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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한국의 산신(山神) | <9>감악산] 고구려 유민 억압하려 唐 장수 ‘설인귀’로 좌정

글·사진 월간산 박정원 부장대우
  • 입력 2016.09.26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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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가 정치적 이용한 듯… 설인귀碑·동굴·고개 등 지명 남아

감악산 북쪽 사면에 병풍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다. 반면 남쪽 사면은 완만하게 형성돼 있다. 사진 이은모씨 제공
감악산 북쪽 사면에 병풍바위가 깎아지른 듯 서 있다. 반면 남쪽 사면은 완만하게 형성돼 있다. 사진 이은모씨 제공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 전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우리의 전통 신앙인 산신(山神)숭배를 적절히 이용했다. 이같은 사실은 역사적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른바 대사·중사·소사에 따른 삼산오악제도다. 삼산오악제도를 실시한 시기는 대체적으로 문무왕(재위 661~681년)대로 보고 있으나 일부는 신문왕(재위 681~692년)대로 파악하기도 한다. 통일신라의 삼산오악제도는 고려에 이어 조선까지 유사한 제도로 계승되고, 현재까지도 대부분 명산·명소로 거론되는 장소들이다.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편에 ‘3산·5악 이하 전국의 명산·대천을 나눠 대사·중사·소사(大祀·中祀·小祀)로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구체적으로 한번 살펴보자.

대사 3산은 첫째가 내력(奈歷 : 습비산, 지금의 낭산), 둘째 골화(骨火 : 경주의 금강산), 셋째 혈례(穴禮 : 청도 오리산)다. 중사는 오악과 4진(鎭)·4해(海)·4독(瀆) 및 기타로 나눴다. 오악은 東은 토함산, 南은 지리산(당시엔 地理山), 西는 계룡산, 北은 태백산, 中은 부악(공산이라 하며, 지금의 팔공산)이다. 소사는 상악(霜岳 : 강원도 고성), 설악, 화악, 겸악(鉗岳, 칠중성 : 지금 양주에 있는 감악산), 부아악, 월내악, 무진악, 서다산, 월형산, 도서성, 동로악, 죽지, 웅지, 악발, 우화, 삼기, 훼황, 고허, 기아악, 파지곡원악, 비아악, 가림성, 가랑악, 서술 총 전국 24곳이 해당한다.

대사·중사의 대상인 삼산오악 외에 소사 제장(祭場)의 대부분도 산악이다. 대사가 사로국 및 신라의 핵심지역 호국신이라면, 중사는 국방 거점에 위치했고, 소사는 통일신라 이전의 전국 지방 세력이 지닌 각각의 신앙이 거의 그대로 신라의 사전(祀典) 속에 편입된 형태로 나타난다. 소사가 치러졌던 산은 모두 그 지역의 진산으로, 소사의 제장은 지역방어를 목적으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사전체계에 나타난 산신숭배는 통일신라라는 확대된 영토에 포함해서 왕실 주도의 하나의 질서로 편입시키려는 의도를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마을의 진산이었던 소사의 산신은 지역민의 안정과 단합 외에 국가를 위한 통합기능까지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고대국가 이전 사회에서 산신신앙은 지역 공동체의 유대감과 질서유지 등에 긍정적 기능을 했다. 하지만 국가범위가 커지고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유대감을 뒷받침하던 산신신앙은 그 배타성으로 인해 국가통합에 부정적 측면도 띤다. 이에 신라는 한반도 통일 이후 산신신앙을 왕실 중심으로 전면 재편을 꾀한다. 국가통합을 위해 국가 전체의 수호와 관련된 역할을 부여했다는 의미다. 전국의 각 지역 거점에 있는 산들을 소사의 대상으로 정해 왕의 하명에 따라 제사를 올리는 제장으로 정한 것이다.

감악산 정상에는 설인귀비, 진흥왕순수비, 광개토대왕비, 몰자비 등으로 불리는 많은 이름을 가진 비석이 하나 있다.
감악산 정상에는 설인귀비, 진흥왕순수비, 광개토대왕비, 몰자비 등으로 불리는 많은 이름을 가진 비석이 하나 있다.

