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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 9|이옥 '중흥유기(重興遊記)'] 산이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다!

월간산
  • 입력 2018.02.21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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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사·진국사에 2박3일 숙박하며 산성 돌아… 이색적으로 불상·승려 자세히 소개

북한산 백운대와 노적봉이 배경으로 보이는 가운데 <중흥유기></div>를 쓴 이옥이 걸은 산성코스를 따라 답사하고 있다.
북한산 백운대와 노적봉이 배경으로 보이는 가운데 <중흥유기>를 쓴 이옥이 걸은 산성코스를 따라 답사하고 있다.

영국 산악인 조지 말로리George Mallory는 거듭된 에베레스트 등정 실패에도 계속 도전에 나서자 기자들이 “왜 산에 가느냐?”고 묻는다. 여기서 그는 지극히 당연한, 그리고 귀찮은 듯 “산이 거기 있으니Because it is there”라고 대꾸한다. 이 네 단어가 지금은 산에 가는 누구나 사용하는 세계적인 명언이 됐다. 이 말은 사실 동양적 가치로 따지면 아무 의미 없는 표현이다.

조선 선비들이 남긴 유산기에는 산을 나타낸 수많은 아름다운 표현들로 넘쳐난다. 그중 이옥李鈺(1760~1812)의 <중흥유기重興遊記>에 나타난 산에 대한 표현은 솔직하면서도 심미적인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그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佳故來 無是佳 無是來”

‘산이 거기 있으니’와 ‘아름답기 때문에 왔다. 아름답지 않다면 오지 않았을 것이다’를 비교하면 어느 표현이 더 아름다운가. 조선 선비들은 이렇게 낭만이 넘쳤다.

그의 글에는 온통 아름답다는 표현이 넘친다.

‘물은 흘러 움직이고 산은 고요하니 북한산은 아름다운 지경이며, 개제순미豈弟洵美한 몇몇 친구는 모두 아름다운 선비다. 이런 아름다운 선비들로서 이런 아름다운 경계에 노니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자동紫峒을 지나니 경치가 아름답고, 세검정에 오르니 아름답고, 승가사의 문루에 오르니 아름답고, 문수사의 문에 오르니 아름답고, 대성문에 임하니 아름답다. 중흥사重興寺 동구檎口에 들어가니 아름답고, 용암봉에 오르니 아름답고, 백운대 아래 기슭에 임하니 아름답고, 상운사 동구가 아름답고, 폭포가 빼어나게 아름답고, 대서문 또한 아름답고, 서수구西水口가 아름답고, 칠유암이 매우 아름답고, 백운동문과 청하동문이 아름답고, 산영루山暎樓가 대단히 아름답고, 손가장孫家莊이 아름다웠다. 정릉동구가 아름답고, 동성 바깥 모래펄에서 여러 마리 내달리는 말을 보니 아름답고, 3일 만에 다시 도성에 들어와 취렴翠帘, 방사坊肆, 홍진紅塵, 거마車馬를 보게 되니 더욱 아름다웠다. 아침도 아름답고 저녁도 아름답고, 날씨가 맑은 것도 아름답고 날씨가 흐린 것도 아름다웠다. 산도 아름답고 물도 아름답고, 단풍도 아름답고, 돌도 아름다웠다. 멀리서 조망해도 아름답고 가까이 가서 보아도 아름답고 불상도 아름답고 승려도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안주가 없어서 탁주가 또한 아름답고, 아름다운 사람이 없어도 초가樵歌가 또한 아름다웠다. 요컨대 그윽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밝아서 아름다운 곳도 있었다. 탁 트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높아서 아름다운 곳이 있고, 담담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번다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고요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고, 적막하여 아름다운 곳이 있었다. 어디를 가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고, 누구와 함께 하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아름다운 것이 이와 같이 많을 수 있단 말인가?’ - <문화원형백과 유산기>(한국콘텐츠진흥원) 인용

공단 안전구조대 최길성씨가 눈 쌓인 길을 오르고 있다.
공단 안전구조대 최길성씨가 눈 쌓인 길을 오르고 있다.

