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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불심검문 러시아 경찰은 구글 번역기를 꺼냈다

정갑수
  • 입력 2022.11.09 09:38
  • 수정 2022.11.10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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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선 차량 썬팅 불법인 걸 몰랐나”
[나홀로 차박 세계일주] 일곱번째 이야기

가을 추수를 끝내고 겨울 채비를 하는 벌판과 숲
가을 추수를 끝내고 겨울 채비를 하는 벌판과 숲

시베리아는 이르쿠츠크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의 지질 및 형태가 달라지는 것 같다. 이르쿠츠크의 동쪽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는 완만하지만 뚜렷한 산맥이 형성되어 나름 눈을 즐겁게 한다. 자작나무 숲의 색깔들이 노랗게 변하는 모습과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나뭇잎이 서서히 떨어져 나뭇가지들이 존재감을 더해가는 풍경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르쿠츠크를 떠나 서쪽으로 갈수록 산은 서서히 없어진다. 드문드문 숲과 광대한 벌판이 펼쳐진다. 눈을 좌우로 돌려도 보이는 건 끝없는 평야뿐이다. 말 그대로 시베리아 벌판이다. 

시베리아 벌판의 숲을 보니 20세기 초 양자역학이 탄생했을 때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 신봉자들의 논쟁이 생각났다. 숲에서 홀로 쓰러진 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면 그 나무는 쓰러진 것일까? 나무를 관찰하기 전에는 나무가 쓰러져 있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람이 관찰함으로써 비로소 나무의 상태가 확정된다고 하는 것이 양자역학적 사고방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양자역학의 성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확률론적 해석을 못마땅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가 저 달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숲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를 볼때 당신은 정말로 그 나무가 쓰러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숲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를 볼때 당신은 정말로 그 나무가 쓰러졌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이에 양자역학 신봉자들은 숲에서 홀로 쓰러지는 나무를 예로 들면서 “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면 달이 그곳에 있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달의 위치를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가 달을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물론 아인슈타인은 그들의 대답에 만족하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달을 바라보건 바라보지 않건 간에 달은 항상 그곳에 존재한다”고 응수했다.

사람이 관찰한다는 ‘의식’이 있을 때만 모든 사물은 의미를 갖는다는 건 꽤 어렵고 철학적인 사유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이미 이 시 구절로 이를 체득하고 있다. 김춘수의 <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시베리아의 벌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시베리아의 벌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시베리아의 벌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시베리아의 벌판은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유럽의 빵바구니’였던 우크라이나 

차를 운전하다 보면 앞에 보이는 경치도 멋있지만 사이드 미러에 비치는 시베리아의 뒷모습도 멋있다. 특히 아침에 서쪽을 향해 달려가다 보면 뒤쪽의 아스팔트 도로가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 정어리떼가 쫓아오는 듯 보여 아름답기 그지없다. 또한 거울이 공간을 압축해 보여주기 때문에 더 극적이다. 마치 예쁜 여인의 뒤태가 더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저녁 무렵이면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진다. 그때는 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황금빛 주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온 세상이 황홀해진다. 추수를 끝낸 밀밭은 노란색이 물든 아이보리가 끝도 없이 펼쳐진다. 내년에 경작을 위해 갈아엎은 땅은 검은 색이다. 그에 반해 숲에서 자라는 풀들은 황갈색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파란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깨끗하다.

시베리아의 땅이 검은 색이라 요즘 러시아와 전쟁을 하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생각난다. 유럽의 곡창 지대라고 부르는 우크라이나는 만주에서 몰도바까지 유라시아 스텝의 서부에 있다. 유라시아 스텝은 초원길, 비단길과 같은 동서양의 교역로 역할을 해 왔다. 우크라이나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6배이지만 경작 가능한 땅은 17배에 달할 정도로 대부분 평지다. 그 가운데 반 이상이 ‘체로노젬(흑토)’이라는 기름진 땅으로 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부른다. 

