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에서 후지산 정상까지 24시간 만에 ‘0 to 3,776m’ [산지컬 100]

후지 씨 투 써밋 이호민 “산행의 완성은 건강하게 가족에게 돌아가는 것”

2025-11-13     서현우

극한 산행은 단순히 체력만 좋다고 가능한 것이 아니다. 산을 대하는 올곧은 태도와 이념, 탄탄한 지식과 경험을 두루 갖춰야만 안전히 산행을 마칠 수 있다. 넷플릭스 인기 예능 <피지컬100>에서 피지컬이 뛰어난 이를 탐구했듯, 월간<山>은 ‘산지컬’이 뛰어난 이들을 만나본다. _ 편집자 주

“저는 산에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어요.”

조금 긴 얘기다. 그에게는 가장 친한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친구의 소식이 전해졌다.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몸의 기능을 조금씩 재활하고 있던 차였는데 불행히도 손상된 시력이 돌아오지 않고 있는 상황 정도로 알고 있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부랴부랴 장례식장에 찾아갔는데 친구의 부모님이 전해 준 말은 더욱 비극적이었다. 친구의 아내가 아이들에게 아빠의 약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다고 시부모님에게 병 수발을 죄다 맡겨버렸단다. 또 그를 포함해 여기저기, 병원비로 쓰려는 듯 돈을 빌려갔는데 그걸 본인 가게를 내는 데 썼단다. 통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고, 남의 가정사에 진실과 사실을 가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친구의 부모님이 전해준 단면은 그랬다.

너무 비통하고 슬펐다. 세상에서 가장 서럽게 울었던 날이었다. 입관부터 발인까지 친구의 장례절차를 모두 지켜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슬픔과 분노가 가슴속에 가득했다. 이토록 격한 감정을 가만히 품어줄 곳은 산밖에 없었다. 서울 남부7산, 일명 삼관우청광 종주에 몸을 맡겼다. 삼성산, 관악산, 우면산, 청계산, 광교산을 잇는 약 50km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오른 산이기에 당연히 문제가 발생했다. 마지막 광교산까지 어떻게 올랐는데 여기서 탈진해 버렸다. 진작부터 물을 다 마셔버린 상황이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지나가는 등산객이라도 있으면 한 모금을 청하겠는데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나마 만난 사람도 물이 없었다.

그렇게 광교산에서 탈진해 누워 있는데 반대쪽에서 한 사람이 올라왔다. 도움을 청하자 그는 즉각 물을 한 병 줬다. 한 번에 다 마시는 모습을 보더니 그는 말없이 두 번째 병을 건넸다. 또 원샷을 내는 걸 보고 나서 그는 자신의 산행 코스대로 진행하려다가 뭔가 찜찜했는지 걸음을 되돌려 다가왔다. 몰골이 너무 처참해서 마음이 쓰였는지 같이 내려가 주겠다고 했다.

“같이 걸으면서 얘기를 나누는데 점점 소름이 돋더라고요. 딱 1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져 지금 재활 차원에서 등산을 다니고 있다고 합디다. 이 분도 시신경이 손상돼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상황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일까. 이 기막힌 인연 이후로는 산에 갈 때마다 늘 누군가가 지켜주는 느낌을 받게 된다고 했다. 수호천사가 지켜주기 때문일까. 그는 더욱 가혹한 산길에 도전해 보고 싶어졌다. 100km를 넘고, 200km도 넘었다. 이번엔 해안선에서 출발해 후지산 정상에도 올라봤다. 사람들은 그가 세운 산행계획을 보곤 “가장 꼼꼼하고 치밀하게 걷는 장거리꾼”이라고 말한다. ‘시노기’란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호민씨다.

오지가 키운 소년의 체력

이씨는 쭉 산에서 자랐다. 태어난 곳은 강원도 황지. 당시엔 삼척에 속했으며 현재 태백인 곳이다. 그러다가 8세 때 부모님을 따라 경북 울진 왕피리로 이사갔다. 왕피리라고 하면 생소하지만 왕피천하면 딱 떠오르는 그곳이다. 왕이 피난 간 동네라는 대한민국에서 손꼽는 오지로 당시에는 더 외졌다. 버스도 안 다녔고, TV에선 KBS1만 나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호롱불을 켜고 살았고, 물도 자연 샘을 길어 와서 썼다. 

