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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파키스탄 히말라야 처녀봉 등정기 (하)

월간산
  • 입력 2004.02.1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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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은 산과의 깊은 교감이다
탈레계곡의 혼브록 & 박마브락 초등기

중부 카라코룸의 등반기점인 스카르두(Skardu·2,340m)로 갔다. 스카르두는 대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룸산맥 사이를 갈라 흐르는 인더스 강변에 오아시스처럼 점 박힌 발티 사람들(Balti-pa)의 땅, 발티스탄(Baltisan)의 주도(主都)다. 대하(大河)가 만들어낸 모래사막으로 인해 해질 무렵 바자르 거리에 북적거리던 인파는 총총히 사라지고 대신 먼지바람이 쓸고 지나간다.

한때 번성을 구가했던 발티스탄의 막폰(Maqpon) 왕조는 지금의 인도 라다크(Ladakh)에서 서쪽으로는 치트랄(Chitral)까지 한반도 크기의 영토를 지배했던 대왕국이었다. 이슬람 시아파(Shia Sect)였던 이 왕조는 잠무(Jammu)의 힌두교도인 마하라자(Maha-Raja) 굴랍 싱(Gulab Singh)의 도그라(Dogra) 병사의 침략을 받아 카르포초(Kharpocho Fort) 성이 함락됨으로써 1840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마지막 라자(부족장)였던 왕(Gaylpo·티베트어), 아흐메드 샤흐(Ahmed Shah)의 후예들이 아직도 스카르두의 새로운 왕궁(Raja’s Palace)에 살고 있다. 그들을 만나러 갔다.

국적 없는 시민으로 남아 있는 발티스탄 주민들

막폰 폴로 경기장을 지나 중앙통로 남쪽의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큰 철대문이 나타난다. 길을 알려준 아이들은 돌려보내고 열린 쪽문으로 들어섰다. 잔디와 꽃이 가꾸어진 정원을 중심으로 우측에는 통나무와 흙으로 지은 3,4층 높이의 옛 건물이 자리하고, 정면에는 신 건물, 정원 끝에는 몇 백 년 자란 치나르(Chinar·플라타너스) 나무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구 건물 진흙 외벽은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고, 아름다운 대리석 계단은 흙으로 덮였다. 아이를 안고 한 남자가 나타나 반가움을 표하고는 여기저기로 안내해준다. 들려오던 요란한 음악소리는 곧 있을 폴로 경기 때를 위해 연습하는 소리란다.

이들은 폴로 경기 중에 흥을 돋우기 위해, 또 골이 들어갔을 때 곡을 연주한다. 그 곡은 각기 다르다. 누가 몇 골을 넣었는지 멀리서 들어도 알 수 있다. 이것은 경기장에 직접 관람하지 못하고 집안에 있어야만 했던 여인네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폴로 경기의 기원은 페르시아라고는 하지만, 스카르두, 길기트, 치트랄 지역 또한 예로부터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주민들은 자기네들이 원조라고 주장한다.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타지키스탄에는 염소 머리를 자른 몸통을 양쪽 팀이 말 타고 서로 빼앗는 부즈카시(Buzkasi)와 기원이 비슷하다.

전시실 같은 방안에 눈에 익은 작은 초상화가 보였다. 아흐메드 샤흐다. 서구인으로서 스카르두에 1835년 처음 방문해 4년간 여행했던 비느(Godfrey. T. Vigne)의 <카시미르, 라닥, 스카르두 여행기(Travels Kashmir, Ladak, Iskardo, 1844)>의 제2권에 똑같은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비느는 샤흐의 친구가 됐고, 초상화는 그가 그려준 것이다. 두 살배기 손은 인공 젖꼭지를 빨며 긴 화승총을 세워 든 할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며 무엇을 아는지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안내하던 남자가 왕가의 장남이 접견실로 초대했다는 말에 웬 행운인가 싶어 급히 들어가서 소파에 앉았다. 잠시 후 흰색 샬와르 카미즈(Shalwar Kameez)를 입은 자말 후세인(Prince Jamal Hussain Maqpon·32세)이 나왔다. 풍채가 크고 얼굴은 온화해 보인다.

