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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중간보급 없이 여성 혼자 남극점으로…100kg 썰매 끌고 1,130km 걷는다

서현우
  • 입력 2022.12.12 07:55
  • 수정 2022.12.14 17:09
  • 사진(제공) : 주민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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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인 김영미 도전, 성공 시 아시아 여성 최초

원정 출국 전인 지난 10월 25일 명동 노스페이스점 직원 운동 공간에서 만난 산악인 김영미. 원정을 위해 평소에 비해 5kg가량 증량한 상태다.
원정 출국 전인 지난 10월 25일 명동 노스페이스점 직원 운동 공간에서 만난 산악인 김영미. 원정을 위해 평소에 비해 5kg가량 증량한 상태다.

순백색의 세상에서 순수하게 고독한 걸음을 45일 동안, 1,130km에 걸쳐 옮긴다. 걸음마다 100kg 썰매와 연결된 끈이 어깨와 골반을 파고들며, 해조차 지지 않아 평안한 안식도 기대할 수 없다. 이 고통의 시간이 무엇을 남길까. 또 왜 이 고통을 택한 것일까.

산악인 김영미가 여성 단독 무보급 남극점 도달 원정에 나선다. 지난 11월 9일 출국해 열흘쯤 준비 및 이동기간을 가진 후 11월 22일 남극 유니온빙하에서 45일의 대장정을 시작할 계획이다. 그동안 홀로 남극점을 밟은 여성은 총 17명, 무보급은 10명뿐이다. 이 중 아시아 여성은 한 명도 없다. 즉 이번 도전이 성공하게 될 시 아시아 여성 최초가 된다. 

김영미는 7대륙 최고봉을 한국 최연소로 완등했으며 에베레스트 신 루트 개척 등반, 국내 여성 최초 히말라야 알파인스타일 등반(암푸1 초등), 바이칼호 724km 종단 등 굵직한 등반과 모험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수직과 수평을 넘나드는 도전을 이어온 김영미에게 원정을 앞두고 임하는 각오와 기획 계기, 준비 과정에 대해 들어봤다.

남극으로 착각할 만큼 하얀 수평선의 핀세는 많은 극지 탐험가들의 훈련 장소다. 사진 안재인 감독.
남극으로 착각할 만큼 하얀 수평선의 핀세는 많은 극지 탐험가들의 훈련 장소다. 사진 안재인 감독.

모험의 최종장을 슬픔으로 둘 순 없었다

Q 2017년 바이칼호 단독 종단 이후 오랜만에 모험입니다. 코로나 동안에는 어떻게 지내셨나요? 

A 정리의 시간이었어요. 바이칼을 종단하면서 썰매 하나면 한 달의 삶이 가능하고, 산에선 배낭 하나면 며칠이건 만족하며 살 수 있다는 걸 배웠습니다. 그런데 문명으로 나오면 그걸 잊고 채워 넣는 삶을 사는 나를 보게 됐어요.

그래서 코로나 동안 1톤 트럭 안에 모든 짐을 다 넣고 살 수 있도록 많은 걸 버렸어요. 장비방도 따로 있었는데 특별히 의미 있는 것 빼고는 다 버렸어요. 이제 남은 건 원정 갈 때 만든 파일철들과 7대륙 최고봉 릴레이 때 입었던 하늘색 티셔츠와 신발 정도네요. 

Q 남극을 원정 대상지로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처음 남극점을 마음에 둔 건 2004년 빈슨 매시프 등정 때입니다. 모든 등반을 마치고 비행기에 올라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을 바라보는데 왜인지 다시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또 다시 온다면 누군가와 저 지평선을 향해 걷고 있지 않을까란 상상도 했죠. 

이 기억은 어렴풋이 내면에 잠들었어요.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많은 사고를 겪었죠. (김영미는 2007년 에베레스트 등반 중 친오빠나 다름없는 오희준, 이현조 두 선배를 잃었고, 2011년엔 강기석, 신동민, 박영석 대장의 사고를 지켜봐야 했다. 모두 그를 산으로 이끌어 준 선배들이다.) 트라우마라고 할 것까진 아닌데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를 정도로 마음에 슬픔은 계속 남아 있었어요.

