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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화제ㅣ재미교포 조수경씨] 설악산의 기적!

글 김기환 차장
  • 입력 2020.01.0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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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아빠 사진 들고 홀로 설악산 올라… 김융기씨 만나 옛 소속 산악회 극적 연결

조수경씨가 김융기(어센트산악회, 오른쪽), 박영호(타이탄산악회)씨와 포즈를 취했다.
조수경씨가 김융기(어센트산악회, 오른쪽), 박영호(타이탄산악회)씨와 포즈를 취했다.

지난 11월 중순, 한국 방문이 처음이라는 미국 국적의 한국계 여성이 설악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사진을 보여 주며 서툰 한국말로 사진 속의 장소가 어딘지를 묻고 또 물었다. 아빠가 젊었을 때 설악산에서 찍은 사진이라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그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바위와 빙벽을 배경으로 서 있는 니커보커스를 입은 청년은 분명 전문등반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가 산에 다닌 것 같은데 소속 산악회가 어딘지 알아요?”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이든 산꾼 한 명이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10년 전 미국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온 그녀가 가진 단서는 스마트폰 속의 아버지 사진이 전부였다. 그녀의 사연을 전해들은 산꾼은 옛날 사진 속의 클라이머가 더욱 궁금해졌다. ‘아버지의 산’을 찾아 온 그녀에게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

LA에 사는 재미교포 조수경(33)씨가 설악산에서 만난 산꾼은 어센트산악회 김융기(67)씨였다. 이들의 우연한 만남은 소설 같은 이야기의 시발점이 된다. 수경씨는 아빠가 올랐던 설악산을 본 것으로 한국 방문 일정을 마치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김융기씨 덕분에 아버지의 옛날 동료들과 연결됐고, 많은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아빠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다.

조수경씨의 아버지 조광열씨의
타이탄산악회 활동 당시 사진.
조수경씨의 아버지 조광열씨의 타이탄산악회 활동 당시 사진.

“사진을 보니 인수봉, 주봉에서 클라이밍을 했더군요. 빙벽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어요. 1970년대 산꾼이라면 몇 군데만 전화를 해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살던 지역과 산악회를 잘 몰라서 처음에는 혼선이 있었어요. 다음날 수경씨 엄마와 통화해 서울 타이탄산악회 소속이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김융기씨는 타이탄산악회 창립회원 박영호씨에게 연락해 ‘미국에 살던 조광열’을 아는지 물어봤다. 전화를 받은 박영호씨 역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후배의 딸이 아빠가 다녔던 산을 보기 위해 한국을 찾아 왔다니 믿기 힘든 일이었다. 곧바로 시간을 내서 그녀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었다.

박영호씨는 “광열이 죽기 전에 겨우 얼굴 한 번 본 것이 전부였는데, 그 딸이 아버지가 다니던 산을 보러 왔다고 하니 만감이 교차했다”면서, “등반을 핑계로 도미할 때 내가 신원보증을 했다가 한동안 당국의 조사에 시달렸는데, 광열이가 그걸 너무 미안해 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조수경씨가 간직하고 있던 설악산에서 등반 중이던 아버지 조광열씨 사진.
조수경씨가 간직하고 있던 설악산에서 등반 중이던 아버지 조광열씨 사진.

아빠 사진 속의 설악산 확인 위해 첫 방한

“아빠가 돌아가신 뒤 생각나고 보고 싶으면  산으로 갔어요. 어릴 때부터 오빠와 저는 늘 아빠와 산에서 놀았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클라이밍과 캠핑을 하며 옛날에 산에 다니던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그때의 추억 때문에 따로 휴가를 내서 설악산을 찾게 됐습니다. 아빠가 젊었을 때 다녔던 곳을 직접 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사진 속의 장소는 거의 다 클라이밍을 해야 갈 수 있다고 하더군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한국에서 클라이밍을 해보고 싶어요.”

수경씨는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아빠의 옛 동료들과 여러 번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조광열씨와 친분이 있던 산꾼들은 세상을 떠난 자일파트너의 딸에게 밥 한 끼 먹이겠다며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그렇게 그녀는 한국 산쟁이들의 정을 온몸으로 경험했다. 설악산을 보겠다며 비행기에 오를 때만 해도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이다.

조수경씨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기념촬영을 했다.
조수경씨가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기념촬영을 했다.

“영호 아저씨가 주신 <타이탄산악회 50년> 책에서 아빠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렀습니다. 무작정 한국으로 날아왔지만 이렇게 아빠의 흔적을 많이 만나게 될지 몰랐습니다. 이 상황을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면 말도 안 된다고 난리예요. 하늘에 계신 아빠가 저에게 이런 기회를 주신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에 와서 기적을 경험하고 갑니다.”

조수경씨의 아버지 조광열씨는 1971년 타이탄산악회에 입회해 활동하다 1981년 도미했다. 조씨가 미국으로 떠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월북해 국내에서 정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연좌제가 엄격하게 적용되던 시절이라 월북자 가족은 취직이 불가능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에 정착했지만, 한국 산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옛날 사진을 스캔해 아이들에게 보여 주며 젊은 시절을 추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수경씨가 설악산에 갔다가 옛날 산꾼들의 눈에 띈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세상 좁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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