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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12월 마운스토리 : 강화 마니산] 수도권 최고의 일몰 명산

글·사진 박정원 선임기자
  • 입력 2021.12.0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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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마운스토리’ 강화 마니산
고구려 때 창건설 전등사·고려 임시수도 강화도·곶 등 볼거리 수두룩

한반도의 일몰 명소로 유명한 마니산에서 서서히 해가 서쪽 바다로 기울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한반도의 일몰 명소로 유명한 마니산에서 서서히 해가 서쪽 바다로 기울고 있는 모습을 담았다.

강화 마니산摩尼山(472.1m)은 서해의 일몰 명산으로 꼽힌다. 여름엔 함허동천涵虛洞天과 같은 시원한 계곡에 많은 캠핑족들이 찾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겨울에도 경건한 마음으로 일몰을 보면서 차분히 일 년을 정리하는 사람들이 찾아 야영을 즐긴다. 높지도 않아 수도권 등산객들이 연말을 맞아 쉽게 찾을 수 있는 산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았다고 전하는 참성단(사적 제136호), 선사시대 부족국가의 무덤이 있는 고인돌 군락, 정설은 아니지만 고구려 때 창건했다고 전하는 우리나라 최고 사찰로 알려진 전등사, 고려 후기 몽골의 침입을 피해 임시수도였고 왕이 피란했던 강화성城, 조선 초기 함허대사가 중건했다는 정수사, 그리고 그가 “사바세계의 때가 묻지 않아 수도자가 가히 삼매경에 들 수 있는 곳”이라고 극찬했던 산과 물이 묘한 조화를 이룬 함허동천, 19세기 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던 광성보·덕진진·초지진 등 유적을 포함한 자연·문화 경관이 좋아 일몰과 함께 주변 볼거리로 유적나들이 코스로 적격이다.

선사시대부터 고대 삼국시대, 중세, 근대에 이르기까지 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곳이 바로 마니산이다. 특히 조선 후기 서구 열강들이 한반도를 침입해 올 때 격전지로서의 아픈 흔적은 강화도 곳곳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주요 침입로가 바로 강화였던 것이다. 그것은 강화도의 지명이 여실히 증명한다.

강화도는 원래 고구려 영토였다. 고대 지명은 고구려 고어로 갑비고차甲比古次였다고 한다. 갑비는 구멍穴을 뜻하는 고어로, 배가 드나드는 나루를 가리킨다. 고차는 입口을 뜻한다. 이는 지금의 곶串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따라서 갑비고차는 바다를 향해 길게 뻗은 곳에 있는 나루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구려 초기 갑비고차는 한자가 들어오면서 혈구로 바뀐다. 강화도에 있는 혈구산(466m)이 그 의미의 자취로 보인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경덕왕은 혈구를 다시 ‘바다의 입구’라는 뜻의 해구海口로 변경한다. 이 같은 내용은 <삼국사기>와 <고려사지리지>에 고스란히 나온다.

조선시대 함허대사가 수도 정진했다는 함허동천계곡에 ‘涵虛洞天’ 마애석각이 있다.
조선시대 함허대사가 수도 정진했다는 함허동천계곡에 ‘涵虛洞天’ 마애석각이 있다.

갑비고차→혈구→해구→강화로 지명 변천

<삼국사기>에 ‘해구군은 본래 고구려 혈구현이었는데 바다 가운데에 있다.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강화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지리지>에는 ‘강화현은 본래 고구려 혈구군(갑비고차라고도 한다)으로 바다 가운데 있으며, 정주貞州의 바로 서남쪽에, 통진현의 서쪽에 있다. 신라 경덕왕 때 해구군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중략) 마리산摩利山은 부府의 남쪽에 있으며, 산꼭대기에 참성단塹星壇이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하늘에 제사하던 제단”이라 한다. 전등산(일명 삼랑성三郎城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은 것”이라 한다)이 있다’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고려 말 조선 초 문신이자 문장가였던 이첨(1345~1405)의 기문에 ‘한강과 임진이 합류하여 조강祖江이 되고, 서쪽으로 잇달아 바다로 들어가는데 따로 흘러 갑곳이 되었다. 전조前朝의 고왕이 여기 와서 피난하는데 원나라 군사들이 쫓아와 말하기를 “갑옷만 쌓아 놓아도 건너갈 수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갑곶이라 이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리지의 내용과는 다소 다르지만 그럴 듯한 유래를 소개한다.

