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숨은 명산] 부산 호령하는 스라소니 닮은 산

글·사진 김병용 북텐츠 대표
입력 2022.01.12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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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가 내려다보이는 팔금산 정상.
소설가 길남씨와 산행 약속을 잡았다. 엄광산은 몇 번 오른 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몇 년 전의 일이었고 증산에서 엄광산으로 이어지는 산행은 처음이었다. 그래서 ‘초행길에 무사히 잘 찾아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까?’ 하는 설렘이 공존해 잠을 설쳤다.

일찍 일어났지만 이것저것 챙길 것을 확인하느라 늦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 시간의 채찍질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버스를 타고 성북고개에 도착했다. 거기서 소설가 길남씨와 만나 증산공원으로 갔다. 길을 잘 아는 등산객들은 주로 좌천역에서 내려 증산공원으로 올라가는 코스를 선택하지만, 우리는 좀 더 쉬운 성북고개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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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으로 가는 이정표.
‘부산’이란 이름 낳은 증산

부산은 산이 많다. 나는 지금까지 부산이라는 명칭이 ‘산이 많아서 지어졌다’로 잘못 알고 있었다. 부산에 산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명칭은 산이 많아서가 아니라는 것을 증산을 통해 알게 되었다. 

부산釜山의 부는 가마솥 부釜를 쓴다. 산 모양이 가마솥 모양이라 해서 부산이라고 불렸는데, 이렇게 부산이라고 불린 산이 지금의 증산이다. 증산의 옛 산이름에서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의 이름이 유래한 것이다.

증산공원 꼭대기는 탁 트인 운동장 모양이다. 가마솥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윗부분이 평평하다. 거기에 전망대가 자리 잡고 있다. 바다 쪽에서 증산을 바라보았을 때 가마솥 모양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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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에서 바라보는 부산 앞바다(바다 쪽에서 증산을 바라보면 산이 가마솥 모양처럼 생겼다고 함).
성북고개에서 증산으로 가는 길은 트레킹 수준에 불과하다. 하지만 증산은 부산의 탄생과 근·현대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역사적 무게를 가지고 있기에 꼭 들러 볼 만하다. 증산공원 입구에 동구도서관이 있는데, 거기서 잠시 시 한 소절 읽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본격적인 산행에 앞서 증산에서 가볍게 트레킹을 한 후 첫 번째 ‘깔딱고개’를 만나러 팔금산으로 향했다. 범일초등학교를 지나 안창마을로 걸어갔다. 비탈길에 집들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부산에는 범천동, 범내골 등과 같이 범과 관련된 동네들이 있다. 내가 거쳐 갔던 범일동도 마찬가지이다. 근대에 이르러 일본 사람들에 의해 범들이 씨가 마르긴 했지만, 범이 출몰하는 지역에 사람들이 많이 살게 된 까닭은 아무래도 피란길에 살 곳이 없어진 피란민들이 등 떠밀려 여기까지 왔음이라. 그리고 안창마을에 다다랐다. 안창마을은 오리고기로 유명한 지역이지만, 과거에는 피란민이나 이주민들이 부산의 주변에서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밀려난 곳이었다. 지금은 문화센터도 짓고 활기찬 마을로 변모해 나가고 있었다.

팔금산 들머리에 들어섰다. 보기에는 그다지 숨차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산은 올라봐야 아는 것이다. 뒤에서 “아이고 죽겠다”고 하면서 바짝 따라붙는 소설가 길남씨에게 조바심을 내며 10분 동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에 올라섰다. 부산 사람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헉, 헉’ 소리를 지르며 겨우 올라간 정상에서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아무렇지도 않게 운동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이었다. 비록 236m라는 낮은 산이지만 절경이었다. 절벽 쪽에는 사람 5명은 너끈히 서 있고도 남을 만한 평평한 바위가 있었다. 포토존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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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탈에 즐비해 있는 집들과 동의대 가야 캠퍼스.
팔금산에서 놀란 폐를 달랜 후 엄광산으로 향했다. 엄광산 들머리를 찾기 위해 동의대 가야 캠퍼스를 지나쳐야 했다. 보통 산행을 하면 줄곧 산을 쭉 타게 되는데, 우리는 의도치 않게 도시와 산을 번갈아 가며 산행을 이어갔다. 기억은 켜켜이 쌓여 나만의 추억의 공간을 만들기도 하지만, 공간이 다시 기억을 소환하기도 한다. 대학 캠퍼스는 한때 좋아했던 그녀를 소환했다. 소설가 길남씨와 그런 추억들을 나눈 후 동의대 꼭대기에 있는 야구장에서 엄광산 들머리를 발견해 냈다. 길에 대한 확신이 없어 조바심을 내어서 그런지 너무나 기뻤다. 들머리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정상으로 가는 안내 표지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표지판의 안내에 따라 2번 길을 선택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안내판을 믿으며 즐겁게 걷고 있었지만, 하염없이 나오는 임도에 뭔가 싸늘함을 느꼈다. 엄광산은 능선길의 갈림길이 너무 많아 자칫 잘못하면 딴 길로 빠지기 쉽다. 인근 주민으로 보이는 분에게 정상으로 가는 길을 여쭤 보았다. “아까 보았던 표지판으로 다시 돌아가면 쉽게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조언과 함께 “다시 돌아가기 힘들면 저기 뒤에 보이는 산길을 선택하면 된다”는 말씀을 들었다.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후자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표지판으로 돌아가기 싫어서 ‘갸우뚱’하면서 산길로 올라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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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밟고 올라오라는 듯 유혹하는 돌길.
엄광산 정상, 부산 일대 다 보여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 될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이유 중의 하나가 ‘이족 보행’이다. 하지만 그 길은 나와 소설가 길남씨에게 이족 보행을 허락하지 않았다. 20분 정도를 네 발로 등산했다. 엄살 부리는 폐를 달랠 정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중간 중간 돌무더기가 발견되었다. 엄광산이 골산임을 실감케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에게 안 그래도 좁은 길은 더욱 더 좁아 보였고 낙엽에 감춰진 돌부리는 아찔하기만 했다. 어쨌든 생존이 우선이었다. 그렇다고 뒤로 돌아가기에는 동지를 앞둔 시점에서 오후 2시의 산은 곧 밤이 올 것 같은 분위기였다.

