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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10>|장현광 <주왕산록(周王山錄)>] 바위의 기이한 형상은 인간군상만큼 기이

월간산
  • 입력 2018.03.15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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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사 언급 없이 계곡·용연폭포까지 산행… 신선 사는 청학동으로도 인식한 듯

장현광이 기이한 바위만큼 인간군상도 다양하다고 말할 만큼 주왕산은 기묘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암벽 봉우리 사이로 지나는 용추폭포는 가히 주왕산의 꽃이라 불릴 만하다.
장현광이 기이한 바위만큼 인간군상도 다양하다고 말할 만큼 주왕산은 기묘한 바위들이 즐비하다. 암벽 봉우리 사이로 지나는 용추폭포는 가히 주왕산의 꽃이라 불릴 만하다.

‘(주왕산이) 주왕周王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삼한 때 왕의 호칭을 지닌 사람이 이곳에 피난해 산 위에 궁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궁궐 곁에는 폭포가 있고 폭포 속에는 암혈이 있어서 사람이 숨어 지낼 수 있는데, 그 폭포가 은폐하므로 바깥사람이 거기에 굴이 있는지 모르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그 굴에 숨어서 피했다고 한다. (중략) 구경하는 사람들은 일컫기를, 이 산은 계곡이 좁고 시내가 험하며 암벽이 우뚝이 솟아 있고, 산마루는 평평하고 넓지만 사방의 길이 막히고 멀어, 난세를 당하여 군사를 숨겨 적을 방어할 수 있다고 한다. (후략)’ - <산문기행> 인용

주왕산 자체도 그렇지만, 주왕산을 지니고 있는 청송은 천혜의 요새 같은 곳이다. 첩첩산중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먹고 살게 없어서 문제지 숨어살기엔 이만한 땅이 없다. <정감록>에 언급되지 않은 이유도 산지가 너무 많아 먹고 살 게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지도를 가만히 놓고 봐도, 남으로는 청송에서 가장 높은 보현산과 구암산이 막고 있고, 동으로는 주왕산과 태행산, 북으로는 비봉산, 서로는 노래산과 계명산 등이 에워싼 형국이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1554~1637)이 1597년에 쓴 주왕산에 대한 첫 유산기인 <주왕산록周王山錄>에 ‘폭포 속에 암혈이 많고, 기암괴석으로 둘러싸여 숨기에 딱 좋은 곳’이라 하고 있다. 주왕산의 다른 이름들도 대개 주왕산의 특이한 지형에 의해 명명된 지명들이다. 석병산石屛山·대둔산大屯山 등이 그렇고, 소금강산은 뛰어난 경관 때문에 이름 붙여진 점을 알 수 있다. 그 외 주방산周房山도 있다. 석병산은 병풍 같은 바위가 있어서이고, 대둔산은 산마루가 큰 진지 같다고 해서 유래했다. 주방산은 주왕의 공간이 있던 곳이라 해서, 소금강산은 경관이 금강산의 축소판 같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주왕산 가장 위에 있는 용연폭포가 추운 날씨에 얼어붙어 있다.
주왕산 가장 위에 있는 용연폭포가 추운 날씨에 얼어붙어 있다.

그런데 정작 주왕산이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하지 않다. 여러 설이 전한다. 흔히 알려지기로는 중국의 주왕이 당나라 군사에 쫓겨 이 산에까지 숨어들었다고 해서 유래했다는 설과 신라 태종무열왕의 6대손인 김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자 이 산에 숨었다가 사후에 주원왕으로 불려 그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 등이 있다. 두 가지 유래 모두 주왕이란 이름에 의해 주왕산으로 됐다는 것이다. 알려진 전설에 의한 지명유래는 시기적으로 삼국시대이거나 그 이전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늦어도 <고려사>에는 위에 언급된 지명들이 등장해야 한다. 하지만 어느 지명도 <고려사>에까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주왕산 입구에 있는 대전사도 신라 혹은 고려 초에 창건됐다고 전하나 출토된 유물을 보면, 조선시대의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청송의 국가지정문화재 보물인 대전사 보광전은 임진왜란이 끝난 1672년 건축된 것으로 확인됐다. 중건한 것인지, 창건한 것인지 불명확하지만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송의 보물이라는 얘기는 청송이 고대에서부터 역사에 중심으로 떠오른 적이 없어 남은 유물이 없다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물론 압독국과 같이 아직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다는 여지는 있지만.

