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등산시렁] 30분 거리를 6시간 왕복… 월간산 기자의 방송 출연기

윤성중
  • 입력 2022.11.25 06:30
  • 수정 2022.11.29 10:22
  • 사진(제공) : 그림=윤성중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산에 가서 등산만 하고 오는 건 싫은 남자의 등산 중 딴짓

방송 촬영을 위해 인제의 개인약수를 찾았다. 물맛은 실제로 놀라웠지만 나는 방송을 위해 더욱 놀란 척을 했다.
방송 촬영을 위해 인제의 개인약수를 찾았다. 물맛은 실제로 놀라웠지만 나는 방송을 위해 더욱 놀란 척을 했다.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처음 듣는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윤성중 기자님이죠?” 

“네, 전데요. 누구시죠?” 

“네, 저는 KBS 춘천 <아마도 마지막 존재>의 안효진 작가입니다. 잠깐 통화 괜찮으세요?” 

“네, 괜찮습니다.”

작가는 내가 필요하다고 했다. 방송에 나와달라는 것이다. <아마도 마지막 존재>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지금 사라지고 있는 것들을 다룬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서 관심이 줄었거나 필요가 없어 더 이상 쓸모 없어진 것들이 프로그램 소재다. 이번에는 ‘약수터’를 소개한다고 했다. 안효진 작가는 작년 월간<산> 9월호에 내가 쓴 ‘[등산시렁] 멸종위기 약수터, 안녕하십니까?’를 봤다고 했다. 프로그램 게스트로 내가 적격이라고 했다. 굉장히 놀랐지만 나는 차분한 척했다. 이런 경험 여러 번 있어서 매우 귀찮게 됐다는 듯이, 많이 바쁜 것처럼. 

“아, 그러십니까?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언제까지 답 드리면 될까요?” 

몇 시간 뒤 나는 출연하겠다고 작가에게 전화했다. 

다음날, 안효진 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촬영이 두 번 진행될 거예요. 강원도 인제의 개인약수에서 한 번, 춘천 KBS 스튜디오에서 한 번이오. 방송 분량은 40분 정도고요, 40분 내내 기자님이 등장할 거고요. 괜찮을까요?” 

“40분 내내 제가 TV에 나온다고요?” 

나는 또 한번 놀랐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척 했다. 나는 곤란하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겠다는 투로 답했다. 아주 관대하면서도 차분한 분위기로. 

“흠흠, 알겠습니다.”

KBS 춘천에 마련된 스튜디오. 스튜디오 주변에 3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약수터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었을까?
KBS 춘천에 마련된 스튜디오. 스튜디오 주변에 30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약수터가 대체 뭐길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달라붙었을까?

인제 개인약수에서 왕복 6시간 촬영
일의 규모만 달랐지 방송국 작가와 등산 잡지사 기자는 하는 일이 비슷한 것 같았다. 어떤 콘텐츠를 만들지 기획하고, 사전 취재를 하고, 거기에 맞는 사람을 섭외하고, 날짜를 잡고 만나서 촬영하고 돌아와서 영상이든 글이든 정리를 하고, 책이든 방송이든 ‘발행’하고. 안효진 작가의 하이톤 목소리에서 방송국 일이 착착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몇 번이고 나에게 계속 전화하는 것을 보니 그 일은 잡지사 일보다 몇 배 더 피곤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또 이것이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좀 더 깊이 생각했다. 요즘 누구도 관심 없는 약수터에 꽤 많은 시간과 돈, 체력을 쓰는 것이 합리적인 일인가? 이게 과연 21세기에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연예인이 아니라 못생기고 어수룩한 기자가 TV에 나오는데 사람들이 이걸 본다고?라면서. 월간<> 등산기자 같은 불가사의한 직업이 세상에 또 있다는 걸 발견한 순간이었다. 애쓰는 안효진 작가에게서 동질감을 느꼈고 그래서 그녀가 부탁을 하든 명령을 하든 “네,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했다.

카메라 장비로 무장한 PD들. 그림보다 훨씬 복잡한 장비를 지고 그들은 약 6시간 동안 고생했다.
카메라 장비로 무장한 PD들. 그림보다 훨씬 복잡한 장비를 지고 그들은 약 6시간 동안 고생했다.

며칠 후 나는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개인약수터로 가는 등산로 입구에 서 있었다. 안효진 작가는 없었다. 대신 노윤중, 이병욱 PD가 카메라를 들고 내 앞에 서 있었다. 살짝 속은 느낌이 들었다. “작가님은 왜 안 오셨죠?” 물어보니 “저도 모르겠어요”라고 노 PD는 답했다. 그 다음부터 나는 PD가 시키는 대로 했다. 

“기자님, 이쪽에서 걸어온 다음, 저기 안내판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할게요.” 

카메라, 삼각대, 녹음기 등 뭐가 뭔지 분간할 수 없는 방송 장비로 몸을 칭칭 감은 채 산에 오르겠다는 그가 안쓰러워서 나는 또 “네, 네 알겠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수술대에 오른 환자처럼 긴장했다. 안효진 작가가 한 말이 떠올랐다. 