서로 악수와 소개를 하고 앉았다. 그는 지금 석유 유통 사업가이면서 스카르두 행정부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다과와 함께 1시간 반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유럽과 티베트인종이 섞인 발티인 조상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또 무슬림으로 개종하기 전 티베트 불교(라마교)를 믿었던 종교적인 면들을 물어볼 때에는 답을 잘 해 주었고, 발티어와 한글과의 유사성에 관해 얘기할 때에는 아주 흥미로워한다.

아흐메드 샤흐로 화제를 돌리자 그는 따분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은 <Baltistan in History>라는 책을 읽어보라며 제목과 구입 장소를 내 노트에 적어준다.

궁을 나섰다. 사방이 바위절벽이며 석축을 쌓아 만든 천혜의 요새 카르포초 고성으로 올랐다. 오름길은 단 하나로 좁은 바윗길이다. 두터운 나무 성문 안의 성곽은 폐허로 남았고, 대신 바위 언덕 위에는 대공포가 인도쪽을 향하고 있다. 1947년 독립 당시 발티스탄은 카시미르에 속해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선다.

후에 분단으로 이어져 파키스탄 북부지구(Northern Areas)의 임시 행정구역으로 속하게 되고, 조세의 의무도, 투표의 권리도 가지지 못한 국적 없는 시민으로 남았다. 성 아래 인더스 강은 정전선(Control Line) 없이 흐르고 있다.

9월10일, 내일이면 추석이다. 길기트에서 스케줄에 없던 여행을 따라나선 세 명의 배낭여행자들이 카플루(Khaplu)로 함께 가서 명절을 보내자는 제안을 뒤로하고 카수믹 마을로 향하는 지프 화물칸에 몸을 실었다. 차는 인더스강을 건너 라다크에서 흘러내리는 샤이욕(Shyok) 강을 따른다. 풍경은 라다크와 닮아간다.

80km를 달려 도고니(Doghoni) 현수교를 건너 북쪽 탈레(Thalle) 계곡으로 접어든다. 가는 도중 마을에서 호박을 사려고 동승한 야르코르(Yarkhor)의 무라드(Murad)에게 “호박(Pumpkin) 2개가 필요하다”고 물었더니 자기네끼리 웃으며 자지러진다. 영문도 모르고 함께 키득거렸다. 그 발음이 이들 발티어로 여자의 성기를 뜻하는 발음과 관련됨을 뒤에 알았다.

40가구의 카수믹(Khasumik·약 3,280m·지도에는 Khusomik으로 표기) 마을에 비를 맞으며 밤중에 도착했다. 함께 타고온 이브라힘(Ibrahim) 집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날 방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밀을 수확한 밭에 천막을 쳤다. 손님이 온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혼자인 몸 뉘일 자리 하나 마련해주지 않는 주민들이 야속하다. 스카르두 지역의 여행은 언제나 이 모양이다.

무명봉 등반과 지도의 빈 부분 메우기 병행

이번의 등반목표는 소카라코룸(Lesser Karakorum) 산맥에 미등으로 남아있는 혼브록(Honbrok·6,459m)이다. 3년 전 후세(Hushe)쪽에서 탐사 도중 발견하게 된 이 봉은 눈과 바위의 덩어리가 아니라 완전한 대칭을 이루는 조각품 같았다. 알고 있는 후세쪽으로 진입하는 것도 좋지만, 미지의 계곡을 답사하면서 등반하는 편이 흥미를 더 끌어 탈레로 접어든 것이다.

이 산이 처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60년 8월6일부터 1주일 간 탈레 계곡에서 측량한 고드윈 오스틴(H. H. Godwin-Austin·1834-1923)은 이어 후세 지역으로까지 확장 측량한다. 이듬해 판마 빙하(Panmah GL.), 발토로 빙하(Baltoro GL.), 아란두(Arandu) 계곡을 측량한 자료를 기초로 영국왕립지리학회가 1864년에 발행한 지도 <Skech Map of the Glaciers of the Mustakh Range(Trans-Indus) and Valley of Skardo &c.>에 이 산이 나타난다. 이 지도에는 ‘Zoah(21,000ft)’라는 이름과 해발고도로 등재되어 있다.