을씨년스런 계곡을 끼고 주왕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을씨년스런 계곡을 끼고 주왕산으로 올라가고 있다.

주왕산 전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달라

일반적으로 주왕산을 얘기할 때 <주왕내기周王內記>를 자주 내세운다. <주왕내기>는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 초기까지 전승된 여러 사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저자로 알려진 눌옹은 조선 초기 인물이며, 1463년 전후 쓴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내용은 주왕의 등장과 활동을 당나라와 발해, 신라를 연결해서 서술한 부분과 주왕의 죽음과 그의 서자인 주희가 석병산에서 머물며 여러 사상을 익히는 과정을 담고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왕은 8세기 인물이며, 또한 주희가 어울린 인물은 신라는 물론 고려와 조선 초에 활동했던 선현과 고승들이다. 따라서 <주왕내기>는 주왕과 주희의 둔세은거遯世隱居를 수록한 소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도 유교, 불교, 도교와 함께 고유 산신(=신선)신앙을 모두 나타내고 있다.

특히 이 소설을 쓴 시기는 세조가 조카 단종을 폐위시킨 비극적 상황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비경을 지닌 주왕산으로 은둔하려는 신선사상을 이상적으로 녹여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즉 저자 눌옹이 가상인물인 주왕을 내세워 은둔을 강조하려는 세조의 패륜에 가까운 비윤리적 현실에 대한 도피적 성격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주왕내기>의 이러한 배경에서 나오는 주왕과 신라 김주원의 전설을 마치 주왕산의 실제 유래인 양 사용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주왕산의 주왕 이야기는 역사가의 눈에는 이보다 더한 엉터리가 없고, 소설가의 눈에는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한 판타스틱 스토리이고, 사상가의 눈에는 유불선에 민간신앙이 습합되고 승화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왼쪽부터)주왕이 은거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주왕굴 안에서 밖을 내다봤다. 주왕산의 깊은 계곡으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왼쪽부터)주왕이 은거했다는 전설이 전하는 주왕굴 안에서 밖을 내다봤다. 주왕산의 깊은 계곡으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주왕산에 대한 분명한 사실은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인해 이상적인 선경仙境으로 인식됐을 뿐만 아니라 숨어살기에 딱 좋은 ‘청학동’ 같은 곳이라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주왕내기>의 소설적 허구성, 즉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주왕산이란 명칭이 사용됐다는 것은 조선시대 들어서야 주왕산이란 지명이 공식적으로 등장한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작가가 소설을 쓸 당시에 주왕산이란 지명은 일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것이다. 1530년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주왕산이 아니라 ‘주방산’으로 나온다. 여헌 장현광이 <주왕산록>을 쓴 시기는 1597년. 거의 주왕산이란 지명이 등장한 초기로 추정된다. 청송군에서 발간한 <주왕산유람록>에 소개된 유산기 총 24개 작품 중에 17개가 주왕산으로, 6개가 주방산으로, 대둔산이 1개다. 조선 초기에는 주방산이 조금 등장하다가 후기로 갈수록 주왕산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주왕산이란 지명은 조선 초기 사람들 입에 조금씩 오르내리다가 중·후기 들어 완전 정착한 지명으로 유추할 수 있다.

장현광은 이런 사실을 아는 듯 모르는 듯 <주왕산록>에서 주왕 이야기를 자주 언급한다.

‘계곡 이름은 두 가지가 있다. 동쪽에 있는 계곡은 이른바 주왕이 난을 피한 곳이다. 폭포의 굴은 변함이 없고, 궁궐의 유적도 여전히 있다. 그리고 계곡 서너 리쯤 들어가면 지금 폐허가 된 절이 있다. 서쪽의 계곡은 바위 계곡으로, 동쪽보다 아주 기이하다. 인적이 미치지 않은 암벽 중턱에 기이한 새가 그 틈새에 둥지를 틀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청학靑鶴이라고 한다. 매년 여름이면 이곳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른다. 둥지에 마주한 바위 머리에 작은 암자를 세워 조망하지만 바위벽은 멀고 둥지는 높아서 사람들이 그 새를 볼 수 없다. 한 무인이 그 둥지를 활로 쏘아 그 곁부분을 없애버렸다. 이후 학은 더욱 험준한 바위로 옮겨가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없게 됐다. (후략)’

주산지 몽한의 아침.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주산지 몽한의 아침.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청학바위는 지금 학소대를 지칭한 듯

청학이 지금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주왕암을 지나 계곡으로 가면 정말 신선이 사는 듯한 청학동이 나온다. 그 첫 지점이 지금의 ‘학소대鶴巢臺’다. 역시 경사 90도의 가파른 절벽 바위다.

