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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한국의 산신(山神)ㅣ(16) 광주 무등산] 자연숭배 산신신앙에 구전으로 김덕령 산신說

글·사진 월간산 박정원 부장대우
  • 입력 2017.04.27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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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까지 국가에서 제사… 조선 들어서 우상 없애며 민간신앙으로 스며들어

철쭉이 만발해 있는 가운데 신록이 더욱 짙어가고 있다. / 사진 무등산국립공원 제공
철쭉이 만발해 있는 가운데 신록이 더욱 짙어가고 있다. / 사진 무등산국립공원 제공

무등산만큼 하나의 산에 다양한 이름을 가진 산도 드물다. 무등산, 무돌, 무당산, 무정산, 무진악, 무악, 무덤산, 서석산 등이 전부 무등산을 가리킨다. 어떻게 이런 다양한 지명을 가지게 됐을까? 이름은 모두 사연과 유래가 있기 마련이다. 전부 설명하려면 책 한 권쯤 써도 되지 않을까 싶다. 산신과 관련한 부분만 간단히 살펴보자. 산신은 역사서에도 나오지만 필히 설화나 전설과 같이 등장한다. 역시 조선 왕조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이성계가 조선을 개국하기 전에 전국의 명산을 다니며 두루 산신기도를 올린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지리산, 금산 등 각 지방마다 이와 관련한 다양한 내용의 설화가 등장한다. 광주지역에 전하는 설화는 다음과 같다.

‘이성계가 왕으로 등극하기 전 여러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었다. 제사를 올려 왕업이 수백 대에 이어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또 자기 손에 죽은 고려 말 명신(名臣)들의 원혼을 달랬다. 그런데 무등산 산신만은 그 소원을 거절했다. 왕으로 즉위한 뒤에도 나라에 가뭄이 계속되자 왕명으로 남쪽의 명산 무등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게 했으나 무등산신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왕명에 불복한 무등산 산신을 멀리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이 산을 무정한 산이라 하여 무정산(無情山)이라 불렀다 한다.’

무정산은 왕명에 불복한 산이라는 의미다. 무등산의 ‘불복’ 이미지는 후삼국부터 고려 중기까지 계속 이어진다. 고려 후기 삼별초 진압에 대한 공덕으로 작호를 받는 등 잠시 회복하는가 싶더니 조선 들어서 ‘무정산’ 이미지로 계속된다. ‘불복’은 새로운 집권세력에게는 불충이고 거역이지만 구 기득권 세력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충성이고 의리다. 아이러니하지만 역사의 이중성이다. 이러한 권력관계와 이미지로 인해 광주와 무등산은 인근 나주와 금성산에 의해 지역의 위상이 역전 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한반도 역사에 있어 권력관계의 변천은 산신과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다. 특히 고려시대 들어서 더욱 강해진다. 앞으로 자세히 언급할 것이다.

무정산에 이어 무당산이란 지명도 있다. 증심사 뒤쪽 ‘무당골’ 골짜기에서 무당의 움막이 1980년대까지 군데군데 있었다. 곳곳에서 내림굿이 펼쳐졌다. 무당들의 활동으로 인해 무등산을 무당산으로 불렀으며, 또한 무등산의 신령스러운 기운과 영험함을 믿는 민중들의 믿음에 따라 무당산이라 명명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 원시종교에서 싹 텄던 ‘당산’신앙과도 관련 있어 보인다. 당산신앙은 무등산을 ‘큰 당산’으로 삼게 했고, 그것을 무당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당산을 신성시했던 시절 무등산을 무당산으로 불렀던 이유는 고대인들의 토속신앙과 관련시켜 볼 때 쉽게 추론이 가능하다.

