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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16>ㅣ이인상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 웅대하지 않지만 아름답고 오묘… 북쪽은 흙이고 남쪽은 바위

월간산
  • 입력 2018.09.17 09:47
  • 수정 2018.11.26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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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지의 물은 줄거나 더하는 법 없어… 孔淵에는 용이 있다고 묘사

태백산 정상 천제단을 앞에 두고 태백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태백산 정상 천제단을 앞에 두고 태백산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태백산의 봉우리로는 천의天衣·상대上帶·장산壯山·함박含朴이 높고, 강물로는 황지黃池·공연孔淵·오십천五十川이 있다. 태백산 신령 천왕은 황지의 신神이다. 함박은 모란을 뜻한다. 아주 고운 산으로 소뢰현에서 가장 조망하기가 좋다. 장산의 북쪽은 순전히 흙이고 남쪽은 순전히 바위로 보물이 난다. 황지의 물은 줄거나 더하는 법이 없고, 공연에는 용이 있다. 강은 하나의 물 흐름이면서 오십 구비에 걸쳐 있어 오십천이라고 한다.’ - <산문기행> 인용

이인상이 <유태백산기></div>를 남긴 첫 숙박지인 태백산 각화사 입구 뒤로 태백산 자락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이 능선은 지금 청옥산 자락이다.
이인상이 <유태백산기>를 남긴 첫 숙박지인 태백산 각화사 입구 뒤로 태백산 자락 능선이 길게 펼쳐져 있다. 이 능선은 지금 청옥산 자락이다.

태백산 유산록으로는 거의 유일한 이인상(1710~1760)의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에 나오는 태백산에 대해 평가를 내린 내용이다. 지금과 똑 같거나 유사한 지명이 있는 반면 전혀 생소한 지명도 등장한다. 또한 신에 대한 언급은 빠지지 않는다. 예로부터 산과 신은 역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 같다.

이인상은 조선시대 널리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림에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1735년(영조 11) 초순쯤 늦겨울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태백산을 3일 동안 유람했다. 각화사에서 출발해서 태백산사고지史庫地를 지나 상대산 중봉~천왕당을 거쳐 소도리로 내려왔다. 그 추운 겨울 태백산을 3일 동안 무려 110리(44㎞)를 헤매면서 누볐다. 겨울 장비를 갖춘 지금으로서도 쉽지 않은 태백산 산행을 당시 도포와 갓만을 쓰고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태백산 유람을 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이인상이 3일 동안 지나간 코스는 현재 등산로가 제대로 이어져 있지 않다. 따라서 그대로 답사할 수 없는 상태다. 현재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태백산권역 중심으로 태백산국립공원사무소 유정석 행정과장의 안내로 백천계곡에서 두리봉으로 올라선 뒤 깃대배기봉을 거쳐 천왕당을 밟은 뒤 소도리로 답사하는 코스를 택했다. 덕분에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백천계곡은 한여름에도 수온이 20℃를 올라가지 않아 한반도, 아니 세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열목어는 천연기념물 제74호.

둘째 날 이인상이 출발했던 각화사와 사고지를 간단히 답사하는 것으로 전체 일정을 마쳤다.

백천계곡에 들어서니 100년 만의 폭염에도 시원한 기운이 느껴진다. 이인상은 한파가 몰아치는 겨울에 유람했지만 취재진은 염천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태백산에 오른다.

1.일제시대까지 있었던 태백산 사각. 2. 해방 직후 사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3. 각화사 위쪽 각화산 남쪽에 자리 잡은 태백산 사고지는 지금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1.일제시대까지 있었던 태백산 사각. 2. 해방 직후 사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3. 각화사 위쪽 각화산 남쪽에 자리 잡은 태백산 사고지는 지금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상대산 중봉은 지금 깃대배기봉 추정

‘산에 들어가 각화사에 묵었는데, 절은 봉화에서 50리 떨어져 있다. 아침에 일어나 두 개의 견여를 정돈시키고 승려 90인을 선발했다. 사람들은 모두 겹옷 한 벌을 입었는데도, 모두 얼어 죽을까봐 걱정했다. 이날 산 아래는 여전히 따스했다. 5리를 올라가 사각史閣을 구경했는데, 하늘이 비로소 밝아왔다. 처음으로 상대산 중봉으로 향했다.’

