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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한국의 산신(山神) | <10>대관령] 영웅신화 같은 스토리로 김유신 장군 좌정

글·사진 | 월간산 박정원 부장대우
  • 입력 2016.10.31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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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나말여초 추정… 고려부터 주요 간선로 되면서 더욱 신성시된 듯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신라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산신이다.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산신이 되는 경우는 허다하다. 산신의 보편성과 일반성 측면에서 김유신 장군이 산신으로 좌정한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런데 김유신 장군이 전혀 연고가 없을 것 같은 강릉 대관령의 산신이 됐다 하면 뭔가 다른 게 있을 것 같다. 산신의 지역성과 특수성 측면에서 뭔가 연결고리가 있을 법하다.

그가 왜, 어떻게 대관령산신이 됐을까? 그는 삼국통일 직후인 673년 사망한다. 그런데 그가 언제 대관령산신으로 좌정했을까? 대관령 주민들이 어떻게 그를 무난히 받아들였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김유신 장군의 국가 표준 영정.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유신 장군의 국가 표준 영정. 사진 한국학중앙연구원
신비한 탄생·영웅적 활약·호국적 희생 담아

대개 영웅적 인물은 태어날 때부터 신비스러운 과정으로 점철된다. 세계사적으로도 예외 아니다. 거의 신화 수준으로 묘사된다. 김유신 장군의 탄생은 역사서에서조차도 신비스럽다. 정사라고 평가받는 <삼국사기>, <고려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삼국사기> 인물열전은 10편으로 나뉘어 50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 가운데 김유신전은 권41에서 권43까지 세 편이나 나온다. 한 명의 인물에 3편을 할애하고, 나머지 49명을 7편으로 나눠 싣고 있다. 김유신에 대한 분량이 전체 인물열전의 30%를 차지할 정도다. 그만큼 위대하고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정사나 야사에 나오는 내용은 대개 그가 가지고 있는 신비적 탄생(신비성), 영웅적 활약(영웅성), 호국적 희생(호국성)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영웅신화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야사로 평가받는 <삼국유사>에서는 김유신의 탄생을 더욱 신비스럽게 묘사한다. 김유신조에 ‘(어머니) 만명이 태몽을 꾸고 20개월 만에 김유신을 낳았다. 17세에 통일의 꿈을 꾸고 입산하여 밀법을 배운다. 18세에 열박산에서 수련하자 영험한 빛이 내려온다. 김유신의 후손들도 대단한 지략을 지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삼국유사> 기이 권1 김유신조에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나서 등에 칠성(七星) 무늬가 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삼국유사> 기이 권2 만파식적조에는 ‘김유신은 삼십삼천(三十三天)의 한 사람으로 (인간 세상에) 하강했다. 용이 된 문무왕과 함께 나라를 지킨다. 문무왕은 용이 되고, 김유신은 천신이 됐다. 만파식적을 보물로 내려주었다’는 표현까지 싣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32 김해도호부 인물조에는 ‘경진일 꿈에 형혹성과 진성 두 별이 만명에게 내려와 잉태하여 20개월 만인 진평왕 건복 12년(595)에 얻었다’고 돼 있다.

한마디로 탄생부터 범상치 않은 천상의 인물이 지상으로 내려와 천하를 평정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천신 수준의 산신이 됐다는 얘기다. 여느 신화에 나오는 내용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수준이다. 그의 신비스런 탄생만큼이나 영웅적 활약도 그에 못지않게 괄목할 만하다.

그의 영웅적 활약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5세(609) 때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로 불린 낭도를 이끌었다. 629년(진평왕 51) 고구려 낭비성 공격 때 중당당주로 출전해서 공을 세웠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해 김춘추가 고구려에 청병하러 가기에 앞서 교섭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김춘추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한다. 644년에 소판(蘇判)이 되고, 그해 9월에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의 요충인 가혜성 등 7개성을 점령한다. 이듬해 정월에는 백제가 매리포성에 침입했다는 급보를 받고 다시 출전하여 승리했다. 647년(진덕여왕 1)에는 귀족회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 반란을 일으키자 왕실 쪽에 서서 반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654년(태종 무열왕 1)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그의 정치적 비중이 더욱 높아져 관등이 대각간에 이르렀다. 660년(무열왕 7) 귀족회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했다. 661년(문무왕 1) 6월에 고구려를 원정했다. 663년 백제부흥을 꾀하는 백제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倭)의 연합세력을 격파했다. 664년 백제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으로 평정했다. 668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군대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됐으나 늙고 병들어 원정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왕경에 남아 신라 국내를 통치했다.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은 생질과 아우였다. 고구려를 평정한 직후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에 제수된다. 하지만 이후부터 김유신이 직접 정치나 군사적 수행을 하지 않았으나 원로로서 자문을 했다. 672년 석문벌판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673년 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춰 장사지내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렸으며 뒤에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했다. 지금 진천(김유신 탄생지)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에 태령산으로 불렸고,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지낸다.’