장현광의 유산록에 나오는 내용을 국립공원 안내판에 비슷하게 적어놓고 있다. 학소대와 마주한 병풍바위를 함께 담은 경관이 ‘한국 자연의 100경’에 선정될 정도로 수려한 경치를 자랑한다.

장현광은 ‘부암附巖’이라는 바위에 도착한다. 길이 끝나는 지점이라고 적고 있다. 현재 계곡이 끝나고 폭포가 시작되는 지점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름은 바위가 높은 벼랑에 붙어 있기 때문에 명명된 것이라고 한다. ‘만약 개미처럼 붙고 이처럼 기어서 간다면 그 바위를 따라 길을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한 것으로 봐서 지금처럼 탐방로가 제대로 조성되지 않아 길이 험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다.

대전사 설경.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대전사 설경.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장현광은 기이한 바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를 본격 시작한다.

‘부암이라는 곳에 이르게 되면 좌우가 모두 바위로 천태만상을 그대로 다 드러내지 않은 것이 없다. 어떤 것은 네모지고 어떤 것은 둥글며, 어떤 것은 오그라들고 어떤 것은 삐죽 튀어 나왔으며, 어떤 것은 좌우로 서로 마주하며 마치 손을 맞잡고 읍하는 듯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저것과 이것이 서로 높아 마치 자웅을 겨루는 듯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부부처럼 짝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형제처럼 차례대로 나열한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원수처럼 서로 등진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친구처럼 서로 가까이 한 것도 있다. 혹은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뭇바위들이 모두 몸을 숙여 군주나 스승을 존경하여 우러러 받들기라도 하는 듯하다. 낮게 엎어져서 눌려 있는 것은 신하와 첩과 같다.’

기이한 바위는 청학부터 계속된다. 연결된 듯 홀로 있고, 홀로 있는 듯 연결된 바위들이 우뚝 솟아 있는 길이 장현광의 표현대로 5리쯤에 있다. 5리는 지금 기준으로 2km 정도. 현재 주왕산이 세계지질공원으로 유네스코로부터 인정받은 것도 폭포를 끼고 있는 이 기이한 암벽들이 보여 주는 영향이 크다. 단지 그 규모가 2km밖에 되지 않아 세계유산으로 등재신청하기엔 다소 아쉬운 점이 있다. 중국의 황산 정도의 규모가 된다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고도 남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주왕산의 절경을 보여 주는 백석탄의 하천이 절묘하게 얼어 있다.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주왕산의 절경을 보여 주는 백석탄의 하천이 절묘하게 얼어 있다.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점촌은 사라진 내원마을 유력

동행한 주왕산국립공원사무소 최성규 자연환경해설사는 “용추폭포가 주왕산의 꽃”이라고 극찬한다. 이전에는 폭포 3개를 제1, 제2, 제3 폭포로 불렀으나 옛 지명 찾기를 벌여 제1 폭포가 용추폭포로 개명됐다. 용추폭포와 주변 암벽은 옛날 화산지형의 흔적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용이 살던 폭포라는 말이다.

장현광은 폭포에 대해 ‘용연龍淵이 몇 곳 있다. 폭포수를 받아 못을 이루었으며 위험해 가까이 갈 수 없고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고 했다. 지금 있는 폭포 3개를 가리킨다. 모두 용이 산다고 믿었던 듯하다. 그의 유산록에는 각각의 폭포에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후세의 사람들은 제일 먼저 나오는 폭포를 용추, 두 번째는 절구, 마지막 세 번째는 용연폭포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용연을 지나 북으로 7~8리쯤 가면 옛날에 점촌이 있었는데 광혈廣穴이라 한다. 난리 통에 흩어져 없어지고, 지금은 서너 개 초막만 남아 있을 따름이라는데, 우리 행차가 미치지 못해 모두 보지 못했다’며 ‘나는 이번 길에 비록 두루 감상할 수는 없었으나, 산의 대강은 파악할 수 있었다. 가장 기이하게 여긴 것은 여러 바위들이다. 서쪽 골짜기에 있는 바위가 더욱 기이하였다’고 기록하며 산을 본 감상부분을 끝맺고 있다.