도시의 나무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낙엽을 떨구고 있다
도시의 나무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낙엽을 떨구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진정한 힘은 높은 과학기술 수준에 있다. 조선과 원자력 분야뿐만 아니라 우주선과 항공기는 자체적으로 설계와 제작이 가능할 정도다. 그래서 세계 최대 크기의 비행기도 있었다. 애석하게도 이 비행기는 러시아의 공습으로 지금 파괴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로 전락했는데, 집권층의 뿌리 깊은 부정부패, 소련 시절부터 남아 있는 관료주의, 그리고 우리나라 영호남 지역 갈등보다 훨씬 심한 동서 간의 오랜 분열 등이 원인이다. 동부와 서부는 이미 몇 백 년 동안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고 문화, 종교, 경제 구조마저도 다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전쟁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이러다 핵전쟁이라도 나면 나는 시베리아에서 고립무원 상태가 되는 것은 아닐까?

구글 지도만 믿다가 낭패

시베리아의 도로는 시작부터 끝까지 약간의 굴곡이 있을 뿐 거의 외길이다. 굳이 구글 지도를 안 봐도 된다. 심지어 자율주행도 필요 없다. 오토 크루즈로 전환해서 일정한 속도로 달리도록 조정해놓고 핸들에서 손을 떼도 운전하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치타까지는 지방 정부의 재정이 빈약해서 그런지 지뢰 같은 포트홀이 많다. 움푹 파인 포트홀을 만나면 자동차는 요동을 치고 바닥을 긁는다. 내 마음마저 아프다.

볼가 강 근처에서 차박 중 노을을 바라본다.
볼가 강 근처에서 차박 중 노을을 바라본다.

도로에는 도시와 도시 사이에 물품들을 운반하는 화물차들이 많이 다닌다. 길이가 보통 10m를 넘는데, 직선도로라 다들 시속 100km는 기본으로 밟는다. 그런 괴물같은 차들을 추월하려면 시속 120km 이상 밟아야 한다. 왕복 2차선 도로니 가끔 생사를 오갈 정도로 등골이 서늘해질 때가 있다. 그런데 화물차를 앞지르면 또 다른 화물차들이 연이어 있다. 결국 제풀에 지쳐 화물차 뒤꽁무니를 따라가게 된다. 그러면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세상이 평화롭게 보인다. 차를 운전하다 보면 시속 90km를 전후해 밖에 내다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마치 놀이공원에서 자이로드롭을 타고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의 차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눈은 이처럼 빠른 속도를 경험해보지 못해 미처 경치를 따라가지 못한다.

시베리아는 땅덩어리가 커서 도시와 도시 사이가 무려 1,000km 넘는 곳도 있다. 그런 곳은 아침 8시에 출발해서 밤 8시까지 종일 운전해야 한다. 저녁을 먹고 호텔에 들어가면 파김치가 된다. 눈을 뜨면 호텔 방의 천장이 도로로 보이고 눈을 감아도 시베리아의 풍경만 눈에 어른거린다.

옛날에는 러시아 교통경찰에게 잡히면 뇌물을 주면 간단히 해결되었다고 한다. 요즘에는 천만의 말씀. 운전을 하다 두 번 정도 불심검문에 걸렸다. 다름 아니라 썬팅이 너무 짙기 때문이었다. 세계가 하나의 통신망으로 연결되다 보니 러시아의 젊은 경찰들도 세련됐다. 운전 면허증을 요구하더니 외국인인걸 보고 핸드폰에서 구글 번역기를 켠다.

“당신은 러시아에서 썬팅이 불법이란 거 아냐?”

“나는 코리안이다. 까레이스키! 차로 세계 일주를 하는 중이다.”

“여기는 러시아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듯이 러시아에서는 러시아 교통법규를 따라야 한다.”

“나는 러시아 교통법규에 대해서 잘 모른다. 미안하다. 다음 도시에서 썬팅을 제거하겠다.”

그러자 그 경찰들은 여기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썬팅이 불법이라고 친절하게 알려준다. 그러면서 자동차 번호판을 적는 게 아니라 사진을 찍더니 다음에도 걸리면 조회가 되서 벌금을 물린단다. 그래서 다음 도시에 도착해 가장 먼저 한 것이 자동차 정비소에서 썬팅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조지아로 가기 위해 볼고그라드를 지나 볼가 강 근처에서 차박을 하다
조지아로 가기 위해 볼고그라드를 지나 볼가 강 근처에서 차박을 하다

차를 운전하는 사람이나 장소를 찾는 여행자들에게 구글 지도는 신과 같다. 구글 지도를 따라가면서 본능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구글 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구글 신은 위대하다! 

