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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에코트레일ㅣ48~49구간 선자령 르포] ‘영嶺’이라 불리는 ‘산山’ 등산객과 전쟁 벌이는 까닭은?

글 신준범 기자 사진 주민욱 기자
  • 입력 2019.12.23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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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목재~고루포기산~대관령~선자령~노인봉~진고개까지 비법정·사유지 피해 널뛰기 산행

고루포기산을 넘어 능경봉으로 향한다. 산행 대장격의 셰르파들답게 효율적인 장비와 안정적인 운행으로 능선을 주파한다. 박춘영 셰르파(왼쪽)와 변재수 셰르파.
고루포기산을 넘어 능경봉으로 향한다. 산행 대장격의 셰르파들답게 효율적인 장비와 안정적인 운행으로 능선을 주파한다. 박춘영 셰르파(왼쪽)와 변재수 셰르파.

“저희는 주말마다 등산객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협조는 어렵겠습니다.”

삼양목장 관계자의 말에 잠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비법정 구간을 가지 않는 블랙야크 에코트레일 원칙대로, 비법정 경계인 매봉까지 갔다가 되돌아 나오려 했으나 삼양목장 관계자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한편 이렇게까지 단호한 말로 거절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골자는 이렇다. 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를 잇는 26㎞에는 국도나 지방도가 없다. 많은 대간꾼들이 당일산행으로 이 구간을 주파하는데, 매봉에서 진고개까지는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하며 4분의 3 정도를 비법정으로 묶어놓았다. 매봉에서 선자령까지는 삼양목장이 산림청으로부터 임대 받은 땅이라 ‘출입금지’ 안내판을 세워놓았지만, 등산객이 들어와서 골칫거리라고 삼양목장 측은 설명한다. 

시야가 뻥 트인 선자령 초원을 걷는 블랙야크 셰르파들.
시야가 뻥 트인 선자령 초원을 걷는 블랙야크 셰르파들.

특히 매봉과 곤신봉 사이의 동해전망대에는 임도가 있어 삼양목장 관람객을 위한 투어버스가 운행하는데, 입장료를 내지 않고 능선으로 들어온 등산객들이 무단으로 버스를 타고 하산한다고 하소연한다. 초원지대라 경치가 시원해 일반 등산객과 야영을 즐기는 백패커들도 많이 찾는데, 이들과 주말마다 문제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일대를 관할하는 산림청 국유림관리소는 “등산객들에게 삼양목장으로 인한 민원을 엄청 받아왔다”며 담당자도 곤혹스러운 입장이라 설명했다. 삼양목장은 1972년부터 정부 차원에서 허허벌판이던 매봉과 곤신봉 일대를 목장으로 개발했다. 이곳에는 법적 등산로가 없고 목장에서 만든 사유 임도만 있어, 산행을 막는 것이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목장 훼손지로 손꼽히지만, 법적으로 ‘산림’이 아닌 ‘초지’로 되어 있어 ‘초지법’ 적용을 받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한다. 

수십 년 동안 법적 문제없이 사용해 온 삼양에게 갑자기 나가라고 하긴 어렵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다만 데크를 설치해 백두대간 등산로 개설을 고민 중이지만, 막대한 예산이 들며 국립공원 측과의 협의도 있어 단시일에 해결하긴 어렵다고 전했다. 

선자령 정상 부근의 풍경. 바람이 워낙 강한 곳이라 나무도 키가 작다.
선자령 정상 부근의 풍경. 바람이 워낙 강한 곳이라 나무도 키가 작다.

사람에게 상처 받은 산이 주는 선물

아직 가을이 남아 있었다. 닭목령 산신각 옆 임도로 들자, 국경이 바뀌었다. 산국으로의 입국은 감당할 수 없는 크기로 덮쳐오는 고요를 감당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강릉의 소금기 곁들인 바람이 해일처럼 능선을 쓸고 갈 줄 알았는데, 상큼한 바람이 봄날처럼 따뜻한 손길을 건넸다. 동행한 이는 블랙야크 변재수 셰르파와 강릉 토박이 김재효 셰르파, 대구에서 온 박춘영 셰르파다. 최소 한 번 이상 함께 대간을 탔던 이들이라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다. 

감미로운 느낌은 잎갈나무 탓이다. 단정하게 뻗은 키다리 나무들이 끝없이 노랗고 가는 잎을 흩날리고 있었다. 이토록 아리따운 특수 효과라니, 예상치 못했으나 매료되었음을 두근거리는 마음과 떨어지지 않는 걸음에서 알 수 있었다. 아무 냄새가 없는데, 격이 높은 영혼의 향기가 풍기는 것 같았다. 

미세한 조건들이 맞아떨어지며 우연히 만들어진 감각의 천국. 자연이 주는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언제부턴가 사는 것이 전쟁이 된 시대, 그 전쟁에 다쳐 쓰러진 사람들 모두 데려다 놓고 싶었다. 골 아픈 생각 잠깐 잊고, 잎갈나무 좀 보라고 말하고 싶다.

