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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나홀로 우리땅 걷기 한라산] 평생 볼 눈, 한꺼번에 봤다

김영미
  • 입력 2023.02.08 07:25
  • 수정 2023.02.17 11:00
  • 사진(제공) : 김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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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에 둘러싸여 하늘도 땅도 모두 하얗게 변한 사라오름분화구의 몽환적인 모습, 설국이 따로 없다.
안개에 둘러싸여 하늘도 땅도 모두 하얗게 변한 사라오름분화구의 몽환적인 모습, 설국이 따로 없다.

겨울엔 한라산이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순수한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한라산 겨울 설경은 사계절의 한라산 중에서도 최고다. 수십 센티미터씩 폭설이 내린 겨울왕국 한라산은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가본 사람은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다. 한라산의 눈은 늘 그리움을 품게 된다.

며칠 전 한라산에 폭설이 내리고 등산로가 폐쇄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에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탐방로가 열리면 누구보다 먼저 순수한 한라산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무서운 강추위 속에서 한라산 설산을 등반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백록담을 보고 싶으면 등반예약은 필수다. 예약경쟁이 치열해서 주말 예약은 대부분 조기에 끝난다. 예약에 성공해도 변덕스러운 날씨 때문에 출입이 통제되는 날이 많다. 

한라산 산행 코스는 5개. 백록담까지 갈 수 있는 성판악, 관음사 코스는 등반예약을 해야만 하지만 한라산 백록담 남벽 분기점까지 갈 수 있는 어리목, 영실, 돈내코 코스는 등반예약이 필요치 않다. 이 중 영실매표소에서 윗세오름까지 걷는 영실코스가 가장 난이도가 낮다. 시간은 편도 1시간 30분. 본인의 상황에 따라 코스를 선택하면 누구나 멋진 한라산의 설경을 즐길 수 있다. 

하얀 눈옷을 입은 병풍바위는 어느 계절보다 웅장한모습으로 다가선다.
하얀 눈옷을 입은 병풍바위는 어느 계절보다 웅장한모습으로 다가선다.

산타마을은 여기! 영실~윗세오름~한라산 남벽~ 윗세오름~어리목 코스

겨울 한라산을 보고 싶어 하는 초보자에게 가장 많이 추천하는 코스는 영실코스. 겨울 설산의 모든 매력을 만끽할 수 있고 길도 험하지 않다. 겨울 설산의 매력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영실~윗세오름~어리목 코스가 좋다. 성판악, 관음사 코스는 10시간 가까이 걸리지만, 영실~어리목 코스는 4~5시간이면 충분하다. 

어리목과 영실 탐방안내소에서는 12시 정각에 입산 통제를 하므로 그 이전에 탐방안내소를 통과해야 한다. 체력과 시간이 허용된다면 윗세오름에서 한라산 남벽까지 다녀오면 더 깊은 설국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윗세오름 안내소의 동절기 한라산 남벽 입산 통제시간은 13시부터이다.

선잣지왓의 설산 대평원에서 우뚝 솟은한라산을 만나는 순간, 감격의 물결이 밀려온다.
선잣지왓의 설산 대평원에서 우뚝 솟은한라산을 만나는 순간, 감격의 물결이 밀려온다.

한라산의 설경을 천천히 만끽하려고 모처럼 택시를 탔는데 영실매표소 주차장까지 차가 들어갈 수 없단다. 어쩔 수 없이 입구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입구에서 제설차가 눈을 쓸어주고는 있지만 조금 걸으니 완전 눈길이다. 입구부터 안전을 위해서 아이젠을 착용한다. 

영실 탐방안내소 도착. 등산로 입구부터 설국이다. 탐방객들은 초입부터 걸음을 멈추고 설경을 사진에 담느라 분주하다.

조금 오르니 나무 사이로 병풍바위가 보인다. 파란 하늘에 하얀 눈을 둘러쓴 병풍바위가 어깨를 활짝 펴고 있다. 하얀 눈을 입어 더 선명한 병풍바위는 어느 계절보다 웅장한 모습으로 다가선다. 우람한 남성의 근육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선잣지왓으로 오르는 길은 한국의 어떤 설산보다도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 준다. 이 하얀 눈 속에 봄부터 가을까지 살아 있던 생명체들이 겨울 휴식기를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니 주변 풍광을 보다 말고 걷고 있는 길을 유심히 내려다보게 된다. 

