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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한국등산사 초록 [제주편 3]

월간산
  • 입력 2003.03.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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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조난사고 직후 적십자 산악안전대 창설
제주 산악운동의 태동기와 한산·대학산악부의 도내 활동
구술 안흥찬 60대산회 회원·전 제주도산악연맹 회장 / 집필 진창기 한라산지킴이 부회장·전 제주산악회 회장
1958년 개미등. 제주적십자 소장.
1958년 개미등. 제주적십자 소장.
해방과 더불어 6·25와 4·3이 끝나고 1954년 9월21일 한라산이 개방되면서 한라산은 도내외 등산객으로 북새통을 이루다시피 했다. 활동이 활발한 많은 육지 산악회들이 한라산을 등반하게 됐고, 제주도민들은 도내 어느 곳이나 자유로이 나다닐 수 있는 평화를 되찾음으로써 자연스럽게 한라산을 오르게 됐다. 그 시대 응어리졌던 한을 산자락에서 야호 소리와 함께 날려버리고 싶었던 것이다.
제주대학 학생들은 4·3이 끝나고 평화가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 10월5일 120명 전원이 한라산을 올랐고, 10월10일에는 한라산 정상 개방기념으로 제주신문사가 주최해 도내 각 기관단체장과 제주신문 간부들이 오르기도 했다. 이외에도 한라산 개방을 기념하는 등반대회가 기관, 직장, 단체별로 잇따라 열렸다.

1956·57년 한국산악회 적설기 등반
한국산악회는 1956년 1월3일부터 21일간 적설기 한라산을 등반했다. 등반대 구성은 대장 홍종인 회장, 리더 김정태, 김정호(남벽 리더), 장비 엄익환, 운행 손경석, 수송 이희성, 식량 안종남, 베이스 남행수, 보도 임석제, 기상 정원, 기록 이문종, 의료 이민재, 통신반 김용웅, 한태균, 정정권, 일반 대원으로 전담과 8명 등 총 23명이었다. 이 등반대는 1948년 조난사한 한국산악회 전탁씨의 추모와 설욕 등반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등반 출발일은 소한과 대한 사이의 가장 추운 시기로 택했다. 1월5일 아침에 제주항에 도착해 관음사터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하고 등반대를 3개조로 나누어 2개조는 관음사로, 1개조는 서귀포로 한라산을 등반하고, 학술반격인 이숭녕 박사는 제주 방언조사로 섬을 일주했다.
관음사 코스의 2개조는 캠프1, 2를 설치하고, 남벽조는 김정호 리더 외에 김영윤, 김효근 등이 서귀포에서 출발해 한라산 남벽 아래 캠프3을 설치했다. 관음사 코스의 2개조가 정상을 등정하는 날이 공교롭게도 13일의 금요일이라 하루를 쉬고, 14일 12시경 등정했다.
한국산악회 보고서를 보면 ‘한라산에는 잔비가 있기 때문에 제주경찰국에서 등반대를 개미목까지 경비경찰을 동행시키겠다는 것이다. 등반대에서 아무리 사정하고 거절해도 만일 대원들이 다치면 자기들 책임이라고 우기면서 따라나서는 것이다. 장비와 식량은 걱정말라고 하면서 꿩털을 꽂은 방한모에 옛 일본군의 털로 된 비행복으로 무장한 거구의 신선부대장 허모 경감 외 1명이 나타났다. 그들이 갖고 온 식량은 청주 2병이 전부였다. 어처구니없었지만 거절해도 막무가내여서 하는 수 없이 지원 수송대와 동행시킬 수밖에 없었다’는 에피소드 한 토막을 적고 있다.
