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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에코 트레일ㅣ설악산 구간 역사] 몽골 침입 피했던 최후 피란처

글 신준범 기자 사진 C영상미디어
  • 입력 2020.02.1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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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산등성이에 쌓은 최후의 산성, 한계산성과 권금성 있어

한계산성 남문.
한계산성 남문.

역사 속의 설악산은 원나라의 침입에 맞섰던 항쟁의 공간이다. 설악산에는 한계산성과 권금성이 있다. 한계산성은 내설악 안산鞍山(1,430m) 남쪽 계곡을 에워싼 석축산성이다. 대승령 부근 안산의 주능선과 지능선을 아우르는 산성으로 둘레 1.9㎞, 높이 1.3m였으니 제법 큰 산성이었다.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한계산성 망경대에서 고려와 후백제군이 대치해 혈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서, 신라가 망했음을 실감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사>에는 고종 46년(1259) 몽골군이 한계성을 공격했으나, 산성방호별감 안홍민이 야별초를 거느리고 출격해 무찔렀다는 기록이 있다.

한계성은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으로 나뉘어 있으며, 예부터 주민들이 상성을 ‘대궐 터’라 불렀다고 한다. 몽골 침입 때 험한 설악의 산세를 방패로 활용해 성을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

천 길 낭떠러지 바위능선에 산성을 쌓았고, 7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을 감안하면 당시 몽골군이 얼마나 흉악스러웠으며 악명이 높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계산성은 너무 험해 워킹산행으로는 전체 답사가 불가능할 정도다.

권금성은 외설악에 있는 석축산성이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일명 설악산성, 토왕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성 둘레는 630m였다고 한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 권씨·김씨 두 집안이 여기에 피란한 까닭에 권금성이라 이름 붙였다고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 성을 쌓아서 수어하였다’고 했는데, 아마도 이 성일 것이라고 한다. 험준한 바위명산 설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산을 넘어 사람 목숨을 지키는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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