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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시즌 특집 | 서울 북부 4대 명산_북한산 르포] 기네스북에 ‘한 해 입산객 최다 등재기록’한 기암 명산

월간산
  • 입력 2016.03.07 1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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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벽 능선~백운대~대남문~의상봉 능선 14.4km 능선 종주산행

사람 욕심의 끝은 정점인가.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알바위산 백운대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곳에 서면 명풍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풍광을 누리고자 정점으로 향하는 것이다. 오른쪽에 인수봉이 비슷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사람 욕심의 끝은 정점인가.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알바위산 백운대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그곳에 서면 명풍경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그 풍광을 누리고자 정점으로 향하는 것이다. 오른쪽에 인수봉이 비슷한 모습으로 솟아 있다.

도봉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을 이루는 북한산(北漢山)은 명산이다. 최고봉 백운대(白雲臺) 높이가 836.5m에 불과하지만 국내 1,500m, 1,600m 산도 지니지 못한 다양한 풍광을 지니고 있다. 한강 북쪽에 솟구친 북한산은 산줄기를 사방팔방으로 뻗어내려 서울 북부는 물론 양주시까지도 끌어안고, 산릉은 곳곳에 웅장한 바위봉우리와 기기묘묘한 기암들을 얹고 화려함에 멋들어진 조망을 갖추었다. 삼각산이란 이름을 낳게 한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세 봉우리만 해도 여느 산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웅장한 풍광에 도도함까지 지니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산이었다. 백제 시조 온조와 그의 형 비류가 한산(漢山)의 부아악(負兒嶽·곧 북한산)에 올라 한강 일원을 바라본 뒤 하남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했다 하니 북한산은 백제 건국의 발상지나 다름없다. 삼천사를 비롯해 신라 때부터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해 불교문화의 메카로 자리 잡는가 하면 조선 숙종 때는 산릉을 따라 산성이 구축되고 산 안에 행궁이 지어질 정도로 전략적 요충지였다.

클라이머들에게는 등반 메카 같은 곳이다. 인수봉, 노적봉, 백운대 등은 일제 때부터 루트 개척이 시작된 이래 지금까지도 개척 등반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동으로 수락산, 불암산 그리고 남으로 청계산, 관악산, 삼성산과 더불어 서울의 허파 역할을 하며 등산객들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1994년 북한산국립공원을 찾은 연간 탐방객이 500만 명이 넘어 기네스북에 오르기도 했다. 지난해 봄 메르스로 인해 나들이 인파가 대폭 격감했음에도 2015년 한 해 동안 북한산을 찾은 등산인은 360만 명에 이른다. 최근 우리나라를 찾는 해외 관광객들 가운데 북한산을 찾는 사람도 많이 늘어나 백운대를 오르내리는 외국인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북한산을 오르는 산길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닥이다. 북한산성, 우이동, 정릉, 불광동, 구기동 등 분소나 탐방안내소가 있는 기점만 해도 10곳이 넘을 정도다. 산기슭 주택가로 이어지는 산길에 산 안에서 갈래 친 산길까지 엮는다면 산행코스는 난이도나 취향에 따라 얼마든지 선택할 수 있다.

보국문~대성문 사이의 망대에서 바라본 삼각산.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세 암봉이 산 한가운데 바위꽃처럼 피어올랐다. 맨왼쪽이 원효봉, 그 오른쪽 은 염초봉이다. 오른쪽 뒤로 오봉에서 자운봉~만장봉~선인봉으로 이어지는 도봉산릉도 한눈에 들어온다.
보국문~대성문 사이의 망대에서 바라본 삼각산.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 세 암봉이 산 한가운데 바위꽃처럼 피어올랐다. 맨왼쪽이 원효봉, 그 오른쪽 은 염초봉이다. 오른쪽 뒤로 오봉에서 자운봉~만장봉~선인봉으로 이어지는 도봉산릉도 한눈에 들어온다.
취재팀은 그중 효자리 사기막골에서 출발해 숨은벽 능선~백운대~대남문~의상봉 능선~북한산성분소로 이어지는 약 14.4km 코스를 답사했다. 이 코스는 북한산을 대표하는 백운대와 인수봉의 웅장함을 만끽하고, 조선 숙종 때 반년 만에 조성한 산성을 따르며 북한산의 전모를 살피고 서울과 경기 북부의 도시와 산야를 둘러볼 수 있는 명 코스다.