후에 산명은 사라지고 표고만 21,190ft로 수정됐다. 그 후 ‘Karakoram by Jerzy Wala. Swiss Foundation for Alpine Research 1990’ 1:250,000 지도에 혼보로(Honboro·6,459m)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재됐다.

그러나 이 산명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이 봉우리는 모습이 조망되는 탈레 계곡 주민들에 의해 불리는 이름이 적절할 것 같아 노력을 기울여 찾았지만 토착명은 없었다.

혼보로는 후세쪽의 혼보로 계곡(Honboro Lungma)에서 차용한 듯하나, 이것은 혼(Hon=Wild animal·야생)과 브록(brok=High Pasture·고원 초지)이라는 두 말의 합성어로 ‘야생의 초원’으로 해석된다. 내가 채록한 이 명칭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남아시아 언어학과 문학을 전공한 존 목(John Mock) 박사의 최근 기록과도 합치한다.

가장 신뢰할 만한 지도에서조차 틀린 부분이 너무 많고, 몇 개의 마을 지명과 두 곳의 고개 이름이 붙어 있을 뿐 탈레 계곡의 봉우리, 지명, 계곡, 빙하, 고개들은 무명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등반과 함께 지도의 빈 부분을 메우는 작업도 병행하기로 한다. 아래에 나오는 명칭들은 대부분 필자가 채록해 붙인 것이다. 공식적으로 입산허가를 얻어 등반한 팀은 없으며, 6,000m 이하에서 트레킹 겸 등반한 팀이 두 팀 있었다.

산의 위치를 찾기 위해 카수믹 계곡(Khasumik Lungma)으로 제1차 정찰을 떠났다. 카수믹은 카(Kha=입 또는 입술), 수(Su=치아), 믹(Mik=눈)의 뜻으로 입과 눈을 즐겁게 할 정도로 풍요롭고 아름답다는 의미다. 계곡 남안에 브랑사(Brangsa·여름 방목지에 목동의 돌집이 있는 곳)가 1시간 거리로 샤카르(Shakar Brangsa·약 3,610m), 파라(Phara Brangsa·약 3,775m), 나중(Najung 또는 Nangmah Brangsa·약 3,920m)에 있다.

모레인 빙하 언덕을 이용해 4,520m까지 올라갔다. 혼브록은 동면이 설빙벽으로 된 모습과는 다르게 남면은 수직 암벽으로 되어 있다. 하루에 박마 계곡(Bakma Lungma)과 동명의 빙하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는 카수믹 고개(Khasumik La·4,835m)를 넘으려 했지만, 감기로 인한 심한 두통으로 중간에서 한 시간을 자고 내려왔다. 베이스캠프에서 냉수로 샤워할 때는 괜찮은데 시내 숙소에서 뜨거운 물로 목욕한 뒤에는 꼭 코감기가 들어 고생이다.

제2차 정찰은 탈레 브록(Thalle Brok)을 지나 시가르(Shigar)로 넘어가는 탈레 고개(Thalle La·4,572m)와 타세르파 고개(Tasserpa La·5,084m·지도의 Tusserpo La)쪽으로 정찰했다. 이 날 스카르두에서 사 가지고 온 양계 닭이 고소증을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

제3차 정찰은 달티르(Daltir) 마을로 내려가서 등반과 트레킹 가이드 경험이 많은 이샥(Issaq·45세)을 만나 좋은 정보를 얻었다. 어느 집 텃밭에 매달린 호박을 사는데, 계곡 안 세계가 전부인 아낙네들은 화폐 개념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지폐 중에 어느 것이 얼마짜리인지조차 모른다. 여성 문맹율이 90% 정도 된다. 또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 탈레 계곡 주민들은 유난히 사시(斜視)와 왜소증, 어린 시절의 병과 부상으로 팔다리가 부자연스러운 사람들이 허다하다. 현재 카수믹 마을에는 제법 큰 보건소 건물이 한창 공사중에 있다.