리더였던 김정태씨의 기록에 의하면, ‘이 적설기 한라산 등반에 대해 1955년 가을 본대 입산이 허가됐으며, 등반방식은 외국원정대형의 극지탐험방식이 취해졌다. 동시에 어택 파티(공격조)는 등정 후 지원대 텐트가 있는 남면으로 하산했는데, 이는 동계 남면은 초등 하산이기도 하지만 등반에 보다 기동성을 높이고 남면 하산에 실패했던 전탁 회원의 조난을 설욕하자는 뜻도 가졌다. 그래서 전탁 회원의 조카 전담 회원과 남행수 회원(조난 당시의 회원)도 참가케 하였다. 등반훈련은 산악회 발족 후 10년만에 가장 정상적으로 짜여져 실천된 알피니즘과 히말라야이즘의 인적 구성과 기획 준비로 기능적인 등반활동의 성과를 보아 그야말로 산악회의 중흥적인 쾌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한국산악회는 1956년에 이어 1957년 1월12일부터 18일간 적설기에 한라산을 등반했다. 등반대는 대장 홍종인, 부대장 이숭녕, 리더 김정태, 대원 이희성과 18명으로 구성됐다. 등반방식은 극지법 전진방식을 채택했고, 주로 설중 막영법의 연구에 주력해 장차 해외원정에 활용할 수 있는 등반방식을 가상적으로 실행했다.

1957년부터 대피소 설치
한라산을 찾는 등산객이 많아짐에 따라 1957년부터 관음사, 성판악, 어리목, 영실, 남성대, 용진각, 탐라계곡, 정상에 대피소와 휴게소를 여러 기관에서 지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나무로 된 산장이었다. 1957년 9월 초 류충렬(柳忠烈) 경찰국장의 착안으로 한라산 정상에 제승정(濟勝亭)을 비롯해 개미목 부근에 용진각(龍鎭閣), 서귀포쪽 하산로에 남성대(南星台)를 지었다.
하지만 이들 산장은 한라산의 기상을 고려하지 않은 건축물이어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만다. 산정의 제승정은 그 해 겨울 심한 폭설로 돌벽이 일부 무너지면서 함석으로 덮인 지붕은 날아가 버렸고, 남성대와 용진각은 다음해 강풍으로 문짝과 지붕 일부가 무너져 산장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됐다. 부서진 산장을 보수하지 않고 방치하다보니 등산객들이 나무를 화목으로 사용해버려 산장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용진각은 가옥형으로 지은 것은 확실하나 위치는 이견이 있다. 1963년 용진각 원형 대피소를 설계하고 감독한 강요준과 1950년대 후반에 도청 공보실에 함께 근무했고, 1974년 한라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제2대 소장을 역임한 고성근에 의하면 용진각 위치는 지금 사용중인 대피소와 원형 대피소 사이에 지었다고 기억하고 있으나, 안흥찬에 따르면 용진각 원형 대피소 북쪽 약 50m 지점인 큰 계곡과 작은 계곡 사이에 지었었다고 말하고 있다.
관음사 탐승정.<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2000, 제주시)에 게재.
관음사 탐승정.<사진으로 엮는 20세기 제주시>(2000, 제주시)에 게재.
영주정(瀛州亭·관음사 동쪽)과 탐승정(探勝亭·관음사 내)은 제주시 교육위원회가 용진각, 영주정, 탐승정을 관리했었다는 기록(1958년)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57년부터 1958년 사이에 지어졌다고 볼 수 있으며, 2003년 1월 확인 결과 관음사에 지었던 탐승정은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
일화 하나를 소개하면 1950년대 후반에 김종철, 안흥찬, 부종휴가 등산을 많이 하다보니 용진각산장은 부종휴가, 영주정(瀛州莊이라고도 함)은 김종철, 안흥찬, 부종휴가 불태워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김승택이 “산장이 없어진 이유가 뭐냐? 당신님네들이 불태워 없어진 것이 아니냐?”고 농담으로 말한 것이 괜한 사람을 방화범으로 몰아 버렸다.
