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파키스탄 히말라야 처녀봉 등정기 (중)

월간산
  • 입력 2004.02.08 11: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고픔, 불안감, 고독도 사치다
힌두라지 치안타르 산군의 아타르코르 & 하이즈코르 초등기

고산 장벽이 여러 겹 둘러쳐져 있는 길기트에도 예외 없이 여름 우기(monsoon)가 시작됐다. 하늘은 짙은 구름층을 만들더니 오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사흘을 쉬면서 그 동안 주렸던 위장에 끼니마다 괜찮은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초호화 식단을 대접했는데도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장출혈은 계속되고 체중은 6kg이나 빠졌다.

묵고 있는 숙소 마디나 호텔은 나홀로 배낭족이나 여행자들이 예전엔 넘쳐 났었다. 9.11테러 이후 이슬람국가인 파키스탄에 외국인 여행자는 가물에 콩 나듯해져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야쿱 사장은 몇 년 전부터 든든한 내 후원자가 되어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으며 어려운 점이 없는가를 물으며 부족한 경비를 지원하기도 했었다.

고정로프 사용은 등반 아닌 노동

등반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꾸기란 고정로프를 설치하며 주마링으로 오르던 등반자에게 그 로프를 끊고 오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10년 전 트랑고 그레이트타워를 등반할 때까지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 “Hard taking? Yes! Risk taking? No!”(힘든 것은 참아도 위험한 것은 안돼!)였다. 트랑고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고, 그 거대한 벽에 길을 만들며 오른 초등자들의 용기와 의지는 나의 길잡이가 됐다. 우리 팀도 혼신의 힘을 기울여 올랐지만 개척자에 비하면 한낱 먼지 같은 것이었다.

귀국 후 그러한 등반을 잘 모르는 사람들의 칭찬에 우쭐해 우리의 업적만 치켜세웠다. 그리고 다시 트랑고가 준 깨달음을 되짚어 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후의 등반은 모두 새로운 루트로만 등반을 지속했으며, 고정로프를 사용하는 오름은 등반이 아니라 노동에 불과하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낮은 수준의 등반행위라고 생각하게 됐다. ‘위험’도 받아들였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위험을 빼면 도대체 뭐가 남는단 말인가!

예정에 없던 탐사로 일정이 지연되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스카르두(Skardu)로 가서 벌써 혼보록(Honbrok?6,459m)을 오르고 있어야했다. 비가 내리는 카라코룸의 상황을 감안해 힌두라지의 이시쿠만(Ishkuman) 계곡을 먼저 가기로 바꿨다.

힌두라지(Hinduraj)는 이시쿠만과 그 원류인 카람바르 강을 경계로 카람코룸과 나뉘어져 카불 강까지 500km 뻗어 가는 동부 힌두쿠시에 속하는 한 지맥이다. 그 중 동쪽 끝자락 치안타르 산군(Chiantar Group)은 힌두쿠시를 통틀어 최장(34km)의 치안타르 빙하 주위를 감싸는 말굽 형태의 연봉들로, 빙하와 봉우리들이 미지로 남아 있다.

전에 방문한 적도 없었으며, 사진으로도 산군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만큼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이어서 더욱 끌어당긴다. 지도 두 장이 내가 가진 정보의 전부다. 특이하게 미군용 지도(US Army Map Service 1;250,000 Series. U 502 India and Pakistan. NJ 43-14 Baltit)에는 이시쿠만의 세 계곡, 바루(Baru Gah), 마탄티르(Mathantir Gah), 찬티르(Chhantir Gah)에만 유난히 녹색으로 채색되어 초목이 무성하다는 의미를 전해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 계곡에 머무는 한 달 동안 몬순기간이었지만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은 불과 6일뿐이었다.

캄캄한 밤 9시에 산골동네 고툴티(Gothulti)에 내렸다. 이런 순간이 참으로 난감하다. 짐 덩어리 두 개를 들고 움직일 수도 없고 동네에 텐트를 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무조건 학교 선생 집이 어디냐고 물었다. 다행히 운이 따라 석유등을 든 젊은 사내가 마중나왔고, 우르르 몰려온 아이들이 짐을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세르 바즈 칸(Sher Baz Khan?32)은 고툴티 초등학교 교사이자 어린 딸을 둔 가장이다. 흔쾌히 별채를 쓰도록 내주며 머무르는 동안 식사는 물론 필요하다면 최대한 돕겠다고 한다. 오히려 목욕시설이 없는 것에 미안해 한다.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뜰에는 사과, 살구가 익어 가는 나무 밑에 봉선화가 함초롬히 피어 있다. 그 건너편에 목수였던 할아버지가 직접 지었다는 집 안에 문양이 조각된 나무기둥과 선반은 연기에 검게 그을려 세월의 흔적이 배어 나오고 있다.

