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소폭포에 감탄… 십승지 명성 그대로 완벽한 음양 조화 이룬 산
‘심광세 <유변산록>의 특징은 변산을 유람하면서 어수대御水臺·화룡연火龍淵·직연直淵·진선대眞仙臺·월정대月精臺·주암舟巖·용암龍巖 등의 기묘한 절경을 그려 화축畵軸·두루마리 그림을 만들고, 그림마다 각각 서敍를 달아 변산의 명소를 상세히 설명했다는 점이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
유산록은 심광세 이전에도 많았지만 변산 유산록은 몇 작품 전하지 않는다. 심광세 <유변산록>이 변산 유산록으로는 최초의 기록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심광세가 그렸다는 변산 두루마리 화첩은 지금 전하지 않는다. 그의 <유변산록>도 전문이 아니다. 뒷부분은 일부 빠진 듯하다. 그는 동선에 따라 유산록을 쓴 것이 아니라 명소별로 기록을 남겨 정확한 동선을 파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당시 지명과 현재 지명이 너무 달라 그의 동선을 따라 가기가 쉽지 않다.
심광세 이전의 변산 기록으로는 고려 후기 명문장가로 유명한 이규보가 남겼다. <동국이상국전집>제9권에 실린 ‘십이월 어느 날 작목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부령군 변산에 갔다가 그때 마상에서 2수 짓다’에 ‘변산은 예로부터 천부天府로 불리며 좋은 재목이 많아 동량으로 쓴다’는 내용이 나온다. 천부는 산천과 물산이 좋은 곳을 말한다. 이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그대로 인용돼 있다. 같은 책에서 ‘(변산은) 산이 겹겹이 쌓여 높고 깎아지른 듯하며 바위와 골이 그윽하다고 묘사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변산이 등장한다. 권제7 신라본기편에는 ‘(신라) 급찬, 원천과 나마가 변산邊山에 붙잡아 머물게 했던 당나라 병선 낭장 겸 이대후 등에 군사 170명을 보냈다’고 나온다. <삼국유사>권제1 변한백제편에 ‘백제땅에 원래 변산卞山이 있어 변한卞韓이라고 한 것이다百濟地自有卞山故云卞韓’라는 기록도 있다. 이같은 기록을 볼 때 변산은 삼국시대부터 ‘卞山’과 ‘邊山’으로 혼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변산을 영주산이라 하고, 다른 기록에는 봉래산蓬萊山이라고도 하여, 고창의 방장산, 고부의 두승산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으로 꼽았다. 그래서 이 계곡 빼어난 경관을 봉래구곡이라 했다. 1곡이 대소大沼, 2곡 직소폭포直沼瀑布, 3곡 분옥담墳玉潭, 4곡 선녀탕仙女湯, 5곡 봉래곡蓬萊曲, 6곡 금광소金光沼, 7곡 영지影池, 8곡 백천百川, 9곡 암지暗池이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십승지의 하나로 언급했다.
정상 509m로 별로 높지 않은 산이지만 변산은 물산이 풍부하고, 계곡이 깊고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100여 리 둘러싸인 모습을 기록을 통해 상상할 수 있다. 골짜기마다 기암절벽이 있다는 표현도 자주 등장한다. 사찰과 암자도 많았다. 골짜기 중간중간에 넓은 평야가 있어 숨어 살기 딱 좋은 곳이다. 당연히 십승지 중의 한 곳으로 꼽혔다. 구전되는 얘기지만 내변산에만 팔만 아홉 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노적마을에서 사장동 실상사까지 약 5km 거리를 버선발로 신발을 신지 않고 암자를 건너 갈 정도로 많았다는 것이다. 과장된 얘기겠지만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다.
우슬치가 변산 들어가는 관문
심광세沈光世(1577~1624)는 부안현감으로 부임(1607년)한 지 넉 달 만인 5월에 바쁜 일정 중 시간을 내어 변산을 유람했다. 유산록은 보통 동선에 따라 기록한 이전 형식과는 달리 명소별로 기록했으며, 2박3일 일정으로 유람을 마쳤다. 취재진이 답사한 동선과 달리 유산록에 나오는 명소를 따라 간다.
유산록 첫 명소는 어수대御水臺. 신라 왕이 이곳에 놀러왔다가 3년이나 머물며 돌아가지 않은 곳이라고 전한다.
