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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막막할 땐 산] 벚꽃 엔딩, 꽃 피우지 못하는 삶이 더 많다

글 이지형 ‘강호인문학’ 저자
  • 입력 2022.05.11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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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산자락 오솔길에 떨어진 동백꽃이 처연히 붉다. 거제 노자산. 사진 C영상미디어
봄날 산자락 오솔길에 떨어진 동백꽃이 처연히 붉다. 거제 노자산. 사진 C영상미디어

동백꽃의 결연한 죽음에 대해선 말들이 많았다. 시들 기색조차 없다가 어느 새벽 툭, 하고 떨어지는 동백꽃의 갑작스런 낙하는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세 번 핀다’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가지 위에서 한 번, 땅에 떨어져 한 번, 보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한 번…. 동백꽃의 짧은 생生에서 신심 깊은 사람들은 핏빛 순교를 보았다. 

허공에 획을 긋는 붉은 감탄사, 동백

때 이르게 선운사를 찾았던 미당未堂(서정주)이 연전年前에 피었던 동백의 자취에 가슴 쓸어내린 것도 그 결연함 때문이다.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았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오히려 남았습디다”라 시인은 절창했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니다”라고, 고금에 유례없는 감상을 남겼다(‘선운사 동구’ 부분 인용).  

동백의 기막힌 사연은 세월을 넘길수록 강렬해진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던 이는 문정희 시인이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나는 차마 발을 내딛지 못하겠다”고 시인은 탄식했다(‘동백꽃’ 부분 인용). 

그러나 어디 세상에 결연한 죽음뿐인가. 고달픈 죽음, 덧없는 죽음이 많아서, 올 봄에도 그 죽음의 메타포metaphor(은유)들을 숱하게 직면해야 했다. 갖가지 나무들이 우리가 지나온 산과 길에 흩뿌려대던, 형형색색의 죽음들에 대해 몇 마디라도 보태고 싶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구례 섬진강. 사진 이원규 시인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수많은 시인묵객들은 인생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구례 섬진강. 사진 이원규 시인

병중의 목련이 그리울 때가 있다

동백이 피고 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목련이 피고 졌다. 고단한 죽음의 전형이다. 고급한 아이보리색의 꽃송이는 가지 위에 몸을 꼿꼿하게 세운 상태로, 급속하게 노화한다. 미동 없이 갈색으로, 흑색으로 타들어가는 꽃봉오리, 그 안의 보이지 않는 속내를 우리는 얼마나 알 수 있을까. 끝내 알 수는 있을까. 

늦봄의 목련, 그 시들어가는 꽃송이에서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절감한다. 우리도 한때는 목련처럼 해맑았다. 우리도 언젠간 목련처럼 시들어간다. 엔간한 자연사自然死는 대개 그런 모양새다. 영원한 젊음을 희구하는 일은 헛된 바람이다. 우리의 짧고 긴 삶들도 죄다 헛소동이기 쉽다. 목련은 그렇게 우리 삶의 맞은편에서, 우리 삶을 미리 살고 위로한다. 시들어가는 일의 애틋함을 웅변한다. 

젊을 땐 탐스런 꽃송이로 봄밤을 밝힌 목련에 반했다. 나이 들어선 눈에 밟히는 병중病中의 꽃송이를 보며 슬퍼한다. 차마 맘속에 담아 두지 못할 풍경…. 한참 후 모진 세월마저 다 넘기고 나면, 목련의 화려와 쇠락을 동요 없이 쳐다볼 수 있을까. 품을 수 있을까. 그걸 아직도 모르겠다.   

벚꽃들의 홀가분하고 덧없는 삶

목련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얼마 전까지 벚나무가 피어 올리던 작은 꽃잎들도 그예 자신의 생사를 달리하는 중이다. 그 작은 분홍 꽃잎들의 무한 조합이 얼마나 아름답던지 하이쿠의 대가는 이리 읊었다. 두 사람의 생애, 그 사이에 피어난 벚꽃이어라…. 두 사람 사이에 얼마나 진한 연분과 애틋함이 있었기에 해마다 봄이면 그리도 흐드러지는가. 