통일신라 삼산오악제도 조선까지 계승

소사의 겸악이 바로 감악산이다. 그리고 그 산신으로 설인귀를 좌정했다. 여기서 겸악, 즉 감악산이 어떤 산이기에 소사로 지정됐고, 왜 하필 감악산인지, 또한 산신으로 왜 당나라 장수인 설인귀가 좌정됐는지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감악산이 어떤 산인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잠시 접어두고 지리적 위치만 먼저 살펴보자. 남북으로 분단되기 이전 한반도 전체지도를 보면 감악산이 거의 정중앙에 위치한다.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다. 전략적 요충지는 교통 집결지와 통한다. 삼국시대 감악산은 개성과 한양을 잇는 한반도 서북지역과 철원과 한양을 연결하는 중부지역의 연결통로였다. 고구려가 남으로 진출하거나, 신라가 북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악산을 거쳐야 했다. 실제로 이 일대는 삼국시대 말엽 나당전쟁기에 치열한 쟁탈의 대상이었으며, 통일신라가 임진강 넘어 고구려 고토로 진출하는 길목이었다. 

원래 이 지역은 난은별이라는 백제의 영토였다. 이후 고구려가 빼앗아 낭비성이라 했고, 신라는 칠중성이라 했다. 소사에 나오는 칠중성이 바로 이곳이다. 성의 주위가 2,000척이 넘는 첩첩의 깊은 곳이라 하여 칠중성이란 지명이 명명된 것으로 전한다. 신라가 영토를 확장한 성덕여왕 때 고구려군이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러 쳐들어오자 주민들은 감악산으로 대피했다. 이에 여왕은 알천을 보내 칠중성 밖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쳤다. 문무왕 때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전투를 벌일 때도 칠중성으로 진격로를 개척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칠중성은 그만큼 삼국시대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감악산 산신당에는 생명수가 솟아나는 연못이 하나 있다. 산과 물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감악산 산신당에는 생명수가 솟아나는 연못이 하나 있다. 산과 물은 생명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

감악산이 어떤 산인지 파악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애초 이름인 ‘겸악(鉗岳)’은 칼같이 우뚝 솟은 바위산을 가리킨다. 이는 감악산의 북쪽 사면이 마치 칼같이 우뚝 솟은 형상을 나타낸다. 그러다 ‘金’이 탈락하고 ‘甘’만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 등에서는 ‘甘岳’이란 표기가 나오는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甘岳’이란 지명은 실제 감악산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甘’자는 단 것을 나타내는데, 실제 감악산과는 전혀 관련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감악산이란 지명으로 돌아가면서 한자를 ‘紺岳’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감악산 북쪽 사면의 검붉은 바위를 상징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글자가 바로 ‘紺’자였다. 실제로 감악산은 바위 사이로 검은빛과 푸른빛이 동시에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또한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에서는 우리말에서 신령스런 큰 산에는 신(神)을 의미하는 고유어 ‘감’ 또는 ‘감악’이나 ‘감앙’과 같은 단어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감악산의 신령스런 부분은 소사로 지정되기 전에도 산 정상에 사우(祠宇)가 있었다고 한다. 소사로 지정된 이후에는 나라에서 봄·가을로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소사로 지정되면서 더욱 신령스런 산으로 거듭나게 됐다.

감악산 정상 비석 앞에 지금은 감악산비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전에는 설인귀비석이라고 소개한 안내문이 있었다. / 사진 조선일보DB
감악산 정상 비석 앞에 지금은 감악산비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전에는 설인귀비석이라고 소개한 안내문이 있었다. / 사진 조선일보DB

적장이 영웅·산신으로 좌정한 건 역사 아이러니

통일신라가 설인귀를 감악산 산신으로 좌정시킨 데 대해서는 조금 의아한 측면도 있으나 정치적으로는 그럴 듯한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산신으로서 설인귀를 설명하기 전에 장수로서의 설인귀(薛仁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설인귀는 당 태종과 고종 시기에 활약한 장수로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성 하진)에서 농민 출신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기마와 궁술에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44년 당 태종이 고구려 침입을 위해 군사를 모집하자 장사귀(張士貴)의 부하로 지원하면서 장수의 길로 들어섰다. 645년 요동 안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유격장군으로 전격 발탁됐다. 661년 천산(天山) 인근의 위구르 연맹과 전투를 하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당시 “장군의 화살 셋이 천산을 평정하니, 장사들은 길게 노래하며 관문으로 들어선다”는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고 전한다.