짚고 넘어갈 것은 관음사 코스에 ‘용진각’이라는 지명이 이 때부터 나타난다. 관음사 코스는 탐라계곡과 두 번 만나는데, 해발 840m(탐라계곡대피소)와 해발 1,480m(용진각 원형대피소) 지점이다. 출발지점에서 첫번째 만나는 계곡까지는 개미꼬리 부분이고, 두 번째 만나는 계곡까지는 개미등, 그 윗쪽은 개미머리 부분에 해당된다. 즉, 용진각이라는 지명의 위치는 개미의 등과 머리 사이이므로 ‘개미목’ 또는 ‘개미목골’이라 부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용진각’은 산장이름이지 지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용진굴’은 백록담 북벽 바위 아래 있는 탐라계곡 최상류부의 이름으로, 개미목 등성이 너머로 사라진 용이 내려와 자리잡은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최하류부는 바닷가 용두암 옆에 있는 용연(龍淵)이라는 계곡이다.
그러나 한라산 국립공원에서 만든 지도에는 용진각산장 밑에 ‘용진굴’이 있다고 나와있으나 맞지 않고, 굳이 구분한다면 흙으로 된 굴이므로 ‘용진토굴’ 정도가 맞는 이름이라 생각된다. 관음사 코스 출발지점 지명은 ‘새미털’이라 하여 샘(泉)이 있고 산(山)과 평야의 경계가 된다는 데서 연유된다.
1961년 4월부터 5년간 제주도청 건축 담당이었던 강요준의 말을 들어보자.
“제주도에서 1962년에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관음사 코스에 방향안내판과 표시판을 설치했다. 김종철씨와 안흥찬씨의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설치한 방향안내판과 표시판에 등산객들이 ‘OO 왔다가노라’는 글자도 새기고 낙서를 하는가 하면 그것도 모자라 방향을 돌려버렸다. 다른 등산객들은 방향표시판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다보면 길이 아님을 알고 돌아와서는 발로 차고 다시 돌려버리기를 반복했다. 제대로 방향을 가리킨 시간이 더 짧았었다. 유지보수하느라 혼났다. 결국 등산로 방향표시판은 오래 가지 못해 망가져 버렸다.
그리고 1963년에는 제주도 예산으로 용진각 원형대피소를 설계하고 감독하여 11월에 완공했다. 신축과정에서 처음에는 등산객들에게 사례금을 주며 시멘트(1/3포 분량), 모래, 합판 등 건축자재를 용진각까지 운반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용진각에 도착한 물량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등산객들이 가지고 가다가 무거워서 숲속에 버렸기 때문이다.
1964년 10월에는 지금의 영실 팔각정 근방에 입승정이라 불리는 대피소를 지었었다. 산장 두 개를 짓고 방향안내판 유지보수 때문에 해병대 군화 세 켤레를 헐렸다.”
용진각 원형대피소는 현재 철거대상 건물이지만 한때는 한라산을 찾는 산악인들이 매우 유용하게 이용했던 대피소였다. 그러나 위치선정은 문제가 있었다. 1971년 서울대공대 산악부 훈련대가 대피소에서 취사하던 중 눈사태로 대피소 전체가 눈에 묻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철문이 엿가락처럼 휘고 산장 안에도 눈이 가득 찼다. 그래서 새 산장은 남쪽으로 50여m 지점에 짓게 됐다. 그리고 영실 입승정은 헐리면서 팔각정(매점)과 자연보호헌장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해방 후에는 여고생들이 먼저 등산
1971년 제주여자고등학교 연례 한라산 등산 페넌트. 1971년이 15회이면 1957년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왼쪽). 1964년 제주 신성여자고등학교 연례 한라산 등산 페넌트. 1964년이 8회이면 1957년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산악회 종신회원 김현우씨 소장.
1971년 제주여자고등학교 연례 한라산 등산 페넌트. 1971년이 15회이면 1957년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왼쪽). 1964년 제주 신성여자고등학교 연례 한라산 등산 페넌트. 1964년이 8회이면 1957년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제주산악회 종신회원 김현우씨 소장.