각화사는 지금의 각화사로 추정된다. 그 위에 사고지도 지금 그대로 있으나 사각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나마 확인하기 위해 올라가는 길은 찾기도 쉽지 않다. 3㎞가량 떨어진 도로 옆에 안내판은 있으나 각화사 승려들은 올라가는 길이 없다며 아예 출입부터 막는다. 각화사 올라가는 계곡 따라 흐르는 물을 절에서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어, 이를 오염시킬까 우려하기 때문이란다. 절에서 아예 빗장을 걸어놓았다. 우회하는 길이 있다고 하지만 어딘지 찾기 쉽지 않다.

이어 이인상은 상대산 중봉으로 향했다. 지역문화원, 군청 문화관광과 관련 담당자 누구도 상대산이 지금의 어느 산인지 모른다. 더욱이 상대산 중봉이라고 한다. 아무도 모르는 지명이다. 태백산 지도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중봉이 있으면 반드시 상봉이나 하봉이 있을 것이다. 태백산 가는 길이니 분명 태백산 천제단 또는 장군봉이 상봉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면 중봉은 지금의 깃대배기봉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태백산이 1,567m, 깃대배기봉이 1,370m, 각화사 바로 위 각화산이 1,202m이다. 이로 미뤄 보면 깃대배기봉이 중봉일 가능성이 높다. 백천계곡을 역으로 치고 올라 이윽고 깃대배기봉에 도착했다.

태백산 천제단 앞 정상을 알리는 비석은 다른 정상비석과는 달리 뭔가 의미가 있는 듯 묘비로 세워져 있다.
태백산 천제단 앞 정상을 알리는 비석은 다른 정상비석과는 달리 뭔가 의미가 있는 듯 묘비로 세워져 있다.

‘산은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길은 갈수록 가늘어졌다. 축 늘어진 회나무와 연건한 떡갈나무가 마치 귀신처럼 서 있다. 바람과 불에 꺼꾸러져 있는 나무가 언덕에 옆으로 누워 있고, 길을 끊었으나 눈이 쌓여서 형체가 흐릿하다. (중략) 상대산에 오르자, 나무라고는 한 치 한 잔 길이의 것조차 없고, 다만 바람이 있을 뿐이다. 사방 백 리에 산이 모두 흰 눈빛이어서, 마치 뭇 용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듯도 하고, 마치 일만 필의 말이 내달려 돌진하는 듯도 하다. 안개 속에 불쑥 드러났다가 사라져 없어지고, 어두컴컴하다가 활짝 열리기도 하면서, 번쩍번쩍 반짝반짝, 희디희고 맑디맑게, 빛의 기운이 허공에 가득하다. 따라 오는 사람들이 미친 듯 외치면서 발을 구른다.’

상대산이란 지명에 걸맞게 평평한 능선이 넓고 길게 펼쳐져 있다. 당시엔 나무가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무성한 숲을 이룰 정도로 우거져 있다. 이인상은 방향별로 눈에 보이는 장소를 언급한다.

‘동쪽으로 바라보니 바다색이 구름과 같고, 하늘에 둥실 떠서 하나로 되어 있다. 그런데 세 개의 봉우리가 마치 안개 속의 돛배처럼 춤추며 날아서 구름 속에 콸콸 흐르고 바다와 뒤섞인 것은 울릉도다. 뚝 자른 듯이 앞에 막아서서 마치 사악四嶽이 제후를 인솔하여 조회를 하는 듯한 것은 청량산이다. 서북쪽은 구름과 안개가 참담하여 시선이 닿는 데까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동북쪽으로 길을 잡아 천왕당으로 향한다. 깃대배기봉의 북쪽에 가까운 동북쪽에 천제단이 있다. 주변에 그 외 봉우리라고 할 만한 봉우리는 없다. 그렇다면 깃대배기봉이 상대산 중봉일 가능성이 더욱 높아진다.

천왕당은 당시 태백산 정상에 집 모양의 사당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은 천왕당이 아니라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돌로 쌓은 천제단이 있다. 천왕당이 언제 천제단으로 변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단지 옛날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의례장소로 지정된 사실은 역사서에 전한다. <삼국사기> 신라 일성이사금조에 ‘일성이사금 5년(138)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해 몸소 태백산太白山에 제사 지냈다’고 나온다. 또한 태백산은 신라가 전국 명산대천을 삼산오악으로 나눠 국가적인 제사지로 지정할 때, 북악에 속했다. 따라서 예로부터 국가적 행사로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명산은 분명하다. 이인상은 눈길을 헤쳐 드디어 천왕당에 도착한다.