백운대와 인수봉 향해 달려드는 형상의 바위기둥

“북한산성 12대문 길이라고 들어봤어요? 대서문부터 시작해 가사당암문, 부왕동암문, 청수동암문, 대남문, 대성문, 보국문, 대동문, 용암문, 위문 거쳐 원효리지 북문과 시구문으로 이어지는 길. 오늘은 사기막골에서 숨은벽 능선을 따라 백운대 정상에 올랐다가 위문부터 역순으로 걸을 거예요. 꽤 긴 거리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해요. 근데 엄청 춥네, 장갑 낀 손이 시린 걸 보면….”

사기막골에서 효자리계곡으로 들어서는 길은 긴 겨울 가뭄에 먼지가 풀풀 날리면서 강추위에 꽁꽁 얼어붙어 있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커다란 송골매는 일행의 모습에 놀랐는지 푸드득 소리내며 잿빛 하늘로 날아오르고, 골짜기 끄트머리로 백운대와 인수봉은 아침 햇살에 희뿌옇게 모습을 드러낸다.

밤골 갈림목(밤골지킴터 0.5km)을 거쳐 숨은벽 북서릉에 올라서자 해가 영봉 능선 위로 올라서고 잿빛 산이 깨어난다. 햇살 등진 인수봉은 묘한 풍광이다. 웅장함과 신령스러움이 합쳐졌다. 하늘에서 쏟아진 영험한 기운에 하늘로 떠오르는 듯하다.

숨은벽 리지가 바라보인다. 도보 산행코스는 숨은벽 리지 직전 안부에서 오른쪽 길 따라 밤골로 이어진다.
숨은벽 리지가 바라보인다. 도보 산행코스는 숨은벽 리지 직전 안부에서 오른쪽 길 따라 밤골로 이어진다.
된비알을 올려치자 이제 숨은벽 바위능선과 백운대도 자태를 드러낸다. 태극기 휘날리는 백운대 정상에는 아직 이른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여럿 올라 있다. 동쪽으로 분지처럼 널찍한 효자리계곡은 빛이 스며들면서 아늑해지고, 효자리계곡 동쪽 장벽을 이룬 상장능선 뒤로 오봉에서 신선대로 이어지는 도봉주릉은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해골바위를 지나 “능선 오른쪽 허릿길은 조망이 별로”라는 양효용씨 말에 능선 왼쪽 길로 접어든다. 과연, 허릿길 따르다 등날로 올라서자 거대한 암릉이 벌떡 일어서고, 인수봉이 고개를 바짝 치켜든다. 예서 숨은벽 리지는 바위능선이 아닌, 곧추 선 기둥바위다. 백운대와 인수봉을 잇는 허리를 끊으려는 듯 비장한 각오로 달려드는 칼이자 창이다. 하지만 아침 햇살은 삼라만상을 아름답고 희망차게 만들어 준다. 숨은벽 우측 밤골에 따스한 기운을 불어넣어 주고, 백운대 능선으로 이어지는 파랑새리지의 기암은 반짝이며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빤빤한 슬랩인 고래바위를 마주하는 순간, 웅장하면서도 선과 면의 조화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숨은벽 리지가 유혹한다. 그 마음을 들어다보았는지 석상명씨는 ‘장비도 없이 무슨 객기냐’는 표정으로 힐끔 쳐다본 뒤 밤골로 내려선다.