집 구조는 하나의 방이지만, 바닥이 낮은 중앙에 음식을 조리하고 난방을 하는 화로가 자리하고, 연통이 천장의 구멍으로 서 있다. 정면에는 식기를 얹는 선반과 곡식을 보관하는 뒤주가, 좌우측은 침실로 사용되는 공간이다. 바닥은 통상 야크털로 짠 카펫을 까는데, 여기는 나무로 마루바닥으로 만들었고, 출입구쪽에 땔감을 쌓아 놓았다.

한국인에게 시련준 마나슬루 닮은 봉부터 등반

이스마일리(Ismaili) 무슬림은 여자들도 외간남자와 마주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율법도 자유로운 편이다. 세르 바즈 부인이 화로에 빵을 굽고 요리하는 동안 남자들은 주위에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며 홍차를 마신다. 이따금 나누어주는 음식은 가족이라는 행복을 느끼게 한다. 나도 그 가족의 한 사람이 됐다.

고툴티 마을에서는 찬티르 계곡쪽으로 두 개의 봉우리가 보였다. 육중한 성벽처럼 생긴 6,222m봉(Koh-I-Karkamush)은 몇 개의 연봉으로 이어져 흥미를 일으키지 못했다. 우측의 검은 암릉 뒤 구름 위로 솟은 봉(6,105m)은 신비감마저 든다. 첫날부터 이곳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 

세르 바즈가 준비해준 당나귀 한 마리에 짐을 싣고 먼 계곡, 마탄티르에 위치한 아타르 호수(Atar Sar)를 향해 캐러밴을 시작했다. 넷이 함께 걷는다. 무게를 맞춘 두 개의 짐을 짊어진 당나귀, 이 놈의 주인이자 몰이꾼인 차도(Chado), 통역자로 따라나선 이시코만 중학교의 수재 샤흐 바즈(Shah Baz)였다. 세르 바즈의 동생이다.

방목과 밀 재배로 여름에만 거주하는 마을 한디스(Handis)를 지나면서 맑은 냇물 주위에는 히말라야 삼목과 자작나무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시원한 그늘과 지나치는 양치기 집에서 대접하는 밀크티를 마시느라 걷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많다.

브로골(Broghol)로 오르는 언덕배기에서는 당나귀도 힘든지 방귀를 뀌며 자주 멈추어 쉰다. 이 때마다 차도는 가차 없이 회초리로 엉덩이를 후려친다. 당나귀라는 동물은 정말 특이하다. 걷다가 잠시라도 사람의 눈길이 닿지 않으면 슬슬 눈치를 보며 멈춰서거나 엉뚱한 길로 샌다.

뻔한 결과를 이 놈도 경험으로 알고 있을텐데, 하루 종일 주인의 발길에 걷어 채이고 얻어맞으면서 간다. 당나귀가 멈출 때마다 덤으로 쉴 수 있어 좋다. 카메라와 계란 두 판만 든 배낭을 메고 가는 데도 힘겹다. 며칠간 심한 몸살을 앓은 것 같은 이런 몸 상태로 등반을 해낼지 의문이다.

나무기둥과 잔가지를 이용해 원추형으로 만든 방목지의 거주지가 멀리 보인다. 옹기종기 붙어 연기를 피워내는 모습이 아메리칸 인디안 천막 같다. 비가 머금은 자작나무 잎이 햇빛에 유난히 반짝인다. 그 숲 사이로 이틀거리를 하루에 마치고, 폭 4km의 아타르 호숫가 초원에 베이스캠프(3,800m)를 정했다.

텐트 주위로 양과 어린 송아지들이 동(Dong)에서 아침마다 풀을 뜯으러 올라온다. 목동들도 심심할 때쯤이면 와서 놀고 간다. 등반 때 먹으려던 사탕과 비스킷은 초장에 거덜났다. 여기는 왜 이렇게 비가 매일 오느냐고 남자에게 묻자 명답이 돌아왔다. 양 한 마리를 자신에게서 사서 제물로 바치면 날씨가 맑아질 것이란다.