고루포기산은 아름다운 산이 아니다. 고랭지 밭, 풍력발전기, 임도, 용평스키장이 점령해 뜯길 대로 뜯긴 상처 받은 산이다. 다 내어주고도 아직 챙겨 줄 것이 남았다는 듯, 시골집 꼬부랑 할머니처럼 선물 같은 풍경을 괜찮다는데도 자꾸만 들이민다. 

고루포기산 정상에 오른 취재진. 변재수 셰르파(왼쪽)와 박춘영 셰르파(가운데).
고루포기산 정상에 오른 취재진. 변재수 셰르파(왼쪽)와 박춘영 셰르파(가운데).

임도를 버리고 산길로 들자 광활한 고랭지 밭이 가까이 다가온다. 고루포기산은 꾸준히 키를 높이지만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하지는 않는다. 곳곳에 벤치 쉼터가 있어 의도치 않게 속도가 느려진다. 안반데기를 곁에 두고 끈덕지게 능선을 올려치자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좁은 고루포기산(1,238.3m) 정상이다. 신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둘러싸고 있지만 가지가 앙상해 하늘이 가깝다.  

정상을 내려서자 용평스키장이 한눈에 보이는 데크전망대가 반긴다. 드문드문 지나는 차를 셀 수 있을 만큼 한적한, 스키 시즌 직전의 용평이 얼마 남지 않은 한갓진 시간을 즐기고 있다. 복자기, 피나무가 추가된 빽빽한 숲을 지나 능경봉을 오른다. 모처럼 나타난 비탈이 온 신경을 산에 몰두하게 만든다. 정상이 아득할수록 호흡이 가빠온다. 호흡의 고통이 끝으로 치달으며 정상이 가까워온다. 고통의 리듬이 모든 걸 삼킬 무렵, 정상이다. 

오늘 처음 만나는 바다다. 강릉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보상 같은 시원한 바다가 와락 안겨온다. 곧 추위에 떨게 될 것을 알면서도 당장은 땀에 전 몸을 바람 속에 밀어 넣는다. 

중력을 핑계 삼아 내리막을 빠르게 내려선다.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 젊은 전나무들이 늘어서서 중년으로 접어들 준비를 하고 있다. 대관령 신재생 에너지전시관 주차장에서 오늘 산행을 마친다.  

해넘이가 시작되면 선자령 초원은 황금빛 옷을 갈아입는다. 곧 해가 진다는 걸 알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해넘이가 시작되면 선자령 초원은 황금빛 옷을 갈아입는다. 곧 해가 진다는 걸 알면서도 아름다운 풍경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전형적인 천고마비의 아침이었다. 문제의 대관령~매봉 구간, 매봉까지 걸어갔다가 온 길을 걸어 나오기가 번거로워, 삼양목장을 차로 올라 매봉에서 산행을 시작해 대관령으로 나오는 역종주를 하려 했으나 입구에서 막혔다. 그렇잖아도 등산인들 때문에 골치를 썩고 있다며, 백두대간 취재에 협조해 줄 수 없다는 것. 여기저기 연락해 사정을 듣고 보니, 일리 있는 거절이다. 대관령에서 산에 깃든다.    

선자령은 유명하다. 완만해서 산행이 쉽고, 초원이라 개방감이 탁월하며 겨울엔 적설량이 많아 대중적인 심설산행지로도 인기 있는 곳. 강원항공무선표지소에서 임도를 버리고 숲에 든다. 얼마 안 가 왜 인기 산행지인지 몸소 보여 준다. 데크전망대에서 강릉 앞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선자령에 다가가자 초록색 카펫을 깐 결이 고운 초원이 넓게 드러난다. 초록과 파랑으로 밑그림을 하고 풍차와 구름이 흰색을 더한, 르네상스 시대 작품 같은 서정적인 그림이 한 굽이 넘을 때마다 새롭게 펑펑 터진다.    

겨울 분위기로 접어든 앙상한 숲길을 빠르게 치고 오른다. 완만한 곳이 많고 오르막이 길지 않아, 다른 구간에 비해 산행이 쉬운 편이다.
겨울 분위기로 접어든 앙상한 숲길을 빠르게 치고 오른다. 완만한 곳이 많고 오르막이 길지 않아, 다른 구간에 비해 산행이 쉬운 편이다.

매봉·소황병산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곳곳에서 윙윙 소리를 내며 바람의 왕국임을 과시하고 있다. 바람으로 전기를 만드는 기술은 친환경적이지만, 풍력발전기를 위해 파헤쳐진 무수한 임도와 비만 오면 흘러내리는 토사. 자연을 위해 자연을 파괴해야 하는 모순, 명확한 해답을 찾기 어렵다.  

