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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6> | 허목 <月嶽記월악기>·김창협 <登月出山九井峰記등월출산구정봉기>] 아홉 용 전설 간직한 구정봉 있는 ‘호남의 금강산’

월간산
  • 입력 2017.11.13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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靈巖 지명도 여기서 나와… 갖가지 형상·사연 가득한 만물상도 압권

일출의 월출산과 운무, 월출산의 만물상이 잘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일출의 월출산과 운무, 월출산의 만물상이 잘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국립공원관리공단 제공

‘월출산은 영암군의 남쪽 5리에 있다. 신라 때는 월나산月奈山이라 불렀고, 고려 때는 월생산月生山이라 불렀다. 속설에 본국의 외화개산外華蓋山이라 칭하기도 하고, 또 작은 금강산이라고도 하며, 또 조계산曹溪山이라고도 한다. (중략) 구정봉九井峰은 월출산의 최고봉이다. 꼭대기에는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높이가 두 길이나 되고, 곁에 한 구멍이 있어 겨우 사람 하나가 드나들 만하다. 그 구멍을 따라 꼭대기에 올라가면 2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그 편평한 곳에 오목하여 물이 담겨 있는 동이 같은 곳이 아홉이 있어 구정봉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아무리 가물어도 그 물은 마르지 않는다. 속설에 아홉 용이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동석動石은 월출산 구정봉 아래에 있다. 특히 층암 위에 서있는 세 돌은 높이가 한 길 남짓하고 둘레가 열 아름이나 되는데, 서쪽으로는 산마루에 붙어 있고, 동쪽으로는 절벽에 임해 있다. 그 무게는 비록 천백 인을 동원해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나, 한 사람이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으면서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암靈巖이라 칭하고, 군의 이름도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중략) 김종직의 시에 등불 켜고 자리 걷지 않은 채 밥 먹고 서성대는 것 괴로운데, 월출산 꼭대기에 햇빛이 비치도다. 뭉게뭉게 들구름은 동혈洞穴에서 걷히고, 삐죽삐죽 가을 산은 하늘에 솟았구나. 뜬 인생이 반 넘어 살도록 이름 들은 지 오래면서, 절정에 올라보지 못하였으니 세상일 바쁜 것이라. 가야산과 방불한 것 참으로 기쁘니, 무단히 마상에서 고향을 생각하게 하노라.’ - <신증동국여지승람>권35 전라도편

가뭄에도 전혀 마르지 않는다는 구정봉의 제일 큰 연못에 물이 고여 있다.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정상 천황봉이다.
가뭄에도 전혀 마르지 않는다는 구정봉의 제일 큰 연못에 물이 고여 있다. 뒤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정상 천황봉이다.
월출산은 정상 천황봉보다 구정봉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많은 시인묵객들이 구정봉을 보기 위해 월출산에 올랐다. 특히 17세기는 노론과 소론 등 사색당파가 극에 달했던 시기로서, 관리들은 당파에 휘말리든지, 아니면 조용히 자연에 묻혀 선비로 사는 삶을 선택하든지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

조선 최고의 명문가 김창협(1651~ 1708)도 영암에 유배 중인 ‘노론의 영수’였던 그의 아버지 영의정 김수항을 위로하기 위해 왔다가 월출산 구정봉을 올라 기록을 남겼다. 그의 나이 25세 때인 1675년(숙종1) 7월이다. 그 기록이 <농암집> 권23에 나오는 ‘登月出山九井峰記등월출산구정봉기’이다.

김창협은 유배 간 아버지를 보러 온 심경을 대변이라도 하듯 월출산 동선도 불명확하고 총 215자에 불과한 유산기를 남겼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오르는 과정에만 초점을 두어 월출산 유산의 험준함과 기괴함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월출산 향로봉과 구정봉을 배경으로 미왕재에서 잠시 쉬고 있다.
2.억새밭으로 유명한 월출산 미왕재에 지금 한창 억새가 휘날리고 있다.
1.월출산 향로봉과 구정봉을 배경으로 미왕재에서 잠시 쉬고 있다. 2.억새밭으로 유명한 월출산 미왕재에 지금 한창 억새가 휘날리고 있다.
허목은 78세의 고령에 구정봉 올라

도교에 심취했던 허목(1595~1682)도 그의 나이 78세 되던 1672년(현종 13)에 월출산에 올라 유산기를 남겼다. <기언집> 권28에 있는 ‘月嶽記월악기’에 나온다. ‘월악기’라는 이름만 보면 월악산 유산록으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엄연한 월출산 유산기다.