따라서 강화의 어원이 갑비고차에서 유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반인들에게 다소 생소한 설명일 수 있지만 한국 남방계 언어로 갑비는 구멍을 뜻하는 구무였고, 구무가 다시 굼으로, 이어 강으로 변했다고 한다. 고차는 고지 또는 곶으로 변했고, 중세 한국어에서 곶은 꽃이었기 때문에 꽃을 나타내는 한자 화華로 바뀌었다고 언어학자들은 말한다. 결론적으로 갑비고차에서 혈구로, 뒤이어 해구로 바뀌어서 지금 사용하는 강화로 됐다고 한다. 의미는 똑 같을지 몰라도 글자만으로 볼 때는 전혀 다른 뜻인 듯하다.

마니산 함허동천 방향으로 중간쯤에 조선시대 조성한 참성단 중수비가 있다.
마니산 함허동천 방향으로 중간쯤에 조선시대 조성한 참성단 중수비가 있다.

고려에서는 행정구역으로 강화현에서 강화군으로 승격했으나 지명을 강도江都라고 불렀다고 문헌에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 들어서 강화도로 완전 바뀌었다. 여러 고지도에서 확인된다. 강화의 유래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지만 강화도에 화도華島라고 별도 지명이 존재한다. 이에 대한 유래는 다른 설명이 있다. 화도는 지형이 꽃과 같이 생겼거나 꽃이 많아 명명됐을 수 있지만 곶串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고 해서 ‘곶마을’이 되고, 이것이 ‘꽃마을’로 변해서, 다시 한자화하면서 화도로 정착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강화에 대한 지명유래의 정확한 어원은 아직 정착되지 못한 실정이라 의견들이 아직 많다.

어쨌든 강화도와 마니산의 깊고 오래된 역사를 기록에서 고스란히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강화도 마니산은 고대부터 최서쪽에 위치한 한반도 명산으로, 그것도 섬으로서 거의 유일하게 자리매김한 산이라 볼 수 있다. 한반도에서 위도상으로 최서쪽은 아니지만 일찌감치 명산반열에 오른 산인 것이다.

16세기 후반 제작된 고지도 <동람도></div>에 현재 사용하는 지명 그대로 표기돼 있다.
16세기 후반 제작된 고지도 <동람도>에 현재 사용하는 지명 그대로 표기돼 있다.

그런데 <고려사>에는 마니산과 마리산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뜻은 전혀 달라 보인다. 기록자의 오기인지 같은 의미로 실제 같이 사용했는지 이 또한 알 길이 없다. 마니산 등산로 입구에는 마니산에 대한 유래를 다음과 같이 안내하고 있다.

‘마니산의 원래의 의미 우두머리라는 뜻의 두악頭嶽으로 <고려사>, <세종실록지리지>,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마리는 머리를 뜻하며,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불러오고 있다. 강화군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가 472.1m이며, 사면이 급경사로 화강암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후략)’

조금 다른 안내판도 있다.

‘마리산·마루산·두악산이라고도 한다. 백두산과 한라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해발고도 472m의 산으로, 강화도에서 가장 높다. 정상에 오르면 경기만과 영종도 주변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중략) 산 정상의 북동쪽 5㎞ 지점에 있는 정족산 기슭에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三郎城(사적 제130 호)이 있고, 그 안에는 유명한 전등사가 있다. 북동쪽 기슭에는 정수사법당(보물 제161호)이 있고, 북서쪽 해안에는 장곶돈대 1기가 있다.’

