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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24세 여성 백두대간 단독 일시종주기 <9>] “자네, 군대는 다녀왔는가!”

글 사진 성예진(블랙야크 셰르파)
  • 입력 2019.09.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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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했던 태백 버스 가사님과 태백산 국립공원 직원 분, 기억에 남아

가스로 뒤덮인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
가스로 뒤덮인 매봉산 고랭지 배추밭.

9월 12일 백두대간 일시종주 19일차

피재(삼수령비)~낙동정맥 갈림길~매봉산~바람의언덕~비단봉~쑤아밭령~금대봉~두문동재(싸리재)~은대봉~중함백~함백산~창옥봉~수리봉~화방재 24㎞

새벽 5시, 알람소리에 잠이 깼다.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창밖을 바라본다. 다행이다. 비가 내리지 않는다. 밤새 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았나보다. 널어둔 옷가지와 침낭을 정리하며 배낭을 챙긴다. 버스 기사님이 말해준 바에 의하면 아침 6시 10분에 터미널에서 삼수령을 지나는 첫차가 출발한다. 6시까지는 나와 있으란 이야기를 떠올리며 서둘러 짐을 정리한다.

밤새 뜨끈한 온돌방에 몸을 맡겨서인지 개운하다. 조금 과장을 보태자면 날아갈 것 같다고 할까. 움직여보니 다리의 피로감이 확연히 줄었다. 걸어봐야 알겠지만 뻐근하던 느낌도 사라진 것 같다. 찜질의 효과를 제대로 본 것이다. 매일 밖에서 노숙을 하며 지내다 연이틀 몸을 지졌더니 이리도 가벼울 수 없다. 

4일을 달려왔기에 휴식일을 언제쯤 가지면 좋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태풍으로 당겨 써버린 4일의 휴식일과 그간 태풍을 전후로 내린 비로 인해 계획한 거리만큼 운행하지 못한 날들이 많다. 매일 적지 않은 거리를 걷는다고 걸었지만 여유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컨디션에 따라 휴식일을 갖기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힘들다고 무턱대고 휴식일을 가지면, 지리산 천왕봉 도착이 기약 없이 미뤄지고 말테다. 몸은 조금 고될 지만 언젠가 한 번은 겪을 고비인데 조금 빨리 찾아온 것일 뿐이라며 나를 채찍질 해본다. 차라리 잘 되었다! 이참에 체력 훈련도 하고 멘탈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지자며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려 노력해본다.

일찍 나선 탓에 태백터미널에 앉아 20분을 기다렸다. 버스 출발 시간을 기다리며 앞좌석에 앉아 기사님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눈다. 내 몸만 한 배낭을 메고 있는 내가 신기하셨던지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한참을 이야기 하다가 “자네 군대는 다녀왔는가” 아저씨의 질문에 웃음이 터졌다. 순간 아침 드라마에서 사위에게 “자네”라고 이야기하는 장인어른의 말투가 떠올라 한참을 웃었다. 

아마도 나를 남자로 착각하셨나보다. 짧은 헤어스타일과 앳된 외모 탓에 항상 오해를 사곤 한다. 대개 처음 만났을 때는 남자로 많이들 착각하시지만 그래도 목소리를 듣고 대화를 나누면 여자로 알아주시던데 아저씨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는듯 질문을 던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이러고 다닐 것이라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내가 여자라고 하니 계속해서 “정말이냐?”고 되물으시는 걸로 보아 정말 생각지 못했던 모양이다. ‘하하 작전 성공이다!’ 차라리 남자로 보이는 게 편할 것 같아 나름의 위장술로 평소보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대간길에 올랐는데 이정도면 만족스러운 결과다.

몇 마디 주고받으며 친해진 기사님과 단둘이 버스를 타고 출발한다. 삼수령을 지나 댓재까지 간다는 완행버스에는 손님이 없다. 기사 한 명, 손님 한 명. 오붓하게 삼수령으로 달려간다. 지나는 주위 풍경은 온통 초록빛 자연이 펼쳐진다. 정말이지 옛날 시골버스에서나 볼 법한 그림이다. ‘덜컹덜컹 달려간다 시골버스야~ 힘차게 달려간다’ 노래 가사가 떠오른다.

