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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小 테마특집 22번째 국립공원 태백산<4> | 태백산 산신(山神)] 역사에서 ‘단종’은 죽었지만 산신으로서 아직 살아 있다

월간산
  • 입력 2016.04.25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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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태백·삼척·정선 등지서 서낭당·산신각 등지서 제사 지내

어린 단종이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알려진 청령포. 걸어서 탈출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 같은 곳이다.
어린 단종이 유배생활을 한 곳으로 알려진 청령포. 걸어서 탈출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 같은 곳이다.

한국에서 오늘날까지 행해지는 전통 집단의식은 약 500건 이상 된다고 민속학자들은 말한다. 그중 114건은 산신(山神)을, 109건은 마을의 수호신을, 68건은 기타 수호신을, 23건은 산과 강의 신을, 23건은 조상신을, 11건은 나무의 신을, 164건은 기타 군소 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마을 수호신도 일부는 산신으로 화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렇게 보면 산신에 대한 전통 집단의식이 압도적으로 많이 행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왜 그럴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회는 하늘에서 천신(天神)이 내려왔다. 첫 도착지가 바로 산이다.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공간으로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동서양의 신들은 전부 산에서 인간과의 만남이 이뤄졌다. 산에서 인간을 만나 인간으로 화(化)해 인간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되는 과정은 동서양 공통적으로 거친다. 왕이 돼서 인간들이 모시기도 하고, 이후 산신이나 신이 되기도 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은 주로 남자였다. 땅의 산신인 여신을 만나 인간세상을 열었다. 따라서 여산신은 죽은 후에 산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산신이었으며, 천신을 제외한 남산신은 죽은 후에 비로소 신격을 얻는 인격신의 경우가 많다.

지리산의 마고할미 산신이 원래부터 산신인 대표적 사례다. 일종의 고대 모계사회의 반영일 수도 있다. 반면 김유신 장군, 최영 장군, 남이 장군, 임경업 장군 등과 같이 죽은 후 산신이 되는 대표적 인물은 대부분 남자 산신이다. 호국적 성격과 마을 수호신격인 서낭신 성격을 동시에 띤다. 태백산 산신인 단종도 이에 속한다.

단군 태백산과 지금 태백산은 달라

우리 역사서에 태백산은 매우 자주 등장한다. <삼국유사> 제1권 기이편에 ‘환웅은 삼천 명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太伯山) 꼭대기에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그곳을 신시(神市)라고 불렀다. 이 분을 바로 환웅천왕이라고 한다. 환웅천왕은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생명·질병·형벌·선악 등 인간 세상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해 인간세상을 다스리고 교화시켰다. (중략)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山神)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고 나온다.

단종이 죽어 묻힌 영월 장릉 주변의 소나무가 수백 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단종이 죽어 묻힌 영월 장릉 주변의 소나무가 수백 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단종의 묘인 장릉.
단종의 묘인 장릉.
저자 일연은 여기 등장하는 태백산은 묘향산이라 주장했고, 아사달은 구월산 또는 평양으로 역사학자들은 추정한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앞뒤 문맥으로 볼 때 단군과 관련된 태백산은 지금의 태백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지금 태백산과 한자도 다르다. 지금의 태백산은 흰 ‘白’이고, 〈삼국유사〉는 우두머리 ‘伯’자를 쓴다. 정황상 환웅이 인간세상으로 내려올 때 바람의 우두머리와 비와 구름의 스승을 데리고 오려면 제일 맏형격인 우두머리 산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삼국사기> 신라 일성이사금편에 태백산이 첫 등장한 ‘일성이사금 5년(138)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해 몸소 태백산(太白山)에 제사 지냈다’고 기록돼 있다.

<삼국사기> 제사지 중사편에 ‘오악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은 부악 또는 공산이라고도 한다’고 나온다.

<삼국유사>에도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삼산(大祀三山)·중사오악(中祀五岳)·소사(小祀)로 나눴다. 대사삼산은 첫째가 경주에 있는 내력산(奈歷山), 둘째가 영천에 있는 골화산(骨火山), 셋째가 청도에 있는 혈례산(穴禮山)이다.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은 백제 지역이었던 계룡산, 남악 지리산, 북악은 고구려 지역이었던 태백산, 중악은 공산(지금 팔공산)으로 지정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 열전 김방경편에 ‘어느 날 선산에 성묘하기를 빌거늘 왕의 아들 김순(金恂)을 태백산제고사를 삼아 보내어 이를 따라가게 하니…’라고 나온다.