 일제시대 제주농고 학생들이 군사훈련 성격인 한라산 단체등산은 있었지만 해방 후 제주도내 고등학교 한라산 단체등산은 여자고등학교부터 시작됐다. 신성여고와 제주여고 학생들이 1957년 한라산을 단체로 등산했다. 이 등산은 연례행사가 됐고, 몇 번은 신성여고와 제주여고가 합동으로 하기도 했다. 초창기에는 이기형, 고영일, 김종철, 안흥찬, 김현우, 부종휴, 김규영, 강태석 등이 지도교사로 같이 등산했고, 나중에 김승택, 김택화, 김두현 등이 같이 등산했다. 안흥찬, 김현우에 의하면 신성여고가 먼저 한라산을 등산했다고 기억하고 있으나 이기형은 제주여고가 먼저 등산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김현우가 보관하고 있는 두 고교 연례등산 페넌트를 보면 신성여고가 1964년이 8회이고 제주여고는 1971년이 15회다. 두 고교 모두 1957년부터 시작했다는 것은 확실하나 어느 학교가 먼저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기형에 의하면 김현우가 항상 같이 다녔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신성여고가 먼저 등산했다고 추정할 수도 있지만, 김승택에 의하면 강태석이 제주여고생들을 인솔해 한라산을 갔다 와서 한 달이 못돼 신성여고와 등산한다고 다시 한라산에 가더라, 제주여고가 등산할 때는 날씨가 좋지 않았으나 여고생 단체등반 초등이라는 욕심 때문에 강행했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기형은 1965년 오현고등학교로 옮기면서 학생들을 인솔해 한라산을 등산하기도 했다.
1957년경은 제주시 서부두에 고등어 잡이배가 들어오면 그 날은 고등어 냄새로 가득 찼고, 각재기(전갱이) 잡이배가 들어오면 그 날은 어김없이 각재기 냄새가 진동했던 시절이다.
지금은 할머니지만 당시 여학생들 얘기를 들어보면 등산지도교사들은 한결같이 인텔리요 멋쟁이들인 총각선생님들이었다. 선생님들이 너무 멋져서 그냥 좋아서 따라다녔다고 회고하고 있다. 한편 선생님들 이야기는 등산 중에 한 여학생의 응석(?)을 받아주면 모두가 똑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심각한 상태가 아니면 모른 체 해야 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들은 후일 산악운동의 불모지인 제주도에서 산악단체를 만들어 많은 활동을 하는 등 제주 산악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제주도 산악인과의 만남
한국산악회는 1957년 8월4일부터 15일간에 걸친 해양훈련과 한라산을 등반했다. 등반대 구성은 단장에 홍종인, 부단장에 이숭녕, 정인호, 리더에 김정태를 비롯하여 본부반 14명, 촬영보도 2명, 의료반 8명, 학술반 18명 등 총 48명이었다. 참가한 대학산악부는 14개 대학이었고, 고등학교는 12개교였다. 인천에서 해군 806함에 승선해서 서귀포에 상륙, 남북 양대로 나누어 막영하며 한라산을 집중등산한 것이다.
고영일에 의하면, 바로 그 시기 여름방학 때 귀향한 현임종과 대학생 6~7명이 한라산 내에 있는 오름들을 등반하기로 했다. 왕관릉에 베이스캠프를 친 다음 정상에 올라갔다가 태풍이 온다는 소식에 정상 동북쪽 방향에 있는 궤(동굴)에 장비와 식량, 그리고 대원 2명만 남기고 나머지는 표고밭으로 철수했다.
태풍이 지나가고 표고밭으로 철수했던 대원들이 올라가는데 정상에 있어야할 두 대원이 내려오고 있었다. 이유인 즉 날씨가 개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서귀포쪽으로 올라온 모 고등학교 학생들이 장비와 식량을 몽땅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용진각에 한국산악회 등반대 단장이 있어서 고영일이 엄중 항의했으나, 결과적으로 손님들에게 적선한 셈이 돼버렸다.