문득, 오늘이 추석 연휴의 시작임이 떠올랐다. 대간길에 올라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추석이 오는 줄도 몰랐다. 아무렴 오늘 날짜도 제대로 모르는데 연휴를 챙길 여유가 있을리 없다. ‘추석이라 손님이 없는걸까?’, ‘할머니는 올해도 제사 준비를 혼자하시겠지’, ‘기사님도 연휴에 고생이시네’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늦은 밤 오아시스처럼 반가웠던 삼수령 휴게소. 다음날 아침 주인 내외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늦은 밤 오아시스처럼 반가웠던 삼수령 휴게소. 다음날 아침 주인 내외분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기사님은 추석인 내일도 운행 스케줄이 있다고 하셨다. 기사님은 버스에서, 나는 산에서 추석을 보내는 것이다. 추석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보내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묘한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한 편으론 다행스럽기도 했다. 손님이 없는 시골버스는 조금 더 빨리 달리는 느낌이다. 눈 깜짝할 새 삼수령에 도착했다. 기사님은 “부모님 걱정 시키지 말고 얼른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과 함께 끝까지 몸조심 할 것을 이야기 하시며 내려주셨다.

밤새 태백에 있을 때는 차분하던 마음이 삼수령 휴게소를 보자 다시금 떨려오기 시작한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린 비로 엉망이 되었을 길에 대한 걱정이기도 했지만, 오늘 맞이할 새로운 길에 대한 호기심과 오늘은 또 어떤 여정이 펼쳐질지 알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기대감으로 한껏 들뜬 마음이다.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이른 아침부터 불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 휴게소에 들려 감사함을 전하고 대간길에 오른다. 어제 하루 종일 장대비를 맞으며 고생했던 내게 쉴 곳을 내어준 휴게소였다. 어두컴컴한 숲속을 지나 도로를 처음 만났을 때 기적처럼 불을 밝히고 있던 곳. 그 순간의 반가움이 다시금 상기되며 간밤에 차분해졌던 마음이 떨림으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느끼기엔 별 것 아닌 장소가 대간길에 오른 뒤부터 새로운 감정을 입고서 내게 다가온다.

대간길과 마주하고 있는 ‘령, 재, 치’ 이름의 도로에 ‘00민박, 슈퍼, 휴게소’ 이름으로 오래된 가게들이 있다. 전에는 이런 도로를 지나며 ‘요즘도 저렇게 낡은 가게에 손님이 있을까?’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곤 했는데, 대간길을 걸으며 그 낡은 가게들의 소중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다. 인적 드문 시골 동네와 국도변을 밝히고 있는 이들이 있기에 대간꾼 혹은 이 길을 지나는 누군가 도움을 톡톡히 받았을 테다. 정말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불이 밝혀진 가게를 발견했을 때의 그 반가움이란! 큰 힘이 되곤 한다. 삼수령 휴게소의 주인 내외에게 감사를 전하고 다시 대간길에 올랐다. 

바람의 언덕으로 향하는 아스팔트길을 따라 걷다보니 금세 오솔길이 나온다. 이정표가 잘 되어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겠다. 구불구불 올라가는 길이다. 다행히도 안개가 그리 짙지 않다. 한치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던 어제와 비교하면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수준이다. 내가 걷는 길이 어느 길인지, 어디를 지나가는지 정도는 식별이 가능한 수준이라 길을 찾는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시야가 트이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다만, 여전히 길의 왼쪽 편으로 보이는 산 능성이 쪽은 안개가 자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조망이 멋진 구간인데, 부디 정상에서는 안개가 걷히길 바래본다.

낙동정맥과 백두대간의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곳에 도착해서야 지난 월간<山> 취재 촬영 때 지나온 구간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때 2박 3일간의 촬영 중에서 분명 하루는 삼수령으로 내려온 기억이 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쩜 이리도 기억을 못하는지 길을 걷는 내내 당황스럽기만 했다. 아마 정맥과 대간의 분기점 비석이 없었다면 정상까지 올라서야 겨우 기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시 BAC 인증 지점이라 내리막을 내려가다 잠시 멈춰서 인증했던 기억, 완전히 어두워지기 전 걸음을 재촉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매봉산으로 향하는 길은 내 기억과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풀숲이 무성해 온몸으로 풀숲을 헤치고 지나야했던 길이었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고려해 봐도 몰라보게 달라진 길이다. 저녁에 형님들과 전화하며 이야기 했더니 원래 이맘때의 산이 다 그렇다며 이번 태풍을 전후로 비가 많이 와서 더 그럴 거라며 놀란 마음을 다독여 주셨다.