‘산의 왼쪽은 우슬치牛膝峙라는 고개가 있다. 변산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다 이길을 따라 간다. 오른쪽으로 가면 영은암이라는 암자가 있다. 사면이 모두 깎아지른 벼랑인데 암자가 그 사이에 끼여 있다. 암자의 오른쪽 산기슭을 따라 구릉을 올라가서 다시 5, 6리쯤 나아가면 비로소 석자사釋慈寺에 이르게 된다. 돌길에다 험한 암벽이 높고도 위태로운데, 절은 그 꼭대기에 있다. 그 위는 넓고 평평해서 수 백 명이 앉아도 좋을 만한데, 이곳이 어수대이다.’ - <유봉래산일기>(부안문화원刊 참고)
여기서 현재까지 지명이 전하는 장소는 우슬치와 어수대뿐이다. 그것도 정확한지는 알 수 없지만. 우슬치는 동일 지명일 수 있다. 변산으로 들어가는 관문이기 때문. 도로가 놓였지만 고갯길인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어수대는 유산록에는 산 위쪽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지금은 산 아래쪽 조그만 연못을 가리킨다. 또 수 백 명이 앉아도 좋을 장소라고 하지만 현재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아니라 연못 주변에 조그만 바위만 몇 개 있을 뿐이다. 기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의 어수대는 변산 종주 등산객들의 시종점이기도 한 곳이다.
갑자기 눈이 펑펑 내린다.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여서 올라갈 수도 없는 처지다. 안내한 변산국립공원사무소 김현미씨도 난색이다. 시설과 직원은 “장비를 제대로 갖춰도 올라가기 힘든 코스”라고 강조한다. 전날 종일 남녀치에서 월명암~신선봉~직소폭포~실상사 등지를 답사한 뒤 아침부터 우슬치로 와서 쏟아지는 눈 속에서 어수대로 올라가는 건 사실상 무리다.
심광세는 어수대에 이어 화룡연火龍淵을 소개하고 있다. 공단에서는 내변산을 청림지구로 나누고 있지만 사실 광의의 내변산은 청림지구를 포함한 개념이다. 심광세는 실상사로 가기 전 내변산 청림지구를 샅샅이 유산한 듯하다.
‘어수대를 본 뒤 가마를 타고 십 여리를 가서야 청계사에 이르렀다. 왼쪽에는 학봉이 있는데…. (중략) 절 뒤에는 청연암淸淵庵이 있다. 여러 층으로 쌓인 굴은 모두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몹시 험준하다. 절 앞에는 시내가 있고 시내의 상류에는 청연이라는 못이 있다. (중략) 산을 돌아서니 길이 끊어져 버려 사람이 다니기 어려웠다. 하지만 억지로 십 리쯤 가서야 비로소 화룡연에 도달했다. 좌우에 있는 두 산은 매우 험준했고, 암석들이 절벽처럼 서 있다.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 늘 향불을 피우고 제물을 바치면서 비가 오기를 기도하는데, 산령이 응답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후략)’
지금과 다른 지명 너무 많아 동선 파악 안 돼
어수대와 화룡연 사이의 거리는 무려 20여 리 된다. 지금 거리로 대략 8km. 동행한 변산국립공원사무소 김민씨조차 이 지역 토박이임에도 불구하고 청연암이나 화룡연이 정확히 어딘지 모른다. 현재 청연암은 내소사 뒤쪽 봉우리 바로 아래 있다. 그런데 우슬치에서 4km 떨어진 곳에 청계사가 있고, 그 뒤에 청연암이 있다고 유산록에는 기록하고 있다. 그 청연암과 지금 청연암은 다른 듯하다. 동명이암同名異庵이다. 화룡연도 어디인지 알 수 없다. 뒤이어 청림동을 언급하는 걸 보니 아마 정상 의상봉 일대 어디인 것 같다. 지금 지명으로 학봉에서 쇠뿔바위, 의상봉, 벼락폭포 등지를 유산한 것 아닌가 추정한다.