학교는 당연히 걸어 다녔다. 초등학교는 편도 4km. 하천을 따라 만들어진 둑길을 따라 오고 갔다. 중학교는 더 심했다. 40리, 즉 16km였다. 도저히 매일 왕복할 거리는 아니라 평일에는 자취를 하고, 주말에 집에 오는 생활을 했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 총합 32km를 걷는 것도 대단히 고된 일이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남들과 달랐던 점이라고 하면 일본어가 재밌었다는 것 정도? 서울 고시촌으로 와서 어학원을 다니면서 낮에는 가락수산시장에서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했었죠. 그리고 모아 놓은 돈을 갖고 일본으로 가서 4년 반 정도 대학교도 다니고 직장 생활도 좀 해봤어요.”

한겨울 소백산 죽구종주. 오른쪽은 우리열아란 닉네임을 쓰는 이로 이씨와 여러 산행을 같이하며 많은 도움을 줬다고 한다.

일본어는 참 좋은데 일본 생활은 영 아니었다. 소주, 삼겹살에 된장찌개가 그리웠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일본어 전공을 살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일본기업과 활발히 거래하는 여러 기업에서 일할 기회를 접할 수 있었고, 지금은 안산에 있는 한 철강회사 산하의 시험부서 회사에서 13년째 일하고 있다.

“운동은 조기축구만 했었고, 산은 안 갔어요. 그러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본격적으로 등산을 시작하게 됐죠. 처음 산은 소병수란 친구와 함께 올랐었습니다. 수리산이었죠.”

수리산은 최고봉이 해발 489m로 높지도 않고,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거리도 그리 길지 않다. 그런데 그는 “정상까지 가는 데 11번이나 쉬어야 했다”고 말했다. 너무 살이 쪘고, 체력도 없던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을 잔뜩 빼고 내려와서 친구와 함께 시원한 술을 마시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점점 내려와 마시는 술의 재미보다 정상에 오르는 재미가 커졌다. 그렇게 홀린 사람처럼 점점 산에 몰입해 갔다.

첫 장거리, 23kg 배낭 메고 불수사도북

한 개 오르는 것도 벅찼던 산이 주변 2~3개쯤 엮어서 긴 코스를 걷는 것이 대수롭지 않게 될 무렵, 장거리 종주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어렴풋이 알게 됐다. 첫 도전장을 내민 곳이 바로 불수사도북.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단독 일본 북알프스 45km 종주.

“중간에 식당을 들르거나 편의점에서 보급을 할 수 있다는 것도, 해도 된다는 것도 몰랐어요. 그래서 38L 배낭 안에 먹을 것, 갈아입을 옷 등을 잔뜩 넣었죠. 배낭 무게가 23kg이더라고요. 집사람이 옆에서 보니 산을 타본 적도 없는 사람이 그렇게 갔다가 죽을까봐 따라오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부부의 무모한 도전이 시작됐다. 불암산, 수락산, 도봉산, 사패산까진 넘었는데 역시 북한산까지 마저 가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그래서 실패했다. 그런데 그는 “내 성격이 하면 해야 되는 성격”이란다. 그래서 다음 주에 또 가겠다고 선언했고, 아내도 또 따라가겠다고 선언했다. 또 23kg의 배낭을 짊어졌는데, 이번엔 23시간 걸려 완주에 성공했다. 그 전까지 오로지 수리산만 1년 동안 오르내려 얻은 성과였다. 그는 “그런데 지인들은 나보다도 평소 산에 가지도 않으면서 두 번이나 불수사도북을 따라와 끝내 완주한 아내가 더 대단하다고 말한다”고 했다. 다만 아내는 이 산행 이후 다시는 산에 안 간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불수사도북 완주로 자신감을 얻자 비슷한 거리와 난이도의 길들을 찾게 됐다. 초반엔 대부분 혼자였다. 주로 서울 근교에 있는 여러 산줄기들을 숱하게 다녔다. 그러다 장거리 전문 산악회에서 활동하면 중간에 다른 회원들이 물과 식량을 응원 차 보급도 해주고 동행도 얻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한 모임에 가입해서 첫 정기 산행에 참여했다. 서울 남부 16산이었다. 