“노윤중 PD님은 주로 현장 촬영을 담당해요. 이런 촬영 여러 번 했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굳이 대본대로 할 필요는 없고요.” 

노 PD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마에 ‘나는 전문가’라고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안심됐다.

나는 PD의 요청에 따라 연기했다. 개인약수에 관해 혼자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내가 어색해하지 않게 PD는 맞장구를 쳤다. PD의 맞장구가 연기인지 진짜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때마다 나는 “예? 네?” 되물어 NG를 냈다.

참고로 방송국에서 촬영 대상지로 개인약수를 택한 이유는 약수터가 강원도에 있다는 것(KBS 춘천에서 만든 프로그램은 주로 강원도 지역에서 방영된다), 개인약수는 한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약수터 3곳 중 하나라는 것(양양 오색약수, 홍천 삼봉약수, 인제 개인약수. 약수터 세 곳 모두 강원도에 있다). 그중 인제 개인약수는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 등이 이유였다. 아무래도 방송국에서 노윤중 PD를 골탕 먹이려고 장소를 정한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노 PD는 문제없다고 했지만 표정이 살짝 어두웠다.

우리는 주차장에서 약수터를 향해 올라갔다. 약수터까지 1.5km. 보통 걸음으로 30분이면 닿을 거리를 우리는 6시간 동안 왕복했다. 그동안 나는 했던 말 또 하고, 혼자 중얼거리고, 갔던 길을 내려갔다가 또 올라가고를 반복했다. 노윤중 PD는 내가 계곡에 빠져 허우적대길 바랐을 수도 있는데, 올라가면서 미처 그럴 생각을 못했다.      

개인약수 앞에서 방송용으로 여러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개인약수 앞에서 방송용으로 여러가지 실험을 진행했다.

녹화를 한 건지 수다를 떨다 온 건지
며칠 후 KBS 춘천방송총국이 있는 춘천으로 갔다. 방송국이 있는 춘천 시내는 번잡했다. 신도시처럼 번쩍였다. 나는 시골에서 온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방송국 안으로 들어갔다. 안효진 작가가 나왔다. 왜 개인약수에 나타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기실에서 연예인 김대희(개그맨)와 안혜경(예전 기상캐스터)을 봤기 때문이다. 김대희가 생각보다 잘생겨 놀랐기 때문이다. 

나는 긴장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손을 휘두르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따라오라면 따라가고 앉아 있으라고 하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손을 덜덜 떨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윽고 녹화가 진행됐다. 세트장에는 20~30명 정도 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약수터를 소개하는 일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도 되는 일인가?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의아했지만 나는 조용히 내 자리로 가서 앉았다.

주로 나를 찍는 카메라 옆에 ‘프롬프터(대본이 나오는 모니터)’가 있었다. 나는 그걸 보면서 거기에 나오는 대본을 따라 읽었다. 어른을 상대로 얘기하는 것처럼 연기했다. 몇 번 NG를 내고 옆에 앉은 안혜경씨에게 말했다. 

“저는 이게 연기라고 인식을 하고 있어요. 머릿속으로 재빨리 상황 변화를 인식시켜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안혜경씨는 편하게 하라고 했다. 그녀는 내게 말을 걸었다. “가장 좋아하는 산이 어디세요?” 나는 대답했다. “설악산이오.” 그녀가 진짜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도 나는 그게 고마웠다. 다시 녹화가 진행됐다. 김대희씨와 안혜경씨는 쿵짝이 잘 맞았다. 내가 별로 웃기지 않는 말을 했는데도 박장대소했다. 프로였다. 2시간 만에 녹화가 끝났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안효진 작가에게 물었다. 

“왜, 개인약수에 안 오셨어요?” 

작가가 대답했다. 

“저는 그때 다음 회차 프로그램을 준비해야 했어요. 여기저기 섭외하고 전화하느라고 바빴어요.” 

“저 잘했나요? 방송 잘 나올 것 같나요?” 

“물론이죠! 잘하셨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에겐 편집이 있으니까요!”

프로그램 담당 이민배 PD에게도 물었다.

“녹화 재미있었나요?” 

그녀가 대답했다. 

“음, 재미라, 웃음을 기준으로 한다면, 개그맨들이 게스트로 나왔을 때와 비교하면 재미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죠. 그런데 이번 프로그램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참신한 아이템 톱5에 들어요. 그런 점에서 10점 만점에 9점이에요.” 

나는 그녀에게 또 녹화 전부터 궁금했던 걸 물어봤다.

“약수터를 다룬 이번 프로그램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투입해 제작할 만큼 이건 합리적이고 가치 있는 일인가요?” 

그녀가 대답했다. 

“저는 우리가 만든 방송이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영향을 끼치고 또 도움이 되는지 잘 알지 못해요. 하지만 지역 방송의 역할이 있어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지역의 이야기를 발굴하고 전하는 거요. 그것이 우리의 존재가치를 입증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하는 일은 아주 작은 일을 그냥 작은 일로 키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바닥에 있던 작은 공을 공중에 띄워 방송국에 넘겼고, 방송국은 그 공을 세상을 향해 강력한 스파이크로 날려버린 것이다. 득점을 했느냐 안 했느냐는 나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