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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감동산행기] 주왕산에서 찾아본 ‘주왕’의 정체

경남 양산시 양주로 장재화
  • 입력 2020.02.2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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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산 주왕암 앞에 선 필자.
주왕산 주왕암 앞에 선 필자.

세종대왕의 정비 소헌왕후 심씨의 본향인 경북 청송의 주왕산(722m)은 아름다우면서 장중하고 기이한 산이다. 산세가 그렇고 전설이 그렇다. 그래서 이양록은 <유주왕산록>에서 주왕산을 일컬어 ‘산이 높고 가팔라 마치 쇠항아리 속에 들어 앉은 것 같다’고 표현했고, <택리지>를 쓴 이중환도 “돌로써 골짜기와 마을을 일구어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하는 산”이라는 후한 평을 남겼다.

산행 들머리는 주왕산주차장에서 가까운 대전사다. 절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우람하면서도 헌칠하게 생긴 바위봉우리가 시선을 압도한다. 기암旗岩이다. 당나라 덕종 15년, 동진의 주도는 스스로를 후주後周의 천황天皇이라 자칭하며 군사를 동원하여 수도 장안을 공격했다. 그러나 곽자의에게 참패하자 소수의 병력과 가솔을 거느린 채 요동을 건너 신라 땅에 잠입, 주왕산으로 들어와 재기를 꾀한다. 그러나 당나라의 요청을 받은 신라군의 대장 마일성의 손에 최후를 마쳤다. 그때 마일성 장군이 대장기를 꽂았다는 바위가 이 기암이다.

대전사는 신라의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그러나 고려의 나옹선사는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절 이름을 대전사로 바꾼다. 이렇듯 주왕산의 모든 골짜기와 바위, 동굴에는 주왕 일가의 전설이 석회암 동굴의 종유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대부분의 국립공원처럼 등산로는 분명하고 이정표도 잘 정비되어 있다. 매표소를 지나 대전사 경내를 가로질러 부도탑을 지나면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 구름다리를 건너는 길은 장군봉과 금은광이를 지나 달기약수터로 이어진다. 오른쪽 길로 들어서서 특산물 상가를 지나가면 다시 갈림길. 왼쪽은 기암교를 지나 주왕굴로 가는 길이다. 오른쪽 길을 택해 정상으로 향한다. 가파른 길이 계속되지만 크게 힘들지는 않다.

산행 1시간 만에 헬기장이 있는 정상에 선다. 주왕 덕분에 주왕산周王山이란 이름을 얻었지만, 그 이전에는 기기묘묘한 암벽이 돌병풍과 흡사해 석병산石屛山이라 했고, 신라의 왕자 김주원이 이 산에 은거해 수도했다고 해서 주방산周房山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한동안 완만하던 능선 길은 갑자기 내리막으로 바뀐다. 급경사를 내려오면 계곡. 길은 계곡을 끼고 이어진다. 맑은 물에 구름이 잠겼고, 굽이굽이 돌아가던 물은 기암절벽과 만나 선경을 이룬다. 후리메기 삼거리에 닿는다. 오른쪽 길은 가메봉 가는 길이다.

왼쪽 다리를 건너간다. 40여 분을 걸어 나무계단을 내려오면 후리메기 입구. 여기서부터는 산길이라기보다는 탐방로다. 곳곳에 세워진 이정표가 명소를 안내하고 있다.

넓은 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내려오면서 폭포부터 먼저 감상한다. 주왕산에서 가장 웅장한 3폭포, 달 밝은 밤이면 선녀가 내려와 목욕했다는 2폭포,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이 위태로운 절벽 사이에 가설한 철제 잔교를 걸으며 1폭포를 지난다.

한국의 자연 100경 중의 하나라는 학소대는 건너편 병풍바위와 어울려 절경을 연출하고, 시루봉은 이름처럼 떡시루를 닮았다. 이리 보면 기암이요 저리 보면 괴석이라, 시끌벅적 왁자지껄한 기암괴석의 만다라가 이 골짜기 안에 펼쳐진다.

일부 학자들, ‘주왕’은 백제 문주왕이라 주장

길 양옆으로 주왕의 아들 대전과 딸 홍련이 달구경했다는 망월대, 바위 위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렸다는 급수대, 주왕이 무기를 숨겼고 군사를 조련했다는 무장굴, 물을 마시기 위해 나오던 주왕이 화살에 맞아 죽었다는 주왕굴, 홍련이 비구니가 되어 깨달음을 얻었다는 백련암 등 온통 주왕 일가와 관련된 전설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주왕이 광활한 중국 땅의 수많은 오지를 마다하고 신라로 들어와서 주왕산에다 산성을 쌓고 재기를 노렸다는 기록은, 대전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주왕전>에서나 나타날 뿐, 정사正史의 기록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까닭으로 어떤 학자들은 전혀 다른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3만의 군사를 이끌고 한성을 공격하자 백제의 개로왕은 왕자 문주를 신라로 보내 원군을 요청한다. 문주가 신라의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오지만 때는 이미 늦어 한성은 점령되었고 왕마저 사망한 뒤였다.

개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백제의 22대 문주왕文周王은,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고 국력 신장을 위해 애쓰지만 패전이 불러온 백성들의 사기저하, 귀족들 간의 갈등으로 뜻을 펴지 못했고 왕권조차 허약했다. 결국 병관좌평 해구에게 실권을 빼앗겨 전전긍긍하다가,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되어 재위 3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를 기반으로 일부 학자들은 해구의 암살 위협을 피해 문주왕이 주왕산으로 들어왔고, 세월이 흐르면서 문주왕의 ‘문’은 빠지고 주왕만 남았을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전설의 실제 주인공은 문주왕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왕이든, 문주왕이었든 간에 두 사람 모두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고 그들이 흘린 피는 주방천의 맑은 물을 붉게 물들였을 게다. 그 후, 주방천 물가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붉은 꽃이 피어났으니 사람들은 그 꽃을 수달래, 수단화水丹花, 혹은 수단화壽斷花라고 부른다. 진달래를 닮은 그 꽃은 이름마저 전설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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