대관령산신당 안에는 연중무휴 끊이지 않는 무속행위로 항상 음식들이 제공돼 있다.
대관령산신당 안에는 연중무휴 끊이지 않는 무속행위로 항상 음식들이 제공돼 있다.
김유신 장군이 산신으로 모셔져 있는 대관령산신당.
김유신 장군이 산신으로 모셔져 있는 대관령산신당.
<고려사> 권56 지리지1 진주(鎭州, 지금의 진천)에 태령산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신라 때에 만노군 태수 김서현의 아내 만명(萬明)이 김유신을 낳아 그 태를 이 현 남쪽 15리 지점에 묻었더니, 신이 되었다 하여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렀다. 신라 때부터 사당을 설치하고 봄과 가을에 왕이 향을 보내 제사를 지냈으며, 고려에서도 그대로 했다.’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진천현조와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천현 사묘조에도 비슷한 기록이 등장한다.

60여 년간 한 번도 패한 적 없다는 주장도

영웅 김유신은 고대사회 한반도 격변기인 서기 600년대의 60여 년간을 전장에 나가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소국 신라를 한반도의 통일국가로 만드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수십 번의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후대의 역사가 과대평가한 측면도 있겠지만 그의 눈부신 활약은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 와중에 산신의 도움을 받는 기록도 나온다.

<삼국유사> 권1 기이1 김유신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595) 을묘에 태어났는데, 칠요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에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 그에게는 신기하고 기이한 일이 많이 있었다. 나이 18세 되던 해 임신년에 검술을 익혀 국선이 됐다. 이때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유신은 고구려·백제 두 나라를 치기 위해 밤낮으로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백석이 그 일을 알고 유신에게 고하기를 “제가 공과 함께 먼저 적국에 들어가 정탐을 한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신이 기뻐하며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는데 두 여자가 따라 왔다. 여인이 말하기를 “공이 말씀하는 바를 잘 알겠으나, 원컨대 공께서 백석을 잠시 떼어놓고 우리와 함께 수풀 속으로 들어가면 실정을 말하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낭자들이 문득 신(神)으로 변하더니 “우리들은 나림(奈林)·혈례(穴禮)·골화(骨火) 세 곳의 호국신인데, 지금 적국의 사람이 낭을 유인하여 가는데도 낭이 그것을 모르고 따라가므로 낭을 말리려고 여기에 온 것입니다”라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자취를 감췄다. (중략) 공이 곧 백석을 죽이고 온갖 음식을 갖춰 삼신(三神)에게 제사를 지내니 모두 다 나타나서 음향했다.’

산신에게 검술 익혀 국선됐다고 전해

이 삼신이 바로 신라의 대사 삼산·중사 오악 중에 호국신에 해당하는 삼산의 신들이다. 그 호국신들이 직접 나타나 고구려로 가는 김유신을 위기에서 탈출하게 한다. 영웅이 아니고는 이런 장면이 나올 수 없다. 또 산신에게 검술을 배워 국선이 됐다고도 한다. 여기서는 신비스럽게 탄생한 비범한 인물 김유신이 하늘과의 연관성을 계속 가져 영웅적 활약을 한 뒤 다시 산신으로 돌아간다는 복선을 깔고 있는 분위기다. 충분히 예견된다.

그런데 왜 대관령일까 하는 점에 의문이 든다. 당시 대관령이 그렇게 중요한 장소였을까?