베이스캠프는 상상했던 것보다 아름다웠다. 전설의 호수 아타르사르와 동쪽에 곧추선 캄푸르를 알게 된 것은 <Between the Oxus and the Indus>라는 숌버그(R.C.F. Schomberg?1880-1958)의 책에서였다.

1933년 여름 숌버그는 다르콧 마을을 출발go, 아타르 고갯마루에서 미리 알고 기다리고 있던 이시쿠만 포터들과 함께 이곳으로 내려와 야영했다. 서구인으로서는 첫 방문이었다. 그는 여기에서 동쪽에 솟은 인상적인 암탑 칸푸르(Kanpur·5,499m·현지인은 Kampur라 부름)를 보았고, 이를 더 멀리에 있는 캄피르(노파 老婆라는 뜻의 산)로 착각했다. 지금의 카람바르 빙하 원두에 있는 캄피르디오르(7,168m)다.

중앙아시아와 카라코룸, 힌두쿠시에서 엄청난 족적을 남긴 대탐험가가 이런 우를 범하게 된 데에는 당시 캄피르는 존재가 불분명한 환상의 산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새 등반대상지를 찾고있던 카를로스 뷸러(Carlos Buhler)와 이반 두사린(Ivan Dusarin)이 이 봉을 3년 전 등정했다.

텐트 문을 열면 바로 올려다보이는 6,189m봉을 먼저 등반하기로 했다. 한국의 초창기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지독한 시련을 안겨 준 마나슬루(8,163m)를 닮았다. 서쪽 모레인 언덕을 오른다. 쉬면서 산을 바라본다.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은 더 이상의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참을 만하며 기쁨으로 승화된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마나슬루에서, 히말라야에서 죽어간 산악인을 나는 슬퍼하지 않는다. 그들 나름대로의 길을 살아갔을 뿐이다.

남벽 중상단부에 세락이 가로질러 매달려 있다. 눈사태나 얼음 붕괴가 문제다. 그래도 괜찮은 루트는 왼쪽의 쿨와르를 재빠르게 올려쳐 서릉으로 붙는 지능선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도 홈통을 지날 때 무언가 떨어져 내린다면 피할 방법이 없다.

봉우리 동면에 좋은 루트나 쉬운 하산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수트 계곡(Sut Gah)으로 갔다. 벽이 마주보이고 하얀 얼음이 드러난 지점까지 올라갔다. 단 1분만 그 모습을 드러내 주면 되는데, 내리는 비와 구름은 제 마음대로다. 4시간을 추위에 떨며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되돌아섰다. 칠흑 같은 밤에 브로길을 지난다. 개들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든다. 스틱을 휘둘러 쫓으려니 더 미친 듯이 으르렁댄다. 목동들이 해가 지면 바깥 출입을 멀리 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소리를 질렀고 잠들었던 주인이 밖으로 나와서야 진정됐다.

8월14일, 기온이 차지더니 날씨가 개었다. 목동들이 항상 휴대하고 다니는 망원경을 빌려 루트를 세밀히 관찰하고 베이스캠프에 남은 짐은 싸서 버드나무에 매달아놓고 출발했다. 해발 4,550m의 등반 출발지점이 바라보이는 곳에 텐트를 치고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딜리상사르 등반과 마찬가지로 보름이 이틀 지난 달빛을 이용해 하룻밤에 오르려고 한다.

라면을 끊이다가 엎어 버렸다. 장비를 착용하고 헬밋까지 쓰고는 벽 하단부 설벽을 오른다. 눈이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한 시간이면 족할 것 같던 설벽 끝은 아직 멀고, 두통으로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숨을 헐떡이며 한 자리에 멍하니 서 있다가 텐트로 되돌아왔다. 헬밋을 돌밭 위에 던져버렸다. 머리가 아프고 오르지 못한 것을 헬밋 탓으로 돌렸다. 밤새 자고 또 다음날 하루 종일 침낭 속에 있었다. 너무나 무거운 중압감을 느낀다.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날씨는 나를 위해 기다려주지 않는다. 베이스캠프로 뛰어내려갔으나 조리할 스토브는 위에 있는 것 하나뿐이다. 동으로 가서 음식을 얻어먹고 그 날 바로 등반 출발지로 올라갔다. 나는 등반노트에 이렇게 적으며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지금 나에게 있어 배고픔과 불안, 고독을 느끼는 그 감정조차도 사치다’.