매년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하는 마니산 정상 참성단. 지금은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 강화군청 제공
매년 전국체전 성화를 채화하는 마니산 정상 참성단. 지금은 일반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사진 강화군청 제공

마니는 우두머리 또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

<세종실록지리지>에서 마니산을 ‘두악’이라 했다고 안내문에 설명했는데 실제 기록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산은 고려 마리산摩利山이다. 강화도호부 남쪽에 있다. 꼭대기에 참성단이 있는데 돌로 쌓아서 단의 높이가 10척이며, 위로는 모지고 아래는 궁글며, 단 위의 사면이 각기 6척 6촌이고, 아래의 너비가 각기 15척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조선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석단이라” 한다. 산기슭에… (후략)’

조선왕조실록의 다른 기록에는 마니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마리산과 마니산을 혼용해서 썼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정도 되면 마니산과 마리산은 같은 뜻으로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른 관찬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에서는 마니산으로 초지일관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강화 진산이 마니산에서 고려산으로 슬쩍 바뀐다.

그렇다면 마니산이든 마리산이든 의미가 같다면 과연 그 의미는 무엇일까? 안내문에는 ‘마니’가 머리를 뜻한다고 하는데, 어떤 의미 변화로, 왜 그렇게 변했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언어학자들은 마니는 르완다어 ‘manye’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심스럽게 추정한다. 이는 ‘나라를 지킨다’는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마니산은 ‘나라를 지키는 산’이라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정상 참성단과 연결해서 이해하면 어느 정도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참성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1682년 제작된 <동여비고></div>에도 마니산으로 나온다.
1682년 제작된 <동여비고>에도 마니산으로 나온다.

또 일부에서는 “마니는 강과 바다의 모퉁이라, 땅이 따로 동떨어지고 깨끗하며 고요하여 신명의 집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혈구 또는 해구의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강과 바다와 통하고, 하늘과 땅이 맞닿은 산이라는 의미로 신성한 참성단의 유래와도 맥이 닿는 듯하다. 불교적 의미로 ‘마니’는 보배 같은 지혜를 상징한다. 결론적으로 마니는 우두머리의 산, 나라를 지키는 산, 지혜의 산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마니산은 그러한 의미를 총체적으로 지닌 산으로 해석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직 정설이 없으니 가능성으로 추측할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대 중반 강화 지역주민들이 마니산을 실제 그들이 사용하는 마리산으로 바꾸자는 ‘지명 되찾기 운동’을 벌인 적 있다. 당시까지 마리산초등학교가 있었고, 교가에도 마리산이 등장한다. 어떤 기준으로 마리산으로 바꾸자고 주장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길 없지만 역사적으로 마리산보다는 마니산이 실제 더 많이 등장하는 걸 확인할 수 있으며, 이로 비춰볼 때 어느 특정단체가 조금 과잉주장한 것 아닌가 여겨진다. 결국 바뀌지 않았지만 마리산보다는 마니산이 조금 더 신성성이 있어 보인다. 조선시대 16세기부터 제작된 고지도 <동람도> <동여비고> <천하지도> <대동여지도> <해좌승람> 등에는 전부 마니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일제가 지명을 정리한     <조선지지자료>에도 마니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지금도 일부 주민들은 마리산으로 부른다고 한다.

마니산과 불가분의 관계인 정상 참성단도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정확히 파악할 길 없지만 역사서에 등장은 <고려사>부터이다. 태백산 천성단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숱하게 등장하는 것과는 사뭇 비교된다. 그렇다면 마니산 참성단은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피해 임시도읍으로 사용했을 때 하늘의 신성한 힘을 빌리기 위해 강화도에서 가장 높은 마니산에 참성단을 조성해서 외적을 물리치려고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가능하다. 강화는 고려의 임시도성으로 사용했을 만큼 도읍지로서 모든 기능을 갖췄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까지 가능성이다.