숲 우거진 골짜기에서도 숨은벽은 도도한 자태로 하늘 향해 솟구쳐 올랐다. 숨은벽은 백운대 능선과 인수봉 능선에 가려 있다고 해서 지어진 명칭이다. 그렇다고 바위꾼들이 가만 놔두었을 리 없다. 1970년 한 해에 8개의 바윗길이 개척됐다. 하지만 바로 옆에 대한민국 암벽등반의 상징으로 꼽히는 인수봉이 있는 데다 접근성이 좋지 않아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하루 종일 햇살이 스며들지 않는 밤골 상단부의 데크 계단길을 따르자 백운대 북쪽 안부에 올라선다. 오른쪽 일명 ‘호랑이굴’을 거쳐 백운대 정상에 곧장 올라설 수 있으나 사고위험이 높아 출입을 막고 있다.

부왕동암문. 문수봉에서 의상봉으로 향하노라면 조선시대 옛길을 걷는 기분이다.
부왕동암문. 문수봉에서 의상봉으로 향하노라면 조선시대 옛길을 걷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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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벽 암릉을 앞두고 바위골을 내려서고 있다. 밤골로 길이 이어진다.
숨은벽 암릉을 앞두고 바위골을 내려서고 있다. 밤골로 길이 이어진다.

안부 아래 백운산장은 따스한 햇살에 한겨울 매서운 추위가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 그 따스한 햇살과 산장지기 노인의 따스한 미소에 좋은 기운을 받고, 따끈한 잔치국수로 배를 불린 다음 백운대 정상으로 올라선다. 알바위 정상에는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조망의 즐거움에 쉬이 자리 뜰 생각을 하지 않는다.

동서남북 사위가 다 발아래다. 바로 옆 인수봉은 모진 추위에서 정상에 올라선 이들이 하강하는 모습이 보이고, 그 뒤로 도봉산은 오봉에서 우이암, 신선대, 만장봉 등 기암들이 등에 인 채 꿈틀대는 듯 기운찬 풍광을 자아낸다. 그 오른쪽으로 수락산~불암산, 철마산~천마산 그리고 멀리 용문산까지 바라보이니 이만한 조망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동쪽 풍광이 눈에 꽂혀 한동안 머물자 삼각산의 주인공답게 당당하게 솟구친 만경대에서 대남문으로 이어진 북한산 주릉이 부른다.

용혈봉 서자 서해바다 은빛 호수처럼 반짝여

북한산성 8개 암문 중 하나인 위문(衛文)에 내려서자 바람이 매섭다. 그래도 만경대 바위 허리길로 접어들자 서쪽 풍광이 조망의 즐거움을 더해 준다. 뚝 떨어지면서도 부드러움을 잃지 않은 서쪽 산자락 뒤로 노고산이 납작 엎드린 채 산줄기를 뻗고, 그 뒤로 너른 평원을 이룬 고양시 일원과 수도서울의 젖줄 한강이 바라보인다. 한강은 장강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강화 염하 부근에서 임진강과 예성강과 합쳐져 서해바다로 변해 간다. 뒤로 백운대는 역시 북한산 최고봉답게 당차고 웅장하다. 백운대 남면은 클라이머들의 훈련도량답게 갖가지 선과 빤빤한 면으로 매혹적으로 조각돼 있다.

해가 중천에 떠오르자 오전 내내 움츠러든 채 산길을 따르던 산객들은 허물 벗듯 덧옷을 벗어젖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지 의상봉 능선이 환하게 미소 짓는다.

보국문~대성문 사이의 능선 등날을 따라 이어지는 북한산성.
보국문~대성문 사이의 능선 등날을 따라 이어지는 북한산성.

“내일이 설날인데 일찍 내려가서 전 부쳐야 해. 가정이 우선 아니겠어?”

“마누라 무서우면 무섭다고 솔직히 말해.”