“지난 이야기지만 제주도의 기상, 특히 한라산 기상은 제주 산악인들은 그나마 친숙하기 때문에 미리 대처했던 것이다. 그 시기 우리 나라에 홍수가 나서 200명 이상이 사망하고 이재민이 6만 명이나 발생했었다. 그 때도 오름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정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작고한 김종철씨가 1995년 제주의 오름들을 집대성한 <오름나그네>를 완성했다. 김종철씨가 오름 자료들을 정리함으로서 새로운 ‘오름 정신’을 만들어냈고, 한라산 역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다. 그를 위해 오름나그네비(碑)라도 세워야 할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한라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크고 작은 사고가 잇따르자 제주도적십자사는 인명구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60년 8월24일 김영진 지사장이 대한적십자사를 방문해 산악안전대 창설기금 40만환을 배정 받아왔다. 산악안전대를 만들기 위한 기반을 닦는 데는 대한적십자사 청소년부장이었던 서영훈이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세번째 조난사고와 산악안전대 발족
1961년은 15명의 동사자를 낸 40년만의 폭설과 혹한이 제주를 엄습한 해였다. 이 해 겨울은 60년 12월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폭설이 중산간 마을의 교통을 완전히 막아 버렸고, 한동안 제주와 육지 간 교통이 두절돼 기름을 실어오지 못해 전도가 단전됐을 정도였다. 또한 1961년은 육지부 대학산악부가 대거 적설기 한라산을 오른 해이기도 했다.
서울법대산악부 등반대는 1월7일부터 5박6일 일정으로 한라산을 등반하기 위해 대장 윤인근(당시 3년)과 대원 10명(1명은 한국일보 기자)으로 등반대를 구성하여 제주를 찾았다. 등반대는 7일 제주시를 출발해 관음사를 지나 해발 600m 숲속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세 파트로 나누어 극지법으로 등반했다.
본격적인 등반일인 8일에는 휘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탐라계곡 부근에 제2캠프를 설치하고 BC로 내려왔다. 그러나 저녁부터는 눈이 폭풍우로 돌변했고, 대원들은 제대로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이었다. 다음날은 비를 맞으며 등반하기 시작해 개미등에 도착했을 때는 차츰 비와 눈이 섞여 내렸고, 삼각봉 앞에서는 완전히 눈으로 변했다. 올라갈수록 기온이 급강하면서 젖은 옷은 얼기 시작했다.
등반대가 용진각에 도착하고는 운행을 중지하고 부근에 제3캠프를 설치했다. 날씨는 어둠과 함께 눈보라가 더욱 세차게 몰아쳤다. 강풍이 텐트를 날릴 것 같이 요동쳤고 기온은 점점 더 내려가 영하 18도까지 내려갔다. 비와 눈과 바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날들이 연속이었다. 10일. 건빵과 통조림으로 아침을 때우고, 폭설을 뚫으며 왕관릉을 거쳐 화구벽에 도착했을 때는 심한 취설로 얼굴을 들 수 없었고, 기온은 영하 20도를 가리켰다. 강한 서북풍을 받으며 화구벽 능선을 따라 정상으로 가는 도중 몇 차례나 분화구 속으로 미끄러져 내렸다.
천신만고 끝에 오후 3시35분 드디어 정상에 섰다. 대원들은 정상 등정의 기쁨에 피로한 기색도 없이 기념촬영에 바빴고 악천후 속에서도 페넌트를 정상에 꽂아 적설기 한라산 등정기념촬영을 마쳤다. 10분 동안의 촬영을 마치고 또다시 몰아치기 시작한 폭설 때문에 하산을 서둘렀다. 용진각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으나 대원들은 극도로 피로한 상태였다. 잠깐 휴식을 취하고 남아있는 식량을 약간씩 나눠먹고는 비틀거리며 또 하산을 시작했다.