‘산이 거기 있으니’에 대한 동양 심미적 표현

글에 온통 아름다울 ‘佳’자뿐이다. 산이 그렇게 아름다운 건 둘째 치고 산을 보고 이렇게 아름다운 감상을 느낀 이옥이란 사람이 과연 누구인지가 더 궁금해진다. 자연과 인간이 둘이 아닌 성리학적 자연관을 가진 조선의 선비답다.

이옥은 1793년 8월쯤 몇몇 벗들과 함께 북한산을 유람했다.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후손인 그는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희생양으로 더 이상 관직에 머물지 않고 낙향해서 지냈다. 문체반정은 새로운 한문문체를 개혁하여 사용하는 학자를 선별해서 반성문을 쓰게 하고 전통 고문古文으로 환원시키려는 문예운동이다. 당시 박지원 등 실학파의 참신한 문체와 이옥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경향의 문체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이는 천주교의 확산과 함께 서학을 금지하려는 의도와 맞물리면서 전통 고문을 쓰지 않은 학자들은 과거까지 못 보게 할 뿐만 아니라 숙청대상이 되기도 했다. 일종의 조선의 문예부흥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행위였다. 문체반정은 꾸준히 서민 속에서 성장하는 서민문학의 대두, 즉 전통적 문예운동과 진보적 문예운동의 대립이라고 볼 수 있다. 진보적 문예운동의 선두였던 그는 문체반정자로 공식 낙인이 찍혀 더 이상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말았다.

1790년 첫 과거에 합격한 뒤 3년 후인 1793년에 북한산을 유람했으니 현실에 좌절을 겪은 허무주의적 의식을 조금씩 드러내던 시기에 <중흥유기>를 남긴 셈이다.

그런데 그가 남긴 유산기에 몇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그가 유산기 제목을 왜 <중흥유기>로 했는가라는 점이다. 북한산 유산기는 대부분 ‘삼각산’ 혹은 ‘북한산’을 제목으로 내세운다. 하지만 <중흥유기>란 전혀 다른 개념을 제목으로 삼았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북한산 대서문을 지나고 있다. 300년 전 완공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북한산 대서문을 지나고 있다. 300년 전 완공 당시의 모습 그대로다.

둘째, 조선 선비들의 유산기에는 불교나 사찰, 불상에 대한 설명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중흥유기에는 이전의 유산기와는 달리 사찰이나 불상, 승려에 대해 자세히, 그리고 조금은 부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전혀 의외다. 이것도 유학자로서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것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셋째, 북한산을 유산한 게 아니라 절을 중심으로 산성을 반 바퀴 돌며 북한산 경관을 살핀 듯하다. 산성에 대한 기록을 그의 유산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지금 등산객들이 즐겨 하는 ‘북한산성 12성문 돌기’의 원조가 이옥이 아닌가 판단된다. 북한산성의 완공은 숙종 37년인 1711년. 이옥은 유산기를 1793년에 썼으니 80년쯤 지나서 기록을 남겼다. 아마 북한산성 완공 후 남긴 첫 공식 유산기쯤 되지 않을까 싶다. 북한산성 완공 전의 산성에 대한 공식 기록은 실제로 전무한 실정이다. 그의 <중흥유기>가 지금 북한산성 관련 기록에 도움이 될 것 같은 이유다. 1925년 북한산의 기록적인 폭우로 행궁과 산영루 등이 휩쓸려 내려가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중흥유기는 당시 있었던 중흥사를 중심으로 행궁에 대한 기록을 엿볼 수 있다.

<중흥유기>는 중흥사에 캠프 차려 제목으로 한 듯

북한산 유산에 대한 기록은 조선 건국 후 1400년대부터 가끔 등장한다. 그러다 1603년 이정구가 <유삼각산기>를 남기면서 제대로 된 북한산 유산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가 유산한 코스도 이옥이 간 루트와 별로 다르지 않다. 산영루에 앉아 북한산 경관을 즐기면서 남긴 기록이다.