우리는 그렇게 엄광산 산행의 절정을 정말 ‘절정’답게 지나고 우여곡절 끝에 엄광산 정상 어귀에 도착했다. 등산 앱에서 정상까지 400m 남았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앱을 따라가다 보니 임도가 보였다. 길 안내를 해주셨던 주민분의 ‘갸우뚱’하셨던 모습이 떠올랐다. 잠시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숨을 들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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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가 내려다보이는 팔금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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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광산 정상.
정상에 있는 통신망 철탑마저도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일이라는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원효대사의 유심론唯心論이 떠올랐다. 정상에 다다르기 전의 약간의 위험은 우리에게 추억을 선사할 것이다. 엄광산은 일제강점기부터 ‘산이 높아 멀리까지 볼 수 있다’는 뜻의 고원견산으로 불렀으나, 1995년 4월 ‘부산을 가꾸는 모임’의 ‘옛 이름 찾기 운동’으로 엄광산이란 이름을 되찾았다. 엄광산은 주위에서 고도가 가장 높아 동구, 서구, 사하구, 북구, 해운대구 일부가 한눈에 내려다보여 부산이 항구도시임을 실감하게 한다. 높이는 504m이다. 산 높이로 보면 부산에서 가장 높지는 않지만, 주위의 일대를 호령하는 엄광산은 마치 스라소니를 닮은 듯했다.

정상에서 간단하게 요기한 후, 최종 목적지인 서구 대신동에 위치한 꽃마을로 향했다. 꽃마을로 향하는 하산길은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숨이 ‘깔딱’ 넘어가는 것을 넘어 ‘꼴딱’ 넘어갈 것 같은 경사도였다. 그리고 조금 더 내려가다 예쁘게 오솔길처럼 펼쳐진 편백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성지곡 수원지같이 거대한 편백나무에서 뿜어져 나오는 웅장함은 없지만, 작은 나무에서 나오는 낭만적인 숲길이 매력적이었다. 

내가 사는 곳은 개금이다. “재 넘어가서 막걸리 한잔 할까?” 아버지께서 점잖게 산행을 권하실 때 즐겨 쓰시던 말이었다. 여기서 ‘재 넘어서’는 바로 대신동 꽃마을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등산을 즐기게 된 동기가 막걸리였다. 꽃마을이라는 공간이 또 한 번 나의 기억을 불러왔다. 꽃마을의 볕은 아직도 우리에게 낮의 넉넉함을 나눠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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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낙엽이 아직도 가을을 그리워하는 듯하다.
산행길잡이
성북고개~증산공원~성북고개~범일초등학교~ 범천동~안창마을~팔금산~동의대~엄광산~ 꽃마을 (5시간 소요)

교통
부산 지하철 1호선 좌천역에서 내려 증산공원으로 가는 방법과 버스(87, 86, 186번)를 타고 성북고개에서 내려가는 방법이 있다. 지하철을 이용하면 초반부터 산행 아닌 산행을 시작하게 되고, 성북고개에서 내린다면 산행을 위한 워밍업 차원의 트레킹으로 시작할 수 있다.

숙박(지역번호 051)
산행 날머리인 꽃마을에 식당이 즐비해 있다. 오리 불고기와 닭백숙을 먹을 수 있는 해성집(243-6439), 얼큰한 동태찌개로 추위를 달랠 대한식당(255-7942)이 대표적인 맛집이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1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