낙동정맥 분기점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낙동정맥 분기점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전날 내린 비로 빗물이 채 가시지 않았다. 아침 이슬까지 듬뿍 머금은 풀숲을 지나며 온 몸이 흠뻑 젖었다. 시작부터 우중산행을 하는 기분이다. 비 오는 날도 문제이지만 그 다음날도 방수 대비를 하고서 산행을 해야 하는구나, 하다못해 스패츠 정도라도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걸음씩 발을 내딛으면서 몸이 서서히 젖는 것을 느낀다. 더 젖기 전에 ‘자켓을 입을까’ 고민을 했지만 지금 당장 눈앞에 우거진 풀숲에 배낭을 내려두고 옷을 입을 엄두가 나지 않아 한참을 가서야, 다 젖어버리고서야 옷을 꺼내입었다.

결국 몸이 폭삭 젖은 뒤에야 방수재킷과 오버트라우져를 걸쳤다. 그것도 참고, 참다가 점점 고도가 높아지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 순간 한기를 느끼고서야 입었다. 좀 전까지 오르막을 오른 탓에 덥기만 했는데 바람 한 번에 한기가 느껴져 급히 배낭을 벗어 옷을 챙겨 입었다. 몸이 젖은 상태로 바람을 맞으니 여간 추운 게 아니었다. 사실 그 전에 옷을 입을 두어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무거운 배낭을 벗었다가 다시 메기가 귀찮아서 고생만 더한 셈이다. 주위 환경에 맞춰 옷을 입고 벗는, 가장 기본적인 레이어링 시스템을 지켜야 하는데 하마터면 추위에 제대로 고생할 뻔 했다. 방수재킷을 입고 나니 춥지 않았다. 초보 산꾼에겐 이 모든 것들이 생소하기도 하면서도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들에 경험치가 쌓인다. 

어제 오늘 홀로 우중산행을 하다 보니 새삼 백두대간을 함께 걸었던 이들에게 감사해진다. 혼자서 거미줄도 헤쳐야 하고, 안개가 자욱한 숲길에서 길 또한 찾아야 한다. 앞에서 풀숲을 먼저 헤쳐 가며 먼저 길을 터주던 이들에게 감사하게 된다.

안개가 끼고 걷히길 반복한다. 어제보다는 나은 상황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안개가 짙어진다. 매봉산을 절반 정도 올랐을 때쯤 주위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또 다시 시야가 가려버린 것이다. 자꾸만 얼굴을 숨기는 하늘이 무심해질 따름이다.

배추밭 한편에 난 흙길로 터덜터덜 걸어가는데 안개가 만들어낸 몽환적인 분위기가 썩 나쁘진 않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를 미세한 물방울이 얼굴에 떨어진다. 이따금씩 바람이 불며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살짝 보이기도 했다. 배추밭과 어우러진 길은 그 자체로 낭만이 깃들어있다. 도시에서 자라 전원생활에 대한 꿈이 있는 나는 이런 그림을 보면 쉽게 감상에 젖곤 한다. 

다소 힘겹게 매봉산을 올랐다. 옷이 물을 머금어서인지 걸음이 어찌나 무겁게 느껴지던지. 정상석 옆에 앉아 행동식을 먹으며 허기를 채운다. 땀이 식어 한기가 들 때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전체적인 난이도에 비해 유난히 힘들었던 날이다. 조금씩 힘든 마음이 들거나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지인들의 응원이 날라든다. 문자나 전화로 매일 연락하는 분도 있고,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 밴드와 같은 SNS 댓글과 메시지로 응원하시는 분도 계신다. 