용암문(龍岩門)은 이별의 문이다(대동문 0.5km, 백운대 1.5km, 도선사 1.1km).
백운대에서 내려선 한 무리 등산객들이 갈 길을 따로 따로 잡고 아쉬운 이별 인사를 나눈다. 그 모습에 김수영씨는 홀로 전 부치고 계실 어머니가 떠올랐는지 “나는 짧게 걷는 줄 알고 동참했다”며 “우리도 여기서 하산하면 어떻겠느냐”고 너스레를 떤다.

북한산대피소를 지날 즈음 산길 옆 땅이 파헤쳐진 모습이 눈에 띈다. 한겨울 먹을 것 찾아 나선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이다. 멧돼지 개체수가 워낙 많이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북한산 자연이 그만큼 좋아졌다는 증표이기도 하다.  

“여기는 왜적이 보이면 워~워~ 하면서 알리는 곳이야.”

동장대(東將臺)는 장군의 지휘소로서 북한산성에는 남장대, 북장대 세 장대가 있었으나 지금은 1996년 복원한 동장대만 남아 있다. 장대가 위치한 곳답게 조망이 멋지다. 보현봉~대남문~문수봉~의상봉으로 이어지는 산릉은 실루엣으로 수묵화처럼 묵직한 산세다.

따스한 햇살 아래 삼삼오오 모여앉아 점심상을 펼쳐놓고 담소 나누는 대동문을 지나 주릉을 따르는 사이 다시 추위가 매서워진다. 등은 땀에 촉촉하게 젖었는데 얼굴은 차갑다. 아직 겨울이다. 그래도 보국문 지나 망대에 올라서자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등 삼각산을 상징하는 3개 암봉이 우뚝 솟구쳐 올라 가슴 벅차게 하고, 원효봉~염초봉~백운대, 인수봉, 만경대~용암봉, 영봉에 이어 오봉에서 주봉 거쳐 자운봉으로 이어지는 북한산국립공원이 한폭의 그림처럼 바라보이면서 감동의 순간을 다시 한 번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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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망무제의 조망처인 북한산 정상 백운대. 인수봉과 그뒤로 도봉산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일망무제의 조망처인 북한산 정상 백운대. 인수봉과 그뒤로 도봉산이 한눈에 바라보인다.

“벌써 오후 3시인데 수영이 말대로 여기서 구기동으로 빠지는 게 어때? 아니면 비봉 능선 타고 상명대로 하산하든지. 그래야 하산주 할 시간 있는 거 아니겠어?”

“옳소! 양 선배님은 정말 영원한 제 편이에요.”

대남문에서 기다리던 양효용씨가 김수영씨를 힐끗 쳐다보더니 편을 들어준다. 하지만 준족이 중도 포기할리 만무. 양씨는 일행이 다 도착하자마자 의상봉을 향해 나아가고, 그 모습에 김수영씨는 “믿을 사람 한 명도 없다”며 한숨을 내쉰다.

문수봉에서 증취봉, 용혈봉, 용출봉으로 이어지는 의상봉 능선은 북한산성의 옛 모습을 볼 수 있고, 자연미 넘치는 토종 소나무도 많이 자라는 능선이다. 하지만 지난해 말 복원공사 진행 과정에서 소나무가 많이 베어져 산성은 복원되었는지 몰라도 자연미는 오히려 많이 훼손되고 말았다.

그래도 의상봉 능선은 숲 우거진 호젓함이 살아 있다. 탕춘대성과 비봉 방면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을 통제하기 위해 조성됐다는 청수동암문(淸水洞暗門)과 부왕동암문(扶王洞暗門)을 거치고, 무너져 가거나 이끼 덮인 산성 역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400년 전 조선의 옛길을 따르는 기분이다.

“어라? 인수봉이 없어졌네. 쟤도 밤이 다가오니까 집에 갔나 봐요. 우린 뭐예요. 이러다 산에서 밤 맞겠어요. 그러고 보니 산 안에 절이 참 많네요.”