이현재 전 호남문화원장이 약사사 산신비석 위에서 무등산 천제단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이현재 전 호남문화원장이 약사사 산신비석 위에서 무등산 천제단을 가리키며 설명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小祀 무진악으로 나와

이같은 결과로 지역 향토사학자들은 선사시대부터 무등산이 무돌이나 무당산이었다고 주장한다. 무당산은 선사시대부터 제사 터였기 때문에 명명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다. 무돌은 무돌의 이두음이 바로 무진악이라 주장한다. 그 무진악이 <삼국사기>에 등장한다. 역사의 초기부터 지역의 거점역할이나 주요 산으로 숭배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자마자 전국의 명산대천을 3산5악 대사·중사·소사로 나눈다. <삼국사기>권32 잡지 제사조에 그 내용이 자세히 나와 있으며, 소사(小祀) 24곳 중의 하나인 무진악(武珍岳)이 지금의 무등산이다. 당시 소사로 지정된 장소와 산은 지방 호족세력의 거점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왕실 주도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선 지방호족의 협조가 절대 관건이었다. 이에 지역거점을 소사로 지정하면서 국가 제사체제에 편입시키며 지역을 감시하는 동시에 지방호족을 달래며 지역민의 안정과 단합을 꾀하는 국가 통합정책을 폈다. 

3산5악 대사·중사·소사 체제가 단순한 국가 제사체제가 아닌 산악신앙을 이용한 국가통치와 통합정책이었다. 산악신앙, 즉 산신신앙은 상고시대부터 전근대까지 존재했던 국가통치의 주요 수단이었던 셈이다.  

신라시대 3산5악 대사·중사·소사에 편입된 전라도의 산은 역사서에 3곳이 전한다. 지리산(중사 남악)과 월출산(소사), 그리고 무등산이다. 지리산이 전라도의 산으로 기록된 이유는 바로 산신을 지낸 제단이 노고단에 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 산의 행정구역에 대한 구분은 높낮이에 상관없이 산신제를 어디서 지내느냐 여하에 따라 결정됐다. 이현채 호남문화원 전 원장은 “지금 행정구역으로 지리산은 경상도 면적이 더 넓지만, 역사서 어디를 보더라도 전라도 지리산으로 나오는 이유가 구례 노고단에서 산신제를 지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지리산 산신제를 그때까지 노고단에서 지냈다는 사실을 또한 알 수 있게 해준다.

무등산과 함께 무주라는 지명도 역사서에 보인다. <삼국사기>권32 잡지 지리조에는 ‘무주(武州)’라는 지명이 광주 대신 등장한다. 당시 지명이 무주였던 것이다. 무등산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하는 역사서는 <고려사>. 권71 지 권제25 삼국속악 백제조에 ‘무등산(無等山)은 광주(光州)의 진산(鎭山)이다. 광주는 전라도(全羅道)의 큰 읍인데, 이 산에 성을 쌓으니 백성들이 의지하여 안전하게 지내게 되어 즐거워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나온다. 이미 고려시대 이전부터 무등산이란 지명을 사용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권57 지리2 전라도조에 ‘전라도는 본래 백제의 땅으로 의자왕 19년(659)에 신라 태종무열왕이 당 장수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마침내 그 땅을 병합했다. 경덕왕 때 나누어 전주와 무주(武州)의 두 도독부가 됐으며, (중략) 성종 14년(995)에 전주·영주·순주·마주 등의 주현을 강남도로, 나주·광주·정주·승주·패주·담주·낭주 등의 주현을 해양도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 권11 해양현조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무등산이 있다. 일명 무진악이라고도 하고 서석산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소사를 지내고 고려 때 국제를 올렸다’

이같은 기록으로 볼 때 광주와 무등산은 일찌감치 사용된 지명이었고, 더욱이 백제 때부터 사용해 온 무진악을 무등산, 서석산과 함께 고려 시절 이미 사용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서석산 산신비석 아래로 약사사가 들어서 있다.
서석산 산신비석 아래로 약사사가 들어서 있다.
 매년 11월 10일 즈음해서 무등산 산신제가 열린다.
매년 11월 10일 즈음해서 무등산 산신제가 열린다.
고려 내내 나주 금성산산신에 위상 밀려

<고려사>권63 지 권제17 예5 잡사조에는 ‘원종 14년(1273) 삼별초를 탐라에서 토벌했을 적에 무등산산신에게 음덕의 징험이 있다고 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다’고 나온다.