허목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산의 동선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구정봉 정상은 809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표고가 정상 높이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면서 가파른 바위 구간이 있어 등산하기 결코 쉽지 않다. 월출산 입구에 있는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의 고도가 불과 50m. 따라서 정상까지 거의 800m를 올라야 한다. 허목의 유산 코스는 도갑→용암사→구정봉(동석)→구절폭포→청정대→죽사를 거쳐 여정을 마친다.

여기서 잠시 그가 왜 월출산 오른 기록을 ‘월악기’라고 했는지 지명에 대한 유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월출산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하는 유서 깊은 산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전국의 명산대천을 대사·중사·소사로 나눌 때 소사 중의 하나에 해당한다. 당시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명은 월나악月奈岳. <고려사>에서는 월생산月生山으로 등장한다. 조선시대 들어서 다시 바뀐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택리지>에는 지금의 월출산으로 개명되면서 정착한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외화개산, 소금강산, 조계산, 금산, 금저산, 천불산, 지제산, 월산, 보월산, 낭산 등으로 불렸다. 지명이 총 13개나 된다. 이름이 많으면 사연이 많다. 월출산의 사연은 암벽 봉우리와 연관된다. 특히 구정봉과 그 주변은 많은 관련 설화를 전한다. 김종직이 월출산을 노래한 시에 나오는 가야산은 만물상을 염두에 두고 비교한 듯하다.

월출산의 여러 지명의 공통점은 당시 행정구역을 반영한 것과 구름에 가린 암벽이 우뚝 솟은 형상을 나타냈다는 점이다. 최초의 지명인 월나악은 당시 행정지명이 월나군이었다. 월나군에 국행제를 지내는 산, 월나산인 것이다. 고려 때는 월생군으로 바뀌었다가 고려 성종 때는 낭주郎州라고 일시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월생산과 낭산이란 지명이 등장한다.

외화개산은 평야에서 우뚝 솟은 암벽 봉우리가 구름에 가린 모습이 마치 꽃봉오리를 덮은 형상 같다고 해서 중국에서 불렸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 도갑사 사적에 ‘구름이 항상 월출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화개라 불렀다’고 전한다. 정상 봉우리만 구름 위로 솟아 있는 모습을 꽃에 비유한 것이다. 소금강산은 호남의 금강산을 빗댄 말이고, 천불산은 암벽 바위의 기기묘묘한 형상을 가리킨다.

전부 암벽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그렇게 보면 월출산은 달과 관련 있는 것이 아니라 영암이란 지명이 유래한 바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설이 설득력을 얻는다. 일반적으로 월출산은 달과 관련된 산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장에 가서 아무리 살펴봐도 달과 관련된 전설이나 설화, 나아가 구전되는 스토리조차 찾거나 들을 수 없었다.

월은 원래 달보다는 돌을 가리키는 듯

월月을 암벽 바위와 연결시켰을 경우 개념과 내용이 명확해진다. 월출산을 달이 나온 산이라고 한다면, 왜 여기서 달이 나왔을까 의문이 생기지만 암벽이 나온 산이라고 한다면 금방 이해된다. 월출산의 암벽 바위는 국내 여느 산 못지않다. 뿐만 아니라 알타이 고어나 고구려어에서 달은 ‘높다’나 ‘산’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돌石과 그 어원을 같이한다고 한다. 우리 말 ‘달’을 사용하다 한자로 표기하면서 ‘月’로 바뀐 게 아닌가 추정된다. 따라서 월출산은 달출산, 달산 혹은 돌출산, 돌산 등으로 불리다가 월출산으로 정착됐을 가능성이 있다. 허목의 ‘月嶽記’도 이와 마찬가지로 ‘돌로 이뤄진 큰 산’이란 개념으로 해석하면 이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바위의 산’ 월출산은 한국 최초의 풍수사상가 도선국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道詵秘記도선비기>란 풍수 책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그는 월출산 자락 도갑사를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허목은 그 도갑사에서 월출산 유산을 시작한다. 아마 십중팔구 도선을 떠올렸으리라 여겨진다.