병풍바위에 흐르는 물이 얼어붙은 얼음폭포의 자태가 선명하다. 오백장군 바위는 눈 속에 꼭꼭 숨어 있다. 고산평원인 선잣지왓과 만세동산에 다다르니 오매불망 그리워하던 백록담이 앞에 있다. 시야를 가리던 나무들도 모두 사라지고 평원이 드러났다.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천천히 밟는다. 맛있는 과자를 아껴 먹듯 한라산 백록담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 빨리 지나가지 않기를 바란다.

성판악코스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오는 길. 구름이 폭탄을맞은 듯 터지고 있어서 마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하다.
성판악코스의 마지막 계단을 올라오는 길. 구름이 폭탄을맞은 듯 터지고 있어서 마치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하다.

윗세오름에 도착하니 정오가 조금 안 된 시간. 이젠 한라산 남벽분기점을 향해 오른다. 바람은 더 세차고 인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탐방객들은 윗세오름에서 하산했나보다.

바람이 유독 심한 한라산 남벽 아래쪽에는 바람에 쓸린 눈이 마치 모래사막처럼 켜켜이 층을 만들어낸다. 단지 바람과 눈에 의해서 이런 멋진 작품이 만들어졌음이 놀랍다. 히말라야의 눈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멋진 설국이다. 눈 속으로 들어가 바람의 언덕을 담느라 애도 써 보지만 마음에 흡족하지는 않다. 

윗세오름으로 돌아와 어리목 방향으로 향한다. 사제비동산에 도착하니 눈가루까지 휘날린다. 구상나무숲과 소나무숲의 나무들은 모두 새하얀 눈옷으로 갈아입고 크리스마스트리로 변신했다. 구상나무 끝에 주렁주렁 달린 고드름 꽃들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물 같다. 산타마을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산타마을의 아이처럼 눈을 밟고 즐기느라 피로를 느낄 틈도 없다.

관음사 탐방로의 삼각봉대피소 등로가 물길처럼 홈이 파여 있어서 등반객들이 네 발로걷고 있다.
관음사 탐방로의 삼각봉대피소 등로가 물길처럼 홈이 파여 있어서 등반객들이 네 발로걷고 있다.

환상적인 운해와 눈꽃 물결에 홀릭, 성판악~백록담~관음사 코스

한라산 백록담을 가기 위해 시작해야 하는 성판악의 높이가 해발 900m. 정상인 백록담의 높이는 해발 1,950m. 고도 1,000m가량 올라야 하는 길이다. 바람과 추위와 싸우며 아이젠을 신고서 눈길을 걷는 것은 쉽지 않다.

일반적인 코스는 성판악~백록담을 왕복하는 것이지만 조금 어렵더라도 성판악~백록담~관음사 코스를 선택하면 다양한 한라산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삼각봉대피소에서 백록담에 이르는 코스는 한라산 등반의 백미이다. 

진달래밭대피소와 삼각봉대피소에서 백록담으로 산행은 오후 12시부터 통제된다. 백록담까지 가려면 12시 이전에 이 대피소들을 통과해야 한다. 18km가 넘는 길을 걸어야 하니 가능한 이른 시간에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체력에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성판악~백록담을 오르는 중간에 사라오름까지 둘러 볼 것을 추천한다. 

한라산 날씨가 계속 추웠으니 눈은 아직 많을 거라는 믿음에 발걸음이 가볍다. 많은 사람들이 주차장에서부터 아이젠을 신고 랜턴 불빛에 의지해서 백록담을 향해 출발한다. 30분 정도 걸으니 여명이 올라오고 세상이 밝아진다. 

성판악 탐방로의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구상나무의 화려한 눈꽃들이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판악 탐방로의 진달래 대피소를 지나면서부터 구상나무의 화려한 눈꽃들이장관을 이루고 있다

속밭대피소까지는 눈길이지만 경사가 완만해서 그리 힘들지는 않다. 속밭대피소를 조금 지나면 성판악 탐방로의 가장 힘든 코스가 시작된다. 추운 날씨에도 몸에서 열이 솟는다. 

