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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연재ㅣ옛문헌에 나오는 광양 백운산] 조선 중기까지 백운산보다 백계산 사용

글 박정원 편집장 사진 C영상미디어
  • 입력 2020.04.03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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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대 제작된 <팔도총도>에 백계산으로…1680년 <동여비고>엔 백운산 병기

현존 목판본 인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팔도총도></div>에 나오는 전라도 지도. 백계산이라고 표시돼 있다.
현존 목판본 인쇄지도로는 가장 오래된 <팔도총도>에 나오는 전라도 지도. 백계산이라고 표시돼 있다.

광양 백운산白雲山(1,222m)은 남한 23개 백운산 중에 가장 명산으로 꼽힌다. 몇 가지 이유가 전한다. 우선, 광양 백운산에서 나오는 고로쇠 수액을 가장 으뜸으로 평가한다. 그 유래도 진위여부를 차치하고 재미있다. 신라가 삼국 통일 직전 백제와 전투를 벌이다 백제군들이 패전 직전의 상황에 처했다. 후퇴를 거듭하다 백운산에서 고로쇠 수액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 전세를 뒤집었다고 전한다. 또 통일신라 말기 도선 국사가 오랜 좌선 후 일어서려 했으나 다리를 펼 수 없어 겨우 옆의 나무를 잡고 일어섰다. 잡은 나무가 부러지면서 수액이 흘러나왔다. 도선 국사는 그 물을 마시고 원기를 회복하고 다리 통증도 사라졌다고 한다. 도선은 나무의 이름을 뼈에 이롭다는 의미로 ‘골리수骨利樹’로 불렀다고 전한다. 이후 음운변화로 고로쇠로 명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로쇠 수액의 원조로 광양 백운산을 꼽는다.

또 신라 말기 한국 풍수의 창시자로 통하는 도선 국사가 창건하고 수도한 사찰인 옥룡사가 백운산 끝자락에 있으며, 옥룡玉龍이 바로 도선의 자子인 것이다. 도선이 옥룡사를 창건하면서 풍수 비보裨補용으로 옥룡사 앞에 동백나무숲을 조성했다고 전한다. 지금은 천연기념물 제489호. 주로 남쪽 해안이나 도서지방에 분포하는 동백나무가 매우 희귀하게 내륙에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면적도 약 7㏊에 이른다. 수고는 평균 5~6m로 생태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숲이다.

봄이면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 높은 산만큼이나 깊고 많은 계곡, 가을에는 살랑거리는 억새, 겨울엔 환상적 설경 등으로 사계절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특히 봄에 더 많이 찾는 이유는 뒷부분에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40권 전라도 광양현편에 백운산은 없고 백계산만 나온다. 

‘백계산白鷄山, 현의 북쪽 20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 정상에 바위가 있고, 바위 밑에 샘이 있으며, 샘 밑에서 흰 구름이 때로 일어난다. 무릇 빌기만 하면 문득 영험이 있고 재계齋戒하는 것을 성실히 하지 않으면 샘이 마른다.’ 

같은 책 불우편에 소개되는 옥룡사玉龍寺도 한번 살펴보자. 

‘백계산에 있으니 당나라 함통咸通 5년에 도선이 세웠다. 최유청이 지은 비문에 사師(도선을 말함)의 휘는 도선이요, 속성은 김씨이니 신라 영암 사람이다. 그 세계世系의 부조父祖는 역사에 전하지 않는데, 어떤 이는 태종대왕의 서손이라고 한다. 어머니 강씨가 꿈에 누가 구슬 한 알을 주면서 먹으라고 하더니 드디어 태기가 있어 달이 차자 훈채와 비린 음식을 먹지 않고 오직 불경을 외우고 염불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아기를 낳자 보통 아이와 다르더니 나이 15세에 이르자 총명하며 숙성했고 기예에 통했다. 드디어 월유산月遊山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여러 해가 되지 않아 문수의 신묘한 지혜와 보현의 현문을 모두 빠짐없이 터득하니 학도들이 모두 신총이라고 여겼다. (중략)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이미 불법의 깊은 뜻을 통달하자, 다니는 데 일정한 곳이 없이 구름과 안개를 밟고 자연에 임하여 그윽한 곳을 찾고 경치를 따라 다니며 게으르거나 쉬지 않았다. 운봉산雲峯山 아래에 동굴을 뚫고 좌선하기도 하고 혹은 태백암 앞에 초막을 짓고 여름을 지내기도 하여 도행의 감동되는 바에 신령스러운 기적이 자못 많았다. 희양현 백계산에 옛 절이 있으니 옥룡사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여기에 이르러서 그윽한 경치를 사랑하여 당우를 수리하고 깨끗이 개축하여 일생을 마치려는 뜻이 있어서 좌선하여 말을 잊은 지 35년이었다. (후략)’ 

