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산과 문화인류학] 기후변화 생존법, 잉카의 후예는 알고 있다

글 오영훈 기획위원
  • 입력 2020.10.21 07:29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안데스 고산 원주민, 빙하 녹자 잉카 시대 농법·관개시설 재활용

빙하로부터 물이 모이는 안데스산맥의 산타크루스 호수. 페루 중부의 주요 고산 도시 우아라스의 핵심 식수원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 호수가 머지않아 고갈돼 식수난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고 있다. / 사진 조너선 모인스
빙하로부터 물이 모이는 안데스산맥의 산타크루스 호수. 페루 중부의 주요 고산 도시 우아라스의 핵심 식수원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 호수가 머지않아 고갈돼 식수난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고 있다. / 사진 조너선 모인스

안데스산맥의 빙하는 지구상 어느 산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감소하고 있다. 최근 한 연구에 따르면 페루의 빙하는 2000~2016년 사이 3분의 1이 감소했다고 한다. 2030년이면 해발 5,500m 이하의 빙하는 모두 사라진다는 예측도 있다. 

지구온난화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보는 인구집단 중 하나는 산간마을 주민이다. 특히 적도에 가까운 고산지대는 기후변화의 영향에 무척 민감해 그에 따른 피해도 크다. 적도 지방 산악빙하의 70%가 남미 페루 안데스산맥에 있다. 


안데스산맥 주변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빙하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식수·관개·수력발전에 필요한 물을 전적으로 빙하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번 연재는 안데스산맥의 케추아족 원주민들이 기후변화로 인한 생존의 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타개해 가는지를 살펴본다.

신성한 약으로 여기는 빙하 얼음을 채취하는 케추아족. 사진 레이니 리버티
신성한 약으로 여기는 빙하 얼음을 채취하는 케추아족. 사진 레이니 리버티

안데스 산골 주민 대부분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 엘니뇨에 대해서는 알지 몰라도 지구적인 기후변화 현상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주민들은 과학적 사실보다는 생존과 직결된 직접적 경험을 통해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다. 예컨대 이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산중에 약초가 줄어든다는 것을 발견하곤 기후가 예전 같지 않다고 이야기했다. 통계적으로 안데스산맥의 빙하가 확연히 급감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였다.

통상 안데스 일대는 10~3월까지 우기, 4~9월까지 건기다. 건기에는 마을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을 빙하에 의존한다. 기후변화로 빙하가 빠르게 녹아내리면 산골 주민 생계에 장기적으로 치명적이다. 일단 산사태·낙석·홍수 등을 유발해 인명과 재산에 직접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 적설량이 줄어들면서 산악호수·계곡하천 등이 축소되거나 아예 사라지면 경작지에 물을 대지 못한다. 수력발전을 통한 전력생산도 축소된다.

식수 문제는 치명적이다. 일단 우물이 고갈돼 식수가 부족해져 갔다. 호수와 강의 수량이 줄면서 적체된 가축 분뇨로 인한 오염과 질병 확산의 위험도 커졌다. 물을 끓여 마셔야 하는 상황인데, 땔감은 점점 부족해졌다. 소독 없이 물을 그냥 마시게 되면서 위장 관련 질환이 늘었다. 대대로 질병은 약초로 다스려왔지만 이마저도 생태계가 파괴돼 줄어들고 있다. 

세계화로 인한 상업자본의 유입은 기후변화 위기를 부채질한다. 페루 산악도시 쿠스코 인근의 마추픽추 관광지로 개발된 마을 우루밤바Urubamba는 국제 투자자들이 투자한 대형 고급 호텔 단지가 들어서며 물을 대거 뽑아 쓰고 있다. 수많은 외국계 채굴 회사들은 안데스산맥의 성산과 빙하들을 파괴하고 물과 땅을 오염시키고 있다. 어떤 주민들은 이들로 인해 빙하가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빙하 감소로 인한 물 부족은 산골에만 영향을 끼치는 게 아니다. 산에서 흘러오는 물은 저지대 주민에게도 필수다. 알프스·히말라야·안데스 등지의 산악빙하 감소로 인한 식수 부족은 전 세계 30억 인구에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후변화는 날씨 주기에도 불규칙 변화를 가져왔다. 우기에 비가 안 오고 건기에 비가 오는 일이 잦아졌다. 폭풍·눈·우박이 건기 한복판에도 몰아치고, 한창 비가 와야 할 우기 초기에 3주 이상 비가 오지 않는 경우도 생겼다. 이러한 이상 날씨 현상은 가축과 작물에 치명타를 입힌다. 