사라오름에는 앞서 지나간 발자국이 없고 안개만 가득하다. 내가 좋아하는 한라산도 보이지 않지만 안개에 둘러싸인 사라오름의 분화구 모습은 너무나 몽환적이다. 바람소리를 친구삼아 사라오름 전망대를 올랐다가 진달래대피소로 향한다. 

백록담이 가까워질수록 눈꽃은 장관이지만 바람은 거세어지고 날씨는 더욱 추워진다. 진달래대피소에서 컵라면을 뚝딱 해치운다. 대피소에서 먹는 컵라면은 세상 어느 진수성찬이 부럽지 않다. 

진달래대피소 이후부터 난이도는 보통. 빨간색에서 초록색으로 난이도가 바뀌니 마음도 한결 편해지고 설경도 더 느긋하게 즐긴다. 백록담에 빨리 도착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구상나무 옆에 붙어서 눈꽃 사진 담느라 바쁘다. 

안개가 몰려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다 아주 잠깐 세상이 밝아질 때에탐라계곡은 한 편의 수묵화를 연출한다.
안개가 몰려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다 아주 잠깐 세상이 밝아질 때에탐라계곡은 한 편의 수묵화를 연출한다.

백록담 정상 바로 아래에 도착하니 발아래로 구름이 폭탄을 맞은 듯 터지고 있다. 마치 내가 구름 위를 걷고 있는 듯하다. 몇 발자국 걷다가 뒤돌아보니 내 발아래에서 구름바다가 출렁거린다. 추위도 잊고 장갑을 벗고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찍는다. 두 발로 오르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모두들 백록담에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려고 쉼 없이 올라가는데 나는 그저 한없이 구름이 펑펑 터지는 풍광에 빠져들고 있다. 

계단구간이다. 이곳만 오르면 백록담. 눈이 엉겨 붙어서 다소 위험한 구간도 있지만 무사히 백록담에 도착했다. 처음 오르는 사람에겐 한국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는 감격의 순간이다. 

관음사 하산 길. 성판악 탐방로는 그나마 러셀이 잘되어 있었는데 관음사 탐방로는 길이 자유자재이다. 초보자들은 무척이나 고생스럽다. 게다가 성판악보다 눈도 훨씬 많다. 어떤 곳은 물길처럼 홈이 파여 있어서 걷기가 너무 불편하다. 내려가는 것도 힘든데 올라오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까? 올라오는 사람들 표정이 밝지 못하다. 오죽 힘들면 얼마나 올라가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다. 

왕관릉은 시야가 터지지 않아서 보이지 않지만 뒤돌아 백록담을 바라보니 눈꽃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다. 아찔할 정도로 황홀하다. 왕관릉, 장구목오름, 삼각봉을 거쳐서 탐라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에서 해가 나오길 기다렸지만 세상은 안개 속에 잠겨 있다. 삼각봉대피소를 지나서 용진각 현수교로 향한다.

순식간에 안개가 몰려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아주 잠깐 세상이 밝아질 때에 탐라계곡이 보여 주는 설경은 수묵화다. 단풍이 들어 있던 그 나무들에 눈발이 날리고 눈꽃이 피었다. 가을 단풍이 들었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용진각 현수교에서 탐라계곡의 설경에 취하고 탐라계곡 목교로 향한다. 탐라계곡으로 내려서는 계단은 경사도가 엄청나고 눈이 쌓여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안전을 위해서 계단 난간을 잡고 내려선다. 탐라계곡 목교를 지나니 편안한 길이다. 어느새 관음사주차장에 도착했다. 

미니 한라산, 어승생악

어리목주차장에서 어리목 탐방로 방향과 반대쪽으로 30분쯤 올라서면 한라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어승생악. 임금에게 바치는 말을 생산하는 곳이라는 지명이다. 미니 한라산이라 불리는 어승생악의 또다른 이름은 어승생오름, 한라산 제1의 전망대다.

단일 분화구를 가진 오름 가운데 1,169m로 가장 높지만 한라산 등산로 중에 가장 완만하고 시작 위치가 높아 등린이뿐 아니라 아이들도 오르기 쉬운 오름이다. 왕복 1시간이면 충분하고 예약도 필요 없다. 

월간산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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