‘콸콸 흐르며 기암괴석과 동굴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큰 소나무가 하늘을 가렸는데, 푸른빛은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일행과 함께 발을 계곡 물에 담근 채 웃옷을 벗고 돌 위에 앉았다. 술과 안주를 풍성하게 준비했다. 어떤 이들은 술잔을 물에 띄워서 마시기 내기를 하고, 어떤 이는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았다. 자제가 단풍나무 가지를 꺾어서 머리에 꽂았다. 나도 국화잎을 따서 술잔 위에 띄웠다. 취하니 기분이 좋았다. 박수를 치고 발을 구르기도 했다. (중략) 뛰어난 경치뿐만 아니고 신선들 모임에 어울리니 우리도 흥겨운 감정이 솟구쳐 음조가 저절로 높아졌다. 신의 도움이 있는 것 같다.’ - <문화원형백과 유산기>(한국콘텐츠진흥원) 인용

북한산성 성곽을 보며 산성길을 따라 걷고 있다.
북한산성 성곽을 보며 산성길을 따라 걷고 있다.

이옥은 도성을 나오면서부터 유산기를 시작한다. 그는 창의문으로 나와 혜화문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그의 동선은 창의문에서 탕춘대능선을 타고 문수암문을 거쳐 북한산성 안으로 접근한 듯하며, 대남문으로 나와 형제봉능선을 거쳐 다시 도성으로 돌아간 듯하다. 그의 유산기 시작부분에서 전체 코스의 윤곽을 알 수 있다.

‘직접 다니며 본 것은 대남문, 대서문, 그리고 동북암문으로 성 가운데 관문을 만들어 한어문悍禦門이라 한 것이고, 멀리 바라보기만 한 것은 외성의 한북문과 대동문, 동장대이다. 성가퀴雉堞는 도성에 비해 비록 낮고 얕지만 초루는 모두 새로 단장하여 산뜻하다. 성곽과 회랑回廊은 규모 있게 되어 있어, 창졸간에 일이 생겨도 외적을 막을 수 있게 했다.’

이어 그는 ‘산중에서 이틀 동안 머무르면서 산영루에 오른 것이 세 번이었다. 낮에 오르고 저녁에 또 오르고 다음날 아침에 지나면서 또 올랐다. 낮부터 저녁까지 날씨가 맑더니 이튿날 아침에는 구름이 끼었다. 산색의 어둡고 밝음과 수기의 흐림과 맑음을 이번 걸음에서 모두 파악하게 되었다. 다시 보니 저녁 산은 마치 아양을 떠는 것 같아 고운 단풍잎이 일제히 취한 모양이요, 아침 산은 마치 조는 것 같아 아련히 푸르름이 젖어드는 모양이다. 저녁의 물은 매우 빠르게 흘러 모래와 돌이 제자리에 있지 못하며, 아침의 물은 기가 있어 바위와 구렁이 비에 적셔진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아침저녁 산수의 변화는 누의 기문으로 남길 만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산영루에서 북한산 경관을 마음껏 향유한 것 같다.

여기서 그가 <중흥유기>라고 쓴 이유를 알 수 있다. 산영루는 북한산성에서 행궁터로 올라가는 계곡 중간쯤에 있는 누각이다. 지금 완전 복원돼 있다. 산山이 비치는暎 누각樓이니 당시 북한산 경관 중에 제일로 쳤던 것 같다. 북한산을 찾은 조선 시인묵객들은 전부 산영루를 거친 기록을 남겼다. 그 산영루 조금 위에 중흥사가 있다. 중흥사는 위치상 북한산성 중앙에서 행궁으로 향하는 모든 길의 중심에 있는 절이다. 일종의 관문인 셈이다. 그는 중흥사 바로 위 태고사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 걸로 봐서 요즘 말로 캠프를 중흥사나 태고사에 친 것 같다. 결국 <중흥유기>는 중흥사에서 북한산성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본 북한산 유산기라고 보면 틀림없겠다.