‘(1672년) 9월에 탑산에 갔다가 돌아와서 곧 월악산 도갑사에 들어갔다. 도갑사는 신라시대 승려 도선이 수도하던 곳이다. 도선은 도를 닦아 이치를 깨닫게 되어 천년 뒤의 일을 예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산중의 기이한 자취는 모두 도선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허목 유산기의 첫 부분이다. 월출산과 도선국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셈이다. 허목은 도갑사에서 용암사로 올라갔다. 그가 유산기에 언급하지 않았지만 중간에 상견성암을 거친 듯하다. 조선 선비들의 유산은 항상 사찰을 기점으로 이뤄지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허목도 예외는 아니다. 허목이 지나친 여정은 상견성암 못미처서부터 출입통제구역이다. 그나마 상견성암까지는 수행하는 승려들만 출입한다. 하지만 용암사는 지금 절터만 남아 있을 뿐 사찰의 흔적은 없다. 길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나무들만 무성하다. 지금 정규 탐방로로 우회하는 수밖에 없다.

도선이 창건한 절로 알려진 도갑사는 역사의 곡절을 겪었겠지만 아직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도선과 도갑, 뭔가 어울리는 느낌이다.

월출산에는 당시 사찰이 99개나 이르렀다고 전한다. 지리산에는 약 400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지리산 면적(472㎢)은 월출산 면적(41.88㎢)보다 10배를 훌쩍 넘는다. 객관적으로 비교해도 월출산에 사찰이 압도적으로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은 산술적으로 1km마다 절이 하나씩 있었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월출산은 산에 온통 절밖에 없었던 것 같다. 불교문화가 매우 융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허목이 갔던 용암사지는 구정봉에서 다시 내려와야 한다. 지금 정규탐방로는 도갑사에서 미왕재를 거쳐 구정봉으로 간다. 미왕재尾旺嶺는 과거 유산기에 나오지 않은 지명이다. 글자 자체로 보자면, 작은 뿌리를 가진 나무가 군락을 이룬 고갯길 정도 되겠다. ‘과거 숲이었으나 산불이 나면서 나무가 불에 타고 억새가 들어와 군락을 이루었다’는 안내문이 보인다. 과거에 어떤 나무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히려 미왕재라는 이름에 걸맞게 억새가 자리 잡은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월출산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애불이다. 부처가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월출산 용암사지 마애여래좌상은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애불이다. 부처가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하다.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마애불

가을바람에 억새들이 휘날린다. 억새는 ‘바람의 미학’이다. 바람이 살포시 내려와 품에 안기는 듯하지만 다시 바람을 일으켜 산들거린다.

향로봉과 구정봉이 그 위로 올려다 보인다.

‘월출산의 절정은 구정봉이다. 사방 모서리는 모두 험준한 벼랑이 가파르고 아슬아슬하다. 다만 서쪽 벼랑에는 지름이 겨우 한 자 남짓한 굴혈이 위로 뚫려 절정에 이른다. 정상에 오르는 사람들은 모두 반드시 굴혈 속으로부터 길을 취한다. 그 굴혈에 들어가면 반드시 엉금엉금 기고 뱀처럼 나아가서야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관모나 망건을 벗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 마치 쥐가 또아리처럼 몸을 웅크리고 굴혈로 들어가는 것처럼 한다. 그러다가 굴혈에 들어가면 비로소 사람처럼 간다. 하지만 여전히 굴혈 속으로 가는 것이며, 굴혈은 둥글고 좁으므로, 그 속을 가는 사람은 두 벼랑 사이에서 몸을 움츠려, 그 귀를 마치 담벼락에 붙인 것처럼 하고 가기를 서너 걸음을 해야 굴혈이 끝난다. 굴혈이 다하면 비로소 위로 나오니, 마치 우물 속에서 나오는 듯하다.

거기를 나오면 곧바로 절벽에 이르게 되며 벼랑 아래는 디딜 땅이 없다. 사람이 갈 수 있게 통하는 틈새는 가까스로 한 발을 놓을 수 있게 할 뿐이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반드시 발을 앞뒤로 번갈아 디뎌야 마침내 벼랑을 건널 수 있다. 바야흐로 앞발을 벼랑 위에 두었을 때는 뒷발을 여전히 구멍에 끼워두고 있으므로 위태롭지가 않다. 그러다가 뒷발을 앞발과 교대하여 벼랑 위에 두게 되면 이것은 전적으로 몸을 벼랑에 맡기는 것이라 위태로움이 심하다. 하지만 이것을 건너기만 하면 곧 절정이어서, 마치 신발 밑을 보듯 큰 바다를 굽어보게 되므로 역시 상쾌하다.’ - 김창협 <登月出山九井峰記> 전문, <산문기행>에서 인용.