이브라힘과 그의 당나귀에 짐 두 개를 싣고 박마(Bakma·밀, 보리 등 곡식을 담는 목재로 만든 뒤주라는 뜻) 계곡으로 출발한다. 길가 밭에는 양모로 만든 나팅(Nhating) 전통 모자를 쓰고 초롱(Chorong·버드나무 가지로 역사각 뿔로 엮은 등에 매는 바구니)을 맨 주민들이 감자를 캐느라 분주하다.

빙하에서 쓸려온 삼각충적토는 물이 잘 빠지고, 또 일조량이 많아 감자 알도 크며 수확량도 많다. 고원지대의 서늘한 기온 덕분에 연작으로 인한 바이러스 감염으로 씨알이 작아지고 썩는 피해도 적은 모양이다. 주민들의 주 수입원이다. 베이스캠프용 식량으로 감자를 5kg 정도 얻었다.

캄바 브랑사(Khamba Brangsa)에서 야크 젖을 사려고 했으나 터무니없는 가격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수스툭(Shustuk Brangsa·약 3,645m), 양화(Yangwha Brangsa)에 머물던 목동들은 풀들이 말라 마을로 내려가고 비어 있다.

나무다리를 이용해 냇물을 건너서 언덕을 오른다. 사면의 버드나무 관목은 노랗게 물들어 있다. 성급히 몰아세우더니 꾀 많은 당나귀가 짐을 진 채로 바닥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발길질에다 회초리 세례를 가하지만 허사다. 결국 당나귀가 하나, 주인이 하나 나누어 메고 간다. 구름이 낮게 드리우고 비가 내리는 가운데 예정지에 못 미친 박마 빙하 말단(4,065m)에 텐트를 쳤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생각에 온몸 바짝 얼어붙어

카라코룸의 9월은 우리의 가을 같아서 맑은 날이 많은데 올해는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 이 비가 그치면 바로 겨울로 접어들어 서리와 눈으로 바뀔 것이다. 주민들이 서둘러 덜 여문 감자까지도 수확하는 이유가 이 때문인가 싶다.

빙하의 원류로 올라갔다. 저녁노을이 지는 혼브록의 황금빛 북서벽은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정상부가 끌 모양으로 길게 암설릉으로 형성되어 두 봉우리 중 어느 피너클이 더 높은지 눈으로 구분하기는 힘들다. 북동쪽이 주봉으로 보인다. 정상에서 빙하 바닥까지 수직에 가까운 북서벽이 섰고, 혼브록 북측에 높이를 정확히 알 수 없는 6,000m 정도의 암설봉(후에 박마브락) 사이에 안부가 있다.

등반은 산과의 깊은 교감이다. 시커먼 벽에 눈과 얼음이 붙은 벽은 자일을 사용하지 않고 오르기에 부담스러워 보인다. 마치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 같다. 경사가 덜하고 바위면에 얼음이 얇게 발린 홈통과 연결해 능선으로 올라서는 루트를 찾았다. 하지만 어디로 내려온단 말인가? 단감을 따먹으러 올랐다가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가 될 수는 없다.

동면의 후세로 넘어간다? 안 돼. 그곳은 크레바스와 아이스폴이 혼돈의 지대를 이루가 있다. 이쪽으로 들어온 이유 중에 하나가 아닌가! 오른 길로 하산은 불가능하다. 지금 내가 이 계곡에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메일을 보낸 지 한 달이 지나고 있다. 길기트를 떠날 때 집과 필석이 형에게 어디로 간다고 연락하지 못한 것이 몹시 후회된다.