우기에 비가 안 오면 작물 생산에 차질이 크다. 고원지대 풀들도 말라붙어 라마·알파카가 풀만 뜯어도 뿌리까지 파괴된다. 우기에 내리는 비도 전보다 훨씬 강력한 폭풍으로 몰아치곤 해 감자밭을 훼손하곤 했다. 

건기에 감자를 얼리고 말려 만드는 추뇨chuño 생산도 타격을 입었다. 추뇨는 밤에 서리가 내리고 낮에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5~7월의 건기에 감자를 널어놓고 동결 건조시켜 만든다. 그러나 난데없는 비가 추뇨 생산을 지속적으로 망친다. 

변덕스러운 날씨를 이기는 농업은 없다. 기후변화로 인해 고산지대는 1990년대 말부터 식량난을 겪기 시작했다. 1998~1999년에는 폭풍 등의 극단적 기후 현상으로 안데스산맥 대부분에 큰 식량난이 발생하기도 했다.

빈곤은 극단적인 기후 현상과 맞물려 페루사마귀병Verruga peruana과 같은 희귀병 확산으로 이어졌다. 고산지대 감자과 작물인 오카·울루쿠·마스와 등에도 병충해가 돌아 농사를 망치는 경우도 잦아졌다. 경제적 손실은 불가피했다. 2007년 5월에 찾아온 냉해는 식량난과 질병으로 이어져 노약자와 어린이 사망자가 속출했다.

페루 안데스산맥의 빙하는 현지 주민들에게 필수적인 존재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사진 캐롤라인 클레이슨
페루 안데스산맥의 빙하는 현지 주민들에게 필수적인 존재지만,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감소하고 있다. 사진 캐롤라인 클레이슨

‘코이유 리티’도 바꾼 기후변화


기후변화는 종교 풍습도 바꿔놓았다. 산간 지방의 남미 원주민들에게 산은 신성한 존재다. 이들은 대지의 여신 ‘파차마마Pachamama’와 함께 산신 아푸스Apus를 숭배한다. 산신과 사람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연결돼 있다. 따라서 개울과 강은 영험한 능력을 담고 있다고 여겼다. 생명을 키우는 물을 내려 보내는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은 생명의 원천으로 보았다. 산정의 호수는 그러한 영험한 생명력을 담보한 곳이어서 순례자들도 많았다. 

잉카제국(1438~1533) 당시 중앙집권 통치를 위한 목적으로 영토 전역에 산악숭배 관행이 뿌리내렸다. 부족마다 다양한 자연신을 산신으로 통일해 제국 본부에서 대표 제사를 지냄으로써 통치 정당성을 확립했다. 오늘날에도 해발 3,000 ~5,000m 고지에 거주하는 케추아족 등의 원주민들은 마을마다 계곡의 원류가 되는 고봉을 숭앙하는 풍습을 이어가고 있다.

이 중 가장 큰 규모의 제전으로는 매년 수만 명이 참가하는 코이유 리티Qoyllur R’iti를 꼽을 수 있다. 이 제전은 쿠스코 남부 시나카라계곡의 시나카라(5,471m), 콜케푼코(5,522m) 산봉 기슭 해발 4,600m 지점에서 펼쳐진다. 잉카 때부터 있던 단체 순례에 기원을 둔다. 초기에는 태양·산·물에게 바치는 제사였는데, 스페인 식민자들은 이런 토착종교를 억압하고 가톨릭 의식을 강요해 결국 오늘날에는 토착종교와 가톨릭이 혼합된 양식을 보인다. 매년 가톨릭 성체축일이 열리기 직전 토요일~수요일에 펼쳐진다. 통상 5~6월 중이다. 나흘 동안 여러 부족에서 각각 춤패를 결성해 춤의 제전을 펼친다. 산신에게 드리는 제사이면서 동시에 참가자의 치유·정화·행복을 기원한다.

잉카제국 당시 정비된 관개 수로. 사진 피오나
잉카제국 당시 정비된 관개 수로. 사진 피오나

코이유 리티에서 구할 수 있는 빙하 얼음은 만병통치약으로 여겨졌다. 얼음을 아무나 가져갈 수는 없었다. 알파카 망토를 걸치고 웅인熊人 우쿠쿠ukuku 복장을 한 이들만 보름 달빛 아래 빙하로 기어 올라가 몇 방울의 피를 눈에 떨어뜨리는 희생제의 의례와 함께 빙하 얼음을 캐 왔다.

그러나 빙하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마을 대표들은 이 관습을 금했다. 1990년대 이전까지는 배낭에 한가득 얼음을 담아 내려왔지만 2000년대 이후로는 조그만 병에 눈을 담아 올 수 있었고, 이마저도 2010년대 후반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금지됐다.