그런데 이 상태에서 멈춰버리면 평생 제 모험의 역사의 최종장은 슬픔인 채로 마침표가 찍히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으로부터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극한이면서 자연환경의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모험을 떠올렸어요. 그때 마음속 깊이 잠들어 있던 남극점이 싹을 틔운 거죠.

노르웨이 훈련 중 텐트 구축. 사진 김영미.
노르웨이 훈련 중 텐트 구축. 사진 김영미.

Q 그래서 제작사 측에서 다큐멘터리 부제를 ‘힐링 탐험기’라고 했군요. 그래도 남극이 ‘힐링’할 수 있는 곳은 아니지 않나요?

A 박영석 대장님이 해준 얘기가 있어요. ‘이 세상에 지옥이 존재한다면, 나는 북극이라고 하겠다’고 했어요. 왜냐면 북극은 유빙이라 자다가도 얼음판이 떠내려갈 수 있고, 바다니깐 습기도 많아요. 극점의 환경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는 말이었죠.

그래도 북극에 비하면 남극은 수월하다고 해요. 사막기후라 건조하고 대륙이라 떠내려갈 위험도 적죠. 그렇다고 물론 둘레길 걷듯 가는 곳은 아닙니다. 일단 남극은 완전한 평지가 아니에요. 가장 관건인 초반부는 경사도 급하고 크레바스도 많아요. 물론 등반에 비해선 수평의 도전이죠. 

Q 수평의 도전이 수직의 도전인 등반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요?

A 등반의 경우 완급 조절이 있어요. 공격일에는 공격을 하고, 아닐 땐 베이스캠프에 내려와 휴식하고 충전하죠. 하지만 수평의 도전은 단 하루도 쉬지 않아요. 끊임없이 밀어 붙여야 되죠.

수평의 도전에 대한 영감은 2013년 암푸 하산길에서 얻었어요. 하행 캐러밴 때 폭설을 만나서 고립, 조난 당하고 동상도 걸려서 짐을 버리고 하루 걸릴 길을 2박 3일 동안 가고 그랬어요. 그렇게 간신히 탈출해 에너지를 다 써버렸다 생각하고 자고 일어났는데 어느 정도 몸이 충전된 걸 발견했어요. 그때 매일매일 몸에 에너지를 다 쓰는 하루가 궁금해졌어요. 그러면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거라 생각했죠. 

Q 또 홀로 도전한다는 것도 큰 차이입니다. 바이칼 단독 종단 때도 혼자 걸으셨죠.

A 사실 바이칼도 원래는 같이 가기로 한 사람이 있었어요. 어느 날 불현듯 그 후배가 못 가게 됐다고 전해 왔죠.

그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이 ‘아이씨. 바람 많이 불 텐데 텐트 어떻게 치지?’였어요. (웃음) 그 전만 해도 혼자 걷는단 생각을 전혀 안 해봤었거든요? 부랴부랴 혼자 걷기 위해 준비하다보니깐 제가 참 그 친구에게 많이 기대고 있었단 걸 깨달았어요. 원래는 등반이나 모험 경험이 많은 제가 그 친구를 데리고 가준다는 생각이었는데 사실 정작 기대고 있던 건 저였던 셈이죠.

그제야 등반을 20년이나 했는데 여전히 스스로 혼자 온전히 서지 않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어요. 내가 홀로 걸을 수 있어야 누군가를 손잡고 끌어줄 수 있을 테니깐 혼자서 잘 해내야겠단 생각이 강하게 들었죠.

그래서 이번 남극점 원정도 단독입니다. 다만 이건 단지 형식이 그렇단 거예요. 제가 부족한 게 뭔지 알고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무척 많아요. 이들의 마음을 감사히 얻어서 가니까 이걸 감안하면 단독이 아닌 셈이죠. 

텐트 안에서 식사 준비. 사진 김영미.
텐트 안에서 식사 준비. 사진 김영미.

남극점 원정, 이어도에서 백두산까지 걷는 것과 같아

Q 바이칼 원정과 남극점 원정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요? 