665년 고구려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의 장남 연남생이 아우 연남건과 연남산에게 쫓겨 당에 원병을 청하자 고구려와의 전투에 참가하게 된다. 667년에는 요동의 신성을 고구려 내분으로 쉽게 점령했고, 연남생의 반란군과 합류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당이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면서 설인귀는 검교안동도호로서 군정 총독의 자리에 앉는다. 671년에는 계림도행군 총관으로 신라와 전쟁에 나선다. 675년 신라의 천성을 공격했지만 신라 장군 문훈에게 패배하며 평양성에서 물러났다. 676년 수군을 이끌고 금강 하구 기벌포를 공격하지만 사찬 이득이 이끄는 신라 수군에게 다시 패배한다. 당은 676년 평양성을 버리고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고군성(지금의 요양)으로 옮기며 한반도에서 완전 물러간다. 이때까지 설인귀는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설인귀는 일개 농민 출신에서 대장군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중국인들에게 영웅 숭배를 받고 있다. <신당서(新唐書)> 설인귀열전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해 귀환한 뒤 설인귀에 대해 “짐은 요동을 얻어 기쁜 것이 아니라 용맹한 장수를 얻어 기쁘다”고 말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감악산 산신당 반대편 서쪽에 있는 범륜사 산신각은 동굴 속에 산신과 호랑이 조각 형상을 두고 있으며, 바로 옆에는 샘물이 솟아난다. 영험한 기도터로 알려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감악산 산신당 반대편 서쪽에 있는 범륜사 산신각은 동굴 속에 산신과 호랑이 조각 형상을 두고 있으며, 바로 옆에는 샘물이 솟아난다. 영험한 기도터로 알려져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 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하편에는 문무왕과 설인귀가 편지를 주고받은 내용이, <삼국사기> 권 제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상편에는 설인귀의 용맹성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특히 ‘고구려본기’에는 ‘(전략) 용문(龍門) 사람 설인귀가 기복(奇服)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진(陳)에 깊이 들어가니 향하는 곳마다 맞서는 자가 없어 아군이 뒤흔들렸다. 대군이 이에 덮쳐 (공격하므로) 아군은 크게 무너져 사자(死者)가 3만여 명이었다. 당주(唐主)가 인귀를 (그 용전을) 바라보고 유격장군을 삼았다. 연수 등이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을 의지해 스스로 굳게 하므로 당주가 제군에 명하여 이를 포위케 하고 장손무기는 교량을 모두 거두어 그 귀로를 끊었다. 연수와 혜진은 그 무리 3만 6,800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며 군문에 들어와 배복(拜伏)하고 명을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 설인귀가 어떻게 해서 감악산 산신이 됐을까. 사실 설인귀가 감악산 산신이 된 데에는 신령스런 기운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당시 신라의 정치적인 상황이 크게 작용했다. 전국 각 지방세력의 신앙을 그대로 신라의 사전 속에 편입한 소사의 성격이 그렇듯이 신라의 중앙귀족은 한강 이북과 임진강 유역 일원의 주민들 사이에 잠재해 있는 고구려 유민의식의 분출을 저지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당의 장수 설인귀를 내세워 고구려 유민들에게 공포감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고구려를 향한 회고의 감정을 억압하는 역할을 했다. 또한 고구려의 멸망은 신라보다는 당에 의해서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목적도 강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농민 출신으로서 당나라 최고의 장수에 오른 그의 영웅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측면도 있다. 보통 신격으로 좌정한 인물이 그렇듯이 해당 인물의 영웅담은 듣고 보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 존경심을 유발하는 효과도 있다. 이는 고려나 조선시대 들어서 설인귀가 감악산 산신에 덧씌워져 영웅호걸로서 역사서나 소설에 재조명되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어쨌든 설인귀는 원래 본향으로 있던 산신을 밀어내고 감악산 산신으로 자연스럽게 좌정하게 된다. 이후 설인귀는 당나라 출신이 아니라 감악산 출신인 신라인이라고까지 발전한다. 따라서 지역사회의 최고 수호자라는 영웅적인 칭호까지 받게 된다. 물론 감악산 산신은 설인귀 외에 원래의 산신 형태인 본향은 그대로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의 파주나 양주 지역에는 당나라 장수인 설인귀에 대한 여러 전설이 전승되고 있다. 먼저 감악산에 유명한 비석이 하나 있다. 글자가 없는 무자비(無字碑) 혹은 몰자비(沒字碑)라고 하며, 설인귀를 기리기 위한 사적비라는 설에서부터 빗돌대왕비, 진흥왕순수비, 광개토대왕비라는 주장까지 있다.