다음 명소는 직연直淵, 직소폭포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화룡연을 보고 난 뒤 다시 왔던 길을 따라서 청림동 입구를 나와 십 여리를 걸어서야 실상사에 이르렀다. 이 절은 세조의 원당이다. 절의 규모가 아주 크고 불상이 매우 성대했다. 절 오른쪽으로 가마를 타고 몇 리쯤 가서 직연에 다다랐다. 길이와 너비가 청연보다는 못했지만 그 깊이는 청연보다 더 했다. 그 위에는 폭포가 있는데, 길이가 수백 척이나 됐다. 곧 바로 못 가운데로 떨어지며 흩날리는 것이 흰 명주와 같고, 소리는 맑은 날에 우레가 치는 것과도 같았다. 그윽하고 아득하며 기이하고도 영험하여 무어라고 표현할 길이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지명은 실상사와 직소폭포다. 지금 청림지구에서 한참 걸어와야 한다. 그러니 심광세의 동선은 청림지구에 있다가 봉래구곡으로 들어선 듯하다. 심광세는 직소폭포의 장관에 한창 넋을 잃고 있다가 각자 경관을 마음껏 즐긴다.
그는 직소폭포에 대해 매우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직연을 따라 물의 근원을 찾아 올라간다. 사실 이 코스가 변산의 하이라이트다. 직소폭포의 장관뿐만 아니라 변산이 십승지로 꼽힌 이유가 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직소의 물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어딘지 끝을 알 수 없는 계곡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다. 높지 않은 산에 이렇게 깊은 골짜기가 있을까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깊은 골짜기에 아직 몇 가구 살고 있고, 그 옛날에도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정말 넓은 평야 같다. 이 깊은 골짜기에 이렇게 넓은 평야가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길을 안내한 공단 김민씨는 “옛날 수백 가구는 족히 살았다고 동네 어른들에게 들었다”며 “1970년대 전후해서 화전민 철거할 때 이들 중 일부는 지리산 청학동으로 그대로 옮겨갔다”고 말했다. “청학동 주민 중에 흰 수염 길고 가끔 TV에 나오는 사람은 변산에 있던 사람이다. 그 사람에게 변산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면 자세히 얘기해 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선대 아래 수백 가구 살던 십승지인 듯
진선대眞仙臺란 명소가 뒤를 잇는다.
‘골짜기가 깊숙하고 샘과 돌들이 아름다워 모두 눈을 기쁘게 하여 흥을 일으킬 만 했다. 다만 땅이 외지고 멀리 떨어져 사람들의 발자취가 드물 뿐이다. 대략 수십리 길을 걸어서 비로소 봉우리 아래에 이르렀다. (중략) 나를 밀어 산으로 올라가게 했다. 간신히 위로 올라가 산등성을 따라 몇 리를 가서야 진선대라는 곳에 도착했다. (중략) 진선대에 올라서 사방을 봤다. 푸르스름한 여러 섬들이 몇몇 점들같이 떠 있다. 고운 눈썹을 칠한 듯 남쪽으로 한 줄기 비스듬히 뻗어나간 것은 백암산·내장산·선운산과 같은 여러 산이다. 두 다리를 뻗고 앉아서 술잔을 들고 서로 부딪히며 희희낙락하고 아무 것도 거칠 것이 없는 양 했다. 세상 밖으로 유람을 떠날 것만 같았다. 따르던 종이 가기를 재촉했지만 돌아갈 줄을 몰랐다. 아! 이 세상에 참으로 신선이 있기나 한 것인가? 아니면 이 진선대에서 노닐었던 자가 참 신선이었던가?’
진선대는 지금의 신선대 아닌가 여겨진다. 직소폭포에서 4시간 정도 계곡 따라 줄곧 올라가면 나오는 봉우리다. 일반인은 비법정탐방로라 들어갈 수 없다. 취재진은 공단의 협조를 받아 직원 김민씨와 동행했다. 길은 결코 험하지 않지만 골짜기 안에 그렇게 넓은 평지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우리로 올라가는 사면도 결코 가파르지 않고, 곳곳에 물이 넘쳐흘러 사람 살기에 안성맞춤이다.
사면 밖에서 볼 때는 이렇게 포근하고 아늑한 곳이 있을 줄 꿈에도 모를 정도다. 역시 십승지가 그냥 된 건 아니었다. 정말 예사롭지 않다. 천혜의 명당에 영지靈地다. 아마추어가 봐도 그렇다. 실제 이곳에는 많은 절이 있었다고 전한다. 동행 직원 김씨의 증언이다. 아마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지 않았다면 어느 종교단체가 왕국을 건설해도 좋은 요새 같은 명당이다.
