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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신간리뷰 | 서재의 등산가] 100세 앞둔 老등산가의 비망록

글 이용대 (사)한국산악회 산악연구소장, 코오롱 등산학교 명예교장.
  • 입력 2020.10.20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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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의 등산가〉 김영도 지음 리리퍼블리셔 2020년
〈서재의 등산가〉 김영도 지음 리리퍼블리셔 2020년

이 책은 100세를 앞둔 노등산가가 남긴 비망록이다. 저자가 여는 글에서 말했듯이 ‘산과 등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화두로부터 시작한다.

저자는 폴 베시에르의 말을 인용해 “등산은 끊임없는 지식욕과 탐구욕, 정복욕의 소산”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즉 육체적 노동을 통해 정신적 고양에 이르는 과정이 등산이라는 것이다.

‘서재의 등산가’란 나이 들어 산에 오르기 힘들어졌을 때 산에 오르고 싶어진다면 서재에 앉아 산악명저 속에 파묻혀 책 속의 산을 오르고 글을 쓰는 그런 등산가를 말한다. 이런 등산가를 ‘북키시 알피니스트bookish alpinist’라고도 한다. 이제 백세가 코앞인 저자도 자신이 서재등산가라는 말을 실감하고 비망록의 제목을 서재등산가로 명명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노등산가는 산서山書와 함께 산에 오르는 삶을 권하며, 책 속에 “산과 길이 있다”고 역설한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산서는 산과 불가분의 관계일 수밖에 없는 인생의 좋은 파트너가 되어줄 것이라고 했다. 산에 가기 어려울 때는 평소 책꽂이에 꽂아 둔 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두었던 산악 명저를 탐독해 보라. 그곳엔 우리가 평소 깨닫지 못한 많은 문제의 해답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노등산가가 오랜 세월 동안 경험하고 사유한 여러 가지 일과 크고 작은 사건들, 그리고 자신의 독서에 관한 생각을 자유롭고 한가하게 쓴 성찰집이다.

저자는 후배 산악인들에게 기회가 날 때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권해 왔다. “평생 동안 일기나 편지 한 줄 남기지 못하고 죽는 것이 보통 사람들이 겪는 삶이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구분할 때 산에 가는 사람과 안 가는 사람, 산에 가는 사람으로서 책을 읽는 사람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 책을 읽는 사람으로서 글도 쓸 수 있는 사람으로 구분한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가 내린 이 오만한 정의는 책읽기와 글쓰기의 가치를 한층 돋보이기 위해서 한 말이지만 혹자는 듣기에 따라 오해하기 쉬운 말이기도 하다.



노등산가가 소개하는 국내외 산악 명저들

산서 속에는 불가능에 도전하고 무상의 행위에 흡족할 줄 아는 고매한 인간정신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산서들은 저자를 비롯해 국내외의 저명 알피니스트들이 펴낸 명저와 그들의 생애가 망라되어 있다. 알프스의 침봉에 올라 시적인 문장으로 등반의 즐거움을 노래한 가스통 레뷔파의 명저 〈별빛과 폭풍설〉, 아크로바틱 클라이밍의 대명사가 된 기도레이의 〈마터호른〉, 등반보고서의 문학적 가능성을 확인시켜준 김병준의 〈하늘의 절대군주 K2〉, 국내에서 가장 많은 산서를 저술한 김영도의 〈산의 사상〉, 〈우리는 산에 오르고 있는가〉, 〈하늘과 땅 사이〉, 유려한 문장과 문사철의 해박한 지식을 지닌 김장호의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 〈우리 산이 좋다〉, 〈한국명산기〉.

국내 최초로 한겨울 백두대간의 하얀 능선을 단독종주한 여성 남난희의 〈하얀 능선에 서면〉, 히말라야자이언트 14봉에서 16년간의 대드라마를 펼친 20세기 불세출의 철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나의 인생 나의 철학〉, 성 편견의 한계를 넘어 정상에 선 금세기 최고 여성 알피니스트들의 열전 〈정상에서〉, 알피니즘은 무용無用의 짓거리라는 명언을 남긴 리오넬 테레이의 〈무상의 정복자〉, 암벽등반의 새 역사를 쓴 불 퇴진의 용장 리카르도 캐신의 〈등반 50년〉, 고 정광식이 옮긴 세계적인 등산교재 〈마운티어니어링: 산의 자유를 찾아서〉와 아이거의 극한 체험을 다룬 〈영광의 북벽〉 이 책은 국내 독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다. 

조 심슨의 조난기 〈친구의 자일을 끊어라〉보다 더 리얼한 고산거벽 등반의 선두주자였던 박정헌의 촐라체에서의 생환기 〈끈〉, 동계 단독등반의 신기원을 이룩한 발터 보나티의 〈내 생애의 산들, 김영도 옮김〉, 캐나다의 저명 전기작가  버나데트 맥도널드가 쓴 〈프리덤 클라이머, 신종호 옮김〉, 이 책은 폴란드 히말라야 등반의 황금시대 주역들이 이루어낸 등반가들의 이야기다. 

