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숲과 사찰] “큰 절의 숲에는 승려들의 땀이 서려 있습니다”

월간산
  • 입력 2021.05.06 10: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통도사 광우 스님 인터뷰
억불의 시대와 남벌을 극복하고 사찰숲을 지킨 스님들을 말하다

“큰 절이 있는 산의 숲에는 사찰과 승려들의 땀이 서려 있습니다.”

경남 양산 통도사에서 노전爐殿(사찰에서 의식 전반을 책임지는 직책)과 영축문화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을 맡고 있는 광우 스님은 수백 년간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산과 숲을 지켜온 절집과 스님들에 대해서 할 말이 많은 듯했다.

“사찰림은 신라와 고려시대에 왕실에서 하사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억불 정책의 영향으로 대부분 조정에 몰수당하게 되지요. 빼앗기기만 한 게 아니라 승려들은 지역紙役(종이 만드는 노역)과 잡역 등 갖은 부역까지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제일 힘든 것은 지역이었어요. 장경 경판 작업을 하다 보니 종이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는데 조선 조정은 사찰에 과도한 지역을 부과해서 나중에는 지역혁파문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찰도 당장 먹고 사는 문제를 외면할 수 없게 되자 계를 조직하는 등 경제활동에 나서게 됩니다. 이후 어느 정도 자산을 축적하게 된 사찰에서는 몰수당한 사찰림을 되사들입니다. 사찰림의 역사는 수난과 극복의 역사입니다.”


지역·잡역에 시달린 사찰

삶과 수행의 터전인 사찰림을 빼앗긴 조선시대 승려의 삶은 비참했다. 천민보다 못한 대접을 받았고 빈 절이 허다했다. 불국사조차 조선 말기 사진을 보면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그만큼 사찰의 경제는 궁핍했다. 스님들은 탁발, 기도, 개간 등을 비롯해 다양한 방식으로 경제 활동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전라도 스님들은 짚신 만들기, 목공, 종이 만들기 등을, 강원도 스님들은 품팔이를 했다. 통도사의 누룩 만들기는 경상남북 전역을 판매지역으로 하여 그 공급을 담당할 정도였다.

종교도 현실적 기반은 세속이니 만큼 활동과 존속을 위해서는 경제적 뒷받침이 있어야 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 통도사의 갑계(승려들끼리 조직한 계) 활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통도사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의 헌신적인 보사補寺(사찰 지원)가 오늘날 통도사가 존재하는 토대가 됐다.

사찰과 숲을 지키기 위한 스님들의 노력

“경전을 판각하고 인쇄해 엮어내는 작업이 중요한 일이었기에 통도사에는 뛰어난 종이제작 기술을 지닌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또한 양반집을 지어주는 스님 목수들도 사찰경제에서 큰 몫을 담당했지요.”

광우 스님은 통도사 계모임에 대해서 이렇게 덧붙였다.

“억불 정책으로 운영이 어렵던 조선 후기 사찰들은 산채나 과일 등의 특산물 채취와 제지사업 등을 통해 운영 자금을 충당했지만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어요. 이를 보완하기 위해 승려들끼리 조직한 계를 갑계라 하는데, 주로 범어사와 통도사 등 경상도 지역의 큰 사찰에서 성행했습니다. 그렇게 십시일반 모은 자금으로 피폐해진 사찰의 중건과 교단 중흥을 이뤄내게 됩니다.”

광우 스님은 “사찰림은 저절로 울창해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위안과 휴식을 주는 저 아름드리나무들의 나이테에는 스님들의 땀과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우리가 사찰림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고 가꿔야 할 이유입니다”라고 말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5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