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새연재ㅣ옛 문헌에 나오는 청량산] <화엄경> 문수보살 관련된 조선 12대 명산

글 박정원 편집장 사진 C영상미디어
  • 입력 2019.10.02 11:02
  • 수정 2019.10.02 13:4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주세붕 첫 <유청량산록>에 퇴계가 발문… 지역적으로 水山으로도 불린 듯

12봉 12대를 가진 청량산 답게 다양한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다. 중앙에 두 봉우리를 연결하는 800m 구름다리가 명물이다. 사진 봉화군청 제공
12봉 12대를 가진 청량산 답게 다양한 봉우리들이 우뚝 솟아 있다. 중앙에 두 봉우리를 연결하는 800m 구름다리가 명물이다. 사진 봉화군청 제공

청량산淸凉山(869.7m)은 이름만으로 보면 전형적인 가을 산이지만 속뜻은 불교 <화엄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화엄경>에 ‘(중국) 화북지방에 청량산이란 명산이 있는데, 그곳에 보살이 상주하고 있다. 그 보살은 문수. 문수보살은 1만여 명의 보살과 함께 살며 항상 설법을 한다’고 나온다. 오대산이 청량산이고, 청량산이 곧 오대산이라는 의미다. 한반도에서는 평창 오대산이 문수보살의 효시이고, 청량산도 그에 못지않다. 지금 한국에 문수사나 청량사, 또는 청량산·오대산·문수산 등의 지명이나 이름은 전부 문수보살과 관련 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그 의미를 모르고 아무렇게나 작명한 산이나 사찰은 관련성이 없겠지만 원래 의미는 그렇다. 

중국의 3대 불교 영산이 오대산(청량산), 보타산, 아미산이다. 중국 오대산은 세계 5대 불교성지에 속한다. 오대산은 중국 불교의 효시이자 문수보살의 효시이기도 한 산이다. 신라 자장율사가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현몽하고 귀국한 설화는 지금까지 전하는 유명한 내용이다. 자장이 귀국한 뒤 문수보살을 현몽한 장소를 찾아 사찰을 건립한 곳이 바로 지금의 오대산이라고 전한다. 

이 정도 되면 삼국시대부터 불교를 국교로 삼은 고대의 역사서에 청량산이 숱하게 등장했을 법한데 어디에도 청량산이란 지명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야사野史를 기록한 <삼국유사>에 몇 부분 등장한다. 

<삼국유사>권3 탑상조에 ‘산중의 고전을 살펴보면, 이 산을 참 성자의 거주처라고 이름 한 것은 자장법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오대산의 문수보살의 진신을 보고자 선덕왕 때인 정관 10년(636) 병신丙申에 당나라에 들어갔다. 처음에 법사가 중국 태화지太和池 가의 문수보살 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기도했더니, 홀연히 꿈에 대성大聖이 4구의 게偈를 주었다. 꿈을 깨고 보니 기억은 하겠으나 모두 범어梵語이므로 해독하지 못하여 망연하였다’고 나온다. 여기 나오는 오대산이 청량산이다. 오대산과 청량산은 동격이면서 오히려 불교적 의미가 더 강하다고 볼 수 있겠다. 

같은 책 권4 의해조에는 ‘자장은 스스로 변방에서 태어난 것을 한탄하여 서쪽에서 불교의 교화를 배우기를 바랐다. 인평 3년 병신丙申에 칙명을 받아 문하의 중인 실實 등 10여 명과 함께 서쪽으로 당에 들어가 청량산(중국 산시성 태원부에 있는 오대산. 오대산은 문수사리의 정토로 전해진다. 산에 만수대성(문수보살을 말하는 것으로 보현보살과 함께 부처의 협시보살로 지혜를 맡고 있다. 이 보살은 중국 산서성 오대산에서 1만 보살과 함께 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 강원도 오대산에 있다고도 하여, 상원사는 문수를 주존으로 모시고 예불한다)의 소상이 있는데, 그 나라에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제석천이 석공을 이끌고 와서 조각한 것”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청량산 5층석탑과 어울린 산세.
청량산 5층석탑과 어울린 산세.

중국에선 청량산·오대산 같은 산으로 봐

같은책 권5 피은조에는 ‘스님은 일찍이 구름을 타고 중국의 청량산에서 머무르며, 대중을 따라 강의를 듣고 조금 있다가 돌아왔다. (중략) 낭지는 산 중의 이상한 나뭇가지 하나를 꺾고 돌아와 바쳤다. 그 스님이 이것을 보고 말하길, “이 나무는 범어로 달제가怛提伽라 부르는데, 이것을 혁赫이라 하고, 오직 서축과 해동의 두 영축산에만 그것이 있다’고 나온다. 

이같이 불교의 성지로 평가받는 족보 있는 청량산이 정사正史에는 기록이 없고 야사에만 소개되는 이유는 ‘신라 수도인 경주에서 어중간하게 떨어져 있는 위치가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라고 판단된다. 당시의 산은 군사전략적인 부분과 신성한 부분을 고려해서 국가에서 지정관리했다. 경주 주변의 산은 야트막한 산까지 통일신라 전에 이미 삼산오악으로 지정하면서 수도 경주를 경비하는 기능을 했다. 동시에 숭배 대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은 여러 군데 나온다. 하지만 청량산은 원래 신라 영토에서 살짝 벗어난 관계로 전국을 5개 지역으로 나눈 오악에 포함되기도, 지방호족세력을 다스리기 위한 소사로 지정하기도 애매한 위치였다. 따라서 명산이자 영산인 동시에 문수보살의 본고장이었지만 명산 취급을 못 받은 대표적인 산으로 꼽을 수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 들어서도 문수보살을 본존불로 봉안한 청량사가 있는 청량산은 여전히 홀대 받는다. 어느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사인 <고려사>에 한 군데도 나오지 않는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 북한산에 있었던 청량사만 <고려사>에 한 줄 정도 비칠 뿐이다. 하지만 전하는 내용으로 청량사 유리보전 현판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온 고려 공민왕이 썼다고 한다. ‘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이란 뜻이다. 왕이 피란 와서 글씨를 남겼을 정도면 정사에 충분히 기록을 남겼을 법한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전설은 전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여하튼 청량산은 고려시대에도 여전히 숨은 명산으로 존재했다. 

