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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페루 안데스산맥 자전거 여행 完] 이 여행을 추천하지 않겠다, 수행자 같은 결심이 없다면

이남석
  • 입력 2022.12.19 07:25
  • 수정 2022.12.28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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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고도 4,200m 총 1,200km 중 마지막 200km

코타우아시계곡 입구의 풍경. 해발 3,000~5,500m를 넘나드는 변덕스런 산길이 끝없이 이어져, 체력과 정신력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고행 같은 여정이라 사진은 완만한 곳에서 삼각대를 놓고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코타우아시계곡 입구의 풍경. 해발 3,000~5,500m를 넘나드는 변덕스런 산길이 끝없이 이어져, 체력과 정신력을 끊임없이 시험했다. 고행 같은 여정이라 사진은 완만한 곳에서 삼각대를 놓고 겨우 찍을 수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젊은 주인은 특별히 나를 위해 아침 식사 준비를 끝낸 뒤였다. 그는 이 지친 자전거 여행자에게 어떻게든 용기를 주려고 노력 중이었다. 짐을 꾸려 숙소를 나오니 계속되는 높은 고도에 정신 착란이 일어났는지 아니면 신경망이 혼란에 빠졌는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짐은 제대로 챙겼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오직 넓은 평원과 푸른 하늘과 무수한 빛을 쏟아 붓는 태양만 인지할 수 있었다. 코타우아시계곡이 시작되는 마을까지 가려면 넘어야 할 5,000m 이상 고개가 두 개나 남아 있었다. 최소한 앞으로 이틀 동안은 사람 한 명 만날 수 없으므로 숙소에서 식량과 식수를 넉넉하게 챙긴 후 출발했다.

높은 고도에 펼쳐진 평원의 모습은 단조롭고 지루했으나 나는 그걸 극복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보며 의도적으로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느끼려 노력했다. 작은 갈림길이 나와도 자전거를 세운 후 GPS로 현재 위치를 확인했다. 이따금 좌우로 설산이 보였지만 카메라를 꺼내는 것조차 힘들고 귀찮았다. 몸에 축적된 에너지가 점점 빠져나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신께서 이런 나의 나태해진 의지를 점검하려고 경고라도 한 것일까?

우아쿨루마을과 쿨리팜파마을로 가는 길. 평균 해발고도가 4,900m이다.
우아쿨루마을과 쿨리팜파마을로 가는 길. 평균 해발고도가 4,900m이다.

마지막 5,000m 고개를 넘어 멀리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나는 너무 기쁜 나머지 힘차게 페달을 돌렸다. 내리막은 그야말로 엄청난 경사로 브레이크에서 불이 날 정도였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경사가 완만해질 즈음 아무래도 브레이크 패드가 많이 마모된 느낌을 받아 점검하니 패드 두께가 종잇장처럼 얇았다. 

급히 패드를 교체하고 쉬면서 뭔가 느낌이 이상해 휴대전화를 켜고 GPS를 확인하는 순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분명 보라색 경로상에 떠 있어야 할 화살표가 엉뚱한 곳에서 깜박거리고 있었다. 완벽하게 경로를 이탈한 것이다. 포기하고 그냥 길을 따라가려고 하니 코타우아시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미 해발 4,600m까지 내려왔기에 원래 위치인 5,000m까지 돌아가기 위해서는 고도 400m를 다시 올라야 했다. 오랜 자전거 여행 경험에서 얻은 ‘여행자의 수행 방법’이라는 나만의 교과서를 펼쳤다. 교과서 첫 줄에 나오는 ‘이미 실수가 끝난 뒤 후회는 할수록 손해이며, 최선의 길은 빨리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을 떠올렸다. 

결국, 20분 동안 내려온 길을 3시간 반이 걸려 올라갔다. 이후 야영은 반드시 낮은 고도에서 하겠다는 계획도 허물어지고 결국, 다시 5,000m에서 텐트를 쳐야 했다. 첫 번째 5,000m에서의 야영은 고소와 육체적 피로에 의한 고통이었다면 두 번째 야영은 추위였다. 

여행 마지막 날, 5,000m 고도에서의 야영. 밤에는 영하 10℃까지 내려간다.
여행 마지막 날, 5,000m 고도에서의 야영. 밤에는 영하 10℃까지 내려간다.

8만 원짜리 침낭 2개로 숙면 취하기

겨울에 야영하면서 자전거 여행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텐트도 중요하지만, 침낭이 야영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다. 보온력과 무게가 우수한 침낭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싸기 때문에 나는 여행 계획을 세울 때부터 고가의 침낭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궁여지책으로 8만 원대의 중저가 국산 초겨울용 침낭 두 개와 이수카 일제 침낭 외피만 들고 떠났는데 대성공이었다. 비교적 얇은 침낭 두 개를 포개 끼우고 그 위에 침낭 외피를 두르자 영하 10℃ 이하로 떨어지는 안데스 고원 추위도 끄떡없었다. 아침은 패딩 위에 고어텍스 재킷을 걸쳐야 할 정도로 추웠다. 텐트 안에 놓은 식수가 얼어붙어서, 마시지 못할 정도였으니 영하 10℃ 이하로 내려간 것 같았다. 