그러나 구글 신을 믿다 낭패를 당하기도 한다. 사마라에서 볼고그라드로 올 때 구글이 알려주는 대로 가는데, 길이 없어지며 볼가 강을 건너기 위해 페리를 타라고 한다. 마을은 강 건너편에 있고, 근처에 페리는커녕 개미 한 마리 없는 외딴 곳이다. 결국 왔다갔다 300km를 도로 위에서 액셀만 애꿎게 헛발질하며 반나절을 헤맨 적이 있다. 게다가 차의 기름은 거의 다 떨어져 마음마저 불안해졌다. 러시아에서도 시골 중의 시골이라 차에 기름이 떨어지면 오도 가도 못하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에 걸린 늦가을의 풍경화
예카테린부르크 미술관에 걸린 늦가을의 풍경화
시베리아 벌판에서 추수를 하는 러시아 여인들의 풍속화
시베리아 벌판에서 추수를 하는 러시아 여인들의 풍속화

남쪽으로 튀어라

예카테린부르크는 러시아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길목에 있는 도시다. 지도상에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세 가지 경계가 있다. 첫째로 북극해에서 카스피해를 남북으로 가르는 우랄 산맥이 그것이다. 둘째로 카스피해에서 흑해를 동서로 가르는 캅카스(코카서스) 산맥이 있다. 마지막으로 흑해에서 지중해를 가르는 보스포러스 해협이 있다. 우랄 산맥의 동쪽은 러시아의 아시아 지역으로 러시아 인구의 20%가 거주하며, 우랄 산맥의 서쪽은 러시아의 유럽으로 나머지 80%가 거주한다.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이 처형당한 피의 성당과 박물관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가족이 처형당한 피의 성당과 박물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서쪽으로 40km 가면 유럽과 아시아를 나누는 오벨리스크가 있다. 경계비 기단석을 유럽 서쪽 끝에 있는 포르투갈의 호카 곶과 아시아 대륙 동쪽 끝에 있는 축치 반도 데즈뇨프 곶에서 가져온 돌로 만들었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도시로 튀르크예의 이스탄불이 있다면, 러시아에는 예카테린부르크가 있는 셈이다.

처음 세계일주를 계획할 때는 모스크바를 거쳐 북유럽이나 에스토니아로 빠질 생각이었지만, 겨울이 다가오기 때문에 가능하면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야 했다. 또한 조지아를 비롯해 코카서스 3국과 유럽과 아시아가 공존하는 튀르크예를 꼭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조지아 국경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푸틴이 군대의 인원을 보충하고자 동원령을 내렸다. 그 바람에 러시아 젊은이들이 해외로 도피하면서 러시아와 인접해있는 카자흐스탄이나 조지아 국경이 붐비기 시작했다. 한국 뉴스를 보면 조지아로 들어가려는 러시아 사람들 때문에 국경의 대기 줄이 무려 16km라고 한다. 국경 통과하는 데만 2~3일 걸린다고 한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것도 잠시, 여태까지 지나온 시베리아의 추위를 생각하니 쉽게 결론에 다다른다. 남쪽으로 튀어라!

시베리아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초록이 보이고 카프카즈 산맥 위로 황혼이 진다
시베리아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초록이 보이고 카프카즈 산맥 위로 황혼이 진다

정갑수

연세대산악회 OB. 악우회. 핵물리학 박사. 을지대 방사선과 교수 역임. 저서 <물리법칙으로 이루어진 세상>, <브레인 사이언스>,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세상을 움직이는 물리>, <방사능 시대를 살아가는 엄마들에게>, <호모 사이언티피쿠스>, <암벽등반의 세계>, <암벽등반과 스포츠클라이밍>, <겨울산행과 빙벽등반>, <스포츠클라이밍의 거의 모든 것> 등. 히말라야 동계 에베레스트, 탈레이사가르, 트랑고타워 등반.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0m), 북미 최고봉 데날리(6,194m),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등정. 대한민국 체육훈장 대한체육회 연구상 수상.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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