한 젊은 등산객이 함허동천 능선과 서해바다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한 젊은 등산객이 함허동천 능선과 서해바다를 카메라에 담고 있다.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이면서 토지가 비옥

마니산 정상 참성단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단군께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마니산 제천단이라고도 한다. 자연석으로 기초를 둥글게 쌓고 그 위에 네모로 쌓았다. 아래 둥근 부분의 지름은 8.7m이며, 상단 네모의 1변의 길이는 6.6m의 정방형 단이다. 상방하원上方下圓, 즉 위가 네모나고 아래는 둥근 것은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생각에서 유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에 임금이나 제관이 참성단에서 제사를 올렸으며, 조선시대에도 하늘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중략) 현재 참성단에는 매년 10월 3일 제천행사가 있으며, 전국체전 성화가 칠선녀에 의해 이곳에서 봉화를 채화하는 의식이 열린다.’

조선은 고려의 마니산 유산을 고스란히 받아들인다. <동국여지지> 에는 강화도의 형승을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토지가 비옥하니 큰 구릉과 평지가 있고, 식물이 풍성하게 자라니 콩, 보리, 벼가 자라기 적합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는 ‘강도는 천연의 험지이니 섬으로 성을 삼고 바다는 천연의 해자가 된다’고도 했다. 한마디로 천연의 요새이면서 비옥한 토지를 지녀 자급자족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선비들이 많이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마니산에 참성단 중수비 조성과 함께 선비들이 유유자적 하며 음풍농월을 즐기는 장소로 참성단과 함허동천은 특히 인기 있었다. 많은 개인문집에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마니산 참성단 재현.
마니산 참성단 재현.

마니산 참성단에 오른 감흥을 읊은 조선시대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문집에 다음과 같은 시가 전한다.

‘단군께서 몸소 만들었다 전해지는/ 천 년 된 높은 제단 참성단에 올라왔네.// 발아래 피어나는 구름과 노을 보려고 왔는데/ 머리 위엔 해와 달만 걸려 있게 하였구나. (후략)’

마니산 정상 참성단에 올라 구름에 가려 석양을 보지 못한 아쉬움을 읊고 있다. 여말선초 이색도 참성단에 올라 시를 남겼다. 

‘긴 바람 나에게 불어 요대瑤臺(신선이 사는 곳)에 오르니/ 넓은 바다 먼 하늘이 만 리나 터졌네// 옷을 털고 이어 발 씻을 것도 없다/ 신선의 피리와 학이 공중에서 내려오는 듯하네.’ 

18세기 전기에 제작된 <천하지도></div>에도 강화 마니산 표기가 뚜렷하게 있다.
18세기 전기에 제작된 <천하지도>에도 강화 마니산 표기가 뚜렷하게 있다.

한 해를 정리하는 12월, 마니산에 올라 서해의 일몰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 방법인 듯하다. 시적 감흥도 절로 날 듯하다. 또한 마음도 정리하면서, 선사부터 근대까지 유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한반도에서 몇 안 되는 장소다. 마니산은 1977년 일찌감치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마니산 산행은 크게 4개 코스로 나뉜다. 계단로로 부르는 제1코스는 마니산매표소에서 1004계단을 거쳐 개미허리와 헐떡고개를 지난 정상 참성단에 오른다. 왕복 4.8㎞에 약 2시간 30분 소요된다. 제2코스는 사실상 마니산 종주코스로 단군로에서 정상을 지나 함허동천까지 간다. 마니산매표소~단군로~372계단~정상 참성단~단군계단~헬기장~마니계단~바위능선~칠선교~칠선녀계단~함허동천로를 거쳐 함허동천매표소로 하산한다. 총 6.5㎞에 3시간 남짓 소요. 제3코스는 단군로에서 정수사로 하산하는 총 5.5㎞에 3시간 30분 소요되는 등산로다. 마니산매표소~단군로~372계단~정상 참성단~단군계단~헬기장~마니계단~바위능선~칠선교~칠선녀계단~정수사로 암릉구간을 힘들게 거쳐 정수사매표소로 하산한다. 계단이 싫다면 단군로로 정상에 올라가서 그대로 하산하는 방법도 있다. 서해바다의 일몰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총 7㎞ 남짓 3시간 이상 걸린다.

19세기 중반 제작된 <대동여지도></div>에도 마니산이 등장한다
19세기 중반 제작된 <대동여지도>에도 마니산이 등장한다
본 기사는 월간산 12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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