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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파워 우먼들의 한북정맥 종주 2] 언니 배낭엔 미용 가위, 마스카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글 사진 성예진
  • 입력 2022.01.18 14:53
  • 수정 2022.01.1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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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여성 성예진과 언니 조수연의 한북정맥 종주 1일차

복계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해에 장난스럽게 입맞춤하는 사진을 찍었다.
복계산 정상에서 떠오르는 해에 장난스럽게 입맞춤하는 사진을 찍었다.

2021년의 마지막 날, 나는 북촌에서, 언니는 의정부에서, 각자의 집에서 출발해서 동서울터미널에서 만났다. 동서울에서 수피령 바로 아랫마을인 화천 다목리까지 한 번에 가는 차가 있어 다행이었다. 막차가 평일 오후 4시 20분에 끊기는 터라 반차를 써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서 부지런을 떨어 겨우 맞출 수 있었다.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 도착하니 저녁 7시인데도 워낙 시골이라 불 켜진 집이 드물다. 개중에 식당 몇 곳이 문을 열어 뜨끈한 해장국으로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사람 사는 곳인데 식당 문은 열었겠지’하는 다소 무모한 방식으로 준비 없이 지도만 보고 왔는데, 행운이 따랐다. 다행이었다. 정류소 옆에는 편의점도 있어 부족한 것은 여기서 보충하면 된다. 

식당에서 내일 새벽 수피령까지 타고 갈 택시 연락처도 알아냈다. 두 번째 행운이었다. 다만 새벽 4시에 출발하려던 계획에는 차질이 생겼다. 택시가 아랫마을인 사창리에서 넘어오는데 그 시간에는 여기까지 올 기사가 없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우리를 태워다 주고는 더 이상 손님이 없다고 했다. 

새벽 4시는 어렵고, 7시쯤 다목리에 볼 일이 있으니 6시 30분에는 맞춰줄 수 있다고 하여,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숙소에서 도로 3.5㎞를 걸어서 가는 것보다는 조금 늦더라도 그 시간에 가는 것이 더 나아보였다. 결국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하는 것으로 약속을 잡았다. 이것이 내일 맞이할 고통스런 야간산행의 복선이었다.

식당에서 나와 정류소 옆의 다 쓰러져가는 모텔로 들어갔다. 팔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혼자 관리하는 듯 보였다. 낡은 건물에서 느껴지듯 지저분한 방이었다. 입실하기 전,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며 사장님께 “혹시 숙소는 바로 옆에 하나뿐인가요?” 물었을 때 피식 웃으며 “돈 주고 자기 아까운 방이죠?”하던 그 말의 뜻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녜요. 저희 숙소 가리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더니 손님들이 다들 한마디씩 하고 간다며 웃었다. 

그래도 숙소에서 잘 수 있는 게 어딘가. 좋게 생각하려고 했다. 다소 찝찝하지만 한겨울 뜨끈한 밤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어디인가. 노숙도 마다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냉장고에 진 곰팡이와 그 냄새, 바닥과 테이블에 가득한 먼지, 이불 속 많은 머리카락과 벌레들은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수연 언니의 배낭에서 나온 물건들. 분명 내일이면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수연 언니의 배낭에서 나온 물건들. 분명 내일이면 후회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보고 깜짝 놀란 수연 언니의 배낭

편의점에서 사온 맥주로 입가심을 해본다. 숙소에 들어오니 수연 언니의 배낭이 더욱 눈에 띈다. 내 배낭과 비교하니 더 크고 무거워 보인다. 터미널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배낭을 들 때마다 “별로 넣은 것도 없는데 무겁다”며 갸우뚱 하던 언니의 배낭. 

뭐가 들었을까? 열어보고 충격을 금치 못했다. 헤드랜턴도 챙기고 혹시 몰라 하나 더 챙겼다는 손바닥만한 캠핑용 랜턴이 든 케이스에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책이 있었고, 파우치에는 화장품이 가득했다. 미용 가위, 마스카라 두 개, 각종 화장품과 캘리그라피펜. 아무래도 종주보다는 여행에 어울리는 내용물이었다. 