태백산 능선길을 따라 다른 능선들이 마치 물결치듯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듯하다.
태백산 능선길을 따라 다른 능선들이 마치 물결치듯 너울거리며 다가오는 듯하다.

정상 천왕당엔 당시 건물 몇 채 있어

‘천왕당에 이르렀을 때는 대략 인정人定(조선 때 밤에 통행을 금지하기 위해 종을 치던 일, 대략 사람들이 잠드는 시각인 밤 10시) 때였으며, 겨우 60리를 간 것이었다. 서쪽 법당에는 석불이 있고, 동쪽 법당에는 나무 인형들이 있으니, 이른바 천왕天王(하늘의 임금 혹은 환웅)이다. 다시 나무를 불태워서 한기를 덜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아가 점사占舍를 찾았다. 달빛은 음침하고 어두운데, 북두성이 마침 떠서는 구름 사이로 새어 나와 숲에 걸려 있다. 서너 리를 가자 달이 다시 밝아지고 사방의 산들이 온화하고, 하늘의 빛은 씻은 듯하다. 소도리점蘇塗里店(삼한시대 천신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에 있는 점집들)에 이르자 밤은 이미 삼경의 때였다. 모두 20리를 걸었다.’

60리, 즉 24㎞를 걸어 천왕당에 도착해서 쉬지도 않고 다시 20리, 즉 8㎞를 더 걸어 소도리로 내려왔다. 아마 추위를 이기기 위해 강행하지 않았나 싶지만 그래도 하루에 걸은 거리 치고는 너무 멀다. 더욱이 견여를 메고 가는 하인들은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이인상의 유산록으로 미뤄볼 때 당시 태백산 정상 천왕당에는 건물이 몇 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과 서쪽 법당에 각각 다른 불상에 대한 묘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점집까지 있었다고 설명한다.

(왼쪽)이인상은 당시 나무가 없다고 묘사했지만 지금은 태백산 곳곳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있다. (오른쪽)이인상이 상대산 중봉으로 묘사한 봉우리는 지금 백두대간 깃대배기봉으로 추정된다.
(왼쪽)이인상은 당시 나무가 없다고 묘사했지만 지금은 태백산 곳곳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져있다. (오른쪽)이인상이 상대산 중봉으로 묘사한 봉우리는 지금 백두대간 깃대배기봉으로 추정된다.

한밤 천왕당에서 바로 소도로 내려가

이인상은 한밤에 태백산 정상에 도착했으니 주변을 둘러볼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낮이었으면 또 다른 묘사가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인상보다 100여 년 앞선 인물인 남인의 영수이자 우의정을 지낸 허목(1595~1682)은 그의 <기언記言> 제28권에 태백산 지명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문수산 정상은 모두 흰 자갈이어서 멀리서 바라보면 눈이 쌓인 것 같으니, 태백이란 명칭이 있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태백산보다 그 아래 있는 문수봉에서 태백산 지명이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태백이란 지명을 단순히 한자로 풀어서 해석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더 높은 봉우리의 유래를 낮은 봉우리에서 유래했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힘들다. 태백산 지명 유래에 대한 정설은 없으니 그중의 하나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천왕당에서 얼마 내려오지 않아 단종비각이 있다. 물론 현판과 비석은 현대인물인 탄허 스님이 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기상으로 당시에도 충분히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인상은 전혀 언급이 없다. 아마 춥기도 하고, 어두워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당연하지만 당시엔 어떤 상태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니 짐작만 할 뿐이다. 

이인상은 한밤중에 도착한 천왕당에서 하룻밤을 보낼 만한데 그러지 않고 곧바로 하산하는 강행군을 한다. 하산코스는 지금까지 지명이 전하는 소도리다. 소도리는 천신에 제사를 지내던 성역으로 일반인뿐만 아니라 관리들도 출입을 엄격히 제한했던 곳이다. 따라서 도둑이나 강도들이 피신하기 위해 소도에 들어가면 관리들도 더 이상 추적할 수 없었다. 지금 태백산 자락 아래 소도리 그곳이다. 주민들은 소도를 거쳐 천왕당, 지금의 천제단으로 가장 많이 올랐다. 지금도 주민들은 천제단 바로 아래,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한국의 100대 명수로 꼽히는 용정龍井 옆 망경사에 오르기 위해 소도를 이용한다. 망경사에서는 주로 밤 12시 전후해서 기도를 올리기 때문에 밤 10시까지 소도에 불을 밝힌다고 한다.