‘이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욕 나와

8월17일, 새벽 1시20분, 헬밋과 하강기는 두고 등반을 시작했다. 어차피 내가 가진 하켄의 수량으로는 줄을 이용한 하강은 어렵다. 오름짓과 마찬가지로 클라이밍다운으로 내려와야 한다. 벽 밑 쿨와르 입구에 펼쳐진 설벽을 오르는 데 3시간이 걸렸다. 좁아진 홈통 안에는 바위에 얼음이 얇게 얼어 속도를 낼 수가 없다. 폭포수로 빙면이 끊어진 곳에서 우측 암벽으로 계속 이어나갔다.

별이 빛나는 하늘금과 맞닿는 곳까지 벽이 연결되고, 가랑이 사이에서 늘어진 줄은 어둠 속에 매달려 있다. 우측 스퍼로 올라섰다. 날은 벌써 훤히 밝았다. 경사는 심한데 눈이 깊다. 50번씩 걸음 수를 헤아리며 오르고 때로는 무릎으로 기기도 한다. 마지막 단단한 수직의 빙벽을 넘어 아침 11시40분, 서릉 위에 도달했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정상까지는 복잡한 설릉과 암탑으로 끝없이 연결되고 있다. 이 시간이면 정상에 서고 하산하고 있어야했다. 날씨가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지만 입을 악다물고 계속 밀어붙였다. 아무 생각도 없다. 오늘 내려가기는 다 틀렸다. 오르면서 쉽게 설동을 파고 비박할 장소도 찾는다.

오후 4시, 하늘이 맑아졌다. 능선 상의 길을 막고 있는 송곳바위 피너클 앞에 섰다. 망원경으로 볼 때는 남쪽으로 횡단해 돌아서서 암빙벽을 50m쯤 오르면 될 줄 알았는데, 가파른 설면 횡단은 판상 눈사태를 일으킬 위험이 너무 컸다. 30m 암벽을 드라이툴링으로 올랐다. 아이스바일의 피크에 감각을 집중시킨다. 올려다볼 때보다는 쉬웠다.

정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남벽은 새의 부리처럼 생겨 그 정점에 올라서기 힘들 것처럼 보이더니 북면은 설릉으로 되어 있다. 커니스의 정면을 올라섰다. 갑자기 서 있던 눈턱이 무너져 내렸다. “씨팔~” 이제 끝나는구나 하는 생각에 욕이 나왔다. 속수무책이다. 떨어지던 눈판이 밑의 턱에 걸렸고, 나는 틈에 끼인 몸을 빼내려고 버둥거렸다. ‘씨팔, 감사합니다.’

오후 6시10분 반대쪽의 동면으로 돌아 오버행 빙벽을 몇 동작 연결해 정상에 섰다. 마지막 노을이 지고 있었다. 카라코룸, 파미르, 힌두쿠시의 대산맥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상하게도 내려가야할 걱정도, 조급함도 들지 않는다. 바위턱에 슬링을 묶고 가져간 히말라얀 까마귀의 깃털을 꽂았다. 한 때 연인이었던 사람의 기억이 아련하다.

“형은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이 되고 싶어?”

“윤회의 고리를 끊고 싶어. 이렇게 대답할 줄 알았지. 까마귀.”

“좋은 것도 많은데 하필이면-.”

“만 미터 고도를 나는 히말라얀 까마귀는 그 산맥을 훨훨 넘어 다니지. 그리고 무거운 배낭 메고 다닐 필요도 없어 좋잖아, 너는?”

“남자.”

나는 왜냐고 더 이상 묻지 않았었다.

어둠으로 산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곳에 있었다. 하산을 시작했다. 하강을 해야하는 암벽지대에서 하켄을 박고 줄은 걸었지만 매달리지 않았다. 이 등반에서 흠결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환청에 시달리며 새벽 4시20분 텐트로 돌아왔고, 1시간을 자고 다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다음날 목동에게 남은 짐을 고툴티로 옮겨달라고 부탁하고, 수트 빙하에서 찬티르 계곡으로 연결되는 무명의 고개를 넘으려고 시도했다. 지친 체력으로는 어려워 밤 10시에 도로 고툴티로 내려갔다. 6일 동안 밤낮으로 걷고 오르고 한 후였다. 어머니라고 불렀던 세르 바즈 엄마는 걱정과 기다림에 지쳐 내가 도착했을 때는 병이 나 있었다.