권27 세가 권제27 원종14년에는 ‘무등산산신이 역적 토벌을 은밀하게 도왔다고 해서, 예사(禮司)에 명해 봉작호를 더하고 봄과 가을에 제사지내게 했다’고도 기록하고 있다.

무등산산신에게 봉작까지 내렸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고려시대는 사실 무등산산신보다는 나주 금성산산신이 훨씬 숭배대상이었다. 국가적으로 수도인 개성 다음으로 규모가 큰 팔관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무등산산신에게 봉작을 내리고 국가적 제사까지 지내게 했는데, 도대체 어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는 산신이 역사적으로 권력층과, 그리고 중앙과 지방호족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고려는 출발부터 태조 왕건이 산신, 즉 산악신앙을 국가통치수단으로 적절히 이용했다. 왕건은 그의 가문에서 시조로 떠받드는 성골장군 호경(虎景)이 개성 구룡산(九龍山) 산신이라는 사실을 유포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고자 했다. 이 내용은 <고려사>에 나온다. 또 ‘산수영응(山水靈應)’에 의지해 인심의 안정을 도모하며, 산령지찬조(山靈之贊助)’에 힘입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사한다는 내용을 개태사 발원문에 태조 왕건이 직접 기록하기도 했다.

그가 즉위한 첫 해에 시행한 팔관회도 산악신앙과 무관치 않다. 훈요십조 제6항에 그는 ‘짐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회와 팔관회에 있다.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일이요. 팔관회는 천령(天靈) 및 오악과 명산과 대천과 용신(龍神)을 섬기는 일이다’고 남겼다. <고려사> 태조26년의 기록이다.

‘천신인 환인의 아들 환웅이 땅으로 내려와 단군을 낳고 나라를 다스린 후 태백산 산신이 됐다’는 단군신화를 왕건 자신도 이와 비슷한 신성화 과정을 밟는다. 이러한 사상적 배경과 신앙을 바탕으로 왕건은 나주 호족세력에 힘입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치는 데 성공한다. 반면 광주와 무등산은 견훤 세력의 본거지였다. 이같은 사실로 인해 고려시대 전남의 대표 고을이 광주가 아니고 나주였던 결정적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광주·무등산은 견훤 본거지로 왕건에 적대적

후백제와 고려가 치열하게 쟁탈전을 벌일 때 나주의 호족은 왕건 편에 선다. 나주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 이후 전남지역의 유일한 주목(主牧)의 위치에 오른다. 현종 9년(1018)에 나주목으로 자리매김한다. 고려 내내 전남지역 으뜸 행정치소로서 역할을 했다. 반면 광주는 나주에 영속된 일개 속군현 내지는 현령관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격하됐다. 나주와 달리 후삼국 끝까지 왕건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신라 진성여왕 6년(892)에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하는 출발지였던 광주는 그 수도가 전주로 옮겨진 후에도 여전히 후백제의 주요한 거점이었다. 견훤의 사위인 지훤과 아들인 용검이 그 성주에 올라, 후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전주와 더불어 반 고려세력의 근거지였다. 통일신라 즈음 무진주 또는 무주로 불리면서 전남지역의 중심지였던 광주는 고려 들어 읍격의 강등까지 감수해야 했다. 현종(1009~1031) 시절에는 속현으로까지 격하되고 만다.