나월봉 부근에서 바라본 의상봉 능선. 양효용씨 등뒤로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지는 원효리지와 만경대, 인수봉이 보인다.
나월봉 부근에서 바라본 의상봉 능선. 양효용씨 등뒤로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지는 원효리지와 만경대, 인수봉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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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혈봉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수도 서울의 젖줄 한강과 서해바다가 저녁햇살에 물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용혈봉에서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수도 서울의 젖줄 한강과 서해바다가 저녁햇살에 물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천정바위를 지나 용혈봉(581m)에 올라서자 인수봉이 백운대 뒤로 숨어버리면서 삼각산 모습이 바뀌었다. 대신 널찍한 분지형 북한산성골짜기 안 곳곳에 자리잡은 사찰들도 바라보인다. 현재 발굴과 복원을 동시에 진행 중인 중흥사는 고려 말 고승인 보우선사가 중창하고, 북한산성 완성 이후 136칸의 대찰로 번창했으나 1915년 대홍수에 사라져 버렸다고 전한다. 이밖에도 산성 곳곳에 상운사, 진국사, 국녕사, 보국사 등 북한산성의 수비와 관리를 위해 창건된 11개 사찰이 있었다고 전한다. 

“와~, 서해바다다. 정말 대단하네.”

용혈봉은 조망대였다. 남서쪽으로 한강은 더욱 넓어지고 저녁 햇살에 물고기 떼 튀듯 반짝이고, 널찍하게 펼쳐진 인천시 뒤로 서해바다는 은빛 호수처럼 반짝였다.

험산 벗어난다는 생각에 발걸음 가벼워

용출봉(571m)을 오르는 사이 비봉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은 저녁 무렵에 접어들면서 한층 멋을 부리고 고즈넉해진다. 지릉의 등날은 햇살을 받아치며 반짝이고 북사면은 그늘이 지면서 더욱 깊어지고 아늑해진다. 반대편 달덩이처럼 부드럽게 솟아오른 원효봉에서 염초봉을 거쳐 백운대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은 힘차면서도 부드럽다. 그 뒤로 우리가 아침나절 넘어 온 숨은벽 능선을 감춰놓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솟아 있다.

용출봉 정상에 오르자 인천 앞바다는 더욱 넓게 바라보이며 아름다운 저녁 풍광을 보여 주지만 까마귀는 산 안으로 날아들면서 깍깍댄다. 산객을 쫓는가보다. 부지런히 발길을 옮겨 가사당암문(袈裟堂暗門)을 지나 원효봉(502m)을 넘어서자 험한 바윗길이 앞을 가로막지만 납작 엎드린 산릉이 마음을 가라앉혀 주고 험산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은 가볍기만 하다. 

 북한산의 진짜 이름은?
‘삼각산’이 최장수 지명… ‘북한산’은 18세기 후반 등장


북한산의 다른 산이름으로 가장 오랫동안 장수를 누려온 것은 ‘삼각산(三角山)’이다. 통일신라 말기 도선(道詵·827~898)의 <삼각산명당기(三角山名堂記)>에 이 산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나말여초부터 불려온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 광종 26년(975)에 세운 여주 고달사의 원종대사혜진탑비(元宗大師惠眞塔碑)의 비문 및 <고려사> 서희전(徐熙傳)과 <고려사절요> 성종 12년(993년)조 기사 등에 이 산이름이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최소한 고려 초기부터는 불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전 이름 부아산은 고려 현종조 기사 이외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삼각산과 함께 고려 전기까지 간혹 불리다가 이후 삼각산으로 굳혀지고, 부아산은 더 이상 불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삼각산은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확고부동하게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등의 역대 지리지와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한결같이 북한산의 본명을 삼각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1929년 일제시대 김유동이 편저한 <팔도명승고적>에도 북한산의 산명을 ‘삼각산’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지금도 간간이 사람들에 의하여 삼각산으로 일컬어지고 또 기록되기도 한다.