이중환의 <택리지>에 ‘관동은 철령 동쪽을 가리키는 용어이고, 영동은 백두대간 대관령 동쪽 지역을 말한다. 관동 지역은 아홉 곳으로 흡곡과 통천·고성·간성·양양과 옛날 (동)예국의 수도인 강릉, 그리고 삼척·울진·평해의 각 군·현을 지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영동지역은 ‘통천·고성·양양·강릉·삼척·울진’을 지칭했으나 행정구역 변경으로 지금은 고성군·속초시·양양군·강릉시·동해시·삼척시 등을 가리킨다. 기록에서 보듯 강릉은 삼국시대 이전 동예국의 수도였다. 당시 지명은 명주(溟洲)로서 독자적인 국가로서 존재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에 편입된다. 이때까지는 대관령이 지역적으로 전혀 주목받지 않았던 듯하다. 단순히 지역경계나 고갯길의 개념으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관령이라는 지명은 기록상에 16세기경 처음 등장한다. 그 전에는 대관(大關)이라 불렀다. 큰 고개를 의미하는 ‘大’자를 붙이고 험한 요새의 관문이라는 뜻으로 ‘關’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大嶺(대령)’이라고 쓴 기록이 나온다. <고려사>에는 ‘大峴(대현)’으로 기록돼 있다. 말 그대로 큰 고개라는 뜻이다. 조선 초기까지 대관령이라는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태종실록>에도 ‘大嶺山(대령산)’으로 돼 있다.

강릉 단오제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단오행사를 진행한다. 산신제에서 신목을 정해 들고 내려간다.
강릉 단오제에서 산신제를 지내고 단오행사를 진행한다. 산신제에서 신목을 정해 들고 내려간다.
대관령옛길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반정은 시내와 대관령 정상까지 거리가 반쯤 된다는 의미의 지명이다.
대관령옛길 비석이 세워져 있다. 반정은 시내와 대관령 정상까지 거리가 반쯤 된다는 의미의 지명이다.
대관령 지명은 16세기 처음 등장

조선 중종에 이르러서야 대관령이란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대관령’이라고 처음 언급하면서 ‘이를 대령이라고도 한다’고 소개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 대관령이라는 기록이 분명히 나온다. 따라서 대관령은 오래된 고개지만 지리·역사적으로 의미를 가지게 된 건이란 삼국통일 이후로 보인다.

물론 경주와 지방을 연결하는 지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통일 직후 당시 수도로부터 9주5소경의 거점도시를 연결하는 간선뿐만 아니라 지선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하서부(강릉)에서 대령을 넘어 내륙 방면으로 향하는 고갯길이다. 태종무열왕의 서자 차득공이 재상 취임 이전에 민심을 살피기 위해 670년(문무왕 10)에 국내를 순행했다. 이때 거쳐 간 주요 도시가 왕경(경주)→아슬라주(강릉)→우수주(춘천)·북원경(원주)→무진주(광주)→왕경 순이었다. 강릉에서 춘천으로 갈 때 대관령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대관령은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자 주요 육상 간선로로 더욱 주목받게 된다. 

<고려사> 권92 왕순식조에 ‘고려 태조가 신검을 토벌할 때 (강릉 사람) 순식이 명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연합하여 적을 격파했다. 이때 태조가 순식에게 말하기를 “짐이 꿈에 이상한 스님이 갑사 3,000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것이 바로 그 몽조로다”고 했다. 이에 순식이 말하기를 “신이 명주를 떠나 대관령에 이르렀을 때 이상한 승사(僧祠)가 있기에 제단을 마련하고 (산신께) 기도했는데 왕께서 꿈 꾼 것은 반드시 이것일 것입니다”고 하니, 태조가 이상하게 여겼다’고 나와 있다.

1728년 편찬된 강릉 읍지 <임영지> 전권2 사전(祀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와 있다.

‘대관산신은 탑산기(塔山記)에 “왕순식이 고려 태조를 따라 남북을 정벌할 때 꿈에 승속이신(僧俗二神)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해 주었다. 꿈에서 깨어나 싸워 이기매 대관령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후 치제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직전 지방 호족세력이던 왕순식이 왕건을 도와 대관령을 주요 육상 교통로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그곳에 김유신 산신이 좌정한 건 확인할 수 없지만 사당이나 암자는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같은 기록을 토대로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즈음 대관령은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간선로로 부각되기 시작했고, 고갯길에 있는 산신각이나 암자에 누군가가 산신으로 좌정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1,000년 이상 명맥을 이어온 강릉단오제에서 모시는 12신의 면면을 봐도 대관령을 이용한 당시 사람들의 숭배대상을 알 수 있다. <임영지>에 ‘성황지신, 송악지신, 태백대천왕신, 남산당제형태상지신, 성황당덕자모왕지신, 신라 김유신지신, 강문개성부인지신, 감악산대왕지신, 신당성황지신, 신라장군지신, 초당리부인지신 총 11신이 봉안되어 있다’고 보여 준다. 이 신들의 성향을 보면 신라계통 아니면 강릉과 개성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호국과 호족, 성황신 등도 두루 포함돼 있다. 경주가 수도일 때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대관령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신들을 숭배대상으로 여겼을 것으로 충분히 짐작되는 대목이다.