점촌은 지금의 내원마을을 지칭한 듯하다. 주왕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환경오염의 주범이라며 내원마을을 없애 버렸다. 지금 주왕산 입구에서 음식점을 하는 사람들 중 일부가 그들의 후손이다. 

산에 대한 감상 뒷부분부터는 기이한 바위에 대한 다양한 설명과 함께 바위의 다양한 형상만큼이나 각양각색의 인간군상들을 고대부터 있었던 인물을 바위에 비유하고 있다. 그는 폭포와 기이한 바위에 대해 매우 강렬한 인상을 받은 듯하다. ‘이제 그 기이한 형상을 감히 옛날 역사책에서 들은 것에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며 장황한 비유를 늘어놓는다.

주산지 겨울왕버들.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주산지 겨울왕버들. / 사진 국립공원관리공단

산에서 본 풍광뿐만 아니라 정신세계 보여 줘

‘마치 옛 도를 좋아하고 성인을 사모하는 사람이 세상에 늦게 태어남을 괴로워하고, 지극한 덕을 보지 못한 것을 개탄해 그 도를 상상하고, 그 사람을 그리워해 붓끝으로 조화를 부려 천고의 성인을 그려내어 삼황오제를 나열하는데, 반고씨를 첫머리에 놓고 무회씨와 갈천씨를 사이에 넣고 아래로 삼대의 성왕에 이르기까지 그 형상을 갖추어 존숭하지 않음이 없고, 그 형체는 모사했으나 그 도는 모사하지 못했으며, 그 몸은 그렸으나 그 마음은 그리지 못하여 다만 이름과 지위를 가지고 모의하는 듯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이한 바위를 보고 발휘되는 그의 상상력이 놀라울 정도다. 조선 선비들은 학문의 깊이만큼이나 상상력도 국경, 시대의 장벽을 넘어 자유자재로 왕래한다.

‘천지의 원기가 이구산尼丘山에 모여 있어 공자를 낳으니,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가르침을 베풀자 영재가 구름처럼 모여서 문하의 제자 3,000명 중에 훌륭한 재주를 이룬 이가 70명이었다. 다섯 가지 과목을 세워 재주를 다하고 네 가지 가르침을 가지고 학문을 성취시키니, 혹은 당堂에 올라 방에 들어온 자도 있고, 혹은 문장을 바라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한 자도 있다. 안회顔回는 어리석은 듯하고, 증삼曾參은 노둔하며, 중유仲由는 용맹하고, 증점曾點은 뜻이 높아 각각 그 재주에 따라 성취하니, 재주는 사람에 따라 길고 짧고, 학문은 공력에 따라 높고 낮으나 모두가 성현의 무리이다.’

이 정도 되면 상상력보다는 학문의 깊이 자랑 같기도 하다. 이런 내용들이 숱하게 언급된다. 장현광이 여러 차례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은둔형으로 지내 ‘산림처사’로 불리는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처사處士는 ‘홀로 자기 몸을 선하게 닦는 데 주력하는 선비’를 말한다. 서애 유성룡이 장현광의 학문에 반하여 자신의 아들을 그에게 배우게 한 것도 유명하다.

장현광이 바위의 형상에서 도덕과 관련된 인간행위의 긍정과 부정의 여러 모습을 떠올린 것은 그의 사상과 관련 있어 보인다. 그는 정치에 뜻을 두지는 않았지만 도덕정치 구현을 매우 강조했다. 도덕정치는 곧 사람의 마음 가운데서 나오는 것이고, 인심은 도덕정치에서 나온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의 유산록 거의 끝부분을 보면 그의 사상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산에서 기이한 바위가 보여 주는 풍광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의 한 단면, 즉 사상의 골수를 보여 주고 있다.

‘바위 모양이 천만 가지로 다른 것과 인간의 일이 천만 가지로 변화하는 것은 이치가 아닌 것이 없다. 이치는 본래 하나인데 사물에 나타나는 것은 천만 가지로 다르고, 사람의 일에는 천만 가지 변화가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결국 눈에 보이는 현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사상은 둘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이 그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주왕산이 그 자태를 뽐내는 듯하다.