선자령 정상에 오르자 곰 같은 덩치의 표지석이 반긴다. 선자령仙子嶺은 엄밀히 따지면 고개가 아닌 봉우리지만, 지형이 완만하고 여러 길이 만나는 곳이라 ‘령嶺’이라 불리게 되었다. 강릉에서 보면 성벽처럼 긴 산줄기가 완만한 흐름으로 뻗어 있어, 어디를 오르더라도 내륙과 강릉을 잇는 길목(고개) 역할을 하였기에 ‘령’이라 불리게 되었다. 〈산경표〉에는 선자령이 ‘대관산大關山’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대관령이란 지명도 여기서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능경봉 정상에 오른 취재진.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의 변재수 셰르파와 깔끔한 등산복차림의 박춘영 셰르파.
능경봉 정상에 오른 취재진. 개성 있는 헤어스타일의 변재수 셰르파와 깔끔한 등산복차림의 박춘영 셰르파.

봉우리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부드러운 곤신봉(1,127m)이 오라고 유혹한다. 너른 임도를 따라 일단 진행한다. 산행보다는 걷기길 답사에 가깝다. 임도가 이끄는 대로 쉽게 고도를 높이자, 작은 전망바위가 있는 곤신봉이다. 삼양목장에서 세운 출입금지 안내판이 있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정면으로 보이는 매봉과 소황병산 산행을 포기한다. 대간꾼이 대간을 걷지 못하고 돌아가는 마음이 편치 않다. 

오후가 깊어질수록 바람이 거세지고, 기온이 급격히 떨어진다. 저무는 해는 초원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며, 좀더 머물라고 붙잡는다. 대관령으로 빠져나오자 금세 어둠이다. 숙소로 돌아가 하루를 마무리한다. 

비법정 구간과 삼양목장 사유지를 에둘러, 진고개로 향한다. 노인봉(1,338m)을 올랐다가 다시 진고개로 돌아오는 편도 4km, 왕복 8km의 짧은 산행이 이번 달 마지막 대간 산행이다. 진고개 고도가 해발 950m로 해발 400여 m만 높이면 되는 간단한 산행이다. 진고개휴게소를 옆에 두고 곧장 숲으로 든다. 낙엽이 이슬에 젖은 냄새가 숲을 메웠다. 낙엽은 좋았던 시절을 추억하는지 달달한 향이 난다. 경치는 없지만 잡념을 씻어내기 좋은 오르막이다. 

노인봉 정상에 올라서자, 매끈한 바위가 산해진미마냥 풍성한 경치를 보여 준다. 비법정이라 갈 수 없었던 소황병산이 부드러운 소의 등걸마냥 뻗었다. 바다 수평선은 기본이며, 가야 할 오대산 첩첩산중도 드러난다. 

진고개로 향한다.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는 지루한 코스. 살다 보면 정상을 포기할 때도 있고, 온 길을 되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고 백두대간이 말하는 것만 같다.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선자령을 호령하듯 곳곳에 서 있다.
거대한 풍력발전기가 선자령을 호령하듯 곳곳에 서 있다.

선자령 구간 종주 가이드

비법정 구간과 삼양목장 출입금지 구간으로 인해 당일 산행 세 번으로 나눴다. 닭목재에서 고루포기산·능경봉 넘어 대관령까지 14km로 하루에 산행하기 제격이다. 5~6시간 정도 걸리며 초반 임도를 따라 걷다가 산길로 든다. 길찾기 어렵거나 위험한 곳은 없다. 

합법적인 코스는 대관령에서 선자령까지다. 선자령 이후는 출입을 금지한 사유지다. 사람이 지키며 통제하거나 철조망 같은 것이 있지는 않아, 가고자 한다면 갈 수는 있지만 매봉부터 노인봉까지도 오대산국립공원 비법정 구간에 속한다. 

선자령 일대는 강릉에서 조성한 걷기길이 많아 헷갈릴 수 있다. 대간 종주는 능선의 도로를 따르다가 산길로 드는 코스다. 대관령휴게소 쪽의 사면 숲길로 가더라도 선자령 정상으로 연결된다. 진고개에서 노인봉 오르는 코스는 외길이라 쉽고, 국립공원이라 이정표가 있다. 

교통

507번 버스가 강릉 시내의 공단을 출발해 닭목재를 넘어 고단리로 운행한다. 강릉역에서 버스정류장이 800m, 버스터미널에서 900m 떨어져 있다. 강릉역에서 닭목재까지 20km 거리. 산행이 끝나는 진고개는 운행하는 버스가 없다. 강릉보다 평창 진부가 가까우므로 택시를 불러 진부로 가야 한다. 진부에는 경강선 KTX와 버스가 운행한다. 택시요금은 2만5,000~3만 원 정도. 문의 진부택시(033-335-1050, 334-9208, 335-0088).   

맛집(지역번호 033)

강릉 토박이가 추천하는 맛집은 토담순두부(652-0336). 주말 점심의 경우 줄을 설 정도로 인기 있는 맛집이다. 대표 메뉴는 순두부전골(9,000원)과 두부전골(9,000원)이며 2인분부터 가능하다. 허름한 시골집 분위기의 순두부 전문점으로 순두부를 매콤한 양념에 끓여낸 전골이 가장 인기 있다. 가정식 느낌의 깻잎, 무말랭이, 김치, 어묵, 미역줄기가 밑반찬으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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