무자비는 도교의 영향으로 애초부터 비석에 글자를 새기지 않은 것이다. 중국 태산에도 무자비가 있다. 한 무제가 다시 중국을 통일하고 태산에 올라 그 기념비적인 일에 더 이상 할 일과 말이 없다고 해서 무자비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이도 도교의 영향이다. 몰자비는 세월에 글자가 마모된 비석이라는 의미다. 빗돌대왕비는 무자비와 조금은 비슷한 성격을 띤다. 빗돌대왕비는 사람들이 돌에 정성을 다해 빈다고 해서 빗돌대왕비석이라고 붙여졌다고 전한다.

이 비석에 전하는 전설도 있다.

‘원래 이 비석은 남면 황방리 북쪽의 눌목리(訥木里)에 있었다. 인근에 사는 한 농민이 어느 날 꿈을 꾸었다. 한 노인이 나타나 막무가내 소를 빌려달라고 해서 그 농민은 빌려주었다. 다음날 일어나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 전부 지난 밤 꿈에 노인이 나타나 소를 빌려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꿈속에서 소를 빌려준 농민들의 소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고, 거절한 농민의 소들은 모두 죽었다. 그런데 평상시 마을 어귀에 있던 비석이 어느 새 감악산 꼭대기로 옮겨져 있었다. 이를 마을 사람들은 감악산 산신의 행동이라 여기고 치성을 올리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됐다고 전한다.’

설인귀가 은거한 동굴로 전하는 설인귀굴.
설인귀가 은거한 동굴로 전하는 설인귀굴.
설인귀굴은 임꺽정굴이라 하기도

설인귀비석에 이어 설인귀굴도 있다. 신라를 도와 고구려를 정벌하러 온 설인귀가 이곳에 진을 쳤다고 전해지는 동굴이다. 일명 임꺽정굴이라고도 한다. 설인귀굴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다. 깊은 만큼 어두워 내려갈 수도 없다. 밧줄을 묶어 놓았으나 위험해서 접근하기가 쉽지 않고 밧줄을 잡고 내려가는 사람도 거의 없다.

설마치(薛馬峙)고개도 있다. 설인귀가 말을 타고 달리던 고개라고 전해진다. 어룡고개, 어영고개라고도 하는데, 왕이 이곳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설인귀사도 있다. 설인귀를 모신 사당이며, 매년 봄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다고 전한다. 이와 같이 당나라 장수 설인귀는 산신으로 좌정하면서 영웅 칭호까지 받는 신라인 못지않은 지위를 누리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통일신라에 이어 고려시대에도 산악숭배신앙은 그대로 계승된다. 감악산의 지위도 마찬가지로 부여된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에서 ‘내가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인데, 연등은 부처를 섬기고, 팔관은 천령(天靈) 및 오악(五嶽), 명산, 대천(大川), 용신(龍神)을 섬기기 때문이다. 왕과 신하 모두가 함께 즐기면서 공경하는 마음으로 이를 행하도록 하라’고 후대 왕들에게 당부할 만큼 팔관회를 중시했다. 팔관회는 고려시대 내내 최고의 국가행사로서 불교의례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의례가 결합된 종교제전이자 축제였다. <훈요십조>에 나오는 대상은 명칭만 바뀌었을 뿐 통일신라의 대사·중사·소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악산에 있는 마애불좌상. / 사진. 이은모씨 제공
감악산에 있는 마애불좌상. / 사진. 이은모씨 제공
조선시대 감악산은 호국백으로 칭호