<세종실록> 세종편에 ‘(세종 5년) 김해의 제석당과 나주의 금성당과 삼척의 태백당과 그밖의 외방 각 고을의 신당을 모두 조사해 동서 활인원과 귀후소에 나누어 소속시키고, 그 신에게 제사하고 쓰다 남은 물건은 있는 곳의 관원으로 하여금 이를 거두어서 소속된 곳에 바치게 할 겁니다’고 돼 있다.

<세조실록> 세조편에는 ‘(세조 2년) 명산대천의 제사는 모두 삼국과 전조의 구제를 의방해서 한 것이므로, 의논할 만한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용흥강은 우리 태조께서 흥운하신 땅이고, 묘향산에 이르러서는 단군이 일어난 곳이며, 구월산에는 단군사가 있고, 태백산에는 신사(神祠)가 있는 곳이며, 금강산은 이름이 천하에 알려졌고…, (중략)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 지리산을 남악,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고, 백악산을 중진으로, 태백산을 동진으로, 송악산을 서진으로 삼고…. (후략)’ 등으로 기록하고 있다.

태백산 천제단에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사진 박정원.
태백산 천제단에 등산객이 오르고 있다. 사진 박정원.
조선 성현(成俔)의 <허백당집(虛白堂集)>에 태백산신이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태백산신이라는 것은 무슨 신인가? 그 산의 동쪽으로 대해로 들어가면 삼척이 되고, 서쪽으로 꺾으면 영춘(충북 단양군에 있는 지명)이 되고, 남쪽으로 돌아 엎드리면 죽계 및 여러 주와 경계를 이룬다. 산은 비록 높으나 사전(祀典)에 실리지 않은 것은 백성과 국가에 공과 베풂이 없기 때문이다. 3도의 사람이 산꼭대기에 당(堂)을 짓고 상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낸다. (후략)’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두 군데나 나온다. ‘강원도 삼척도호부에는 태백산사가 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이라 부른다’와 ‘(태백산은) 삼척부 서쪽 120리에 있다. 신라 때는 북악이라 하여 중사에 기재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단종 이전에 구체적 인격神 규명 안 돼

조선 중기 허목(許穆:1595~1682)이 지은 <척주지>에는 ‘풍속에 귀신을 믿어 태백산 정상에 천왕사를 지어 놓고 봄과 가을에 큰 제사를 지냈다. 여기서 기도드리는 모든 사람들은 재계하고 소를 끌고 가 천왕사 아래에 매어 놓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달아났다. 이는 돌아보면 재앙이 뒤따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에 관에서 감고를 정하여 그 소들을 거두어 들였는데, 이를 퇴우라고 했다. 1667년(효종 8)에 충학이라는 승려가 이 사당을 불태워 버려 음사(淫祠)가 비로소 없어졌다’고 전한다.

허목의 <기언(記言)> 제28권에는 ‘문수산 정상은 모두 흰 자갈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으니, 태백이란 명칭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라고 기재돼 있다.

역사서에 나온 기록으로 볼 때, 환웅이 내려온 태백산과 단군이 산신이 된 태백산은 명확히 지금의 태백산은 아닌 듯하다. 하지만 지금의 태백산에서 분명히 산신에 대한 제사는 국가적으로나, 관에서 매우 자주 지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실체는 누구일까? <허백당집>에도 구체적으로 태백산신을 언급하지만 인격적 주체는 거론하지 않고 있다. 신라시대 북악이었고, 고려시대에도 국가적으로 제사 지내는 장소였으며, 조선시대에도 동진일 만큼 명산은 분명했지만 산신화된 인격신은 아직 등장하지 않고 있다. 분명히 제사 지내는 대상은 있었을 텐데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든지, 추상적 대상에 제사를 지냈든지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민속학자들은 “태백산신은 천신·왕신·서낭신·부처 등의 복합적 신격으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일종의 절대적 권위를 가진 추상적 대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자리를 단종이 꿰차고 들어간다. 태백산 산신으로. 어떻게 가능했을까? 단종은 왜 산신이 됐을까? 잠시 단종의 짧은 생애(1441~1457)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극적 죽음은 서민들 恨에 남아 동정심 얻어

