한 뒤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천왕사는 조계종 산하 사찰은 아니지만 성모석상을 대웅전에 모신 뒤로 날로 번창하고 있다고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은다. 사찰 경내 부지도 날로 확대되고 있다고 전한다. 처음에 슬레이트 지붕의 초라한 집 한 채에서 시작한 천왕사는 불과 몇 년 사이에 신도가 급격하게 늘어나 여러 채의 건물이 들어섰다.

혜범스님도 마을주민과 공단에서 돌려달라는 목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 누가 천왕할매를 훼손하거나 훔쳐 가면 어떻게 합니까? 내가 천왕할매를 찾았으니, 내가 안전하게 모시고 있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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