광양 백운사 정상 상봉 바로 아래 거북바위가 상봉을 향해 기어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광양 백운사 정상 상봉 바로 아래 거북바위가 상봉을 향해 기어오르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백운산·도선·옥룡사 상세히 설명

백운산과 도선 국사·옥룡사의 관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도선은 백운산 옥룡사에서 입적하고 다비식을 가진 것으로 전한다. 지금 옥룡사 터 옆에 도선 공적비와 부도가 있는데 진위여부는 아직 모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마찬가지로 현존하는 목판본 인쇄지도 중에 가장 오래된 <팔도총도八道總圖>에는 광양에 백계산이라고 유일하게 표시돼 있다. 이 지도는 일명 <동람도東覽圖>라고도 하며, 1531년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100여 년 뒤인 1680년대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는 <동여비고>에는 백운산 옆에 ‘일명 백계산’이라고 병기해 놓았다. 백계산과 백운산을 동일 개념으로 보고 있다. (지도 참조)

문집으로는 1478년 서거정 등이 기록한 <동문선>에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백계산과 도선 국사, 옥룡사에 관한 내용을 더욱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1697년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갈암 이현일(1627~1704)이 유배를 가면서 광양 백운산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다.

‘백운산 아래 옥룡동에 들어가서 소요하면서 그곳의 그윽한 정취를 즐겼다. 다른 사람의 장서 수백 권을 빌려 밤낮으로 이치를 완미하면서 다시 세간의 이해와 영욕이 따로 있음을 의식하지 않게 되니, 경敬을 지키고 이치를 살피는 공부가 날로 정밀해졌다.’ 

이후 그는 몇 편의 시와 옥룡동에서 감회를 읊은 시가 있다고 전한다.

하지만 1861년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는 백계산과 백운산이 다른 산으로 나타난다. 호남정맥이 뻗어가다 백운산에 못 미처 계족산이 나온 뒤 두 갈래로 나뉜다. 한 갈래는 호남정맥이 계속 이어 도솔산~백운산으로 이어지고, 다른 갈래는 지맥으로 백계산으로 연결된 뒤 옥룡사 중흥산을 끝으로 광양시내로 흘러 바다로 소멸된다. 다시 말해 백계산 자락에 옥룡사가 있고, 백운산과는 완전 다른 산으로 소개된다. 지금 지도로 설명하자면, 현재 백운산 정상 상봉이 백운산이고, 옥룡사 뒷산은 백계산으로 구분되어 표시돼 있다.

<대동여지도></div>에는 호남정맥 능선 상에 백운산이 있고, 백계산은 지맥으로 갈라져 나온 봉우리로 표시돼 있다.
<대동여지도>에는 호남정맥 능선 상에 백운산이 있고, 백계산은 지맥으로 갈라져 나온 봉우리로 표시돼 있다.

