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마운스토리’ 강화 마니산
고구려 때 창건설 전등사·고려 임시수도 강화도·곶 등 볼거리 수두룩
강화 마니산摩尼山(472.1m)은 서해의 일몰 명산으로 꼽힌다. 여름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같은 시원한 계곡에 많은 캠핑족들이 찾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일몰을 보면서 차분히 일 년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찾아 야영을 즐긴다. 높지도 않아 수도권 등산객들이 연말을 맞아 쉽게 찾을 수 있는 산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는 참성단(사적 제136호), 선사시대 부족국가의 무덤이 있는 고인돌 군락, 정설은 아니지만 고구려 때 창건했다고 전하는 우리나라 최고 사찰로 알려진 전등사,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을 피해 임시수도였고 왕이 피란했던 강화성城, 조선 초기 함허대사가 중건했다는 정수사, 그리고 그가 “사바세계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자가 가히 삼매경에 들 수 있는 곳”이라고 극찬했던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룬 함허동천, 19세기 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광성보·덕진진·초지진 등 유적을 포함한 자연·문화 경관이 좋아 일몰과 함께 주변 볼거리로 유적나들이 코스로 적격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대 삼국시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곳이 바로 마니산이다. 특히 조선 후기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를 침입해 올 때 격전지로서의 아픈 흔적은 강화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요 침입로가 바로 강화였던 것이다. 그것은 강화도의 지명이 여실히 증명한다.
강화도는 원래 고구려 영토였다. 고대 지명은 고구려 고어로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고 한다. 갑비는 구멍穴을 뜻하는 고어로, 배가 드나드는 나루를 가리킨다. 고차는 입口을 뜻한다. 이는 지금의 곶串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따라서 갑비고차는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곳에 있는 나루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구려 초기 갑비고차는 한자가 들어오면서 혈구로 바뀐다. 강화도에 있는 혈구산(466m)이 그 의미의 자취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경덕왕은 혈구를 다시 ‘바다의 입구’라는 뜻의 해구海口로 변경한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지리지>에 고스란히 나온다.
갑비고차→혈구→해구→강화로 지명 변천
<삼국사기>에 ‘해구군은 본래 고구려 혈구현이었는데 바다 가운데에 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강화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에는 ‘강화현은 본래 고구려 혈구군(갑비고차라고도 한다)으로 바다 가운데 있으며, 정주貞州의 바로 서남쪽에, 통진현의 서쪽에 있다.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략) 마리산摩利山은 부府의 남쪽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 한다. 전등산(일명 삼랑성三郎城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 한다)이 있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이첨(1345~1405)의 기문에 ‘한강과 임진이 합류하여 조강祖江이 되고, 서쪽으로 잇달아 바다로 들어가는데 따로 흘러 갑곳이 되었다. 전조前朝의 고왕이 여기 와서 피난하는데 원나라 군사들이 쫓아와 말하기를 “갑옷만 쌓아 놓아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갑곶이라 이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리지의 내용과는 다소 다르지만 그럴 듯한 유래를 소개한다.
따라서 강화의 어원이 갑비고차에서 유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설명일 수 있지만 한국 남방계 언어로 갑비는 구멍을 뜻하는 구무였고, 구무가 다시 굼으로, 이어 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고차는 고지 또는 곶으로 변했고, 중세 한국어에서 곶은 꽃이었기 때문에 꽃을 나타내는 한자 화華로 바뀌었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결론적으로 갑비고차에서 혈구로, 뒤이어 해구로 바뀌어서 지금 사용하는 강화로 됐다고 한다. 의미는 똑 같을지 몰라도 글자만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뜻인 듯하다.
고려에서는 행정구역으로 강화현에서 강화군으로 승격했으나 지명을 강도江都라고 불렀다고 문헌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강화도로 완전 바뀌었다. 여러 고지도에서 확인된다. 강화의 유래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지만 강화도에 화도華島라고 별도 지명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유래는 다른 설명이 있다. 화도는 지형이 꽃과 같이 생겼거나 꽃이 많아 명명됐을 수 있지만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곶마을’이 되고, 이것이 ‘꽃마을’로 변해서, 다시 한자화하면서 화도로 정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강화에 대한 지명유래의 정확한 어원은 아직 정착되지 못한 실정이라 의견들이 아직 많다.
어쨌든 강화도와 마니산의 깊고 오래된 역사를 기록에서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강화도 마니산은 고대부터 최서쪽에 위치한 한반도 명산으로, 그것도 섬으로서 거의 유일하게 자리매김한 산이라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위도상으로 최서쪽은 아니지만 일찌감치 명산반열에 오른 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