이 시기 나주 금성산신은 백제부흥운동과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는 음조로 정녕공에 봉작된다. 개경의 송악에 버금가는 숭배 대상으로 부상했다. 송악을 제외하고는 산신당을 다섯이나 거느린 전국 유일의 산이었다. 고려 팔관회는 개경과 서경에서만 개최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나주에서도 개최할 정도였다. 팔관회는 산악신앙과 전통신앙을 아우르는 국가적인 종합축전이었다. 잠시 나주 호족과 왕건의 관계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증심사 산신각에 모셔져 있는 무등산 산신도.
증심사 산신각에 모셔져 있는 무등산 산신도.
 증심사 산신각이 산신비석이 있는 무등산 자락 바로 앞에 건립돼 있다.
증심사 산신각이 산신비석이 있는 무등산 자락 바로 앞에 건립돼 있다.
나주 호족은 송악의 해상세력 출신으로서 사회·경제적 배경이 유사한 왕건 쪽이 더욱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나주는 왕건의 중요한 세력 근거지가 된다. 왕건은 903년 나주에 처음 출정한 이후 918년 왕위에 오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기간을 나주에서 보낸다. 호족인 나주 오씨와 영암 최씨 같은 세력을 규합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왕건이 즉위한 이후에도 나주의 중요성은 변함없었다. 나주에 중앙정부와는 별로로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가 설치되고, 그 수반으로 총리인 시중을 파견한다. 더욱이 나주 호족 출신의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가 낳은 아들(혜종)이 왕건의 후계자로 내정된다. 이는 고려 초 나주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나주는 고려왕조 전 시기에 어향(御鄕)이라 불리며 중시됐다. 현종이 거란의 침입을 맞아 나주로 피란한 것도, 고종 24년(1237)에 이연년이 백제부흥을 기치로 난을 일으켰을 때 토벌하러 내려온 전라도지휘사 김경손이 나주가 어향임을 강조하며 반군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독려한 것도 나주와 고려왕실의 깊은 인연을 의식한 때문이었다. 진도 삼별초 진압에도 나주가 큰 공적을 세웠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배경과 이유로 금성산산신이 국행제사의 대상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조치다. 금성산산신은 나주 호족의 상징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반전이 일어난다. 고려 내내 지역위상 강등으로 수모를 당하던 무등산산신과 광주는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일본에 원정하던 고려군 지휘관 김주정이 출전에 앞서 승리를 기원하던 제사를 올리자 광주의 무등산산신이 응답을 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35 광산현 사묘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무등산신사는 고을의 동쪽 10리에 위치한다. 신라에서 소사로 삼았고, 고려에서는 국제(國祭)가 됐다. 동정원수(東征元帥) 김주정이 각 고을의 산신에게 제사를 드리면서 신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소리 내어 불러 그 신이함을 징험했는데, 광주고을의 산신이 깃발에 매달린 방울을 세 번이나 울렸다. 김주정이 조정에 보고해 작위를 내렸으며, 지금 조정에서는 해당 고을로 하여금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받들도록 했다.’

삼별초 진압 공로로 무등산산신 위상 잠시 회복

김주정의 공로로 무등산산신이 국가로부터 작위를 받고 봄·가을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내게 했다는 사실은 광주지역 호족세력의 강력한 열망이 반영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등산산신의 위상강화일 뿐만 아니라 지역호족세력의 존재과시의 이중효과를 동시에 노렸던 것 같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광주는 나주와 마찬가지로 목(牧)으로 승격되는 특혜가 내려졌다. 그게 원종 14년(1273) 때였다. 이후 잠시 부침이 있었지만 공민왕 22년(1373)에 광주목이 되어 고려왕조가 끝날 때까지 목사고을로 유지했다.

삼별초의 난이 평정되고 무등산산신에 대한 작호가 내려진 4년 뒤 다시 나주 호족세력들이 금성산산신에 대한 작위 수여를 요구하는 등 지역 간 패권을 잡기 위한 공방을 몇 차례 벌인다. 이는 무등산산신을 우대함과 더불어 광주를 목으로 승격시킴으로써, 그동안 나주가 누려왔던 전남지역을 대표하는 유일한 주목으로서의 지위가 흔들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시 무등산산신에 대한 기록으로 되돌아보자. 

<세종실록>지리지 권제151 전라도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소개된다.

‘무등산은 일명 무진악이라고도 하며 서석산이라고도 한다. 무진에 있는데, 넉넉하고 후덕하며 높고 크다. 신라 때는 소사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를 지냈다. 본조(조선)에서는 그 고을의 수령에게 제를 올리도록 했다.’