조선시대 들어서도 산신숭배신앙은 역사서에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감악산은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나타난다. 그만큼 중요시됐던 산이고 장소였다.

<태조실록> 3권 1393년 ‘전국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에게 봉작을 내리다’편에 ‘이조에서 경내의 명산·대천·성황·해도의 신을 봉하기를 청하니, 송악의 성황(城隍)은 진국공(鎭國公)이라 하고, 화령·안변·완산의 성황은 계국백(啓國伯)이라 하고, 지리산·무등산·금성산·계룡산·감악산·삼각산·백악(白嶽)의 여러 산과 진주의 성황은 호국백(護國伯)이라 하고, 그 나머지는 호국의 신이라 하였으니, 대개 대사성(大司成) 유경이 진술한 말에 따라서 예조에 명하여 상정한 것이었다’고 나온다.

<태종실록> 28권 태종14년(1414)에 ‘예조에서 산천에 지내는 제사에 대한 규정을 상정하다’편에서도 기록이 등장한다.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祀典)제도를 올렸다. 삼가 <당서(唐書)>, <예악지(禮樂志)>를 보니, 악(嶽)·진(鎭)·해(海)·독(瀆)은 중사(中祀)로 했고, 산·임·천·택(澤)은 소사로 했고, <문헌통고(文獻通考)>의 송나라 제도에서도 또한 악·진·해·독은 중사로 했습니다. 본조(本朝)에서는 전조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빌건대, 고제(古制)에 의하여 등제(等第)를 나누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악·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경성 삼각산의 신(神)·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德津),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진,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백산(鼻白山),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中祀)였고, 경성의 목멱, 경기의 오관산·감악산·양진, 충청도의 계룡산·죽령산·양진 명소, 경상도의 우불산·주흘산, 전라도의 전주 성황·금성산, 강원도의 치악산·의관령·덕진 명소, 풍해도의 우이산·장산곶이·아사진·송곶이, 영길도의 영흥 성황·함흥 성황·비류수(沸流水), 평안도의 청천강·구진 익수는 모두 소사이니, 전에는 소재관(所在官)에서 행하던 것이다. 경기의 용호산·화악, 경상도의 진주 성황, 영길도의 현덕진·백두산은 이것은 모두 옛날 그대로 소재관에서 스스로 행하게 하고, 영안성·정주 목감·구룡산·인달암(因達巖)은 모두 혁거(革去)했다.’

고려나 조선의 산신숭배가 모두 신라의 대사·중사·소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감악산은 항상 그 대상에 포함됐다.

이와 같이 우리 민족의 산악숭배사상은 매우 깊다. 산을 생명의 원천으로 보고, 죽으면 돌아가는 자리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생명순환의 본원 자리로 산을 보는 관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산을 단순한 산으로 보지 않는다. 인간이 죽어 그 원천으로 회귀하기 때문에 산에 묻히고 산에 거주하는 장소로 믿는다. 다르게 표현하면, 계시의 장소, 선령의 거처, 생산의 주관자, 생명의 공급자, 망자의 거소 등으로 나타난다. 인간이 신령을 만나 계시를 받는 장소가 산이라는 관념은 종교의 세계에서는 매우 보편적이다.

우리는 천신의 하강과 그 아들인 국조의 산신화로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단군신화다. 이후 산신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변천과정을 거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또한 단군 이외에 어떠한 산신이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 무한하고 다양한 산신의 형태 때문에 체계화하기도 쉽지 않다.