변산 대부분 악산嶽山으로 험한 곳이 많지만 직소폭포에서 물의 근원을 찾아 신선대로 가는 길은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완벽한 음양의 조화를 이룬 곳으로, 동물들도 신선대 아래 아늑한 사면에 와서 새끼를 낳는다고 한다. 산의 형세를 가만히 보니, 악산의 기운이 신선대 아래 골짜기로 모아져 아늑한 느낌을 주는 듯하다. 동시에 직소폭포는 여성의 음부 형세로 영락없이 임신한 여성이 누운 듯한 모양이다. 변산의 전체 기운이 직소폭포로 흐르는 듯했다. 그 아래 실상사가 있고, 원불교 성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신선의 기운과 흥취를 느끼지 않으면 오히려 비정상적이리라 싶었다. 심광세는 신선의 흥취를 맘껏 즐기다 월정대月精臺로 향했다.
월명암의 아늑한 분위기에 빠져들어
‘진선대에서 놀다가 밤이 되어 내려갔다. 횃불을 잡고서 큰 골짜기를 지나고 첩첩 산을 넘어 묘적암에 와서 잤다. 이곳에는 세 암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가운데 두 개가 없어지고 승려도 살지 않는다. 암자는 이 산에 있어 명당자리라고 부른다. 이 산의 진면목을 몽땅 드러내는 곳은 이른바 월정대인데, 암자 뒤 높은 봉우리다.’
지금 월명암이 묘적암 터로 추정한다. 남녀치에서 쌍선봉을 지나 월명암에 도착한 답사진은 월명암의 조망과 그 아늑한 분위기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절이 터를 잡은 자리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뒤 능선으로 올라서면 낙조대가 있다. 비법정탐방로지만 공단 직원의 안내로 답사가 가능했다. 월명과 낙조, 어울리는 분위기다. 낙조대에 올라서는 순간 서해가 저 앞에 펼쳐진다. 낙조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로 여겨진다. 변산의 비경 중의 하나가 월명낙조라고도 한다. 월명암에서 낙조나 달을 보려면 여기서 1박을 해야만 가능하다. 실제 월명암에서 숙박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심광세는 월정대를 내려와 묘적암을 따라서 곧장 지름길로 실상동으로 내려왔다. 여기서 동쪽으로 채 몇 리도 가지 않아 주암舟巖이라는 곳이 나왔다고 밝히고 있다.
‘(주암) 동설 두 언덕이 있는데, 석벽이 높이 에워싸고 있다. 온 산의 물이 다 이곳을 거쳐 지나간다. 그 물이 괴어서 못이 된 것이 열 이랑 정도 됐다. 못 가운데 큰 바위가 있는데, 그 모양이 마치 누워 있는 배와도 같았다. 주암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의 봉래구곡을 거닌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말부터 구곡문화가 조금 형성되기 시작하지만 주세붕부터 본격적으로 전국에 명명된다. 봉래구곡은 시기적으로 그 뒤에 명명된 듯하다. 조선 선비들은 구곡을 붙이는 재미도 상당했던 듯한데 심광세는 구곡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공단 직원들도 주암이 어딘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이어 용암龍巖을 기록하고 있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다 몇 리를 채 가지 않아 또 용암이 나왔다. 예전에는 이러한 이름도 없었고, 구경하러 오는 이도 없었다. 이전에 내가 이 산에 왔다가 우연히 이 길을 따라 마천대를 향해 가던 중에 이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를 따라 왔던 사람들이 이를 두고 변산의 또 하나의 볼거리라고 여겼다. 대체로 바위의 모양이 엎드려 있는 용과 닮아서 용암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용암도, 이어서 가는 마천대도 현재 지명에 남아 있지 않다. 아마 지금 부안호에 잠겼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봉래구곡의 마지막 9곡 암지가 실상사 반대편 부안호 끝자락에 지명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광세는 용암을 따라 10여 리 험한 길로 가서 마천대로 오른다. 마천대는 이 산에서 최고봉이라 불린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 변산의 최고봉은 의상봉이다.
‘마천대는 진선대와 견줄 만하다. 대체적으로 진선대는 서남쪽으로만 위치해 있고, 마천대는 동북쪽으로만 위치해 있다. 그 때문에 시야가 제각기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된다. 그러나 바라보이는 것은 대략 서로 같다.’
심광세는 변산의 풍광에 흠뻑 빠진 듯하다. 대충 바삐 구석구석 훑어보면서도 “끝내 산신령에게 속물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받을 수밖에 없었으리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취재 답사도 변산의 속내를 속속들이 파악할 수 없지만 그 깊고 그윽한 골짜기에 전혀 예상치 못한 넓은 평지는 완벽히 음양의 조화를 이룬 변산의 모습이 분명했다. 다시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분명한 천혜의 명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