워낙 잡동사니가 많아서 집에서 쓸 법한 커다란 치약과 칫솔, 린스, 샴푸 같은 다른 무거운 짐들은 존재감이 약해 보일 정도였다. 내가 놀라자 머쓱했는지 “이게 왜 여기 들어있지…”하며 다시 배낭 속에 넣는 언니. 나는 자못 진지한 눈빛과 말투로 “언니 이거 진짜 다 쓸거예요? 우리 그냥 버리고 갈까요?”“하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이후 언니는 부쩍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러곤 물건을 다시 주섬주섬 배낭 안에 집어넣었다. ‘분명 후회할 텐데…’하는 생각이 스치며, 우리가 맞닥뜨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내일 일정에 대한 이야기, 그간 보낸 세월에 대한 안부를 나누며 2021년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아침 5시 30분, 알람 소리 한 번에 눈이 번쩍 뜨였다. 출근 때 같았으면 두 번, 세 번 신경질적으로 울리는 알람에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을 텐데 오늘은 다르다. 역시 놀러 가는 데는 장사가 없다. 바닥이 뜨거워 잠을 뒤척였음에도 몸은 개운하다. 

1월 1일 아침, 수피령을 출발해 복계산으로 오른다.
1월 1일 아침, 수피령을 출발해 복계산으로 오른다.

몸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눈 뜨자마자 ‘감성’을 찾겠다며 물을 끓여 드립커피 한 잔씩 마셨고, 간편식으로 챙겨 온 전복죽을 나눠 먹었다. 전날 먹은 해장국의 든든함이 아직 채 가시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먹어둬야 산에서 그 힘이 발하는 법. ‘먹은 만큼 간다’는 진리를 되새기며 숟가락을 억지로 들었다. 이제 엉덩이를 떼면 먹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먹어두려고 애썼다.

택시를 타고 수피령으로 향했다. 한북정맥 출발 기점인 대성산 전적비에 도착해서 사진도 찍고, 장비를 갖추고 산행을 시작하려니 7시가 다 되어 간다. 아쉽다. 새해 첫 날의 일출을 복계산 정상에서 보고 싶었는데, 이미 늦었다. 이러면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그래도 좋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능선에 올라서 해를 보기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택시 기사는 좀 더 위쪽의 임도를 따르는 코스가 편하다며 권해주었지만, 나는 등산로로 가고 싶었다. 이정표는 없지만 산악회 표지기가 이정표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들머리. 이쪽 길에 마음이 동했다. 제법 쌓인 눈 위로 대여섯 개의 발자국이 있는 걸로 보아 우리보다 앞서 간 팀이 있는 것 같다. 눈이 많이 와서 길을 헤매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일이 잘 풀려가고 있었다.

여명이 밝아오는 한북정맥 능선길에 섰다.
여명이 밝아오는 한북정맥 능선길에 섰다.

몇 걸음 내딛고 거친 숨을 토해낸다. 시작과 동시에 펼쳐진 거친 오르막에 숨이 금세 거칠어진다. 시작이구나! 거친 호흡과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바라보는 반대편 능선에서 희미하게나마 날이 밝기 시작한다. 산기슭이 희붐히 밝아온다. 새벽 여명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다. 어슴푸레한 새벽 여명이 느껴지지만 아직 하늘에는 말갛게 늘어선 나무 사이로 별이 총총하게 들어서 있고, 초승달이 눈웃음 짓고 있다. 

별을 보며 강원도 산골짜기에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어젯밤 식당에서 나오면서도 봤던 것 같은데 여기는 별천지구나. 2년 동안 서울살이를 하며 별을 본 적이 있던가. 감흥이 남다르다. 능선에 올라서자 점점 새벽 여명이 강하게 밝아온다. 잠깐이면 어둠이 물러가고 날이 밝을 참이다.

이제 시작일 뿐인데, 일출 무렵의 그 뜨거움에 자꾸만 고개를 돌리게 된다. 탄식이 절로 나온다. 언제 보아도 가슴 뜨거워지는 일출은 새해가 밝은 것을 아는지 유달리 밝게 타오른다. 복계산과 복주산 능선이 조망이 없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하루 종일 걸어도 그다지 매력적인 그림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컸다. 지금의 이 뜨거움을 흠뻑 즐기고 싶었다. 아마 해가 뜨고 나서부터는 지루한 능선길을 의무감에 숨 쉬듯 걷게 되리라. 

자꾸만 발목을 잡는 일출의 황홀경에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능선에 올랐다. 동그란 계란 노른자처럼 말간 태양을 바라보며 소원도 빌고, 오늘 시작한 종주가 무사히 끝나기를 바랐다. 그 뒤로 복계산까지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굳이 힘 뺄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 삼거리에서 잠시 가방을 내려두고 복계산 정상으로 향했다. 무슨 배짱이었는지 혹시 누가 훔쳐갈까 하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복계산 정상은 한북정맥 주능선에서 살짝 빗겨나 있다. 그래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구간이라 올라 보고 싶었기에 정상 표지석 구경을 하고 돌아와 복주산 방향으로 향했다.