벚꽃은 예고 없이 확 피어난다. 대규모 정전처럼 확 사라진다. 클라이맥스만을 보여 주는 벚꽃이다. 피어나는 순간, 벚꽃은 이미 한바탕 절정이다. 그리고 단 며칠 만에 홀연히 사라진다. 간밤만 해도 투명한 대기를 분홍으로 물들였는데 오늘 아침엔 모두 어디로들 간 건지. 벚꽃들은 전국의 콘크리트와 흙바닥을 화려한 점묘點描로 수놓는 중이다. 소리 없는 그 죽음을 뭐라 표현해야 할까. 

참으로 홀가분한 죽음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는, 집도 절도 없이 떠돌다 바람 속으로 사라지는 나그네의 삶이 벚꽃에 아로새겨져 있다. 동백의 결연함도 아닌, 목련의 고단함도 아닌 그 무엇이 벚꽃의 죽음을 그리 홀가분하게 만들까. 자유로운 듯 가벼운 그 죽음이야말로 덧없는 삶의 반증이다. 덧없어야 좋은 삶일까. 그것 역시 아직 모르겠다.    

눈높이를 낮출 때 보이는 들풀들

동백과 목련과 벚꽃의 각기 다른 삶, 각기 다른 죽음을 목도하면서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게 있다. 꽃 피우지 못한 삶, 꽃 피우지 못한 죽음이 우리 곁엔 많다. 그런 삶과 죽음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거의 전부일지 모른다.  

많은 식물들이 생존을 위해 세상에 씨를 퍼뜨리지만, 모든 식물들이 꽃을 통해 그리 하는 건 아니다. 꽃은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소수의 식물들만이 독특하게 만들어낸 생존 장치다. 꽃 피우는 식물들은 화려한 꽃잎으로 곤충들을 유혹해 꽃가루(씨)를 퍼뜨린다. 꽃이 없는 식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씨를 세상에 흩뿌려야 한다. 그저 바람에만 의지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무질서한 공기의 흐름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는 건 무애無碍의 경지다. 

시야의 고도를 찬찬히 낮추어 갈 때, 산자락의 낮은 풀잎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풍성한 나무들 발치에서, 널찍한 나뭇잎들이 흡수하고 남은 소량의 햇빛으로 힘겨운 삶을 지탱해 나가는 여린 풀잎들이다. 세상엔 그렇게 숨은 삶이 많다. 때론 짓밟혀야 하는 삶도 있다. 그 삶까지가 우리들의 세상이다.  

꽃 있어도, 꽃 없어도… 눈부신 5월의 풍경

주말에 오른 북한산이 눈부셨다. 5월의 태양이, 수억 년 묵은 화강암 군집이, 생명력을 주체 못한 잎들이 빛을 냈다. 그렇게 금빛과 잿빛과 초록과 고동古銅이 어울린 북한산 숲길 사이로 꽃들이 피고 지는 중이다. 바람이라도 불면, 그 아래로 이름 없는 풀들이 지친 몸을 누인다. 풍광이 기적 같아 자주 멈칫했다. 

그날, 서울 불광역 뒤 대호아파트 곁길을 통해 족두리봉으로 단숨에 치달아, 향로봉과 비봉과 승가봉과 사모바위를 거쳐 문수봉에서 한 숨 놓은 뒤, 대남문·대성문·대동문을 오르내리며 지칠 만큼 지치고, 다시 동장대와 용암문과 위문을 거쳐 백운대에 설 때까지 북한산 풍경은 내내 첩첩하고 중중했다. 

그 깊고 그윽한 풍경 속에서 제 위치를 지키고 있을, 꽃 있는 것들과 꽃 없는 것들의 오래된 조화를 떠올리면서 가끔씩, 울컥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5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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