단독등반에서 누구인가 베이스캠프에 머물며 무전기를 받아주는 상황과 혼자만의 완전한 격리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올해 등반의 중요한 룰이다. 마을로 내려가지 않고 홀로 남은 조(Dzo·숫야크와 암소 사이에 태어난 교잡종) 한 마리가 텐트 주위를 어슬렁거린다. 양배추 이파리로 유혹해 반나절 재미있게 놀았다.

하산 방법을 하나 찾아냈다. 혼브록 북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을 넘어 암벽을 100여m 내려선 다음, 설벽으로 된 쿨와르를 따르는 길이다. 늦은 오후 햇볕으로 발생하게 될 눈사태만 잘 피하면 될 것 같다. 마지막 아이폴 지대는 200여m 높이에 양쪽에 바위벽을 깎고 떨어지고 있어 몹시 복잡하고 위험스럽다. 아무튼 오른 루트로 내려오도록 하자. 눈이 시리도록 산을 쳐다보고 또 쳐다보며 생김새를 정확하게 외웠다.

9월17일, 베이스캠프 텐트를 옮겨 벽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해발 4,545m의 모레인 언덕에 쳤다. 밤 11시50분에 출발했다. 전 등반 때보다 밤 기온은 차갑다. 처음으로 얇은 우모복 상의를 입고 배낭의 짐도 늘었다. 내일 밤은 정상에서 내려와서 설동에서 자기로 한다. 침낭과 코펠, 가스통 한 개, 티타늄 스토브, 그리고 식량으로는 라면 1개, 치즈, 비스킷, 밀크티 1리터를 준비했다.

눈이 약간 흘러내린 홈통 초입에서 줄을 매달았다. 가자. 이번이 마지막 등반이 될 것 같다. 계획상의 파키스탄산악협회 회원들과의 등반은 어려울 것이다. 랜턴 불빛에 비친 홈통 안의 얼음이 번들거린다. 깨지기 쉬운 면은 암벽지대로 우회한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다. 3시간 정도를 쉬지 않고 올랐다. 마음은 편하지만 긴장은 여전하다. 소변보는 것도 잊었다. 급하다 싶어 바일에 확보줄을 걸고 장갑을 벗고 벨트 사이의 지퍼를 열고 또 여러 겹의 옷 사이를 헤집고 달라붙어 숨어버린 놈을 찾을 때쯤이면 이미 물은 흘러내린다. 내의가 축축하다. 계속해서 반복된다.

암질이 역층으로 되어 있어 아이젠 발톱이 자꾸 흘러내리고, 경사는 급해진다. 옆으로 오버행 암벽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다. 바위턱 밑에는 한 사람이 딱 누울 만한 이상적인 비박지가 종종 나타난다.

2m 너비의 얼음면에 아이스바일 피크를 살며시 찍고 수직에 붙었다. 두번째 동작에 아이젠 발톱이 물린 얼음이 깨졌다. 하체가 늘어지며 매달렸다. 다행히 바일 피크가 견디어 주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생각에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발판이 있는 턱에 내려섰다. 심장은 요동치고 입안은 바짝 말라 버스럭거린다.

설봉에 서자 광활한 파노라마에 생기 돋아

차를 마셨다. 한참을 쉬었는데도 추락 공포로 인해 경직된 몸과 마음은 안정되지 않는다. 담배를 피웠다. 하늘에는 별이 쏟아져 내리고 달빛이 벽을 비추고 있다. 저 아래 마을에서 쳐다보면 더 없이 아름다울 이 산이 지금 나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다시 배낭을 메고 우측의 2m 오버행 바위턱을 시도한다.

수직 틈새에 아이스바일을 끼우고 매달렸다. 턱 위가 보이지 않는다. 밑으로 늘어진 자일은 랜턴 불빛이 닿는 곳을 벗어나 어둠 속에 매달려 있다. 머리 속은 과감하게 동작을 취하라 소리치고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추락의 공포가 밀려 올라온다.