월간<산> 기사에 ‘좋아요’와 댓글로 힘을 실어주시는 분들도 있어, 힘들 때마다 큰 힘을 얻는다. 또 별 다른 표현은 없지만 누구보다 내 걱정을 하고 있을 분들을 생각하면 없던 힘도 생기는 기분이다. 매일 같이 카톡이나 각종 메시지가 상당히 많이 와서 일일이 답장할 순 없지만 그 마음은 온전히 느끼며 걷고 있다.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전국에서 보내오는 응원을 생각하며 한 걸음씩 천왕봉을 향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국립공원 탐방로는 그동안 온 길에 비하면 너무 편안해서 행복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국립공원 탐방로는 그동안 온 길에 비하면 너무 편안해서 행복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느새 바람의 언덕으로 내려왔다. 바람의 언덕 직전에 길을 헤매어 20분 동안 주위를 서성이기도 했다. 풀숲으로 향하고 있는 이정표 탓에 길을 잘못 들었는데, 내 키보다 큰 풀숲이었음에도 사람이 지나다닌 발길이 선명했다. 길을 찾고 보니 아마도 그 발길 모두 길을 잘못 든 사람의 것이었으리라 짐작해본다. 엉뚱한 숲속에서 한참을 헤매고 다시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니 20m 아래에 다른 이정표가 있었다. 왜 하필 트랭글 지도는 그 숲으로 길을 안내하는지 정말 여러모로 안개 속에서 길을 잃기 딱 좋은 그런 곳이었다. 풀숲에 몸도 흠뻑 젖고 오늘도 험난한 여정이다.

간간히 바람이 불어오며 이따금씩 멋진 그림이 연출되지만 청옥산 구간에서 삼각대를 잃어버려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 찍을 수 있는 사진이라곤 내 얼굴만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셀카 뿐이라 눈으로만 담으며 바람의 언덕을 유유히 지난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그림 같은 풍경은 마음으로만 담기엔 아쉬워 풍경만이라도 찍기도 하고, 커다란 내 얼굴을 넣고서라도 사진을 몇 장 찍어 보기도 한다. 한 편으론 사진을 찍어줄 누군가 나타나주었으면 했지만 개미 한 마리도 보이지 않더라.

바람의 언덕에서 비단봉 방향으로 내려오는 길은 흙길로만 이루어진 경사가 센 곳이다. 질퍽한 흙으로 변한 내리막을 버둥거리며 겨우 내려올 수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탓에 미끄러워 발이 자꾸만 미끄러진다. 넘어지진 않지만 순간적으로 힘을 줘서 인지 어제 하산 직전부터 느낌이 좋지 않았던 왼 무릎에 통증이 다시금 느껴진다.

바람의 언덕 쪽은 여전히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혹시 전망이 트일까 싶어 ‘조금 더 기다려볼까’ 했는데 곧장 내려오길 잘 한 것 같다. 마을 쪽은 그나마 안개가 덜한데 배추밭에서 산을 바라보니 위쪽은 그 모습을 가리기 바쁘다. 어쩜 저리 수줍은 새색시 같은지. 오늘도 하루 종일 바람에 언덕엔 안개가 짙을 것만 같다.

운행을 하다보면 가끔 고민에 빠진다. 현지의 안내판과 GPS앱 트랭글에서 보이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트랭글은 네이버 기반의 지도로 임도에서 빠져 능선으로 올라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고, 국립공원과 이 지역의 등산로 안내판은 다른 길로 안내하고 있다. 육안으로 판단했을 때는 밭을 가로질러 가는 트랭글의 길이 짧아 보이지만, 태백산국립공원 지역이라 국립공원의 안내를 따라야 한다. 국립공원에서는 정규탐방로가 아닌 코스의 이용을 자제해야 한다. 

이런 걸 보면 네이버 기반의 트랭글 지도는 대략적인 방향만 참고 해야겠다 생각된다. 이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과 다른 옛길들이 너무나 많고 이제는 변형된 길들이 많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고랭지 배추밭이 많다보니 비단봉으로 향하는 등산로에 배추가 널브러져 있다. 수확철을 지난 배추는 그 쓰임을 다한 것인지 뽑힌 채로 밭에 버려져 있거나 여기저기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있다. 

오랜만에 나타난 국립공원이 반갑다. 개척 산행을 하며 걸어온 탓에 잘 닦여진 이 길이 편하게만 느껴진다.  몸이 편안하니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몇 차례 비를 맞으며 걸었더니 새삼 비가오지 않는 날의 산행이 얼마나 쾌적한지 느끼게 된다. 전날 내린 비의 영향으로 온몸이 젖긴 했지만 오늘에 감사하게 된다. 