한국을 대표하는 산서 저술가 손경석의 〈산 또 산으로〉, 현대등반의 기초를 다졌으며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산악인으로 평가받는 앨버트 머메리의 〈알프스에서 카프카스로〉, 세계 등반사의 일대 전환점을 마련한 황금시대의 위대한 등반가이자 저술가였던 에드워드 윔퍼가 남긴 〈알프스 등반기. 김영도 역〉 이 책은 ”사람이 산에 오르는 한 계속해서 읽어야 할‘ 명저 중의 명저다.  

라인홀트 메스너와 함께 자이언트 14고봉 편력의 10년 드라마를 연출하며 8000m 14봉 경주에 뛰어들었던 예지 쿠쿠츠카의 〈14번째 하늘에서. 김영도 옮김〉, 한국의 인수봉에 취나드A.B라는 이름의 길을 연 미국의 유명 등반가 이본 취나드의 〈아이스 클라이밍. 김영도 옮김〉, 히말라야 상업등반의 병폐를 폭로한 존 크라카우어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 두 개의 8000m봉 초등정 기록을 가진 살아 있는 신화 쿠르트 딤베르거의 〈산의 비밀, 김영도 옮김〉, 영국을 대표하는 히말라야 등반의 전략가 크리스 보닝턴의 〈어센트〉, 아이거 북벽 초등으로 등산계의 전설이 된 하인리 하러의 〈하얀거미〉, 이 책은 발행 후 1,000만 권 이상 판매된  산악문학의 빌리언 셀러이며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명저다. 

히말라야 8,000m의 위와 아래서 지옥과 천국을 체험하며 낭가파르바트 단독등반을 이룩한 철인 헤르만 불의 〈8000미터 위와 아래, 김영도 옮김〉, 이 책은 잠시 반짝했다 사라지는 인기 소설류와는 그 깊이가 다르다. 이 책은 그저 60여 년이 지난 시대적 유물이 아닌 불멸의 문화적 유산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유명 등산가들이 남긴 명저들은 이 분야의 정보에 일천한 독자들에게 선물하는 보너스다.

한국의 산악인치고 저자 김영도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세인들이 그를 기억하는 뚜렷한 사건은 1977년 지구 최고봉에 최초의 한국인을 올려 우리나라 알피니즘에 새 장을 열게 한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있은 후에도 그는 앞만 보고 달리며 수많은 저서를 펴내며 산서의 높이를  끓임 없이 쌓아나갔다. 육순. 칠순. 미수를 지나 이제 100세를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서재의 등산가〉를 펴냈다.

이 책은 1부 ‘산은 멋지다’, 2부 ‘자유 그리고 자연’, 3부 ‘언제나 산과 연결되는 삶’, 4부 ‘우리는 산과 어떻게 만나는가’로 꾸며진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는 저자의 평소 생활철학과 신념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무엇보다 알피니즘에 철학을 심어주고 가꾸는 사색가이자 독서가요, 이런 사색의 결과물을 기록으로 남긴 저술가요, 등산의 본질을 정립해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알피니즘의 전도사다. 

제1부의 ‘나는 산서를 이렇게 읽는다’에서는 저자가 산서와 반려가 되어 평생을 살아온 산서의 세계와 첫 인연을 맺은 오시마료키치의 〈山-硏究와 隨想〉과의 첫 해후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는 중학생일 때 이 책에 나오는 ‘산의 단상’에 끌린 것이 평생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의 내용 중 ‘베르그슈타이거Bergsteiger(등산가)는 누구나 산속에 자기의 하이마트Heimat(고향)를 가지고 있다’고 했지만, 저자 김영도의 마음속 고향은 누가 무어라 해도 ‘산서의 세계’임이 분명하다.  

그동안 저자는 여러 권의 산악명저들을 번역해 오며 한 시대를 선도해 온 등산의 정신, 철학, 시대성 등을 국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했다. 또한 이런 책들은 국내 산악인들의 지적갈증을 풀어 주었으며, 알피니즘의 철학적인 바탕을 확립시키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해외산악명저들을 한글로 읽을 수 있게 했다는 점은 국내산악인들에겐 분명 하나의 축복이었다. 100세를 앞둔 나이에도 산악인들이 지켜야 할 가치가 어떤 것인지를 늘 탐구하는 그는 아직도 읽고, 쓰고, 생각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인생의 황혼기까지 지필紙筆을 잡은 채 가득 채운 인생을 살아가는 분도 드물 것이다. 아직도 30대 젊은 청년 못지않은 열정과 패기로 인생을 살고 있는 저자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산악인들에게 본보기가 되고도 남을 만한 분이다. 

김 회장님! 100세까지 강건한 모습으로 산에서 들려오는 메시지를 전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있었기에 산악계의 정신문화는 풍요로워졌습니다. 

코로나 재확산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된 요즘 집에서 산서의 세계에 몰입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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