복계산 정상에 오르는 동안 이미 해가 등뒤로 떠오른다. 일출의 감동에 계속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복계산 정상에 오르는 동안 이미 해가 등뒤로 떠오른다. 일출의 감동에 계속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앗! 스패츠를 떨어뜨리고 왔다

복계산 정상에서 텐트 5동을 만났다. 발자국의 주인이구나. 우리와 같은 정맥팀일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을 제대로 빗겨 갔다. 이른 시간부터 쉘터 안이 시끌벅적 소란스러워 보였다. 얼큰하게 술에 취한 듯하여 말을 걸지는 못하고, 속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발자국 덕에 짧은 거리지만 편히 왔다. 정상에서 강렬하게 내리쬐는 태양과 함께 2022년 첫 일출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었다. 여기까지는 놀멍쉬멍 요령 피며 몸을 풀었으니 이제 복주산까지 신나게 달려보자 다짐했다.

저 멀리 보이는 대성산을 뒤로하고 본격적인 한북정맥 종주에 돌입한다. 원래 한북정맥은 대성산이 남한 출발 지점인데, 일반인이 출입하기 어려워 수피령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삼거리로 돌아와 출발할 채비를 하는데, 언니가 화들짝 놀라 나를 쳐다본다. 스패츠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언니의 목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느껴진다. 

가방의 측면에 꽂아두었던 스패츠는 이미 택시에서 내리면서 한 번 떨어졌던 참이다. 택시가 차를 돌려 떠나기 직전이라 간신히 구할 수 있었는데, 올라오는 길에 나뭇가지에 걸려 버둥거릴 때 그때 또다시 탈출을 감행했나 보다. 

고생길을 미리 알았던 것일까. 다리에 한 번 감아보지 못하고 일찍이 사라져버린 스패츠. 한 번도 쓰지 않은 새 제품이라고 했다.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힘들었던 오르막길을 알기에 둘 다 주우러 가고 싶진 않았다. 스패츠를 두고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쓰레기가 되지 않고 누가 주워가서 잘 쓰길 바라는 마음으로 복주산으로 향했다. 시작부터 새해 액땜 제대로 했다.

복계산에서 복주산으로 이어진 한북정맥은 생각보다 험해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복계산에서 복주산으로 이어진 한북정맥은 생각보다 험해서, 속도가 나지 않았다.

복계산 삼거리 이후 복주산으로 향하는 길에서 한동안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엔 무척이나 좋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길을 가장 먼저 밟는 그 기분이란! 비탈진 오르막을 오를 때 딛는 걸음마다 살짝 미끄러지는 느낌이 좋았다. 내리막에서 발을 슬쩍 디디면 넘어질 듯 말 듯 미끄러지는 느낌도 좋았다. 이 순간 아무도 부럽지 않은 기분. 그런 내 마음과는 달리 언니는 눈길이 좋으면서도 힘에 부치듯 보였다. 

내가 몇 걸음 앞에서 러셀하여 길을 만들고, 언니가 뒤따랐다. “언니! 귀여운 펭귄 같아요”라고 농담을 걸었다. 나도 8자 걸음이 심한 편인데, 언니도 특유의 걸음걸이가 짙다. 더욱이 눈까지 쌓인 비탈진 노면에 뒤뚱거리는 모습이 펭귄 같았다. 앞서 걷다가 뒤돌아서 언니를 보면 큰 가방을 메고 버둥거리는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실제로 보았다면 모두들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언니 말로는 펭귄 중에 제일 빠른 펭귄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따라오고 있었단다.

언니의 말을 듣다보면 나의 처음 산행이 떠오른다. 언니는 좁은 비탈길을 걸으며 가방 무게 때문에 굴러 떨어질까봐 중간 중간 숨을 멈추고 걸었다고 했다. 나 역시 다 겪어보았던, 한 번쯤은 느껴보았던 것들이다. 시기적으로 우린 서로 다른 때를 지나고 있지만, 이야기 나누다 보면 묘한 동질감이 들곤 한다. 언니와 함께 하는 종주가 즐거운 이유 중 하나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라지 않는가. 나의 지난 모습을 언니에게서 발견할 때면 퍽 기분이 좋다. 어쩌면 나이 차이가 많아 불편할 수 있는 것들도, 내가 꼰대력을 발휘해 조언이랍시고 하는 말들도, 모나지 않게 받아주는 언니가 늘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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