그러면 김유신과 강릉은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떻게 대관령산신이 됐을까? 그리고 언제 산신으로 좌정했을까?

허균의 <성소부부고> 권14 문부11 대령산신찬 정서(井書)조에 강릉과 김유신의 관계에 대한 첫 기록이자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계묘년(선조 36, 1603) 여름이었다. 내가 명주(溟州, 강릉)에 있을 때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고 하기에, 그 연유를  물으니 수리가 이렇게 말했다.

대관령옛길 반정에서 강릉시내와 동해를 바라본다. 사진 조선일보DB
대관령옛길 반정에서 강릉시내와 동해를 바라본다. 사진 조선일보DB
대관령 항공촬영.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길이 말 그대로 아흔아홉 굽이에 이르는 것 같다. 사진 조선일보DB
대관령 항공촬영. 백두대간을 가로지르는 길이 말 그대로 아흔아홉 굽이에 이르는 것 같다. 사진 조선일보DB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 대장군 김공 유신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했는데, 산신(山神)이 검술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에서 칼을 주조했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런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대와 향화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에 잡희로 신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대가 쓰러지지 않아 그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풍재나 한재가 있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날에 가서 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 생각건대,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을 세워 삼국통일의 성업을 완성했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오히려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낸다.’

1933년에 간행된 강릉읍지인 <동호승람> 권2 사묘 영당조(祠廟·影堂條)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성소부부고>의 내용을 가져와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화부산사(花浮山祠)는 신라 명신 김유신의 사당이다. 신유년(무열왕 8, 661)에 말갈을 북쪽으로 쫓아내라는 왕명에 따라 이를 정복하기 위해 명주에 와 화부산 아래에 주둔하며 칼을 만들었고, 오대산에서 말 타는 훈련을 하고 팔송정에서 토벌계획을 도모했다. 적이 모두 두려워 도망가니 사방의 백성들이 의지하고 따랐다. 선생이 죽은 후 보호받은 것에 말미암아 주둔처에 사당을 짓고 제향했는데 세월이 흘러서도 변하지 않았다.’

강릉에 말갈족 무찌르러 김유신 진출

661년이면 김유신이 한창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시기다. 이때 말갈족을 무찌르기 위해 대관령 너머 명주까지 진출, 위대한 업적을 또 하나 남겼다. 그렇다고 그가 바로 산신이 됐을 것 같지는 않다. 앞선 ‘한국의 산신’ 연재에서 봤듯이, 죽어서 바로 산신으로 좌정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몇 백 년 동안 주민들과 습합과정을 거친 뒤 숭배대상으로 전승되면 산신이 되고, 그렇지 않으면 유야무야 소멸된다. 몇 세대 걸쳐 검증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이는 산신의 성격에서 잘 드러난다.
산신은 한 사회의 실생활이나 사회적 이데올로기, 사회 지배가치 등을 통제하는 작용을 한다. 산신은 그 자체로 권위를 상징했다. 산신을 만든 집단은 집단을 결속시키고 지연공동체로 건설하며, 지배계급으로 부상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권위의 표상이 되기를 갈망한다.

우리나라의 산신은 천신, 성황신과 그 신격이 때로는 뒤섞여 나타난다. 시인 조지훈은 논문 <누석단·신수·당집(累石檀·神樹·堂집) 신앙연구>에서 ‘당신신앙의 신앙대상은 곧 천신이요 산신이며 부락신이다. 우리 민간신앙에 있어서 이 삼자는 완전히 동격이요, 삼위일체이다. 이 신앙의 원형은 단군신화에 나타나 있다. 우리 선민들은 하늘과 인간이 교섭처(交涉處)로서 고산을 숭배했고 우수한 치자·장수(治者·將帥)는 산신이 되어 나라와 부락의 수호신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산신은 호국신 또는 부락의 수호신 곧 동신, 당신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유신 장군이 대관령산신으로 좌정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탄생의 신비성, 영웅적인 활약에 이어 나머지 사후과정은 너무 뻔하게 예상할 수 있다. 그러면 언제 됐을지 의문이 생긴다. 김유신 장군의 산신 좌정 시기는 범일국사의 대관령성황신의 좌정과 맞물려 매우 미묘한 문제다. 강릉 단오제의 주신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성황신에서 산신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맞서 있기 때문이다. 단오제의 주신이 산신에서 성황신으로 바뀌게 된 계기도 명확하지 않다. 지역 사학자들 중심으로 국사성황신 범일국사가 강릉 출신이면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신통력을 발휘해서 왜구를 쫓았다는 신이한 이야기가 등장하면서 지역수호신격인 성황신으로 좌정한 것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다.