감악산 산신이 설인귀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훨씬 다양한 산신이 존재할 것으로 믿는다. 설인귀는 단지 사회통합을 위해 정치적으로 이용한 측면이 있는 산신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산신은 현대까지 무궁무진하고 다양하다. 세상이 바뀌어도 산신은 존재하고, 종교가 바뀌어도 산신은 존재한다. 삼국시대→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도 역사서에 나타난 산신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를 해석해 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몫이다. 

“감악산 기도발은 계룡산 버금가는 수준”

주민들, 영발 좋다고 자랑… 산신당 많아 만신·박수 굿 잇따라

감악산은 예로부터 국가가 관리해 온 한반도 중부의 명산이다. 특히 개성과 한양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로서의 감악산은 온갖 역사적 사건들이 많았다. 삼국시대에는 영토를 빼앗고 빼앗기는 각축장이었고, 임꺽정의 주요 활동무대일 정도로 개성이나 한양으로 이송하는 물품을 강탈하는 도적들도 많았다. 사건들은 자연 무고한 희생자를 수반한다. 희생자는 그들을 위한 기도가 필요했다. 자연 기도대상이 있어야 한다. 감악산비와 감악산 산신이 오랫동안 숭배대상이었다. 따라서 무속행위가 잇따랐다. 양주 주민들은 “감악산 기도발은 계룡산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잘 받는다”고 장담한다.

신령스런 기운과 기도발 잘 받는 산으로 감악산은 이름을 날렸다. 덩달아 여자 무당인 만신(萬神)과 남자 무당인 박수(薄數)가 많았다. 이들은 비명횡사한 원혼을 달래 주는 굿을 하고, 아들이 없는 집에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어 주고 마음을 치유해 주는 역할을 했다. 이들이 주로 섬기는 신은 최영 장군 산신, 부처, 관세음보살, 약사보살, 미륵, 산신도사, 장군신, 동자신 등 다양하다.

현재 감악산 자락 원당저수지 앞에 감악산 산신당이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다. 당주는 박영심(75) 무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산신당 옆에는 자연수가 솟아나는 연못이 하나 있다. 역시 생명수가 중요하다. 산천 내지는 산수라는 개념은 모두 생명의 원천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항상 같이 간다.

박 당주는 “30여 년 전 신이 내 몸에 들어와서 이곳으로 오게 됐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퇴마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듯이 우리는 사람들을 치유해 준다. 몸이 아픈 사람, 정신적으로 허약한 사람, 가정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나쁜 귀신이 그 사람 몸에 들어가 활동하기 때문이다. 그 악귀를 물리치는 역할을 우리가 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처음 신내림을 받을 때 천신과 동자신, 칠성할머니 신 등이 많이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본인에게는 유달리 신들이 이름을 밝히고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인간이 존재하는 젖줄이 산신이다. 그리고 산신, 천신, 용왕신의 삼합이 맞아야 한다. 용왕신은 옛날 우리 할머니들이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리는 신”이라고 말한다. 천신은 단군뿐이지 않느냐고 하자 “천신은 도를 닦아 신선이 된 6대조 이상의 조상이다. 한둘이 아니고 매우 많다”고 말했다. 나아가 이곳에는 “많은 신령들이 동침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연못을 지나 기도터를 보여 주겠다고 했다. 기도터는 역사서에 나오는 팔매바위 앞인 듯했다. 팔매바위는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7년에 ‘칠중성 남쪽에서 큰 돌이 저절로 35보가량이나 옮기어 갔다’고 나온 그 바위로 추정한다. 어떻게 팔매바위로 변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기도터는 바위를 향하는 자리였다. 바위는 기운이 결집된 응집 터였다. 큰 마당을 닦아 기도터를 마련했다. 아마추어가 봐도 기운이 넘쳐흐르는 듯한 바위였다. 기운이 넘쳐흐르는 바위와 생명수가 솟아나는 연못, 산수와 산천이 융합된 그런 산신당이었다. 그러면서 박 당주는 “신은 감응한다”고 했다. 기도발이 있다는 의미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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