김창협은 구정봉 올라가는 과정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는 것으로 유산기를 대신했다.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부분은 전혀 없다. 감상도 마지막 한 부분 ‘상쾌하다’뿐이다. 대신 <농암집>에 ‘구정봉’을 노래한 시가 나온다.

‘아홉 용 머물게 하기 위해/ 드넓은 산봉우리 만들었건만/ 변화해 사라진 지 몇 해이런고/ 꿈틀대던 옛 자취 흔적 없구나/ 어쩌면 한 우물 속 물이/ 저 아래 큰 바다와 통해 있을지.’

김창협은 구정봉의 아슬아슬하고 신비한 모습에 대단히 감동한 듯하다. 아예 다른 풍광은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허목도 구정봉에 대한 감동은 김창협과 별로 다르지 않다.

‘구정봉에 올라가니 거기에 구룡정이 있다. 이곳은 구름과 안개로 싸여 있다. 산봉우리 위에 종과 같이 생긴 큰 바위가 하나 있다. 한 사람이 흔들어도 움직일 것 같은데, 열 사람이 흔들어도 더 이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바위 이름을 영암이라 부르는 까닭도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 산에는 이와 같이 생긴 바위가 3개 있다. 도갑사 아래에 있고, 용암龍巖 아래에 하나 더 있다. (중략)

구정봉 남쪽에는 쌍석봉이 있다. 그중 높은 것이 청청대이다. 그 남쪽의 봉우리는 불정봉인데, 그 밑에 백운사가 있다. 구정봉의 북쪽 절벽에는 원효대가 있고, 거기에 맑은 샘물이 흘러나온다고 도선의 <산수기>에 쓰여 있다. 용암의 아래에는 수레 모양의 바위가 3개 있다. 소년대 동쪽에 있는 것을 운거雲車라 하고, 그 운거의 북쪽에 있는 것을 마거馬車라 하며,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것을 녹거鹿車라 했다. 이들은 모두 산중에서 기이하게 생긴 것들로서, 그중에 녹거가 가장 크기 때문에 그 골짜기를 녹거동이라 했다.’

장군바위로 불리는
세계 최고 큰바위얼굴 찾아

월출산 구정봉의 동석은 고려시대에도 유명한 듯하다. 입만 열면 노랫말이었고, 썼다 하면 시였다고 전하는 고려 후기 문신 김극기도 구정봉에 대해 기록을 남겼다.

‘월출산 서쪽 고갯마루에 이상한 한 덩어리 바위가 있네. 지나는 길손 모두 길을 굽히고, 대개 올라서 구름 자취를 찾는다. 내가 만약 그대로 지난다면 땅의 신령이 응당 책망하리라. 산 아래에 와서 말을 멈추니, 나뭇가지에 나는 신이 멈추도다. 과연 천 길이나 되는 바위를 만나니, 높고 우뚝한 것 빈 하늘을 의지했구나. 여와씨가 일찍이 하늘을 기울 때 아직도 금액을 굳히지 못하여, 날아서 백운 풀에 떨어지니 하늘에서 거리가 겨우 지척일세. 참으로 그는 낙駱·원原의 사신이라, 명승지를 사랑하여 멀리 가는 것도 잊었도다. (후략)’

<세종지리지> 전라도편에도 구정봉과 동석(흔들바위), 그리고 영암에 대한 비슷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그만큼 월출산은 구정봉으로 상징되고 있다.