A 둘 다 눈과 얼음 위에서 걷는다는 점에선 같아요. 하지만 바이칼은 얼어붙은 호수인 만큼 완전 평지죠. 하지만 남극점은 평지가 아니에요. 시작점의 해발고도가 180m, 남극점은 2,840m입니다. 또 거리도 바이칼은 724km인 반면, 남극은 1,130km죠. 그러니깐 이 해발고도차와 거리를 적용하면 이어도에서 백두산까지 끊임없는 오르막을 걸어오르는 것과 비슷해요.

그 다음 차이는 밤이 없다는 거죠. 지금 남극은 백야입니다. 단 1초도 햇빛을 피할 수 없어요. 끊임없이 내려쬐는 태양에 온몸이 마르고, 피부도 갈라지겠죠.

Q 정말 처절한 환경인데 운행 중 하루 일과는 어떻게 이뤄지는 건가요?

A 매일 하루가 똑같습니다. 오전 7시에 일어나서 밥먹고, 텐트 정리하고 오전 9시에 출발합니다. 100kg의 썰매를 끌고 10~11시간 정도 스키로 운행하죠. 점심은 파우더, 행동식으로 해결하고 저녁은 알파미와 마장동 고기를 떼서 만든 동결건조 식량으로 먹습니다. 이걸 계속 반복하는 거죠.

컨디션이 좋다고 오버페이스를 해서도 안 되고, 꾸준하게 속도를 유지하는 게 관건입니다. 바이칼에서 한 번 컨디션이 좋아서 40km를 간 적 있는데 다음날 무척 힘들었거든요. 

썰매에 실을 100kg 짐의 모든 목록과 무게를  수치화해 화이트보드에 게시하고 짐을 박스에 나눠 담았다. 사진 김영미.
썰매에 실을 100kg 짐의 모든 목록과 무게를 수치화해 화이트보드에 게시하고 짐을 박스에 나눠 담았다. 사진 김영미.

Q 짐이 무려 100kg인데 안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A 하루 1kg씩 50일치 식량, 12kg의 연료, 나머지 38kg는 장비와 썰매 장비 자체, 촬영장비(이번 원정은 다큐멘터리 ‘화이트아웃’으로 제작돼 내년 상반기에 공개된다) 등이에요. 짐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장비를 하나만 가져가면 고장났을 때 대책이 없어서 여분을 챙겨야 되기 때문입니다. 스키폴, 태양광 충전기, GPS, 위성전화기, 버너, 충전케이블 모두 두 개씩 챙겨요. 또 크레바스 추락을 대비해 자일과 도르래도 가져가죠.

썰매 이름은 ‘백두대간’입니다. 올해가 제가 백두대간을 일시종주한 지 20주년이 되는 해기도 해서 이를 기념하려고 정했어요. 바이칼 썰매는 ‘시베리아의 소녀’란 뜻으로 시비랴치카란 이름을 붙여줬었죠.

필체는 아버지 손글씨예요. 원래는 산악계 유명 인사나 어르신께 받을까 몇 달 고민했는데 최근에 중병을 이겨낸 아빠에게 써달라고 했어요. 아버지가 이겨낸 것처럼 저도 역경을 이겨내겠다는 마음을 담았어요.

Q 100kg의 짐을 끈다는 게 쉽게 가늠이 안 되는데요. 등산에 비하자면 몇 kg의 배낭을 메고 어느 산을 오르는 것과 같나요? 

A 재밌는 질문이네요! 사실 저도 잘 가늠이 안 됐는데 바이칼의 경험과 여러 자료를 종합해 볼 때 하루에 5,000칼로리 정도를 소모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에너지 소모를 기준으로 한 건데요, 설악산에서 15kg 넘는 배낭을 메고 40km를 걷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거라고 보면 됩니다.

물론 이 정도 운행이야 하루 정도하는 건 쉽죠. 하지만 이걸 매일 하면 얘기가 달라져요. 몸 컨디션이 시시각각 달라져서 부족한 부분을 잘 채워야 장거리 원정을 끝마칠 수 있어요. 가령 식사, 수분섭취 패턴, 스틱 길이, 호흡법 등에 따라서 컨디션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저도 아마 이번 원정에서 30일차를 지나면서 고비를 맞이할 것 같아요. 상상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해 오로지 정신력으로 버티겠죠.

