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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셰르파 스토리] 세계에서 가장 빨리 에베레스트 오른 셰르파

글 서현우 기자 사진 락파 게루 셰르파 홈페이지
  • 입력 2020.09.24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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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파 게루
에베레스트만 일가 도합 31번 올라…네팔 대법원 통해 14년 만에 FKT 기록 되찾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정상. 사진 셔터스톡.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바라본 에베레스트 정상. 사진 셔터스톡.

2003년 5월 25일 오후 5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결연한 표정의 한 셰르파가 정상을 향해 힘찬 첫 걸음을 내딛었다. 그로부터 10시간 56분 46초 뒤인 26일 새벽 3시 56분 46초, 이 셰르파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그는 정상에 오르자마자 6피트(1.8m) 높이의 놋쇠 기둥에 네팔 국기를 게양했다. 세계에서 가장 빨리 베이스캠프부터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오르는 기록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 셰르파의 이름은 락파 게루Lhakpa gelu다. 락파 게루는 1967년 6월 23일 네팔 솔로쿰부 칼리콜라에서 태어났다. 부모인 타르케와 양지는 감자, 옥수수, 밀 등을 재배하는 자작농이었다. 락파 게루의 고향은 인근에 마땅한 학교나 병원도 없는 시골이었다. 비록 가난했지만 그의 부모는 자식들에게 정규 교육의 기회를 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락파 게루는 에드먼드 힐러리 경이 설립한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학교가 집에서 가장 가까운 곳이었지만, 이마저도 언덕길을 2시간 반이나 올라야 갈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락파 게루는 락파 덴디, 장부, 다누르부, 파상 겔젠 4명의 형제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돈을 벌기 위해 고산 등반에 입문했다. 형제들 모두 고산 등반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락파 게루는 에베레스트를 총 14번 등정했으며, 장부는 10번, 다누르부는 6번, 파상 겔젠은 1번 등정해 형제들이 도합 31번이나 정상에 올랐다.

락파 게루는 동료들과 함께 정상에 올라 기록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락파 게루는 동료들과 함께 정상에 올라 기록을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고산등반 가이드로 안정적인 생활을 꾸리게 된 락파 게루는 1990년 풀리 셰르파와 결혼해 두 아들 앙 다와와 니마 누루, 딸 밍마 타시를 낳았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이듬해인 1991년에는 아버지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맏형인 락파 덴디가 한국원정대와 함께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던 중 눈사태로 사망하는 등 슬픔을 겪는다. 이러한 아픔으로 인해 락파 게루는 자신의 자식들이 셰르파로 생활하지 않고 더 나은 환경에서 자라기를 희망했다. 오랜 준비 끝에 락파 게루는 온 가족과 함께 2005년 미국으로 이민해 알파인 어센트 인터내셔널, 어드벤쳐 어센트 등에서 산악 가이드 활동과 식당 보조, 피자 배달 등을 병행하며 생계를 이었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서도 락파 게루는 고향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선 재단을 설립해 활동했다. 특히 락파 게루는 고향의 어린이들을 위해 영어 교사를 파견하고자 재단 모금을 독려하고 있다.

정상 인증 사진을 찍은 락파 게루.
정상 인증 사진을 찍은 락파 게루.

네팔 대법원, 펨바 도르제 기록 무효화

락파 게루의 등반 활동 중 가장 눈에 띄는 이력은 에베레스트 최단시간 등반이다. 그는 2003년 5월 26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 노멀 루트를 따라 단 10시간 56분 만에 정상에 올랐다.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인 성격의 락파는 기록 달성 당시에 이를 딱히 내세우지 않았다고 한다.

정상에 오른 락파 게루가 네팔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정상에 오른 락파 게루가 네팔 국기를 게양하고 있다.

이 기록이 세계 최단기록FKT(Fastest Known Time)으로서 기네스북에 공인받기까지는 무려 14년의 시간이 걸렸다. 등정 이듬해인 2004년, 펨바 도르제 셰르파가 8시간 10분 만에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등정 신빙성에 대한 진실공방이 벌어졌다. 무려 13년이나 이어온 논란은 법정 공방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2017년 11월 28일 네팔 대법원이 펨바 도르제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무효화하고 락파 게루의 기록을 인정하면서 일단락됐다. 펨바 도르제는 앞선 2003년 5월 22일에도 12시간 45분 만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세계 최단기록을 수립했으나, 락파 게루에게 3일 만에 기록을 갱신당하는 등 그와 악연이 깊은 사이였다.

세계 최단기록을 되찾은 락파 게루는 “펨바 도르제는 자신의 등정을 뒷받침할 사진 증거나 정상 표지물 등을 남기지 못했고, 함께 정상에 오른 사람도 없었으며, 등정 날인 2004년 5월 21일의 에베레스트의 기상은 매우 안 좋았기 때문에 그토록 빠른 속도로 정상에 올랐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며 “마침내 14년 만에 내 세계기록이 돌아와 무척 다행이다”라며 안도의 뜻을 밝혔다.

락파 게루의 기록 달성 당시 기네스북 왼쪽 하단에 락파 게루의 이미지와 업적이 소개되고 있다.
락파 게루의 기록 달성 당시 기네스북 왼쪽 하단에 락파 게루의 이미지와 업적이 소개되고 있다.
락파 게루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산악 가이드로 활동하지 않을 땐 식당 보조로 일하고 있다. 사진 트래블스코어
락파 게루는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산악 가이드로 활동하지 않을 땐 식당 보조로 일하고 있다. 사진 트래블스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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