끝없이 이어진 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라, 시간이 멈춘 풍경처럼 느껴진다.
끝없이 이어진 길.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가 드문 일이라, 시간이 멈춘 풍경처럼 느껴진다.
거인들이 줄지어 선 듯 펼쳐진 기암 군락. 다른 행성에 온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거인들이 줄지어 선 듯 펼쳐진 기암 군락. 다른 행성에 온 듯한 풍경이 펼쳐졌다.

해가 뜨자마자 곧바로 출발했다. 완만한 내리막이지만 길 상태는 최악이었다. 가축을 모는 목동들이나 다닐 것 같은 길이었다. 자전거를 타기 힘들 정도로 거친 길을 3시간 이상 내려가자 아주 작은 팔로Fallo마을에 도착했다. 가구 수는 세 가구인데 중앙에 번듯한 건물이 있어 알아보니 우리로 말하자면 초등학교였다.

“학생들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소개하시고 인사를 좀 해주세요.”

식수를 구하러 들어갔다가 학교 선생님에게 이끌려 본의 아니게 스페인어 수업 중이던 6명의 학생들에게 한국을 소개하고 그간의 여정을 설명했다. 물론 스페인어도 아닌 영어로 말하니 10세 전후의 학생들이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팔로마을에서 만난 초등학교 학생들. 예쁘게 차려 입은 아이들이 보기 좋았다.
팔로마을에서 만난 초등학교 학생들. 예쁘게 차려 입은 아이들이 보기 좋았다.

선생님은 옆에서 열심히 스마트폰으로 동영상을 촬영하고 아이들은 알아듣지도 못하는 내 설명에 웃음으로 호응했다. 비록 전교생이 6명뿐이지만 학교는 식당과 양호실까지 갖추고 각 담당자가 있을 만큼 페루 정부가 아이들 교육에 신경 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본격적인 내리막이 시작되었으나 실상은 아니었다. 어떤 곳은 계곡으로 길을 낼 수 없어 높은 산을 우회하는 길을 만들어 오히려 5,000m 평원지대를 지날 때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다만 풍경이 위로해 주었다. 코타우아시계곡은 카메라 화각으로는 담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넓고 깊었다. 곳곳에 폭포와 기이한 색깔의 봉우리와 암군岩群으로 가득했다. 특이한 점은 계곡 좌우에 초지와 약한 경사지에는 어김없이 경작지와 마을이 있었다. 덕분에 어디서든 식사는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안데스산맥에서 만난 무슬림 가족.
안데스산맥에서 만난 무슬림 가족.
어느 고산 마을의 미용실. 색깔이 참 특이하고 강렬하다.
어느 고산 마을의 미용실. 색깔이 참 특이하고 강렬하다.

페루에서 만난 이슬람교도들

팔로마을에서 쿠엔코Quenco마을까지는 코타우아시계곡의 가장 극적인 지형과 기이한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구간으로 앞에 보이는 경치에 한눈을 팔다가는 자칫 길옆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할 정도였다. 특히 쿠엔코마을은 안온하고 평화로운 곳으로 야영하면서 가장 편안함을 느꼈던 곳이다.

친카이야파Chincayllapa마을의 가게에 들렀다가 마을 사람들이 보통의 페루 사람들과 다른 복장에 수염을 기른 모습을 보고 “혹시 무슬림이 아니냐?”고 물어보자 주인은 난처한 듯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슬람교도입니다.”

처음에는 놀랐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는 놀라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 상생하고 선한 본성을 기르는 것에는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런 안데스 깊은 골짜기에 가톨릭이 아닌 알라를 믿는 마을이 있는 줄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코타우아시를 얼마 남겨놓지 않은 알카Alca마을에는 또 한 번의 오르막 홍역을 치른 뒤에야 도착했다. 친카이야파마을에서 갑자기 높은 산이 있는 곳으로 길이 나 있기에 설마 저건 다른 마을로 들어가는 길이겠거니 하며 조마조마했는데 결국 계곡을 피해 가는 오르막 우회도로였다. 이 구간은 마지막까지도 여행자의 인내심을 시험했다. 

마침내 종착지 코타우아시 콘세프티온 광장에 도착했다.
마침내 종착지 코타우아시 콘세프티온 광장에 도착했다.

바나나 7개에 꿀을 듬뿍 묻혀 배가 불룩하도록 먹었으나, 300m 고도를 올리는 데도 거의 탈진 직전까지 갔다. 탄수화물과 당분을 아무리 섭취해도 힘이 나지 않는 까닭은 근육에 저장되었던 단백질과 기름기가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알카Alca호텔에서 하루를 묵은 후 종착지인 코타우아시까지 10km는 포장도로로 정말 오랜만에 여유롭게 달렸다. 그리고 코타우아시의 콘세프티온Conception 광장에 이르러 마침내 여행은 끝났다. 액션 카메라로 동영상을 찍었다. 여행 말미를 녹화하며 스스로 소감을 웅얼거리는 동안 울먹이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해발 5,000m가 가까워오면 오르막은 그야말로 고행길이 된다. 산소가 부족해 호흡을 일정하게 하지 않을 경우 바로 근육통이 온다.
해발 5,000m가 가까워오면 오르막은 그야말로 고행길이 된다. 산소가 부족해 호흡을 일정하게 하지 않을 경우 바로 근육통이 온다.

만약 누군가 이 구간을 여행하고 싶다고 한다면 ‘수행자처럼 큰 결심이 없다면 추천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원래 비쩍 말라 줄어들 것도 없는 체중에서 7.5kg이 달아났으며, 언제나 그랬듯 여행 후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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