백계산 흔적은 천연기념물 동백림에만 남아

현대 들어서 다시 바뀐다. 옥룡사 뒷 능선은 도솔봉으로 연결되지만 동쪽 백운봉에 속한 것으로 판단, 백운산 옥룡사라고 부르고 있다. 백계산은 슬쩍 사라지고 백운산만 호남정맥 끝자락에 존재감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백계산의 흔적은 옥룡사지 앞 동백림을 백계산동백림이라고 부르는 데서만 찾을 수 있다. 그나마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

그렇다면 분명 백계산이 역사적으로 있었고 문헌기록도 남아 있는데 왜 백운산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담당 관청인 광양시청 관계자는 “과거 기록에 나오는 백계산이 지금의 백운산을 말하며, 흰 닭이 두 발을 딛고 날개를 활짝 펼친 상태서 북쪽으로 날아오르는 형세의 산”이라고 설명한다. “지금 지형과 명칭으로 살펴보자면, 정상 상봉이 닭벼슬에 해당하고, 계족산이 닭발이고, 한재는 목 부분, 따리봉은 몸통”이라고 덧붙였다. 계족산은 <대동여지도>에는 도솔봉 옆 봉우리 지명이지만 현대 들어서는 북서, 남서쪽에 동명이산으로 표시돼 있다. 어쨌든 백계산이 풍수적으로 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또한 계족산도 옛날이나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봐서 닭과 관련한 사연이 있을 법도 하다. 계족산이 닭다리 모양쯤 되는 것 같다.

여기서 잠시 백운산의 형세와 관련한 풍수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계산세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닭은 풍수적으로 관운을 상징한다고 한다.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계룡산으로 천도를 주장하고 실제 도시 건설까지 들어갔다. 계룡산은 한편으로는 금계포란형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비룡승천형이라고 해서 계룡산이라 명명했다는 설이 있다. 황금 닭이 알을 품은 형국과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세라는 것이다. 따라서 계룡산이 천하의 명당이고 하늘이 내린 인물이 태어날 땅이라고 주장한다. 닭은 기본적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암탉은 알을 낳는다. 이러한 의미를 풍수에서는 닭처럼 부지런하고 높은 벼슬을 하는 훌륭한 자식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으로 해석한다.

<동비여고></div>에는 백운산과 백계산을 동일한 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동비여고>에는 백운산과 백계산을 동일한 산으로 표시하고 있다.

광양 백운산에서도 비슷한 전설이 전한다. 그런데 닭과는 연결되지 않고 기운으로 설명한다. 아마 그 의미를 모르는 것인지, 와전 설명되어 그런지 알 길은 없다. 전설의 내용은 이렇다.

‘백운산에는 예로부터 영험한 3가지 기운이 전한다고 알려져 있다. 봉황의 정기와 여우의 지혜, 돼지의 복이라고 한다. 벼슬과 지혜, 재물이 그것이다. 조선 중종 때 대학자인 신재 최산두 선생이 봉황의 정기를, 병자호란 직후 몽고국의 왕비가 된 월애부인이 지혜의 정기를 타고났고, 재물의 정기를 타고난 사람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고 한다. 광양 사람들은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광양 백운산의 세 가지 정기 중에 아직 나타나지 않은 돼지의 정기를 광양 사람들은 한껏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닭과는 상관없다. 닭이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형국의 백운산의 의미가 조금 변질된 듯 보인다.

결론적으로 광양 백운산은 초기에는 백계산이란 지명으로 사용되다가 이후 백계산과 백운산을 혼용해서 쓰다가, 또 다른 문헌에서는 동일 개념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는 백운산보다는 백계산이란 지명이 더 일반화한 듯하다. 현대 들어서는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백운산으로 국토지리정보원에 등재돼 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밝히는 것도 앞으로의 과제다.

백운산 정상 상봉은 사방이 확 트여 있다. 동으로는 섬진강, 북으로는 지리산, 남으로는 남해, 서로는 길게 뻗은 호남정맥 능선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사방이 확 트인 만큼 항상 바람이 세차다.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살을 에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그 상봉 바로 아래 바위가 거북이 모양으로 상봉을 떠받든 형국이다. 아직 기운이 다하지 않은 상봉인 듯하다. 봄이 되면 겨우내 움츠려 있던 기운이 상봉을 통해 내뿜는다고 전한다. 봄에 산꾼들이 백운산을 찾는 이유다. 아직 효력이 다하지 않은 백운산의 세 가지 기운 중 한 가지 정기를 누가 받을지 백운산을 찾아 가보자. 혹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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