이틀을 쉬고 6,105m봉 등반을 위해 다시 길을 나섰다. 세르 바즈 부인은 빵, 사과, 고추, 파 등 많은 식량을 챙겨 주었고, 이번에는 처남이 당나귀를 끌고 동행했다. 진입이 가능한 카르카무시 계곡(Karkamush Gah)과 하이즈 계곡(Haz Gah) 중 하이즈로 들어갔다. 빙하 말단이 시작되는 자작나무 숲속에 베이스캠프(3,400m)를 쳤다. 등반보다 접근로를 찾아내는 것이 이번 등반의 최대 관건이다. 등반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1차 정찰에서 하이즈 빙하를 올라가 봉우리 남쪽에서 흘러내리는 복잡하고 큰 얼음빙하 밑까지 가 보았다. 거기에서도 봉우리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2차 정찰은 봉우리 반대편, 하이즈 빙하와 디란 빙하(Diran Gl) 사이에 있는 고개(후에 ‘Kuti Gali’로 명명)에 올라 작은 암봉에서 봉우리 전체 모습을 관찰할 수 있었고, 복잡한 능선들 사이에서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좁은 협곡을 찾았다.

그곳은 1차 정찰지점에서 더 들어간 하이즈 빙하 원두의 북측이었다. 이 날 베이스캠프로 곧장 돌아오지 않고 디란 빙하로 내려가서 주변 탐사를 이어나갔다. 천둥번개가 치며 폭우가 쏟아지는 속에서 길을 잃었고, 계곡을 빠져 나오는 절벽에서 4시간을 등반하며 헤매다가 새벽 5시에 하이즈의 텐트로 돌아왔다.

침낭에 눕자 날이 훤하게 밝아온다. 잠이 든가 싶더니 밖이 시끄럽다. 부스스한 눈으로 문을 열자 꼬마 아이들이 봉지를 건네준다. 계란이다. 값을 후하게 쳐주고 매일 가지고 오면 살 것이며 텐트에 내가 없더라도 안에 두고 가라고 손짓발짓으로 의사를 전한다. 선금도 주었다. 그 후 아이들은 닭, 계란, 야채, 양젖를 가져다주었다.

드디어 날씨가 개었다. 3차 정찰은 빙하 끝까지 갔다. 그곳에서 숨이 멎을 듯한 멋진 산을 보았다. 이제 등반의 90%는 끝난 셈이다. 베이스캠프로 내려와 짐을 정리했다. 한 번에 끝내자. 정상에 오르고 못 오르고는 상관없다. 등반이 끝난 후 미련만 남지 않으면 된다.

다음 날 9월2일 해발 4,590m지점에 텐트를 치고 기다렸다. 밤에 등반하다보니 이제 달에 대해서도 도사가 다 됐다. 차오르는 달은 초저녁에 떴다가 이내 져버려 별 도움이 안 된다. 제발 하루만 맑아 주기를 희망한다. 등반 식량으로는 밀크티와 초코바를 준비했다. 커피는 속이 쓰려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장비도 더 줄였다.

프렌드 너트 하강기는 자유등반으로 오르내리는 데에 필요 없는 품목들이다. 단 1g이라도 줄이자. 하켄 3개, 스크류 1개, 자일, 카라비너 5개, 티블록 1개, 슬링을 챙겼다. 추락으로 부상을 입을 경우 탈출용으로 절대 필요한 장비다. 배낭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1.7kg이나 나가는 엄청난 무게의 카메라다. 작은 것을 준비하지 않은 벌이다.

추락 멈춘 뒤 바일에 입맞춤하고, 운명의 여신께 감사

컨디션이 좋고 기분도 최상이다. 출발 전 항상 그러하듯 스트레칭, 명상, 몸을 씻어 안정과 기운을 돋우었다. 밤 9시40분, 출발이다. 루트는 우측 복잡한 아이스폴을 올라 설원을 질러 좌측의 안전한 혼합지대를 치고 올라 남릉을 이용한다. 하산은 같은 등반루트로 내려오다가 상부 빙하 지대에서 오름길과 다른 좌측으로 내려오기로 결정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아이스폴 지대의 빙벽에 매달리고 틈새를 뛰어넘었다. 히든 크레바스가 예상되는 곳에서는 우회하거나 바닥에 엎드려 기었다. 이런 곳을 한낮에 혼자 간다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얼어붙은 설원을 기분 좋게 가로질러 벽이 시작되는 곳으로 접근했다. 속도도 빨랐고 몸도 가볍다. 프런트포인팅으로 암빙설 지대를 오른다. 발끝에서 손끝까지 감각은 살아나고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등반을 즐기고 있다.

