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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막막할 땐 산] 애국가, 태극기, 산성, 유세…등산의 정치학

글·사진 이지형 <강호인문학> 저자
  • 입력 2022.07.07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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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정치

휴일이면 백운대 정상에 긴 행렬이 늘어선다. 무심히 펄럭이는 태극기에서 정치적 속내를 찾는 건 과도한 상상일까?
휴일이면 백운대 정상에 긴 행렬이 늘어선다. 무심히 펄럭이는 태극기에서 정치적 속내를 찾는 건 과도한 상상일까?

극장에서 애국가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관객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합창이었는지 바리톤이었는지 소프라노였는지 기억나지 않는, ‘동해물’에서 시작해 ‘보전하세’로 끝나는 노래를 들으며 어둠 속 청춘들은 무표정했다. 그렇게 심드렁하게 애국가를 보고 들어야 했던 세월이 1971년에서 1989년까지, 20년 가깝다.

구시대의 끝물에 허랑한 청춘 몇 년을 걸친 까닭에, 당시 극장 분위기를 좀 아는 편이다. 그런데 의아하다. 그때 우리는 왜 그리 순순했을까.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애국가를 왜 경청만 했을까. 요즘 말로 하면 TPO(시간·장소·상황)를 깡그리 무시한 정부의 폭거暴擧였는데….

어둠 속 애국가 송출이 여전히 한창이던 1988~1989년이면 거리의 시민들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도 1년은 지난 후다. 정치적 자유는 얻고도 영화 감상의 자유는 얻지 못했던,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과도過渡의 시절이다. 그런데 엊그제 점심을 즈음해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다가 오래된 시대착오의 추억을 주억거렸다.    

백운대 정상, 태극기를 향한 행렬

한낮의 백운대엔 수백 명의 등산객이 빼곡했고, 정상을 향한 20~30m의 줄은 지루할 만큼 길었다. 그 끝에서 태극기 한 장이 심란하게 펄럭이는 중이다. 순간, 심연과도 같은 불화를 느꼈다. 이 시간, 저 자리에 왜 태극기가…. 주말 아침 화강암들의 절경이 보고 싶어 산을 찾은 나는 왜, 바람에 펄럭이는 태극기와 그 깃발을 경배라도 하려는 듯 늘어선 행렬을 봐야 했나.

물론 그들은 태극기를 경배하지 않는다. 태극기는 액세서리일 뿐이다. 해발 836.5m, 북한산 정상의 백운대 표지석과 그 주위를 맴도는 바람을 배경으로 찍힐 인증샷의 포인트 같은 거다. 점심을 먹은 후, SNS에 올릴 인증샷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의 부지런함과 어쩌면 가상일지 모를 행복을 뽐낼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곳엔 왜 태극기가 있을까. 백운대의 태극기를 처음 본 게 아닌데, 족히 수십 번은 보았을 텐데 그날은 영 아귀 맞지 않는 애국의 풍경이 생소했다. 긴 행렬의 소란과 흥분이 잦아들면 갑자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의 첫 소절이 울려 퍼질 것 같았다. 1970~1980년대의 어두운 극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기립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중년의 과도한 감성感性과 감상感傷을 나무랄 분도 있겠다. 서울 하늘 위로 깃발 하나 더 펄럭이면 어때, 그게 태극기이면 어때, 다 같이 도열해 국기에 대한 맹세나 국민헌장을 암송할 것도 아닌데 뭐 어때…, 생각하실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북한산 능선을 타원의 성곽이 두르고 있다. 300년 전 한양의 정치인들은 축성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북한산 능선을 타원의 성곽이 두르고 있다. 300년 전 한양의 정치인들은 축성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북한산성과 민주산악회의 사연

거친 암반으로 구성된 백운대는 인수봉만큼 어렵진 않아도 맨몸, 맨손으로 오를 곳이 아니다. 육중한 철골과 치렁치렁한 와이어가 없다면 우리는 동네 뒷산처럼 백운대를 오르지 못한다. 그런데 험한 암반 위로 등산로를 낸 이들은 우리의 수십 년 세월을 강점했던 일제다. 그들은 성스러워 보이는 북한산 정상이 말 그대로 짓밟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비 온 뒤 새벽이면 보랏빛 상서로운 구름이 봉우리를 감고 도는 적막과 신비 앞에서 그들은 막연한 불안을 느꼈을지 모른다. 자신들의 불온한 강점强占이 벌 받지 않을까 걱정했을 게다.

그렇게 보면, 백운대 정상의 태극기는 100년 전 그들의 만행에 대한 은연중의 반발이기도 하다. 하지만 백운대에 쇠말뚝과 철골을 심은 것도, 세월이 지난 뒤 등산로의 종착지에 태극기를 꽂은 것도 어찌 보면 다 같이, 고도의 정치 행위 아닐까.

속세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 같아도 산은 사실,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긴 세월에 걸쳐 강건했던 ‘정치 공간’ 서울을 곁에 둔 북한산은 말할 나위 없다. 18세기 초반 숙종은 군사적 열패감과 외침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북한산 중심부에 얼기설기 산성을 둘렀다.

북한산의 요새화 여부와 시기를 둘러싸고 조선 조정에서 벌어졌을 논쟁을 떠올려보라. 정치로부터, 북한산은 자유롭지 않다. 300년 전에 만들어진 북한산성을 따라 걸으며 때로 답답함을 느끼는데, 그건 가로막힌 외부 풍경에 대한 갈증만은 아니다. 천혜의 자연을 가둔 속세의 정치에 대한 불만이다.

산 특유의 은밀함이 정치를 불러들이기도 했다. 1980년 대 초반, 신군부에 의해 손발이 묶였던 김영삼YS은 민주산악회를 통해 ‘정치’를 재개했다. 민주산악회의 첫 산행이 북한산 등반이었다. 엄혹한 시절의 김영삼에게 산은 유일무이한 정치 공간이었다. 산을 오르며 동지를 규합했고, 산 위에서 정치 일정을 짰다. 외신기자들과의 인터뷰도 북한산에서 이뤄졌다. 

정치가 사라진 산을 꿈꾸며

북한산과 함께 북한산국립공원을 구성하는 도봉산의 초입도 선거 때면 정치로 시끌시끌하다. 산은 많은 사람이 일거에 모여드는 곳이고, 당선을 꿈꾸는 이들에겐 유세의 최적지다. 지난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도, 도봉산 입구는 국가혁명당을 비롯한 여러 정당들에 의해 주말마다 점거 당했다.

어쩌면 산에서 비非정치, 탈脫정치, 무無정치를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망할지 모르겠다. 산은 성스러워서(철골과 태극기), 험난해서(축성), 은밀해서(민주산악회), 번잡해서(국가혁명당) 정치적 공간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체의 정치를 탈색한, 그래서 속세와 무관한 산을 꿈꾸는 건, 계곡의 심오深奧와 능선의 활발活潑과 봉우리들의 지고至高를 필터 없이 느끼고 싶어서다. ‘대한늬우스’의 한 컷이 되어버린 영화관의 애국가처럼, 백운대 정상의 태극기도 언젠간 지난 시대의 추억이 되어주길 바라는 건 불충한 일일까.

월간산 2022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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