북한산의 또다른 이름으로는 화산(華山)과 화악(華嶽)이 있다. 이들은 <고려사> 악지(樂志) 등 주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이르는 문헌에만 보이고, 조선 후기의 왕조실록 등 후기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볼 때, 대체로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에 걸쳐 삼각산의 일명으로 일컬어진 산명으로 추측된다.

북한산(北漢山)이 한강 이북의 한산 지역을 일컫던 지역 이름이 아닌, 산 이름으로서 불리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조선 후기 이서구(李書九·1754~1825)의 <유북한산중시(遊北漢山中詩)〉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진흥이비고(眞興二碑考)〉에 이 산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후엽의 일로 추정된다.

이 이름이 삼각산을 제치고 본명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이었던 금서룡(今西龍)이 작성한 <경기도 고양군 북한산 유적 조사 보고서〉가 최초로 추측되고, 1983년 북한산 일대와 도봉산 일대를 한 권역으로 묶어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 명명하게 되면서 본명으로 정착됐다.

<조면구 저 <북한산성> 참조>
산행길잡이

사기막골~숨은벽 북서릉~백운대~대남문~의상봉을 잇는 능선 코스는 북한산의 안팎을 두루 살필 수 있는 멋진 종주코스다. 단 산행 길이가 14km가 넘어 체력이 뒷받침돼야 산행이 가능하다.

숨은벽 북서릉은 사기막골이나 밤골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숨은벽 북서릉은 간간이 험로가 나타나지만 우회로가 나 있어 산행의 어려움은 없다. ‘식당바위’를 지나 바위 안부에 닿으면 오른쪽 밤골로 내려서야 한다. 안부 너머 숨은벽 암릉은 암벽등반장비를 갖추었다고 해도 경험자의 안내가 필요한 험로다.

밤골이 끝나는 안부에서 오른쪽 호랑이굴을 들어서면 곧바로 백운대에 올라설 수 있으나 사고가 많아 공원사무소에서 산행을 금지시켰다.

안부에서 곧장 위문으로 갈 수 있으나 일단 백운산장으로 하산해 휴식시간을 갖는 게 컨디션 조절을 위해 바람직하다. 위문~백운대 등로는 늘 등산객들로 붐비므로 우측통행 원칙을 지키도록 한다.

위문~대남문 구간은 위문~노적봉 안부 바위 허리길 외에는 위험한 구간이 없다. 대성문~대남문 구간은 능선을 따르기도 하지만 대개 대성문 오른쪽 우회로를 따른다.
대남문에서 의상봉 가는 길은 문수봉을 경유할 수 있으나 청수동암문까지는 대개 우회로를 따른다. 이후 의상봉까지는 길이 헷갈릴 지점은 없지만 기복이 심해 체력소모가 많이 온다. 의상봉 하산길은 험로마다 데크가 설치돼 있다.

사기막골~숨은벽 북서릉~백운대~대남문~의상봉~북한산성분소 산행은 약 14.4km 거리에 7시간 정도 걸린다. 숨은벽 아래 샘이 있으나 겨울철에는 위생상태가 좋지 않다. 따라서 식수는 백운산장에서 생수를 구입해 마시도록 한다.

교통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버스정류장에서 불광동~의정부를 왕복하는 34번 평안운수 버스(의정부 기준 05:00~22:30, 배차간격 8~12분)나 704번 제일여객 버스(송추 기준 04:00~22:00, 15분) 이용, 밤골이나 사기막골 입구 하차.

숙식

백운산장 2층은 산장으로 사용된다. 정원 40명, 1일 숙박비 7,000원. 1층 매점에서는 국수(4,000원)와 두부(4,000원) 외에 간식과 생수, 음료수 등을 판다. 문의 02-904-0909.

북한산성 들머리 상가단지에 다양한 메뉴의 식당이 여럿 있다.

만포면옥 숨은벽 코스 들머리인 밤골 입구에서 도로 건너편에 위치한 냉면 전문식당(1972년 개업)으로 을지로와 구파발 만포면옥의 본점. 코오롱등산학교 이용대 명예교장이 “평양냉면은 만포면옥이 최고”라고 적극 추천하는 냉면집이다.