장현광의 <주왕산록> 원문. <여헌집>권8 잡저 주왕산록에 수록

山之高不爲最也。而山之名則著焉。以其有古跡。且其巖壑奇異也。余聞久矣。思一觀以快塵眼者宿矣。而願莫之遂也。是夏。從朋友就山之近區而寓焉。一日。約二三友人。擬副宿願。是日午雨作。不能徧遊。聞之於人。山之所以以周王名者。在三韓時。有一王號者。避亂于此。置闕于山之上。傍有瀑流。瀑流中有巖穴。人可隱藏。而以其瀑流蔽之。故外人不知其有穴焉。主有急則藏于其穴以避之云。余以日暮且雨。不得親見其跡。山之得名則以是矣。觀者謂此山洞狹而溪險。巖壁磈峻。嶺上平廣。四方之路皆阻遠。當亂世。可藏兵以禦賊也。若遊觀之人。則非特以古跡。爲其巖奇水潔。似是羽人栖息之地也。洞之名者有二。而東者乃所謂周王避亂之所也。瀑穴未變。闕址猶在。而入洞數里許。今有弊寺焉。西者巖壑。比東尤奇。而巖腰人跡未及處。有異鳥巢其隙。人謂之靑鶴。每於春夏。卵育於此。對巢巖頭。爲立小庵以望之。而壁遠巢高。人不見其鳥。平時來賞者。次角以驚之。待其飛出。然後得見其形。有一武人。射其巢。矢著其傍。自後鶴遂移栖于愈險之巖。人不復見焉。洞至五里許。厓絶路竆。路竆處有巖曰附巖。蓋其巖石。襯貼懸厓故名矣。若能蟻附蝨攀而行。則可緣其巖。以通其路。由其路而踰一嶺。則山勢稍平。不甚奇美。而但有龍淵數處。受瀑成潭。危不可近。深不可測。由龍淵北去 七八里許。古有村店。名曰廣穴。因亂散亡。今只遺數幕云。而皆余行所未及見也。余於是行。雖未能偏賞。然山之大槩。則已得以領略焉。最所奇者。諸巖也。巖之在西洞者益奇。試以是日所目者記之。則自洞口至路竆處。可五里兩岸皆巖。而不相疊累。下自巖根。上至巖角。不知其幾丈。而直一石以首尾焉。中有小溪水。從溪有微逕。逕不履土。躐石而步。石布溪左右。或高或低。或巨或小。或縱或橫。或側或夷。非健脚力。必常蹉跌。由其逕者。仰視兩厓之壁。則巖根各去人纔咫尺。而巖角直揷雲衢。天與日。眞如井中見也。至所謂附巖之上。則左右諸巖。羅布眼前。千形萬狀。無不具悉。或方或圓。或縮或突。或左右相對。有若拱揖者然。或彼此相高。有若爭爲長雄者然。或配合之如夫婦者。或序次之如兄弟者。或若仇讎焉相背之。或若朋友焉相親之。或一巖巍然。衆巖俱低。則其尊仰敬奉之者。君師如也。其卑傲壓倒之者。臣妾如也。東厓之巖。不連於西厓。西厓之巖。不屬於東厓者。有似乎分門別陣法。不得相混也。或儼然莊然。中立不倚者。有若大人正士之不可犯也。或爲詭爲怪。不可貌象者。有若異道左學之反吾倫也。或若介胄之士。以不拜爲禮者焉。或若梟熊之將。以殺伐爲心者焉。或若上古聖人。生在朴略之世。道一天地。不露性情者然。或若末世浮薄之人。負藝恃才。驕傲自售者然。有或如偃蹇林壑。高尙其事者也。有或如逃遁巖穴。若將浼焉者也。或有乖戾而自異者焉。或有依附而衆同者焉。或有小從於大者。或有後隨於前者。藏縮頭角者。如有所畏怯於時勢者也。暴露稜隅者。如有所憤怒於世亂者也。此其大略耳。不可具狀矣。(후략) 이후 원문은 주왕산에 대한 묘사보다는 역사적 인물을 주왕산 바위의 형상에 비유하여 설명하고 있어 생략한다.

박정원 편집장
박정원 편집장
박정원 편집장 jungwon@chosun.com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역임.
<신이 된 인간들> <옛길의 유혹, 역사를 탐하다> <내가 걷는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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