빙하가 녹고 만년설이 사라지면서 산의 영력이나 산신 숭배제의의 효과를 의심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최근 수십 년 사이 늘어난 개신교도들이 가톨릭교도들의 성상숭배·순례행사를 일절 거부한 것도 한 몫 했다. 기후변화는 종교관의 변화에도 영향을 끼친 셈이다.

유적지로 남아 있는 잘 정비된 잉카 제국 당시의 계단식 경작지. 사진 래리 W. 메이스
유적지로 남아 있는 잘 정비된 잉카 제국 당시의 계단식 경작지. 사진 래리 W. 메이스

잉카 전통농법으로 기후변화 대응

원주민들은 빙하가 사라지면서 고향을 버리고 경작과 목축에 적합한 다른 곳을 찾아 떠나기도 하지만, 사실 그런 땅은 지구 어디에서도 찾기 힘들다. 결국 최후의 선택은 이미 과포화한 도시로의 이주다. 그러나 친족이나 의례적 가족인 ‘콤파드라스고compadrazgo’들의 도움 없이 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도시 생활은 비참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안데스 산사람들에게 땅은 쓸모가 없어졌다고 쉽게 등질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생계·종교·풍습·사회관계 모두가 땅과 직결돼 있다. 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단기적 해결책과 장기적으로 지속가능한 혁신 사업들을 자체적으로 추진해야만 했다. 여름은 더 덥고, 겨울은 더 춥고, 강수량은 종잡을 수 없고, 하천은 말라 갔지만, 페루 안데스 산골 주민들은 다양한 방책을 강구해 적용하고 있다.

코이유 리티 제전에서 성체 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 댄 키트우드
코이유 리티 제전에서 성체 행진을 벌이고 있다. 사진 댄 키트우드

가장 성공적인 해결방안은 주민들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각종 토착적 지혜를 활용하는 것이었다. 1984~1985년에 쿠스코의 ‘신성한 계곡’ 우룸바에 심한 가뭄이 닥친 적이 있다. 

당시 주민들은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아 잉카제국 당시 사용했던 흔적만 남은 저수지와 수로를 보수하고 재건축해 다시 사용했다. 주민들은 잉카인들이야말로 산에서 가장 안정적인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다고 믿는다.

여기서 영감을 얻은 여러 지방의 산골 주민들은 1990년대 이후 안데스산맥의 빙하가 전면적으로 빠른 속도로 축소하기 시작하자 적극적으로 과거의 지혜를 발굴·활용하기 시작했다. 

현장 연구자·활동가·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국제구호단체·국제개발단체 등으로부터 기금을 확보해 유사한 방식으로 고대 관개시설 재건축에 나섰다. 단순히 과거로 회귀하는 게 아니라, 학교 및 전기 설비 등 현대적 시설물과 병합해 전반적인 개량에 나섰다. 구호단체는 태양광을 활용한 조리기구·등·온수기 등을 지원했다.

이같은 ‘잉카식’ 개선은 부족한 물을 보존하는 데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수로 주변에는 잡목을 심어 수분 증발을 최소화했다. 그동안 선호됐던 호주산 유칼립투스는 성장이 빠른 장점이 있지만, 물을 많이 필요로 하고 뿌리가 너무 공격적으로 자랐다. 대신 환경적으로 유리한 쿠에냐(장미과)·쿠이스와(부들레야) 나무, 타얀카·칠카 등의 토착종 국화 나무를 심었다. 산비탈과 마을 곳곳에는 자그마한 규모의 숲을 여러 곳에 조성했다. 

토양과 수분 유실을 최소화하는 보전경운保全耕耘법도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땅을 깊이 파내지 않는 밭갈이로, 역시 잉카 시기에 활용됐던 방법이다. 고대 계단식 경작지도 재건해, 물 손실과 토양 유실을 최소화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열대권 빙원인 페루 켈차야 빙원의 빙하 감소. 매사추세츠 대학의 기후연구소 더그 하디 박사가 13년의 시차를 두고 촬영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열대권 빙원인 페루 켈차야 빙원의 빙하 감소. 매사추세츠 대학의 기후연구소 더그 하디 박사가 13년의 시차를 두고 촬영했다.

기후변화는 안데스산맥의 주민들에게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안데스 주민들은 산에 머물 수밖에 없다. 나무를 심고, 도랑을 파고, 빗물을 모으고, 산의 수분을 최대한 관리하는 게 그들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지구적 문제 앞에 ‘달걀로 바위치기’처럼 보이지만 현지인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다. 

안데스 주민들이 기후변화에 대처하는 법은 쿠스코 주변의 여러 산골 마을에서 자원봉사 단체가 조직돼 마을 단위로 전개한 ‘풀뿌리’ 사업이라는 데도 의의가 있다. 땅을 버릴 수 없다는 절박함이 상황을 타개할 해결책을 자신들의 전통 속에서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