위의 책 무진군조에는 ‘진산 무등 재군동(鎭山 無等 在郡東: 진산은 무등인데 군의 동쪽에 있다)’라고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광산현 산천 조의 기록이다.

‘무등산은 (광산)현의 동쪽 10리에 있는데 진산이며, 일명 무진악 또는 서석산이라고도 한다. 하늘같이 높고 큰 것이 웅장하게 50여 리에 걸쳐 있다. 제주도의 한라산, 경상도의 남해·거제 등의 섬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백 자나 된다. 산 이름 서석은 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날이 가물다가 비가 오려고 할 때나 오랫동안 비가 오다가 개려고 할 때에는 산이 우는데 수십 리까지 들린다. 세속에 <무등산곡>이 있는데, 백제 때 이 산에 성을 쌓으니 백성이 그 덕으로 편안히 살면서 즐거워 노래 부른 것이라 한다.’
위의 책 사묘조에 무등산 신사의 기록이 나온다. 

‘무등산 신사는 (광산)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신라 때는 소사를 지냈으며, 고려 때는 국제를 올렸다.’

<대동지지>는 ‘제터에서 ‘무등산단’이라 쓰고, 신라 때에는 무진악이라 불렀고, 명산으로서 소사를 지냈다. 고려 원종14년 봄과 가을에 무등산에서 제사 지내도록 명하였으며, 본조(조선)에서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도록 본읍(광주)에 명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무등산 천제단을 돌을 쌓아 조성했다.
무등산 천제단을 돌을 쌓아 조성했다.
산신 성격과 특징, 시대별로 뚜렷한 차이

무등산 산신이 모셔진 신사는 역사적으로 뚜렷이 구분이 된다. 통일신라시대는 소사로서 국가적인 제사를 지내는 지역거점역할을 했고, 고려시대에는 인근 금성산 신사와 함께 국행제를 지내는 대상이었고,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신으로서 제사 대상이었다. 이는 고려시대까지 지역토착 호족세력과 중앙권력의 갈등관계를 산신을 통한 통합·통치정책으로 나타났고, 조선시대 들어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로 편입되는 과정을 보인다. 조선시대 지방호족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약화된다. 나아가 조선시대 산신은 민간으로 스며들어 서민신앙의 핵심을 이루는 계기가 된다. 또한 산신에 대한 위패도 고려시대까지는 ‘○○○산왕대왕’이라든가, ‘○○○산신대왕’과 같은 하늘에서 권력을 내려 받은 신성성과 지역성·대표성을 동시에 띠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지방호족세력의 힘을 반영하는 결과로 보인다. 반면 조선시대 들어서는 국가에서 통제를 하며 후작이나 백작과 같은 호국신 지위를 일일이 내려준다. 산신도 일종의 국가의 통치대상이었다. 산신의 지위가 사실상 매우 격하된 것이다. 자연히 산신신앙은 서민신앙으로 스며들기 시작하며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매김한다. 중앙과 별도의 신격화가 이뤄지는 것이다.

따라서 산신에 대한 실체도 조금씩 다른 양상을 보인다. 고려시대까지는 단군이나 박혁거세, 석탈해, 김유신, 왕건과 같은 건국신화와 관련된 인물이 산신으로 좌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반면, 조선시대 들어서는 영웅적 행동을 하거나 영웅이 억울한 죽임을 당해 민간이 한풀이를 대신해 줄 인물들이 산신으로 좌정하는 경우가 주류를 이룬다. 단종이나 금성대군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무등산산신에 대한 실체도 고려까지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다 조선시대 들어서 한두 명 거론된다. 고려시대까지 지방호족세력의 위세로 볼 때 광주 무등산에는 김주정 같은 인물이, 나주 금성산은 정가신 같은 인물이 산신으로 좌정할 만한데 그렇지 않았다. 김주정은 고려 삼별초의 난을 진압할 때 무등산산신의 큰 음덕으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며 무등산산신에게 작호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요구한 인물이다. 정가신은 고려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나주 금성산산신도 삼별초 진압에 큰 공을 세웠다며 작호를 요구했다.