너무 급하게 하산한 이인상은 정상과 주변에 대한 설명은 거의 없다. 단순히 천왕당에 대한 언급만 일부 할 뿐이다. <유태백산기>는 이후부터 태백산 아래 자락의 묘사로 이어진다.

태백산 깃대배기봉에서 동북쪽으로 정상 천제단이 어렴풋이 보인다. 당시엔 천왕당이 있어 건물 몇 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태백산 깃대배기봉에서 동북쪽으로 정상 천제단이 어렴풋이 보인다. 당시엔 천왕당이 있어 건물 몇 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날 바람이 맹렬하고 눈발이 일어나며, 들판의 쌓인 눈이 모두 일어나 구름과 안개로 뒤엉켜 천지사방이 아득해서 걸음이 한 자밖에 떨어지지 않았는데도 주고받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20리를 가서 황지에 이르자 비로소 갰다. 사방 둘러보니 들판이 10리에 평평한데 못이 그 가운데에 모여 있다. 실로 전체 산의 한가운데로 함박치가 그 서쪽에 있다. (중략) 그 물이 남쪽으로 넘쳐흘러서 공연孔淵에 있는 작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진다. 첩첩 산을 뚫고 지나는 것이 100리이고, 바다로 조회하는 것이 1,000리이니, 그 물 흐름이 대단히 길다. 머리를 돌려 모란봉을 바라보매, 현란하게 조각한 듯한 형상이 꽃과 같다. 웅대하지는 않지만 아름답고 오묘하여 이 산의 면목을 일변시킨다. 그렇기 때문에 기이하다.’

이인상은 끝으로 태백산에 대한 총평으로 끝을 맺는다.

‘태백산은 작은 흙이 쌓여 크게 되었으므로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차차 높아져서 100리에 달하므로 그 공덕을 드러내지 않는다. 마치 대인이 내면의 덕을 지닌 것과 같다.’

유산록 따라 가는 산행을 취재하면서 항상 떠오르는 궁금한 사항은 당시에 묘사한 지명이나 유적을 지금은 전혀 찾을 수 없고, 지금 국보나 보물로 전하는 유적에 대해서 당시 상세하게 묘사할 법하나 전혀 언급이 없는 부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하는 점이다. 당시 선비들이 유람하면서 숙소로 이용한 사찰은 상당 부분 현재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지금 기준으로 문화재를 보고도 당시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그리고 당시 사용했던 지명이 왜 사라졌을까 하는 점이다. 분명 뭔가 이유나 사연이 있을 텐데, 그 내막을 찾을 수 없다. 더욱 더 깊고 깊어지면 혹시 알 수 있을까.

태백산과 청옥산 능선을 가르는 백천계곡은 한반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로 수온이 한여름에도 20℃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태백산과 청옥산 능선을 가르는 백천계곡은 한반도 최남단 열목어 서식지로 수온이 한여름에도 20℃를 넘지 않는다고 한다.
원문으로 보는 이인상의 <유태백산기>
<凌壺集능호집>卷三 記 ‘遊太白山記’ 乙卯에서 발췌