물냉면은 고기육수에 달짝지근한 동치미 국물을 섞고 간장으로 간을 맞춘 데다가 지방이 적은 우둔살을 얹어 깔끔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내기로 정평 나 있다. 호주산 청정우가 대파와 팽이버섯과 함께 돌쟁반에 채워진 육수에 얹혀 나오는 어복쟁반도 일품이다. 수육과 더불어 특히 술꾼들에게 알맞은 음식이다.

냉면 9000원, 온면 9000원, 갈비탕 1만 원, 갈비찜 대 4만5,000원 소 3만5,000원, 녹두지짐 1만 원, 어복쟁반 5만5,000원, 찐만두 5,000원, 만둣국 8,000원.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로 553번길 6(효자동 96-12). 문의 02-359-3917.

옛골토성 북한산성점 대서문 위쪽 식당가에 있던 금강식당 주인 이만수씨가 운영하는 오리고기 전문점으로 북한산 마니아들뿐 아니라 단체 산행객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점이다. 북한산성초등학교 앞쪽 시설지구에 자리해 있다.

메뉴 오리훈제바비큐 1인 1만4,000원. 삼겹살바비큐 1인 1만2,000원. 해물파전 1만5,000원. 서울 은평구 대서문길 45-7. 문의  02-389-0123. 

여자만 꼬막정식(왼쪽). 옛골토성 오리훈제바비큐
여자만 꼬막정식(왼쪽). 옛골토성 오리훈제바비큐

여자만 여자 영화감독과 남자 산꾼이 차려내는 남도제철음식. 북한산 산행의 북한산성 나들목에서 북쪽 도로변에는 위치한 ‘여자만(汝自灣)’은 서울 인사동에서 이미 명성을 크게 떨치고 있는 계절음식 명가. 이미례 감독이 창업한 업소다. 여자만은 이 감독 남편의 고향인 고흥 벌교의 만(灣) 이름이다.

이곳은 여자만 펄에서 나오는 꼬막을 주제로 하는 요리가 인기 있다. 국내산 홍어와 삼겹살 수육을 묵은지에 싸먹는 홍어삼합 역시 대표 음식. 보성 녹차막걸리도 마실 수 있다. 메뉴 새꼬막정식 1만5,000원, 참꼬막정식 2만5,000원, 삼합 소 3만 원, 대 5만 원, 여자만 정식 2만 원, 여자만 대표정식 3만 원, 여자만 특정식 3만5,000원, 전복해물뚝배기·전복돌솥밥 각 1만5,000원, 꼬막돌솥밥 1만3,000원. 고양시 덕양구 북한산로 379. 문의 02-384-8848.

북한산온천 비젠 북한산성 쪽 들머리에 자리한 ‘비젠(wiesen)’은 지하 972m에서 끌어 올리는 알칼리성 수소탄산나트륨 단순천을 이용한 온천이다.

구파발~북한산성 북한산길 도로변에 온천장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장, 입욕시간은 오전 6시~오후 9시, 입욕료는 7,000원이다. 별관 온천칼국수 집에서는 바지락칼국수와 식음료를 내놓는다.

온천칼국수 메뉴 바지락칼국수 7,000원. 고양시 덕양구 중고개길 88-7. 문의  비젠 02-381-5656, 온천칼국수 02-3672-1471.