운행 중 잠시 썰매에 앉아 지도와 GPS로 루트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 김영미.
운행 중 잠시 썰매에 앉아 지도와 GPS로 루트를 확인하고 있다. 사진 김영미.

몸무게 5kg 증량, 혹한 적응 훈련 마쳐

Q 100kg 썰매를 끌기 위해 어떤 훈련을 진행했나요?

A 먼저 몸무게를 평소에 비해 5kg 정도 더 찌웠어요. 먼저 남극점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보고서를 보니 원정이 끝나고 나면 10kg 정도 빠질 것 같아요.

구체적인 훈련으로는 크레바스 탈출 훈련, 혹한적응 훈련, 체온조절, 고도적응, 타이어 끌기, 헬스 등을 복합적으로 했어요. 크레바스 탈출 훈련이야 등반을 했으니 어려운 게 없는데 혹한적응 훈련이 정말 힘들었어요. 시베리아 아무르강에서 작년 12월에 일주일 동안 진행했어요. 여태껏 등반하면서 동상 한 번 걸려본 적 없었는데 바람이 살짝 볼에 스쳤는데 바로 동상에 걸리더라고요. 방한대책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강구해야 하는지 가늠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어요. 또 노르웨이 2,000m 고원지대 핀세Finse에서도 1시간당 3km 페이스로 8시간 운행하는 훈련을 지난 2월 한 달 동안 했죠.

Q 원정에서 특히 예상되는 어려움은 어떤 것이 있나요?

A 배고픈 거요. (웃음) 정말 배가 엄청 고플 것 같아요. 일단 초반 구간을 잘 넘기는 게 중요해요. 하루라도 먹으면 썰매 무게가 1kg씩 주는데 초반에는 워밍업도 안 된 상태로 최대 무게의 썰매를 끌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초반이 경사도 세고 크레바스도 많아서 한 시간에 잘해야 1.5km를 간신히 갈 거 같아요. 그래서 특별히 어깨운동을 많이 했어요. 스틱을 잘 써야 되거든요.

생각만 해도 벌써 끔찍하고 온몸이 아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쉬우면 누구나 다 했겠지’라고 주문을 외워요. 사실 춥지 않고, 바람도 안 불고, 걷기 쉬우면 남극이 아니죠. 실제 원정 중에는 이렇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이 중요해요. 바이칼에서도 아침마다 날씨 보고, 온도계 체크하고 했는데 나중에 가니 부질 없더라고요. 눈 내리든, 춥든, 바람이 불든 어차피 걸어야 했거든요. 

터널형 1인용 텐트. 길이는 2m. 사진 김영미.
터널형 1인용 텐트. 길이는 2m. 사진 김영미.

Q 육체적인 준비만큼 정신무장도 필요할 것 같은데 특별히 이번 원정을 위해 준비한 것이 또 있나요?

A 남극은 정신적으로 힘든 환경이에요. 들리는 소리라곤 오로지 바람소리밖에 없어요. 어떤 사람은 한 달 정도 지나면 해무리만 봐도 구토할 지경에 이르고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보이스레코더에 산 노래와 여러 소리들을 담아가요. 제가 좋아하는 소리들이죠. 가령 5월의 설악 새소리, 계곡소리, 그리고 음악들이오. 또 이렇게 음악을 넣다 보니 현지에선 이야기할 사람도 없는데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도 좋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응원의 메시지를 청해 모아뒀죠. 현지에서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Q 무사히 원정을 마치시길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독자 분들과 응원해 주시는 분들에게 한마디 전하고픈 말이 있으실까요?

A 오랜 꿈이었던 원정을 갑니다. 남극을 갈 수 있다고, 또 해낼 수 있다고 믿어줘서 고맙습니다. 잘 다녀올게요. 또 갔다 오면 살이 많이 빠질 테니 꼭 같이 밥 먹어요. 

또 많은 분들이 저를 믿고 응원해 주신 만큼, 저도 누군가에게 믿음을 주고 응원해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김영미의 남극점 단독 무보급 도달 원정은 whiteout.kr 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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