모처럼 편한 길을 만난 기쁨도 잠시 약간의 이물감이 느껴지던 발목에서 깊은 통증이 느껴진다. 오르막에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내리막을 만날 때마다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는 것이 불안하기만 하다. ‘제발 인대 손상만 아니어라’ 속으로 기도하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안고 걷는 기분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오른쪽 무릎 뒤 힘줄의 통증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왼쪽 발목의 통증과 맞바꾼 느낌이다. 통증이 생긴 뒤로 오른쪽보다는 왼쪽에 하중을 나눠 실은 것이 도움이 되었나보다. 그렇담 이번엔 오른쪽에 힘을 주면 괜찮아질까? 왼발목이 괜찮아질 때까지 이번엔 오른쪽의 힘을 좀 더 빌려야겠다. 혹시 통증이 계속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스럽다. 아직은 심하지 않은 부상이지만 혹여 통증이 깊어졌을 때,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정말 맛있었던 컵라면을 내어준 친절했던 태백산국립공원 직원 아저씨.
정말 맛있었던 컵라면을 내어준 친절했던 태백산국립공원 직원 아저씨.

오르막이 시작되자 축축하게 젖은 등상화가 야속하게만 느껴진다. 그렇잖아도 가볍지 않은 중등산화인데 왜 방수가 제대로 안 되는지, 축축하게 젖은 등산화 탓에 오르막이 더 힘겹게만 느껴진다. 

짧은 시간에 감정이 빠르게 변한다.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일 테다. 편한 길이 나오면 행복했다가 길이 조금만 나빠지면 너무 힘든 나머지 속으로 욕을 퍼붓고 있다. 몇 번을 반복하고 나니, 이런 나의 모습에 스스로 놀란다. 5㎞를 지나며 그 사이 몇 번이나 반복했는지 누가 지금의 내 마음을 본다면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정말 대간길 위에서 조그만 변화에 울고 웃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처음보다 살이 많이 빠진 탓에 오버트라우져 바지가 자꾸만 흘러내린다. 내리막에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바지가 줄줄 흘러내리는 통에 몇 걸음 옮기지 않아 허리춤을 다시 치켜 올려야 한다. 겨울에 입으려면 살짝 큰 사이즈를 사야한다는 말에 그렇잖아도 보통의 바지보다 큰 치수였는데 살까지 빠져버리니 골반에서 잡아주지 못한다. 배낭의 허리 밸트로 겨우 흘러내리는 걸 막고서 걸음을 이어간다.

운행 중간에 최대한 먹는다고 먹어도 장시간 걸어야하는 백두대간이기에 살이 빠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허리가 들어가기 시작했다. 예전에 운동할 때 보이던 11자 복근도 서서히 형태가 드러나고 있다. 얼마 만에 나의 복근을 보는 건지! 새삼 내게 복근이 있었구나 싶다. 지리산에 도착하면 얼마나 살이 빠져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바람은 이 상태만이라도 잘 유지했으면 싶다.

비단봉을 지나 쑤아밭령, 금대봉 길을 걸으며 함께 했던 이들과의 이야기가 떠올라 혼자 피식 웃곤 했다. 전체 구간이 모두 기억나진 않지만, 특정 사물이 인상적인 구간을 지날 때 화두가 던져진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다 기억난다. 추억들을 떠올리며 전화를 해볼까 또 문자를 해볼까 하다가 추석 연휴라 모두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거란 생각에 다음을 기약했다.

두문동재로 내려와 잠시 탐방안내소에서 쉬어간다. 데크에 앉아 쉬려했는데 날이 쌀쌀해 그마저도 여의치 않던 차에 직원분의 배려로 안에서 쉬어갈 수 있었다. 친절한 직원 아저씨께서 날도 추운데 푹 쉬고 출발하라며 배려해주신 덕에 따뜻한 실내에서 잠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내게 컵라면을 건네며 먹어도 된다고 하셔서 넙죽 받아들고 따뜻한 국물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맛보는 라면이 어찌나 맛있던지!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염치 불구하고 맛있게 먹었다. 걸으며 그리 춥다고 느끼지 못했는데 내 몸은 추위와 싸우고 있었나보다. 실내에 있으면서도 춥다는 느낌이 들던 차에 따뜻한 라면은 최고의 만찬이었다. 카레맛 전투식량과 면을 비벼 먹으니 풍미도 좋고, 친절한 직원 아저씨 덕에 여러모로 호강에 겨운 식사였다.