余隨退漁金公觀太白山。歷安東順興諸郡。邐迤百餘里至奉化。皆山之麓也。始入山宿覺華寺。寺距奉化五十里。晨起整二肩輿。點僧徒九十人。人皆複衣一襲。而皆憂凍死。是日山下猶和暖矣。上五里觀史閣。天始明。始向上帶山之中峰也。嶺轉危路轉微。鬅鬙之檜。偃蹇之槲。植立如鬼。其顚倒於風火者。橫岡截路。而雪積糢糊。植者方闘勁風。其聲滿空。振動于東。勃鬱而西應。陰晦倐閃。無有窮已。從人皆僵立。命拉朽吹火以熨之。復踏雪開嶺脊。繩系輿前後。縋壑懸而進。望處漸遠。雪漸深風漸烈。林木漸短。及登上帶。便無尺寸之木。而只有風矣。四顧百里。山皆雪色。如羣龍之血戰。如萬馬之馳突。煙中隱見滅沒。冥晦闔闢。熒熒晃晃。皛皛皓皓。光氣滿空。從人又狂呼足蹈焉。東望海色同雲。浮霄爲一。而三峰飛舞如霧中帆。滚于雲而混于海者。鬱陵島也。緝緝明明。低首環列。而不敢肆者。七十州之山也。嶄然當其前。有如四岳之率諸侯朝覲者。淸凉山也。西北則雲霧慘惔。極目無所覩。唯有一山純石成。束立如劒斧。遂從東北取路。向天王堂。日落月出。但見嶺巓之木。高纔數尺而蹙萬節。裊以寄生。臃腫奇古。婆娑牽裙裂袖。其剛如鐵。令人僂而行。封根之雪沒人膝。見風而飛。風自北方來者。天昏地裂。轟雷而蕩海如也。巨木吼怒。小木哀鳴。僧顚復起。雪壓其背。運輿之難。如急灘之上舟也。僧曰木猶千歲耳。萬古積雪。蓋嶺背尤近北。與上帶異候。故其風極壯。而其木極怪。雪愈不消云。至天王堂。約人定時。而纔行六十里。西堂有石佛。東堂有木偶。所謂天王也。復燒樹救寒。向前尋店舍。月色陰黑。星斗時出。漏雲掛林。行數里月復明。四山穆然。天光如洗。余長吟不已。有凌雲駕風之想。抵素逃里店。夜已三更。凡行二十里。店人南後榮來見。貌淳而言眞。具道玆山之形勝曰。玆山盤據三路十二州。自東北而隷于關東者曰江陵,三陟,蔚珍,平海,寧越,旌善。三陟之松可以爲槨。其蔘甚良。踰南而爲嶺南諸州者曰。安東,奉化,順興,榮川,豐基。奉化以史閣爲重。浮石之寺名于南土。實在順興。湖西之四郡。始奇於永春。永春實爲西支。其峰之高者曰天衣,上帶,壯山,含朴也。其水曰黃池,孔淵,五十川也。其神曰天王,黃池之神也。俚言呼牧丹曰含朴。玆山甚姸。宜望於素耒峴。壯山純土於北純石於南。有寶産焉。池水不加减。淵有龍焉。川只一派而涉五十曲。其他幽奧絶世之地。不必言云。翌朝偕南生出店門。風猛雪作。原野之積雪。俱起滚爲雲霧。六極蒼茫。尺步不通語。行二十里到黃池上始霽。環顧四邊。野平十里。而池滙于中。實一山之中。含朴峙其西矣。其廣纔半畆。其形如匏穿穴。中寬而外縮。地動三丈者周池。非冬月無敢有履而近者。泉自腹上湧積。色如漆而冽如氷。蓋魚龍之所不宅。而終古無測之者也。苟有動其水者。風怪一歲。人不得寧。意者有明神。冬而不氷。旱不蹙。潦雨不受益。其有定性定度矣。泛濫于南。濤于孔淵。穿重嶺者百里。朝海者千里。其流澤亦長矣。遂別南生。徑從素耒峴向孔淵。回望牧丹峰。絢爛刻雕如花。不雄大而姸妙。一變玆山之面目。所以爲奇也。行二十里。過小石峰。孤起數十丈。如冑鍪狀者曰鐵巖。又行十里。宿方墟村。路邊皆五鬣松。其直如筠。上枝葱然成蓋。夾水兩崖而立。已而彩雲起于西。隱暎于松林。陸離璀璨。如貝如虹。移時不變。蓋山極峻而落暉在下。倒光上薄而爲光怪耳。兩崖之石。如魚龍之脊鱗。齒齒突起。有若交制者。其水合於孔淵云。翌日沿流抵淵下。有石壁立十餘丈。蒼碧巉削。而間以赭色。中開巨穴如城門。黃池水駛流數十里。滚滚湧出。不離于門。而滙爲深潭如黃池。出乎門而合水于左。大其瀾。勇赴于南者。爲洛東江入于海。蓋太白之觀。至於孔淵而極其奇焉。一行入其門。履氷而仰觀焉。西納天光。東受旭日。風壯氷堅而石危欲崩。忽有山鳩數十。翩翩飛出。羽聲劃然。不覺凜然怵魄。不可以久留矣。土人曰世傳黃池水。舊從山後南流。有龍破開此穴。而水改其道。水之底龍其伏焉。理或然也。行五十里宿洪濟菴。又行六十里抵奉化。路皆重嶺險絶。蓋太白山積土成大。其深莫測。漸高百里。不示其功。如有大人之中德也。游纔三日。而返而出山。便茫然如隔世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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