청량산 청량사의 한 전각.
청량산 청량사의 한 전각.

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거의 모든 역사서와 지리지, 개인문집에 등장한다. <세종지리지> 경상도 안동 대도호부에 ‘청량산은 재산현才山縣 서쪽에 있다. 청량산 석성은 재산현 서쪽 21리에 있으며, 본부와의 거리가 71리이다’는 내용으로 소개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24권 경상도편에서도 비슷한 내용으로 나오며, ‘치원봉은 청량산에 있으며, 최치원이 여기에서 글을 읽었으므로 이름 지은 것이다. 청량사는 청량산에 있다’는 내용이 추가돼 있다. 여기서 재산현은 원래 덕산부곡德山部曲인데 고려 충선왕이 경화옹주의 고향이라 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으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재산현은 안동도호부의 동쪽으로 보면 지금 봉화쯤 된다.  

최치원이 남긴 작품으로 전하는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事蹟>에도 <여지승람輿地勝覺>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듯 ‘안동부 재산현 서쪽에 위치하며, 최치원이 있었고, 치원암에서 선생이 독서를 하며 머물렀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조선 선비들의 개인문집에는 많은 학자들이 작품을 남겼다. 주세붕도 청량산에 올라 청량산 최초의 유산기로 평가받는 <유청량산록>을 문집에 남겼다. 퇴계 이황은 주세붕의 <유청량산록>에 발문을 썼을 뿐만 아니라 “이 산은 실제로 내 집안의 산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괴나리봇짐을 메고 수없이 이 산을 왕래하며 독서했는데, 그 수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강조했다. 

조선 초 역대 시문선집 <동문선東文選>에는 ‘수산水山’으로 소개된다. 수산의 유래는 전혀 알려진 바 없으나 1998년 안동문화연구소에서 실시한 지표조사에서 ‘수산청량사水山淸凉寺’라고 새겨진 명문기와를 수습하면서 청량산이 수산과 같이 불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됐다. 1901년 출간된 지역 지리지 <오가산지吾家山誌>에도 ‘淸凉山 在才山縣南 古名水山’이라고 나온다. 이로 볼 때 수산이 널리 사용된 건 아니지만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청량산과 혼용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청량산의 명물 구름다리.
청량산의 명물 구름다리.

<택리지> 명산과 명찰편에 청량산·청량사 언급

조선 후기 들어서 대표적인 지리지 <택리지>에는 청량산을 조선의 12대 명산에 포함시켰다. 같은 책 산수편에 ‘명산과 명찰’편에 ‘백두대간 등줄기에서 오직 금강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선유산·덕유산·지리산의 여덟 개의 산이 가장 뛰어나다. 산맥(백두대간) 등줄기에서 벗어나 있는 명산, 칠보산·묘향산·가야산(합천)·청량산 네 개의 산만이 백두대간 여덟 개 산과 더불어 나라 안의 큰 명산으로 은둔자들이 깃들어 수양하는 곳이다. 옛말에 “천하의 명산은 승려가 많이 차지했다”고 했다. 우리나라에는 불교만 있고 도교는 없어서 이 열두 개의 명산을 모두 사찰이 차지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중환은 청량산에 대해서는 ‘태백산맥 한 줄기가 들판으로 뻗어 내려와 예안의 강가에서 뭉쳐 솟구친 산으로, 멀리 밖으로 바라보면 봉우리가 두어 개 있는 흙산일 뿐이다. 하지만 강을 건너 골짜기로 들어가면 사방에 석벽이 만길 높이로 둘러쳐 있어 엄숙하고 기이하며 험준하기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산 안쪽에는 난가대가 있다. 고운 최치원이 바둑 두던 장소인데, 바둑판처럼 생긴 바위가 있으며, 근처에는 한 노파의 석상이 석굴 안에 안치되어 있다. 고운이 산에 머물 때 밥을 지어 주던 여종이라 전해 온다. 산에는 연대사가 있고, 연대사에는 신라의 김생이 손수 쓴 불경이 많다. 근래 한 선비가 절에서 글을 읽다가 불경 한 권을 훔쳤는데 집에 이르자마자 역병에 걸려 죽자 집안 사람들이 두려워서 즉시 절에 돌려주었다고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에는 청량산이 매우 높게 평가된 듯하다. 물론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주세붕과 이황이 즐겨 찾던 산이라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기본 풍광과 얽힌 전설이 어느 산 못지않다는 객관적 사실이 조선시대 들어서 빛을 발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 외에도 <대동여지도>에는 안동도호부로부터 서북쪽으로, 안동 일대를 자세히 묘사한 <영남지도>에는 낙동강 줄기가 흐르는 모습과 함께 상세히 표시돼 있다. 조선 선비들의 기록이 아직까지 전하고, 그 이전 인물인 원효와 최치원, 김생 등은 전설만 전하지만 가을이 깊어가는 10월과 11월 어느 날에 맑고 신선한 청량산을 찾아가면 가을을 다 보낸 듯한 느낌은 충분히 들겠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