등반대는 목표지점인 제1캠프까지 하산할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너무 늦었고 체력이 달려 할 수 없이 개미등 중간 숲 지대에서 설동을 파고 비박을 하기로 했다. 11일. 약간의 마른 음식으로 아침을 대신한 대원들은 관음사를 향해 하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극도로 피로한 대원들은 오직 정신력으로 2m가 넘는 눈을 뚫어야만 했다. 이 때부터 이경재 대원은 완전히 기력을 잃고 허우적거리며 걸었다. 대원들이 부축했으나 거의 끌리다시피 했다. 서로가 교대로 이경재 대원을 업고 부축하면서 탐라계곡을 빠져 나왔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였고, 관음사 등산로를 빠져 나올 때쯤은 의식이 희미해지며 숨결이 가늘어지고 맥박마저 느려져갔다.
대원들은 이경재 대원의 긴박한 모습을 보자 어떻게 해서든지 살려야겠다는 일념에 지친 줄도 모르고 교대로 업고 뛰었다. 관음사에 도착하여 이젠 살았구나하고 업고 있는 이경재 대원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동료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이경재군(당시 20세·1학년)은 충북 홍성이 고향으로 경기중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로 알려졌고, 서울법대산악부 조직 후 첫 희생자가 됐다. 서울법대산악부가 하산할 때 고려대산악부는 올라가고 있었다.
다음날 서울에서 가족들과 서울법대 학생과장, 한국산악회 홍종인 회장과 이숭녕 부회장 등 5명이 유해수습과 조난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미군용기편으로 제주에 왔다. 조난조사대 등반 시에는 제주 출신 부종휴와 고대승이 참가했다. 그러나 조난조사대는 삼각봉 트래버스 중 눈사태를 만나 두 대원이 크게 다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후일 이경재 대원 형제들이 관음사 앞에 추모비를 세웠다. 형수의 친필로 쓴 그 비에는 ‘여기 한라 기슭에 / 어느 눈보라 치던 날 한 송이 피지 못한 / 에델봐이쓰가 슬어졌노라 / 지나는 산벗이여 / 우리 그를 위해 잠시 머리 숙이자’고 새겨져 있다. 지금은 관음사 앞길을 우회하는 도로가 만들어져 오가는 산악인들과 만나기 쉽지 않으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앞을 지날 때는 머리를 숙이곤 했다.
적설기 한라산 등반을 일반 산악단체와 대학 산악단체로 구분하여 보면, 1948년 한국산악회 등반대를 기준으로 13년 전에는 일본 대학산악부인 경성제대산악부가, 13년 후에는 한국 대학산악부인 서울법대산악부가 등반했다. 세 팀 모두 동계 첫 조난을 당하는 얄궂은 우연으로 이어지게 된다. 모두 관음사 코스를 이용했고, 정상을 등정하고 하산 도중 용진각을 정점으로 조난사고가 발생했다. 서울법대가 초등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두 팀은 동계 초등이기도 하다. 그리고 조난사고를 당한 이들 모두 엘리트들이다.
제주산악사를 쓰면서 세 팀의 조난사고는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했다. 한라산이 있는 한 산악인들은 찾을 것이고, 한 번쯤 읽었던 이 조난사고 사례가 유사한 상황에 처했을 때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2001년 적설기 훈련 중 눈사태로 인해 제주지역 대학생 3명의 목숨을 잃은 대형 사고와 같은 전혀 다른 유형의 조난사고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위와 같은 범주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는 생각에서다.
영실대피소 입승정. 60대산회 김용구 회원 소장.
영실대피소 입승정. 60대산회 김용구 회원 소장.
 1961년 겨울 제주도민 15명이 동사하고 이경재의 죽음으로 도내에서는 산악안전대책 수립과 산장 시설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세부사항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1962년 탐라계곡 적십자대피소, 1963년 용진각대피소, 1964년 영실대피소 시설물들이 바로 그것들이다. 그리고 1960년부터 대한적십자 제주도지사가 추진하던 산악안전대가 평소 산을 좋아하던 이들을 한 데 묶는 가교역할을 함으로서 자연스럽게 탄생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1961년 제주적십자 산악안전대 창립은 전국에서 처음이다. 적십자 정신과 산악인 정신이 절묘하게 합쳐진 고귀한 산악안전대 정신은 오늘날까지도 계승·발전되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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