이옥의 <중흥유기></div>에 나오는 국녕사에서 북한산 최대 크기의 불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옥의 <중흥유기>에 나오는 국녕사에서 북한산 최대 크기의 불상을 바라보고 있다.

동선은 중흥·태고사 등 절 중심으로 차례로 나열

그는 이어서 행궁으로 향한다.

‘행궁은 석림헌昔臨軒이라고 한다. 선원첩璿源牒을 보관하는 곳이 있고, 산성을 관장하는 장영이 있고, 훈국창이 있고, 금영창이 있고, 어영창이 있는 데 모두 한 곳이 아니다. 화약고와 총섭영은 중흥사 옆에 있는데 군량과 갑옷, 병기를 보관하여 산성을 지키는 방책을 마련해 놓은 것이다.’

이옥은 본 대로 절 이름을 그대로 적는다. 중흥사, 태고사, 용암사, 상운사, 서암사, 부왕사, 진국사, 보국사 등을 차례대로 봤고, 원각사, 국녕사, 보광사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의 동선은 중흥사와 태고사, 산영루에서 한참을 즐기다가 태고사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이튿날 노적봉 능선을 넘어 상운사 등지로 갔다가 다시 돌아와 진국사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행궁과 부왕사를 거쳐 의상봉 능선으로 올라간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서 대남문을 거쳐 형제봉 능선 언저리로 해서 보국사를 지나 혜화문으로 해서 도성으로 귀가한 것으로 보인다.

취재진은 그의 일정대로 2박3일을 소요할 수 없어 중흥사에서 행궁터로 갔다가 의상봉 능선을 타고 문수봉-나한봉-나월봉-부왕동암문-증취봉-용혈봉-용출봉을 거쳐 국녕사로 해서 대서문으로 돌아 하루 만에 끝냈다. 국립공원관리공단 홍보실 서영각씨와 국립공원북한산사무소 안전관리반 최길성씨가 동행하며 안내를 했다.

유산기에 좀처럼 보기 힘든 불교와 불상에 대한 그의 기록은 이색적이고 재미있다. 어쩌면 조선 선비들이 불교를 바라보는 시각을 대변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절이란 부처의 사당祠堂이니 곧 불상이 있다. 흙을 반죽하여 만든 것, 쇳물을 녹여부어 만든 것, 깎아 만든 것, 쪼아 만든 것이 있는데, 흙을 반죽하여 만든 것은 바르고, 쇳물을 녹여 부어 만든 것은 틀에 넣은 것이고, 깎아 만든 것은 그림을 그리고, 쪼아 만든 것은 메운다. 가운데 놓은 것은 여래세존이라고 하며, 왼편이 관음보살, 오른편이 대세지불이라 한다. 서쪽을 향하여 동쪽에 앉은 것을 지장보살이라 한다. (중략) 불실에 들어가니 오방이 모두 그림이다. 부처를 그린 것은 아름다웠고, 나한을 그린 것은 어지러웠고, 시왕十王을 그린 것은 교만스럽게 되어 있고, 귀신을 그린 것은 불똥이 튀듯 하고, 옥녀를 그린 것은 부박했고, 용을 그린 것은 산란하고, 난봉鸞鳳을 그린 것은 빼어났고, 지옥을 그린 것은 처참한 느낌을 주면서도 묘했고, 윤회를 그린 것은 분잡한 듯했지만 또렷했다. 들은 바로 인해 상상하고, 상상한 것으로 인해 형상화시키고, 형상화시킴으로 인해 실체를 잃게 되어 이와 같이 멍하고 어렴풋하게 된다. 군자는 몸을 더럽힐까 하여 감상하지 않고, 소인은 그것을 공경하여 이마를 조아린다.’

북한산성 성곽과 주요 시설물 안내도.
북한산성 성곽과 주요 시설물 안내도.

그는 승려에 대해서도 별로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하다.