60년 세월 동안 백운산장 관리해 온 이영구씨
“그때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업어 날랐는지 모르겠어요”

1 백운산장 잔치국수와 두부.
2 백운산장을 60년간 관리해 온 이영구씨 가족.
1 백운산장 잔치국수와 두부. 2 백운산장을 60년간 관리해 온 이영구씨 가족.
 백운대 기슭에 자리한 백운산장은 북한산의 상징이라 할 만큼 등산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다. 특히 산장에서 직접 만들어내는 따끈한 잔치국수는 맛을 보려고 일부러 북한산을 오르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인기다. 여기에 김이 무럭무럭 나는 두부 그리고 늦가을부터 초겨울까지 한시적이지만 직접 쑤어 만든 도토리묵도 판매한다. 한때 막걸리도 인기였으나 공단의 공원 내 주류 판매 금지 방침으로 추억 너머로 사라졌다. 국수·두부 각 4,000원, 문의 02-904-0909.

80대 중반 고령인 이영구(李永九·85)씨가 60여 년간 관리해 온 백운산장은 전문 산악인들에게 베이스캠프 같은 곳이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창립된 산악회 회원들에게는 베이스캠프이자 사랑방 같은 곳으로 등반에 대한 무용담뿐만 아니라 높은 산, 험산에 대한 꿈을 나누던 곳이었다. 1986년 설립된 코오롱등산학교가 2010년 8월 우이동에 교육센터를 마련하기 전까지는 봄가을 정규반 학생들에게 교육장이자 숙소로서 몇해 동안 이용되기도 했다.

이영구씨가 1924년 할아버지 이해문씨 때부터 지내 온 백운산장에 삶의 닻을 내린 것은 6·25 한국전쟁 정전 3년 뒤였다. 전쟁을 피해 몇 해 동안 산아래 머물다가 부친과 함께 산장에 올라왔을 때에는 양철지붕조차 누군가 거둬가 버린 상태였다. 해서 현재 백운암의 바위굴에서 지냈는데 이듬해 부친께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오래 인연 맺어온 산사람들이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고 양두철, 변완철씨 등 서울산악회(당시 회장 고 이기섭 박사) 원로 산악인들은 “당신 아버지한테 신세를 많이 졌다”며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해 주겠다”고 도움을 제의했다. 이후 1959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1960년 완공된 단층건물이 백운산장이다. 이씨의 동생 이경구씨는 백운산장 아래 인수산장을 1971년부터 1991년까지 20년 동안 관리해 형제 산장지기로 이름나기도 했다.

이영구씨는 60년 동안 산장을 관리하는 동안 별별 일을 다 겪었다. 1970년 11월 28일 인수봉 서면 하강 코스 인명사고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할 정도로 큰 사고였다. 당시 봄 날씨처럼 따뜻하던 날씨가 갑자기 영하 16℃까지 떨어지면서 로프가 엉켜 공중에 매달려 있거나 테라스에 머물러 있던 클라이머 7명이 저체온증으로 목숨을 잃었다. 이씨는 “당시 하강 지점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40여 명이나 됐는데 이들을 어떻게 산장까지 업어 날랐는지 모르겠다”고 급박했던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 이씨는 “사고 이듬해인 1971년 봄 원효리지에서 조난당한 등산객들을 구할 때 서면 하강 지점에서 끊어낸 자일을 사용했다”며 웃었다.

백운산장은 1992년 버너 불에 의한 화재로 위기를 맞았다. 버너 불에 말리려고 널어놓은 빨래에 불이 붙으면서 천장까지 타버린 것. 이후 여러 해 동안 천막을 씌운 채 지내오다가 1997년 현재 2층 산장으로 증축했지만 국립공원관리공단과 20년 사용 후 기부체납 계약을 맺음으로써 이영구씨는 1년 뒤면 산장에서 떠나야 할 운명이다.

이영구씨는 1995년 공단 기획부장과 맺은 기부체납계약 건에 대해 “억압에 의한 부당한 계약이었다”며 당시 공단의 처사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있다. 이씨는 당시 “소가 도살장 끌려가는 기분으로 공단을 방문했더니 기부체납 계약서를 내놓았고, 가족들과 의논하고 결정하겠다고 하니까 당시 기획부장이 ‘지금 당장 도장을 찍지 않으면 공단에서 직접 산장을 짓겠다’며 날인을 강요했다”며 억울한 심정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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