턱 위에 몽키행잉 자세로 올라서더라도 경사면에 틈새나 홀드가 없으면 아래로 미끄러져 나자빠질텐데-. 다시 내려왔다. 방법을 찾지 못하고 1시간을 시도하고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이제 줄을 이용해야 한다. 하켄을 박고 카라비너를 건다. 거기에 반으로 접은 줄을 통과시키고 벨트에 매듭한다. 그리고 10여m를 올라 안전한 자리에서 줄을 빼내면 다시 내려갈 필요가 없다. 바위틈새를 찾고 나이프하켄를 쳤지만 반밖에 들어가지 않는다. 공교롭게 역층 암질은 추락하는 체중을 지탱하지 못할 것이며, 행여 확보해 준다 해도 긴 거리의 추락은 하강용 6mm 코드슬링을 끊어버리고 말 것이다.

베르글라 빙벽으로 마주섰다. 그리고 아주 위험한 대여섯 동작을 머리에 그리고 손짓 발짓을 취해 가며 익혔다. 이번에도 성공하지 못하면 내려가야 한다. 이제 나 자신을 믿어야한다. 조심해서 피크를 박고 발을 옮기고 정해진 동작을 천천히 연결한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시간은 멈춘 듯하다. 드디어 위험지대를 벗어났다. “으아-” 괴성을 질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벽은 경사가 수그러들고 혼브록 북릉의 5,570m 능선 상에 올라섰다. 오전 10시40분이다. 긴장이 풀어져 비틀거린다. 차를 마시고 설면을 헤친다. 저 하늘 위로 솟은 정상의 설탑은 무너질 듯 매달려 있고, 그곳으로 연결되는 유일한 설릉을 한 번 쳐다보고는 바로 돌아섰다.

벽에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아 나아갈 수 있지만, 버섯형 설탑과 자연적으로도 무너지는 나이프리지를 확보 없이 가는 것은 뜬구름 위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이제 혼브록 등반은 끝났다. 하산해야 한다. 올라온 루트로는 절대 못 내려간다. 북쪽의 봉우리를 넘어 생각해 두었던 길만이 유일하다. 그 봉우리로 오르는 설사면은 햇빛에 녹아 무릎까지 빠진다. 오후 내내 허우적거려봤자 소용없다. 크러스트된 야간에는 두세 시간이면 족하다. 밤에 가자.

세락 밑에 설동을 팠다. 크레바스 틈새라 쉽게 혼자 누울 만한 공간을 만들었다. 옆으로는 눈블록을 쌓고, 위에는 비상용 은박천으로 덮어 스틱과 바일로 고정시켰다. 바닥에 눈을 채워 다졌는데도 계속 주저앉는다.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온다. 라면이 끊기도 전에 가스가 바닥나 불려서 먹고 침낭에 들어갔다. 누가 설동이 따뜻하다고 했는가? 한기가 몸을 파고들고 싸늘한 공기에 입김이 뿜어져 나온다. 침낭 안에서 끙끙 앓는다. 결국 밤에 길을 나서지 못했다.

9월19일 새벽 5시15분에 일어났다. 아침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마실 물도 떨어져 서둘러 짐을 꾸려 안부로 내려선 후 단단한 설사면을 이리저리 찾아 오르막을 힘겹게 나아간다.

서쪽 150km 멀리 검은 대지 위에 낭가파르밧(Nanga Parbat·8.125m)이 작게 솟아있다. 태양은 뜨겁게 비추고 설면은 녹아 푹푹 빠진다. 정말 죽을 맛이다. 가끔 눈을 입에 넣어 삼킨다. 물기가 마르면 갈증이 더 심해질 줄 알면서도 어쩔 도리가 없다.

북쪽으로 마셔브룸(Masherbrum·7,806m)이 나타나고, 그 우측으로 검은 색 피라미드 K2(8,611m)도 보인다. 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어 미리 촬영해 두려고 벼랑쪽으로 나아간다. 사면에 배낭을 내려놓는 순간 고무줄에 끼어있던 매트리스가 빠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허둥대다가 장갑 한 짝도 잃었다.