1 태백산 정상 바로 아래 탄허 스님이 직접 쓴 글씨로 유명한 단종비각이 있다. 사진 박정원  2 단종비각 안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다. 탄허 스님이 적은 내용이다. 사진 박정원
1 태백산 정상 바로 아래 탄허 스님이 직접 쓴 글씨로 유명한 단종비각이 있다. 사진 박정원 2 단종비각 안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라고 쓰인 비석이 세워져 있다. 탄허 스님이 적은 내용이다. 사진 박정원
단종은 세종의 손자로, 아버지 문종의 늦둥이로 얻은 귀한 손이었다. 문종은 조선 왕조 중 유일하게 상처하고 재혼하지 않은 왕이었다. 즉 죽을 때 왕비가 없었다. 어린 단종이 즉위했을 때 흔히 대비(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지만 대비나 대왕대비 누구도 수렴청정을 할 사람이 없었다. 문종의 동생인 야심 가득한 수양대군이 사실상 수렴청정을 했다.

단종은 8세 때 왕세손, 10세 때 왕세자, 12세 때 왕에 올라 14세 때 결혼했지만 이후부터 급격한 인생하강 곡선을 그린다. 수양대군에 밀려 15세 때 상왕, 이어 노산군으로 강봉되고 영월로 유배, 또 서인으로 강봉되고 17세에 죽임을 당한다. 역사적 사실을 기술했지만, 한마디로 일찌감치 부모를 여의고 삼촌한테 가진 것 다 뺐기고 죽임을 당한 비극적 인물이 단종이다. 많은 서민들의 가슴에 한(恨)을 남기고 동정심을 얻기에 충분했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전설은 서민들의 동정심을 더욱 부채질했다. 세조는 단종에게 사약을 내린다.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들고 간다. 그는 단종 복위를 꾀했던 인물이다. 차마 못할 짓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전설에는 어린 단종에게 사약을 못 내리고 독약 그릇을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으로 나온다. 독약을 가져가는 사자(使者)들이 몇 차례 자살을 하자, 단종은 결심을 한다. 그는 방 안에서 목을 매고 관노(官奴)인 복득이에게 명주줄을 당기라고 명한다. 복득이는 개를 잡는 줄 알고 힘껏 당겼다가 단종이 목을 맨 사실을 뒤늦게 알고 대성통곡하고 역시 자살했다고 전설은 전한다. 단종은 삶부터 죽음까지 모두 비극으로 점철돼 있다.

비극은 인간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착한 심성을 부각시킨다. 무한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죽지 말아야 될 사람이 죽었다고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신격화로서 억울한 죽음을 보상해야 한다고 마을 공동체 사람들이 믿게끔 된다. 후대 들어 다시 왕으로 복원된다. ‘역시 죽지 말았어야 할 인물이야, 신이 될 만했다’고 마을 공동체 모두가 신으로서 완전 인정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이때는 신격화가 아니라 이미 신(神)이 된 상황이다. 대체적으로 그려진 단종의 신격화 과정이다.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다시 서인으로 강등한다. 그리고 사약을 내린다. 바로 그 시간,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한성부윤을 역임한 추익한(秋益漢·1383~1457)이 단종을 위로하러 갔다가 이상한 일을 겪는다. 그는 머루랑 다래를 단종에게 갖다 바치곤 했다. 그날도 추익한은 머루와 다래를 가지고 영월읍으로 가고 있었다. 그가 수라리재를 넘어 내려가자 백마가 영월 쪽에서 수라리로 오고 있었다. 백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단종이었다. 화사한 용포를 입고 검은빛 익선관을 쓴 단종의 얼굴은 슬프도록 곱게 보였다. 추익한은 바로 그 자리에 엎드리며 “마마,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단종은 한참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는 지금 태백산 산신이 되기 위해서 가는 길이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있는 사길령 산령각의 모습.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보부상들의 쉼터 역할을 하며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서낭당 역할을 했다. 사진 박정원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기 위해 가는 도중에 있는 사길령 산령각의 모습.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보부상들의 쉼터 역할을 하며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서낭당 역할을 했다. 사진 박정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추익한은 황급히 읍내로 달려갔다. 읍내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 조용히 흐느낌이 깔리고 있었다. 단종은 이미 죽었다. 추익한도 다시 수라리재에 돌아가, 쓰러져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역사적으로도 단종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절명했다고 전한다. 추익한도 단종과 함께 태백산신령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전설은 계속된다. 세조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모두가 주저할 때 엄흥도가 지게를 지고 강물에 던져진 단종의 시신을 몰래 수습했다. 엄동설한이었다. 산에는 눈이 내려 땅이 보이질 않았다. 갑자기 노루가 뛰어 달아났다. 노루가 앉았던 자리는 눈이 녹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 쉬다가 다시 일어나려는데 지게목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엄흥도는 할 수 없이 그 자리를 파서 단종을 모셨다. 그리고 몸을 감추었다.