후지산 정상. 씨 투 써밋에 성공했다.

“그 전까진 40, 50km까지만 혼자 다녔지, 100km 단위는 처음이었어요. 사실 그때 제 경험수준을 생각하면 가면 안 되는 산행이었어요. 미리 계산할 줄 몰랐거든요. 비 예보도 있었던 터라 절대적으로 무리인 산행이었어요.”

그런데 상황이 우습게 됐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악천후라 사람들이 50km 지점에서 대거 이탈했다. 그들은 경험이 있어서 남은 50km를 가늠할 줄 알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를 가늠하지 못했고, 첫 장거리 산행이니 꼭 완주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다. 무지의 힘 때문일까. 마지막에 완주한 이는 그가 유일했다.

“그런 일을 겪고 나니 자신감이 좀 생기더라고요. 이어서 여러 산악회에서 다양한 대장님들과 함께 산을 미친 듯이 다녔어요. 송림지부장님, 수도권지부장님, 골짝대장님, 천무님, 뛰어갈거다님 등을 좇아다녔죠. 이름 있는 초장거리 코스들은 거의 그렇게 섭렵하게 된 것 같아요.”

그들과 함께 다니면서 어떻게 산을 다녀야 될지 뚜렷한 목표도 갖게 됐다. 먼저 40~50명씩 패거리로 다니는 건 영 맞지 않았다. 또 그렇게 단체로 다니면서 그중에 몇 등으로 완주하는지를 관건으로 삼는 산행도 지양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남을 인솔해서 장거리 산행을 한다면 책임질 수 있도록 소수의 인원으로, 끝까지 모두 함께하는 산행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씨가 뚬방 대장과 함께 한오봉에 올랐다. 그는 현재 9정맥 35구간을 진행 중이다.

스루가 만에서 후지산 정상까지

산행을 공지해서 사람을 모은 뒤 책임지고 끝까지 산행하는 사람. 그것이 그가 생각한 대장이었다. 그렇게 처음 ‘대장’이란 직함을 달고 나간 산행이 호남국공연산이다. 월출~무등~내장산을 잇는 약 300km다. 

“일주일 중 4일이 비가 와서 무척 힘들었어요. 중간에 휴식은 직접 만든 비닐 텐트에서 취했죠. 요즘 쉘터라고 나오는 제품은 너무 비싸고, 공기도 잘 안 통해서 별로더라고요. 그래서 커다란 김장봉투를 사서 직접 숨구멍도 뚫고 재봉해서 만들었어요.”

기록을 분석해 보니 중간에 보급할 만한 식당이나 편의점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또 인기 있는 산행지가 아니라 산중에 사람도 없었다. 130km를 걸으면서도 한 명도 마주치지 않는 기현상도 겪었다. 길도 무척 험해서 마지막 20~30km를 남겨두고는 속이 뒤집어져서 음식이 안 들어갈 지경이었다. 하지만 후반부에 여러 산악회 사람들이 보급품을 들고 온정의 손길을 내밀어 끝까지 완주할 수 있었다.

그 다음이 올해 여름에 다녀온 ‘후지산 씨 투 써밋’ 50km다. 이 아이디어는 우연한 계기로 얻게 됐다. 아무래도 직업상 일본 출장을 많이 가고, 오래 사귄 지인도 많다. 일본에 가게 되면 출장에 휴가를 조금 붙여서 북알프스 종주나 일본 100대 명산을 다녀오기도 했다.

후지산 씨 투 써밋 도중 길가에 누워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카네코 히로타카란 오랜 친구와 만나 술을 마실 때였어요. 그 친구가 후지산을 두 번 가본 적 있다기에 ‘같이 후지산을 올라보자, 대신 이왕 가는 거 바다를 찍고 정상까지 가보자’고 했죠. 술김에 둘이 같이 하자고 의기투합했죠. 그런데 이 친구가 덩치가 좀 있어서 이거 하려면 살도 빼고 운동을 충분히 해두라고 말하곤 귀국해서 일정을 잡았어요. 1년이 지나 공항에 도착해 보니 이 친구가 운동은 하나도 안 했는지 그대로더라고요. 하하.”