허목은 도갑사로 하산했지만 올라갔던 지명과는 다른 장소, 즉 구절폭포·청정대·죽사 등을 지나쳤다. 동행하며 길을 안내했던 월출산국립공원사무소 직원 이광수씨는 이 장소들을 전혀 몰랐다. 그것들이 없어졌든지 현재 다른 지명으로 변했든지 할 텐데, 그것조차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영암에서 1980년대 초부터 사진작업과 함께 월출산 알리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영암예술원 박철 대표도 “유산기에 나오는 지명은 없어지거나 지금과 달라진 곳이 너무 많아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다”며 “월출산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알려지지 않은 명소를 찾아내 역사적으로 고증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월출산은 한민족의 얼을 상징하는 큰바위얼굴이 있는 산으로서, 미래의 한반도를 이끌 민족의 영산으로 손색이 없다”고 자랑했다. 월출산의 만물상에서 찾은 큰바위얼굴상(일명 장군바위)은 영락없는 세계 최고의 바위 형상이었다.

허목의 구체적 하산코스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산기에 ‘남쪽에서 구정봉을 바라봤다. 석벽과 기이한 바위들이 많았다. 도갑사의 서북쪽 돌산 봉우리 사이에 상하·견성암이 있고, 그 아래에 봉선암奉僊庵이 있다. 나는 청대로부터 눈을 맞으며 내려와서 죽사에 쉬었는데, 여기가 봉선암이다. 눈 오는 밤에 도갑사로 내려오니 학자 두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끝을 맺고 있다.

방향으로 보자면, 지금 미왕재 탐방코스가 구정봉의 남쪽이 된다. 다시 도갑사로 돌아오려면 미왕재로 내려오는 코스 외에는 대안이 없어 보인다. 용암사는 구정봉의 서쪽이다.

허목은 구정봉 올라가는 길에 용암사를 들렀지만 지금은 구정봉에 올랐다가 용암사로 가는 길밖에 없다. 구정봉에 올랐다. 김창협의 표현대로 바위 사이로 간신히 몸을 빠져나와 정상에 올라섰다. 사방에서 바람이 확 불어온다. 아홉 용이 승천했다는 연못도 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물이 담겨 있는 연못이 아홉 개가 훨씬 더 된다. 물이 담긴 연못만 13개 정도다. 그 외 물은 없어도 연못같이 생긴 혈은 훨씬 더 많다. 이는 무슨 의미일까? 설마 불과 340여 년 전의 구정봉이 지금의 모습으로 변하지는 않았을 터이고. 또한 당시 사람들이 혈을 일일이 세지 않고 막연히 구정봉이라 하지도 않았을 터인데…. 여하튼 ‘9’란 숫자에 대해서는 많은 해석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마침내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국보 제144호 마애여래좌상을 보유한 용암사에 도착했다. 허목은 구정봉 올라가기 전에 들렀지만 지금은 구정봉에서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은 절은 없고 절터만 남은 용암사지다. 세로 높이 7m나 되는 마애불은 월출산의 또 다른 장관이다. 불상 양식은 신라 말이나 고려 초로 추정된다. 그런데 허목이나 김창협은 이 마애불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 아무리 성리학자라고 하지만 이렇게 미적으로 뛰어나고 크고 웅장한 마애불을 보고 전혀 감상이 없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조선시대 유산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불교문화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선비들의 옹졸함일까, 배타적이어서 그럴까, 문화의 차이일까. 유산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월출산은 조선시대까지 지리산·천관산·능가산·내장산과 함께 호남 5대 명산으로 꼽혔다. 평지에 우뚝 솟은 바위산은 그 바위만큼이나 사연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이름이 붙은 봉우리만 해도 270여 개에 달한다. 그래서 천불상이고 만물상이다. 거기에 최근에 발견한 세로 100m나 되는 큰바위얼굴까지 있다. 월출산에서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1.월출산 천황봉 정상에 있는 월출산소사지 비석. 2.월출산 구정봉 아래 큰바위얼굴 형상이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 산신 같기도 하고 정말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다./영암예술원 제공.
1.월출산 천황봉 정상에 있는 월출산소사지 비석. 2.월출산 구정봉 아래 큰바위얼굴 형상이 마치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 산신 같기도 하고 정말 사람의 얼굴 같기도 하다./영암예술원 제공.

월출산 산신

기세 넘치지만 인산 좌정 않는 듯 …
큰바위얼굴 형상이 산신일 수도

월출산은 <삼국사기> 제사조에 나오는 소사의 명산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국가 주도로 산신제를 지냈다. 소사의 명산 중에 중앙에서 가장 접근성이 떨어지는 곳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소사로 지정했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이유가 충분히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산의 반열에 오른 사실과는 다른 차원이다.