엄흥도가 단종의 시신을 가매장한 뒤 한참 세월이 흘렀다. 영월은 인심이 흉흉해진다. 군수가 부임하는 즉시 이유 없이 죽어 갔다. 아무도 영월군수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부임했다. 어느 날 밤 단종의 혼령이 나타났다. 그가 혼비백산했지만 단종의 혼령은 “내가 너를 해치러 온 것이 아니다”고 달래며 말을 이었다. “내 말을 잘 들어라. 내가 산 속에서 눈비를 그대로 맞고 있는 것을 아느냐?”며 다그치고 돌아서서 나갔다. 박 군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따랐다. 혼령이 어느 곳에 도착하더니 잠시 머무르다 사라졌다.

이튿날 박 군수는 관노를 데리고 어제 그 산으로 갔다. 겨우 혼령이 잠시 머물던 장소를 찾아 봉분을 정성스럽게 쌓았다. 그후로는 영월군수가 변을 당하는 일이 없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단종의 신격화 과정이고, 어떻게 보면 전형적인 산신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신격화되는 여러 과정 각본 짠 듯 절묘하게 맞아

진정한 신이 되기 위해서는 신화에서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과정도 필수적으로 거친다. 중종 11년(1516)에 중종은 우승지 신상을 영월에 보내 노산군의 묘에 치제(致祭)를 하게 한다. 이어 1541년 영월군수 박충원에 의해 단종의 묘역이 실제로 조성된다.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는 사건이다. 즉 단종 영혼에 대한 위로와 달래기는 사회적 안정으로 연결된다.

사길령 산령각 안에 있는 단종 산신도. 백마를 타고 가는 단종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 박정원
사길령 산령각 안에 있는 단종 산신도. 백마를 타고 가는 단종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진 박정원

눈이 덮여 있는 태백산 천제단 앞에서 한 무속인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눈이 덮여 있는 태백산 천제단 앞에서 한 무속인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그리고 단종 승하 241년 뒤인 숙종 24년(1698)에 다시 단종으로 복위됐다. 1698년 죽음을 무릅쓰고 올린 신규의 상소로 일단락됐다. 신규의 상소는 ‘사육신은 옛 임금을 위하여 절개를 굽히지 않고 죽음으로써 임금의 사랑과 은혜를 입었는데, 하물며 육신의 옛 임금은 오히려 죽어서도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제사에도 왕례를 쓰지 않으니 전하께서 불쌍함을 굽어 살피시옵소서’라고 올렸다.

<숙종실록>에는 당시 숙종이 “이번 회의에 참석치 않은 2품 이상의 관리는 파직시키고 당상관 이하는 잡아서 그 죄를 엄히 다스리라”고 하명할 정도로 주요 관심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숙종은 노산군을 단종으로 복위시키고, 능호도 노릉(魯陵)에서 장릉(莊陵)으로 추봉했다. 지금의 장릉이다.