새벽 3시10분, 능선에 도착, 계속되는 찬 공기 호흡으로 가슴 부위도 차가워졌다. 밀크티로 따뜻하게 하고 꾸준히 진행한다. 몇 시간만 참아 주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한다. 발라클라바를 쓰고 덧장갑을 끼었다.

이 정도 날씨로는 앞길을 막지 못한다. 추운 만큼 몸에 열을 내려고 속도를 더 빠르게, 그리고 동작을 더 격렬하게 움직인다. 중앙에 점같이 밝힌 바위를 제외하고는 휑하니 선 300m 빙벽에서는 정말 무서웠다. 단단한 얼음은 아이스바일을 타격할 때마다 깨져나가고 그 얼음덩이가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떨어진다.

삐죽삐죽 솟은 리지를 넘어 바람을 피하면서 좀 더 안전해 보이는 서면을 횡단하듯 오른다. 암벽의 약한 홀드를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잡는다. 손이 얼어간다. 바위 표면에 마치 성애가 끼듯 얼어붙는다. 폭풍설은 암릉에 스치면서 윙윙거린다. 암릉이 끝나고 북서쪽이 커니스가 심한 설릉이 정상까지 이어졌다. 9월3일 오전 6시10분 눈이 살짝 덮인 얼음의 정상에 섰다. 아무 표지물도 없다. 바일에 확보하고 있어야할 정도 눈보라가 밑에서 위로 올려친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맑아질 것 같지 않은 정상에서 1시간 반을 덜덜 떨었다. 기다리면서 하늘에 대고 세상 모든 신들의 이름을 들먹거리며 욕을 퍼부어댔다. 그리고 외쳤다.

“등반 끝나고 돌아가면 당신들 모두 믿을 테니, 제발 맑아라. 개어라.”

미끄러운 빙벽보다는 최대한 바위지대를 이용해 내려간다. 어려운 부분을 거의 다 내려왔을 때 바람은 여전하지만 구름이 조금 걷혔다. 나는 좋지 않은 시력으로 눈을 3개씩 가지고 다닌다. 촬영을 하려면 고글을 벗고 안경을 갈아 써야한다. 실수를 저질렀다. 반대편 절벽으로 떨어지는 안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제 마지막 매달린 빙하의 빙벽만 남았다. 히말라야 등반은 잘 오르는 자보다 잘 내려오는 자가 뛰어난 등반가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기술이 가파른 경사의 얼음을 클라이밍다운하지 않고 걸어서 빠르게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이 안 되면 줄을 이용해 하강을 계속해야한다. 그러나 이것 또한 위험하다. 한 걸음만 실패해도 끝장이다.

등반은 결국 걷는 것에서 출발해 걷는 것으로 끝난다. 최상위의 기술도 안정되고 리듬있게 잘 걷는 것이다. 좋게 말해 프렌치 테트닉인 ‘아이젠 꽝꽝’ 기술이다. 그러나 빙벽을 알고 한두 해가 지나 선배가 되면 우리는 창피스러워서인지 훈련하는 데 소홀히 한다. 프렌치 테크닉은 편집증 환자처럼 연습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체력은 많이 소모된 상태다. 사면을 아이젠 스테핑으로 내려간다. 마치 춤을 추듯이 허리로는 중심점을 이동하고 상체는 균형을 맞춘다. 예술적인 동작이다. 아이젠이 미끈하더니 순식간에 앞으로 처박혔다. 몸이 빙면에 닿자마자 휙 미끄러진다. ‘지익~’ 하는 소리가 계속이어졌다. 왼손은 바일의 헤드를, 이마는 샤프트를 죽어라고 누른다. 본능적으로 제동을 시킨 것이다.

안전한 평지로 나오면서 추락을 멈추게 한 바일에 입맞춤을 했다. 그리고 운명의 여신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다리를 놓아준 것에 감사했다.<계속>  

김창호 서울시립대OB. 쎄로또레 등산아카데미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핫키워드

#히말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