대신 카네코씨가 자료수집이나 일행 픽업 등을 도맡아주기로 했다. 찾아보니 매년 같은 코스를 달리는 대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만 대회처럼 곳곳에 CP가 마련돼 보급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닌 상황에서 일반인이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특히 한국인이 한 기록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스루가 해변에서 출발해서 고텐바 루트를 따르다가 6부 능선에서 후지노미야 루트로 올라타서 3,776m 후지산 정상까지 가는 코스로 진행했어요. 느낀 점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단 사람이 거의 없으니 참 무섭더라고요. 그리고 해변에서부터 정상까지 99%가 오르막이란 점이 무척 괴로워요. 평지가 거의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계속 올라요. 다른 산들은 아무리 씨 투 써밋으로 간다고 해도 적당히 평지를 따르다가 산 들머리에서 본격 등산하는 개념인 경우가 많은데 여긴 안 그렇더라고요.”

다음 목표는 일본 알프스 3개를 한 번에 걷는 트랜스 재팬 알프스 레이스다.

또 한국과 다른 점이 있었다. 바로 산장 문화다. 산장의 도움으로 보급이 한결 편하지만, 대신 철저한 예약제다. 재워 달라고 애걸복걸해도 소용없다. 계획을 완벽히 세우고 엄수하는 습관이 있어야 산장 문화를 누릴 수 있다.

“산행이란,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

그는 완벽하게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이다. 그 이유에 대해 “하나는 성격적인 것. 다른 하나는 산행의 목표 때문”이라고 했다.

“어떤 일이든 자료를 수집해서 계획을 세우는 걸 즐겨요. 산행의 경우 네이버지도를 확대해서 보급처나 민박, 슈퍼 등도 모두 일일이 확인하죠. 여기까진 남들도 다 하는 걸 텐데 저는 전화해서 언제, 몇 시까지 여는지 등 운영시간이나 어떤 물건이 있는지도 전부 확인해요. 그렇게 안 하고 갔다가 문이 닫혀 있으면 낭패거든요. 산행을 공지할 때면 파워포인트로 수십 장씩 만든 자료를 올리죠.”

그는 평소 산행할 땐 &lsquo;몸빼바지&rsquo;류를 즐겨 입는다고 했다. 다만 이 날은 카메라 앞에 선다는 말을 들은 아내의 일성을 듣고 좀 다르게 갖춰 입었다.
선한 인상의 이호민씨. 그는 극한의 장거리 산행에서도 낙오하는 이 없이 함께 가려는 주의를 천명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산행이란 행위의 궁극적인 목표는 가족에게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그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가족”이라고 했다. 안전하게 산행을 마치기 위해서는 철두철미한 계획이 필수적이다. 모든 산꾼들이 가슴에 새겨야 될 말이다.

더 안전하려면 힘든 극한산행을 그만두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산행을 통해 인생에 있어 너무 많은 것을 배웠다”고 받아친다. 과거와 달리 지금은 웬만한 고난이나 어려움이 와도 아무렇지 않은 튼튼한 정신을 갖게 됐다고 했다. 어차피 모든 것은 지나가기 마련이란 생각이다. 

“남들이야 죽을 고생을 뭐 하러 그렇게 하냐 싶겠죠. 실제로 죽을 고비 비슷한 것도 몇 번 넘겼고요. 그런데 이런 산행을 통해서 성취감도 성취감이지만 여러 인생의 고비를 냉정하게 넘기는 힘이 생긴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 치밀한 계획을 세워 더 힘든 장거리에 도전하는 것 같고요. 다음에는 일본 알프스 3개, 북중남 도합 415km를 한 번에 걸어볼 생각입니다. 같은 코스에서 트랜스 재팬 알프스 레이스란 대회가 열려요. 1등이 5일 16시간, 컷오프는 8일이더라고요. 물론 제 목표는 그런 기록에 도전하는 것은 아니에요. 저에게 있어 최고의 기록이란 그저 안전하게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호민씨의 산행 장비. 맨 오른쪽 아래가 침낭형 비상용 은박담요, 그 왼쪽이 치마우의다. 둘다 요즘 장거리꾼들의 소위 &lsquo;잇템&rsquo;이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