김유신의 대관령산신 좌정과 관련한 첫 구체적 기록은 앞서 언급한 허균의 <성소부부고>다. 이때가 1603년. 유교가 국교인 조선시대 때 산신으로 이미 좌정돼 있었다고 설명한다. 한참 오래전인 듯한 암시를 준다. 고려 말 무신 정추(鄭樞, 1333~1382)의 문집 <원재고(圓齋藁)>에 ‘(산신은) 장사 김유신을 말한다. 김유신이 산에 들어 칼에 주문을 외우니 각성의 별빛이 내리비쳐 그 칼이 단단해졌다’고 했다.

강릉 단오제에서 사람들이 대관령산신제를 지내고 위패를 들고 강릉시내로 가고 있다.
강릉 단오제에서 사람들이 대관령산신제를 지내고 위패를 들고 강릉시내로 가고 있다.
산신은 지역공동체 결속 이데올로기

하지만 <고려사>의 왕건과 왕순식의 기록에서 봤듯이 ‘대관령 산신’에 대해서 언급하지만 구체적 인격신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전 기록은 더더욱 대관령산신에 대한 기록조차 없는 실정이다.

강릉 단오제와 성황사에 대해 연구하고 있는 강릉원주대학교 사학과 이규대 교수는 “고려는 불교 국가였고, 조선은 유교 국가였기 때문에 신라 말기 인물이면서 승려이자 국사인 범일국사가 성황신으로 좌정한 상태에서 단오제의 주신으로 모셔졌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와 맞물려 성황당문화는 신라 말 고려 초에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어, 강릉 출신 범일국사를 성황신으로 좌정하고 주신으로 모시는 게 사찰 신도회나 지역 호족세력의 공동체적 가치와 지배이데올로기를 강화하는 데 더욱 효과적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김유신 장군은 이미 검증된 인물이기 때문에 산신으로 좌정하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렸을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산신같이 오랜 시간 습합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신라시대에 이미 대관령산신으로 좌정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김유신 장군은 대관령산신으로, 범일국사는 대관령성황신으로 좌정한 뒤 단오제의 주신은 대관령성황신으로 오랫동안 모셔져 온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그 근거로 지역 토착세력과 성황신에 대한 신앙의 긴밀한 관계를 들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묘조 및 인물조에 ‘양산의 김인훈(金認訓), 의성의 김홍술(金洪術), 밀양의 손긍훈(孫兢訓), 곡성의 신숭겸(申崇謙), 순천의 김총(金惣) 등이 이 군현들의 성황신으로 봉안되어 있다’고 전한다. 이들은 나말여초 그 지역에서 군사적 기반을 가졌던 대표적인 호족세력이었다. 왕건과 혼인관계를 맺었던 세력들이기도 하다. 이 인물들을 시조로 하는 성씨들은 각각 해당지역에서 대표적인 토성(土姓)들이다. 토성들은 고려 중기 이후 각 지역에서 지배세력으로 정착한 후, 자신들의 조상을 성황사의 신으로 설정하고 배향한 것으로 본다.

이같은 역사기록과 이 교수의 의견을 바탕으로 추론하면, 김유신 장군은 이르면 신라 말, 늦어도 고려 초까지 대관령 산신으로 좌정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유신이 산신으로 좌정하면서 고려 수도인 개성까지, 조선 수도인 한양까지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간선로인 대관령은 더욱 신성시 여겨져 중요시됐을 것이다. 대관령은 서민들이 이용하는 주요 간선로로 지리적으로 중요했을 뿐만 아니라 무속인들에게는 매우 신성한 곳이었다. 현재의 대관령 바로 위 산신당과 성황당 위치가 과거와 같은 곳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이곳에는 지금도 연중 무속행위가 끊일 날이 없다. 주변 관계자는 12월 25일 성탄절 하루만 쉰다고 한다. 

우리의 산악숭배나 산신신앙은 단군신화에서부터 시작한다. 산신은 산에 거처하는 신격으로 천신과 교통하는 곳에 있다가 차츰 인간들과 가까운 곳으로 내려왔다고 짐작한다. 산신신앙은 무속신이나 성황신과 같은 토착신앙이 불교나 도교 등 외래종교와 습합하면서도 그 중심신격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우리 문화의 정신세계에 전승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유신 장군과 대관령산신 이야기는 민족적 신앙세계의 전승이나 기능적 측면에서 볼 때 신화적 상상성과 역사적 사실이 결합된 한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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