‘여러 절에는 불교경전이 전혀 없었는데 오직 승가사와 부왕사에만은 약간 남아 있었다. 비록 있기는 하지만 책장이 떨어져 나가고 꿰맨 실이 흩어져 읽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은 <은중경>, <법화경> 등의 대여섯 묶음뿐이다. 경전을 통한 승려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중략) 승려는 내가 알기에 조개도 아니고 뱀이나 이무기도 아닌데 죽어 불에 태우면 왕왕 오색의 구슬을 얻게 되고 그것을 사리라고 일컫는다. 사리는 과연 영험한 것인가? 이 세상에서 물物을 변화시키는 것 중에는 불만 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불이 작용하는 바에 송진이 홍말갈紅靺鞨이 될 수 있고, 변나미汴糯米가 오색의 구슬로 될 수 있는데, 이는 모두 불의 작용이다. 승려를 태워 사리를 찾아내는 일이 어찌 영험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승려들은 이 이야기를 신비스럽게 하고 있다. (중략) 청암사 앞에도 창송당대사의 사리를 모신 곳이 있었다. 청암사는 도성에 가까워 그 절의 승려들은 살이 찌고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이로써 그들이 술과 고기를 즐겨 먹음을 알 수 있고, 모두가 스스로를 좋게 꾸미고 있으니 이로써 그들에게 아리따운 여자가 있음을 알 만하고, 손이 예쁘장하고 옷차림이 꽃다우니 이로써 그들이 일에 힘을 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약사전은 도성의 여염집과 부엌이 맞닿아 있어 푸른 치마를 입은 이가 향적주에서 밥을 짓고 있었다. 거기에 있는 승려는 일반 백성으로 단지 머리만 깎은 자들이었다.’

승려에 술 심부름 시키고 부정적 인식 드러내

이옥이 승려에 대한 인식은 매우 부정적이다. 경전 안 읽는 승려일 뿐만 아니라 일반인과 별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승려를 묘사하고 있다. 당시 사회 전반적 인식인지 이옥만의 인식인지는 알 수 없지만 승려가 이 정도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옥은 또 산에서 술 한 잔 하는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행궁 앞 주막에서 한 잔 반을 마시고, 태고사에서 반잔을 마시고, 상운사에서 한 잔을 마시고, 훈국창 주막에서 한 잔을 마셨다. 아침에 안개가 너무 껴서 승려를 보내 술을 받아오게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중략) 산에 갈 때는 술이 진실로 없을 수 없으나 또한 진실로 많아서도 안 된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많지는 않지만 술을 마셨다. 누각에서 마시고, 약사전에서도 마셨다. 없으면 승려를 시켜서 마셨다. 술과 함께 풍류를 마음껏 즐기는 분위기다. 승려한테 심부름을 시키는 것도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행위다. 당시 승려들에 비하면 지금 승려들의 신분은 매우 높아진 듯한 느낌이다.

그는 북한산성 안의 관청과 사찰, 불상, 샘과 돌, 초목, 성곽과 누정, 숙식과 술, 승려 등에 대해서 글을 쓰고 마지막에 여행의 총론을 덧붙이면서 아름다울 ‘佳’자만 무려 수십 번을 사용하면서 유산기를 맺었다. 문체반정으로 그가 남긴 문집은 없어, 그의 유산기는 그의 친구 김려의 <담정총서潭庭叢書>에 실려 전한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유교의 합리주의로서 불교의 신비체험적 원리를 철저히 부정, 비판했으며, 오행의 상생설에 대해서도 이론의 부당함을 설파했다. 그러나 문체파동을 겪고 난 뒤부터는 현실에서 소외되는 허무주의적 의식의 흔적을 보인다. 또 신비체험의 현상에 대해서도 강하게 부정하다가 관심을 보이는 기록을 남긴다. 결국 사상은 자신이 주어진 현실의 반영인 것이다. 유산기도 그에 다름 아니다.

/ 박정원 부장대우 jungwon@chosun.com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역임. <옛길의 유혹, 역사를 탐하다> <내가 걷는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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