영월 장릉에서 태백산 단종비각까지(백두대간 영주 고치령까지라는 설도 있음) 단종이 태백산 산신이 되기 위해 다닌 중심길 12군데에 단종을 모시는 서낭당과 산신각이 있었다고 전한다. 영월읍 보덕사 산신각, 영월읍 청령포 동제, 김삿갓면 내리 단종산신각, 중동면 유전리 서낭당, 중동면 녹전리 서낭당, 중동면 두릉서낭당, 와석리 서낭당, 태백 어평 서낭당, 태백 혈리 새길령 산신당, 정선군 여량 서낭당, 태백산 단종대왕비각(또는 경북 영풍 고치령 산신당), 삼척 도계리 서낭당 총 12개소가 대표적인 단종 산신각 또는 서낭당이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는 서낭당이나 산신각은 새길령(사치령 또는 사길령) 산령각과 태백산 단종대왕비 등이다. 새길령은 옛날에는 정상부 인근에 천령이라 있었으나 강원도와 경상도를 넘나드는 보부상들이 너무 힘들어 새 길을 낸 곳이 바로 새길령이다. 지금은 사길령이란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다. 태백산 단종비각에는 ‘조선국태백산단종대왕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고 새겨진 비석이 있다. 탄허스님이 직접 쓴 글씨라고 한다. 비석 뒷면의 내용도 탄허스님이 직접 작성했다고 적혀 있다. 단종비각의 현판글씨도 탄허스님이 직접 썼다.

이 비석은 1950년대 태백산 정상 아래 있는 망경사 주지인 김진정행이라는 보살에게 단종 혼령이 나타나 “내가 태백산에 있는데 아직 표식이 없구나, 네가 비석을 하나 세우도록 하라”고 해서 세웠다고 한다. 영월과 태백으로 가는 길목 웬만한 곳에서는 아직 단종 산신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래서 ‘단종은 죽지 않았다’고 말한다. 역사에서 단종은 죽었지만 신화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삼척 산신은 단종이 아닌 공양왕”
김강산 전 태백문화원장 주장… 삼척 전문가 “공양왕은 육백산서 죽어” 일축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 사진
삼척시립박물관 제공
삼척에 있는 공양왕릉. 사진 삼척시립박물관 제공

김강산 전 태백문화원장은 “영월, 정선, 태백의 산신은 단종이지만 삼척의 산신은 공양왕”이라고 말한다. 웬 생뚱맞은 주장인가 하면서도 확인하기 위해 삼척시립박물관과 문화원을 찾았다. 삼척시립박물관 학예사들은 금시초문이라고 한다. 그 분야의 전문가인 김도현 박사를 소개했다. 김도현 박사는 “전혀 근거 없는 소리”라고 한마디로 일축한다. 그는 “공양왕이 삼척에 유배 와서 죽기는 했지만 그가 삼척의 산신이라는 처음 듣는 얘기”라고 말한다. “또 공양왕이 죽은 산도 태백산이 아니라 육백산 인근”이라며 “산신이 되려면 육백산이라면 모를까 태백산신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문화원장이 주장하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왕으로 추대됐으나 용도 폐기되어 원주로, 고성 간성으로, 다시 삼척으로 유배됐다. 공양왕을 죽이러 전투병을 보냈으나 공양왕은 극렬히 저항한다. 저항은 오히려 처참한 죽음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능지처참으로 참수형 당해 목은 가져가 고양에 묻히고 몸통만 삼척에 묻히는 신세가 됐다. 억울한 죽음은 하늘이 대신 갚는다. 따라서 공양왕은 태백산 삼척의 산신이 됐으며, 다른 정선·영월·태백 쪽의 태백산 산신은 단종이다.”

지금 공양왕의 묘지가 고양과 삼척 두 군데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태백산 산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공양왕은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하여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스린 일이 없겠습니까?” 하면서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로 갔다고 한다. 동년 8월 7일 간성군에 두었다가 모반의 기운이 있다는 신하들의 상소가 이어지자 태조 이성계는 태조 3년(1394) 3월 공양왕 삼부자를 삼척에 안치시켰다. 이후 신하들의 계속된 상소와 공양왕을 앞세운 모반 계획을 접한 이성계는 마침내 삼척의 공양왕에게 교지를 전하고 그와 두 아들을 1394년 4월 17일 교살한다. 능은 경기도 고양과 강원도 삼척시, 강원도 고성산 자락에 있다. 공양군으로 강등됐던 공양왕은 조선 태종 16년에 공양왕으로 추봉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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