전남대 변동명 사학과 교수는 “지리산에는 많은 인물들이 인신(人神)으로 좌정한 데 반해, 통일신라 시절부터 소사로 지정된 무등산과 월출산에는 인신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며 “특히 김주정은 무등산보다는 담양 쪽에서 먼저 신격화 작업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그는 또 “무등산에는 왜 인신이 좌정하지 않았는지, 인신이 좌정한 산과 그렇지 않은 산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연구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민간에서는 김덕령 장군이 무등산산신으로 구전되고 있다.

김덕령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장군이자 곽재우와 절친한 친구로 유명하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용맹에 대한 소문이 여러 구비설화로 전승된다. 이몽학의 난에 연루돼 영웅적 활동을 하고도 억울한 죽음을 당한 내용으로 더욱 전설적인 내용으로 확산됐다. 그의 탄생과 죽음까지 모두 산신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전승되는 김덕령 관련 설화는 다음과 같다. 

‘김덕령은 무등산 인근의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중국의 명인이 “큰 인물이 날 명당”이라고 한 장소에 그의 부친이 조상의 묘를 쓴 뒤 김덕령이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민첩하고 용맹이 뛰어났다. 친구를 물고 간 호랑이를 쫓아가서 친구를 빼앗아 올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김덕령은 의병을 일으키지만 친상을 당한 몸이라 왜군을 죽이지 않았지만 출전하는 전투마다 혁혁한 공을 올렸다. 그는 왜군을 죽이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역적으로 몰려 조정에 잡혀간다. 조정에서 김덕령을 죽이려 칼로 내려치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으나 죽일 수 없었다. 김덕령은 ‘만공충신 김덕령’이란 현판을 내려주면, 오금에 있는 비늘을 때리면 죽는다고 알려 준다. 조정에서는 김덕령을 죽인 뒤 만고충신 현판을 없애려 했으나 글자가 더욱 뚜렷해지며 도저히 없앨 수 없었다.’

‘서석산 산신지위’라고 새겨진 비석.
‘서석산 산신지위’라고 새겨진 비석.

그의 미천한 출신이나 영웅적 행위, 억울한 죽음으로 볼 때 조선시대 산신으로 좌정하기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다. 실제로 광주 및 전남지역에서는 김덕령 장군은 곽재우 장군에 버금가는 임진왜란 최고의 영웅으로 그 명성이 전승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산신의 성격과 인물이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김덕령 장군, 아니 무등산산신으로 거론되는 인물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무등산에 가면 산신에 관한 몇 가지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증심사·약사사에 산신각 대신 ‘서석산신지위’라는 비석이 각각 세워져 있다. 이현채 원장이나 변동명 교수는 “이 비석이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서석산이란 지명이 사용된 시기를 역추적하면 대략 가늠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서석산이란 지명은 <고려사>에 처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무진악, 무주, 무등산이 등장한 이래 그 뒤에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조선시대 들어서 유산기에는 전부 ‘유서석록’이란 제목으로 등장한다. 오히려 무등산이란 지명이 전혀 사용되지 않은 듯 여겨질 정도다. 이에 대해 변동명 교수는 “조선시대 양반사대부들이 주로 유산록을 남겼다. 이들은 무등산이란 지명이 불교용어라고 사용하기 싫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읍지나 지리지에 보면 당시에도 무등산과 서석산이 같이 등장한다. 그런데도 서석록으로 나오는 것은 종교적 이유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무등산 유래에 대해서도 설이 분분해 아직 정설이 없다.

어쨌든 무등산산신은 통일신라~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실체 없이 자연신 숭배가 주류를 이룬 반면 조선시대 들어서는 민간신앙 중심으로 김덕령과 같은 영웅적 인물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민간의 한풀이 대상으로 산신화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난다. 시대에 따라, 권력에 따라 산신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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