허기를 달래고 주위를 둘러보니 검은 봉지 속 김밥이 눈에 들어온다. 저 검은 봉지에서 컵라면을 꺼내셨는데, 아마 컵라면과 김밥이 함께 있던 걸로 보아 점심식사를 하려 준비해 둔 것인가 보다. 아이고, 내게 점심을 양보하신 것 같다. 그제야 죄송한 마음이 밀려온다. 대간이 끝나면 인사라도 드리러 가야겠다. 이러다 지리산까지 내려가서 다시 북진하며 올라와야 하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길을 지나며 신세를 진 곳들이 너무나 많다. 백두대간 일시종주가 끝나면 감사를 전해야 할 곳이 많아 대간을 걸을 때보다 더 바쁜 나날이 될 것 같다.

아저씨는 오랜 시간 몸담았던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이곳에서 또 다른 인생을 설계하고 계신 분이었다. 나이가 많아도 아직 한라산 정상까지 갈 힘이 있다며 내게 체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산을 사랑하는 마음이 듬뿍 묻어났다. 식사를 마치기 전에 난로도 피워주셨는데 남은 거리가 있어 오래 쉴 수 없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 아쉬웠다. 쉴 때 쉬더라도 얼른 끝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쉬는 게 낫기에 걸음을 재촉한다. 함백산으로 걸음을 옮기는 내게 이번 태풍으로 인해 등산로가 훼손된 곳이 많다며 조심하라고 걱정 섞인 인사를 건네신다.

함백산으로 오르는 길은 이미 정비를 한 번 거친 뒤인지 지나온 길보다는 깨끗한 편이었다. 곧 보수 공사를 하려는지 헬기로 옮겨놓은 자재들이 길가에 있기도 했다. 수낭에 물을 먹으려 호스를 물고 물을 당기는데 물이 시원하다. 그만큼 고도가 높다는 뜻일 거다. 고도만큼이나 쌀쌀해진 공기가 나를 맞는다.

바람이 심했던 함백산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바람이 심했던 함백산 정상에서 인증사진을 찍었다.

오늘 유독 전망대가 많이 들어온다. 그만큼 조망에 좋다는 뜻일텐데, 전망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주변이 온통 안개로 덮여 전혀 보이지 않는다. 조망은커녕 스산한 기운만 감돈다. 올라온 만큼 경치를 볼 수 있다면 힘이 날 텐데, 보상이 없으니 당최 얼마나 올라 온건지 확인 할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고 통 힘이 나질 않는다. 힘이 빠지려던 찰나 많은 사람들이 추석 안부를 전한다. 오르막길에 지쳐가고 있는데 반가운 이들의 목소릴 들으니 힘이 불끈 솟는다. 힘을 얻어 중함백에 오르고 나니 이후부터 함백산과 창옥봉까지 그리 힘들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오르막을 오른다. 대간길에 오르고 숨차게 오르막을 올라본 적이 손에 꼽는다. 워낙 긴 거리를 걸어야하기에 부러 힘을 아껴 천천히 오를 때가 대부분이다. 걸어본 길도 있지만 초행길이 대부분이라 낯선 곳에서 힘을 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이후 어떤 길이 나올지 확신이 없으니 힘을 아껴야 했다. 중함백에서 만항재까지는 지나본 길이라 마음껏 달렸다. 힘들여 높이 올라 흘린 땀방울을 함백산의 바람이 식혀주니 걸음마다 힘이 실린다. 그럼에도 오름은 오름이기에 힘이 들어 잠깐 멈춰 서서 하늘을 보기도 하고, 수줍은 하늘을 대신해 이따금씩 내가 올라온 길도 한 번 봐준다.

길가에 핀 꽃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꽃을 몇 번 흘깃 쳐다보다가 이내 함백산이 야생화로 유명한 사실을 떠올린다. 실내에서 곱게 자란 화초도 좋지만 난 이렇게 거친 환경에서 꽃을 피우는 들꽃에 마음이 간다. 깔끔하게 정리된 돌계단 사이로 노란 꽃이 빠끔히 고개를 내밀고 있다. 곳곳에 소담스레 피어난 야생화를 보니 잔잔한 감동이 울려 퍼진다. 거칠던 호흡은 어디로 가고 없고 마음 한편에 따스함이 자리한다. 힘이 남아 빨리 오르기만 했다면 이런 감동은 느낌 못했을 것이다. 때로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덕에 감동 받는다.