먼저, 소사로 지정된 사실은 역사적으로 지방 호족의 세력이 상당히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신라와 고려는 중앙정부가 있었지만 지방호족과 결탁한 통치형태를 왕조 내내 유지했다. 때로는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중앙에서 통제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호족들의 반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해지기도 하고, 진압에 상당한 곤란을 겪을 때도 많았다. 따라서 신라와 고려 왕조는 지방호족과 결탁해서 위탁통치하는 형식을 취했다.

둘째, 산세가 예사롭지 않은 경우다. 월출산은 680년쯤 소사로 지정됐지만 이전 부족국가인 마한 시절부터 산신제를 올렸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의 행사가 어느 날 뜬금없이 치러지는 경우보다 그 행사가 소단위로 꾸준히 이어져왔다거나, 비슷한 행사로 분위기가 이미 성숙해져, 이른바 티핑포인트tipping point에 의해 개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월출산은 부족국가 시절부터 이미 산신제를 지냈으며, 통일신라는 하늘의 힘을 이어받는 산신제를 통해 지방호족을 다스림과 동시에 그 산신의 힘을 빌려 지방을 통치했다고 볼 수 있다. 대개 산신제를 지낸 산은 형세가 예사롭지 않다. <택리지>에는 월출산에 대해 ‘화승조천의 지세’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침 하늘에 불을 뿜는 듯한 땅의 형세를 말한다. 특히 악산이기 때문에 그 기운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셋째,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일 경우다. 영암은 영산강과 인접한 동시에 인근 바다와 접한 강진의 배후지역으로 소홀히 할 수 없는 지역이다. 옛날에는 육로보다 수로가 훨씬 중요했다. 이에 따르면 월출산이란 걸출한 명산과 강과 바다의 배후지역으로 된 영암은 전략적으로 중요시 할 수밖에 없는 곳인 셈이다.

이에 따라 소사로 지정된 월출산은 특히 소사 중에 전국에서 유일하게 제사 터가 확인된 곳이다. 구정봉이 인간들의 정상이었다면, 월출산의 실질적 정상인 천황봉은 하늘의 봉우리로서 산신제를 지냈던 곳이다. 정상 비석 바로 옆에 월출산소사지月出山小祀址를 표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지난 1994년 조사단이 소사지를 발굴조사한 결과, 통일신라 고급 청자잔탁과 접시, 고려시대 녹청자접시와 청자잔탁편, 조선시대의 백자접시 및 기와편 등이 출토됐다. 그외 향로뚜껑, 토제 말, 철제 말 등도 나왔다. 이는 제사지가 일반 서민들의 제사 터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시사한다. 산신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뿐만 아니라 <고려사>,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전한다.

그러면 월출산 산신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진다. 보통 초기의 지방호족이 산신으로 좌정하는 경우가 많다. 초기 호족인 최지몽의 산신설에 대해서 지역인들에게 물었으나 다들 금시초문이라는 답만 돌아왔다. 지역 향토사학자나 월출산에 관심 있는 지역인들은 월출산 산신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도 들은 바도 없다고 했다.

2015년 월출산 전시회를 개최하고 책을 발간한 국립나주박물관 박중환 관장은 “산신에 대한 실체는 전혀 알 수 없다”며 “산신의 기록은 여기저기 등장하지만 그 실체나 인신의 여부에 대해선 아직 거론된 바가 없는 걸로 안다”고 말했다. 영암문화원 관계자도 비슷한 답이 돌아왔다. 관련 심포지엄이나 학술대회도 개최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직 산신의 본향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산신은 크게 자연신과 인(격)신으로 나누며, 본향의 산신은 아직 인신이 덧씌워지지 않은 자연신의 형태에 가깝다.

그런데 최근 월출산의 만물상 가운데 바람재 인근에서 큰바위얼굴 형상이 발견됐다.

지역인들은 세로 100m나 되는 세계 최고라고 자랑한다. 실제 찬찬히 보고 있으면 미국의 큰바위얼굴보다 훨씬 선명한 모습을 띠고 있다. 더욱이 미국의 큰바위얼굴은 최근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큰바위얼굴을 보기 위해선 바람재까지 올라가야 한다.

바람재 위의 큰바위얼굴이 월출산 산신인지, 미래에 한국을 이끌 큰 인물의 형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월출산의 기운과 산신의 영험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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