이런 마음을 시샘하는지 함백산 정상에 오르자 칼바람이 맞이한다. 정상석 부근은 어떤 계절이고 올 때마다 세차게 불어대는 바람 탓에 잠시 서있어도 금세 추워지곤 한다. 인증 사진만 남기고 서둘러 내려간다. 함백산 정상은 이미 여러 번 와서인지 별 다른 감흥이 없었다. 더욱이 주변 풍경을 꽁꽁 감춰버린 함백산이 반가울리 없었다. 다만, 익숙한 곳이기에 ‘어느새 이곳까지 내려왔구나’ 기쁨은 있었다.

높은 고지에 한 번 올라서서인지 창옥봉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한 산책길 같았다. 마치 제주의 오름길 같다. 둘레길처럼 편안했다. 간만에 편안한 길을 지나니 정말 행복했다. 이렇게 편해도 되는걸까 싶을 만큼 좋은 길에 모처럼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만항재로 내려와 ‘야생화 천국 화원’을 둘러보고 만항재 휴게소로 올랐다. 사실 처음엔 이곳이 백두대간 등산로 인줄 알고 들어갔는데 알고 보니 등산로가 아닌 부러 야생화를 심어둔 산책길이었다. 저 멀리 바라보니 만항재 휴게소와 길이 연결되어 있어 이미 발걸음을 옮긴 뒤라 겸사겸사 한 바퀴 둘러보고 휴게소로 올라갔다. 설명을 자세히 보니 해마다 태백에서 열리는 야생화 축제를 이곳에서 하는 것 같았다. 기왕 들어온 거 찬찬히 구경을 하며 여유를 즐긴다. 시간에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원래 코스는 바로 옆의 차도로 오르는 것이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항재 휴게소에 올라 비로소 만항재(1,330m)의 제일 높은 곳을 딛는다.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갯길로 알려져 있다. 예전에 자전거를 탈 때 태백을 자주 왔는데 바로 이 만항재 덕분이다. 이 길에는 함백산도 있고, ‘운탄고도(석탄을 운반하던 구름이 펼쳐진 길)’ 이름을 가진 임도길도 있어 MTB를 타는 사람들에겐 투어로 꼭 와봐야 하는 곳 중 하나로 손꼽힌다.

휴게소에 앉아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이들을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잠시 옛 추억에 잠긴다. 지금이야 국립공원에서 자전거의 출입을 대대적으로 금지하며 함백산 입구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지만 불과 5~7년 전만 하더라도 임도로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함백산은 많은 라이더들에게 사랑 받는 코스 중 하나였다. 자전거로 함백산을 오를 때는 정말 내가 이 길을 두 발로 걸어서 지날 거라 생각지 못했는데, 새삼 내가 자전거가 아닌 두 발로 대간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 대간을 끝내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정말 1년 전만 하더라도 내가 백두대간을 걷고 있을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으니 이 대간이 끝나고 나면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다소 부족했던 사전 조사로는 화방재에 아무것도 없었다. 네이버 지도상에도 주유소만 있는 것으로 나와 이곳 만항재 휴게소가 마지막 매점이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화방재에 새로 생긴 으리으리한 휴게소가 있었다. 만항재 휴게소 이모님께 여쭤도 화방재엔 별 게 없다고 해서 만항재에서 메밀전병과 콜라, 커피로 배를 든든히 채우고 화방재로 향했다. 마지막 수리봉은 그리 어렵지 않기에 거의 두 시간 가량 앉아서 여유를 즐기며 천천히 배부르게 먹고 화방재로 향했다.

천천히 오르며 수리봉에 앉아 한참 쉬기도 하고 그렇게 쉼없이 달려온 보상을 실컷 누리며 천천히 마무리를 했는데 화방재에 내려오자 웬걸? 새로 지은 신식 휴게소가 눈에 들어온다. 휴게소가 있는 줄 알았으면 얼른 이곳으로 넘어와 편히 쉬는 건데, 허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몰랐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도 덕분에 다음날 아침으로 샌드위치와 콜라를 살 수 있으니 아주 불만은 아니었다. 화방재 휴게소 맞은편에 텐트를 치고 긴긴밤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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