걸음 수를 헤아렸다. 50, 40, 20보로 걷는 수는 줄어들고 정상은 더 멀어지는 것 같다. 무릎으로 기고 눈이 깊지 않은 바위지대를 골라 계속해서 밀고 나간다. 12시30분 마지막 설봉의 정상 박마브락(Bakma Brak·약 6,150m, 브락은 바위 봉우리라는 뜻)에 섰다. 기압측정 고도시계는 약 6,150m를 나타낸다.

사방으로 거봉들이 푸른 하늘에 머리를 대고 있다. 그 광활한 파노라마에 다시 생기가 돋았다. 서쪽으로는 낭가, 북서쪽 멀리 쿠냥츠히시(Khunyang Chhish·7,852m), 바인타브락(Bainta Brakk·7,285m), 북동쪽으로 K1(마셔브룸), K2, 브로드피크(Broad Peak·8,051m), K3(GasherbrumⅣ·7,925m), K4(GasherbrumⅡ·8,035m), K5(GasherbrumⅠ·8,068m)가 펼쳐진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정상은 1856년 처음으로 인더스 강 저편의 산들이 발견되고, 여기에 카라코룸의 이니셜 K를 따서 일련번호를 붙인 인도 스리나가르의 삼각측량점 하라묵(Haramukh·4,876m)과 정확히 같은 방향에 있다. 동쪽으로 시아첸 빙하(Siachen Gl.)의 겐트(Ghent·남봉 7,401m, 북봉 7,342m) 쌍봉과 K6(7,281m)의 오버행 북벽도 보였다. 카라코룸산맥의 3분의 1을 바라본 것이다. 생각했던 혼브록 정상은 오르지 못했지만, 날씨 혜택으로 박마브락 정상에서 더 많은 기쁨을 누렸다.

정상 높이와 비슷한 5m 거리의 북쪽 암각에 슬링을 묶고 돌탑을 쌓았다. 원래 예정했던 알링 빙하(Aling Gl.)와 경계선 상의 피너클로 하산은 불가능했고, 올라온 길을 50m 되짚어 내려와 북서벽을 내려다보았다. 첫 부분은 평균경사가 55도나 되는 암설벽이다.

엉덩이를 허공으로 하고 벽을 마주하고 섰다. 빙하를 내려서는 1,200m 표고차를 낮추는 동안 한 번도 걷지 못하고 이 자세로 클라이밍다운했다. 바위턱의 고드름이 경사가 심함을 알려준다. 발판이 무너지는 위험한 순간에도 마치 나는 누군가가 뒤에서 확보해주고 있다고 믿었다. 뒤에 끌려오던 줄이 암각에 걸렸을 때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뒤에 오면서 뭐 하는 거야. 줄 처리 좀 잘해.”

따라오는 사람은 없다.

“요번에는 네가 갔다와!”

옆 사람에게 얘기했다. 실제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암벽지대는 끝났고, 쿨와르로 들어갔다. 아이젠에 눈이 달라붙어 짜증이 난다. 눈을 털어가며 바일을 깊숙이 박으며 뒷걸음질친다. 부챗살 모양의 설사면이 모여드는 홈통으로 들어갔다. 오후 4시가 넘어가고 북서면에 햇빛이 비추고 있다. 눈사태가 날 시간이다. 하산을 멈추고 사면을 횡단해 바위턱 밑에 바일피크를 얼음에 단단이 꽂아 확보줄을 걸고 기다렸다.

바위면으로 흐르는 흙탕물을 입술을 대고 빨고 있을 때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눈사태가 미친 듯이 쿨와르로 모여 쏟아져 내린다. 얼른 바일을 이마로 누르고 얼굴을 감쌌다.

다행히 약간의 눈이 어깨를 치고 갔지만 괜찮았다. 기다린 지 단 10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쓸려간 홈통은 스노볼도 생기지 않아 내려가기 좋았다. 모든 감각을 위쪽으로 주시하고 호흡을 가다듬을 겨를도 없이 속도를 내어 뒷걸음친다. 태양빛이 사면을 거슬러 올라 정상 위쪽으로 사라졌다. 기온이 바뀌는 시간이다. 다시 눈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시간, 20여 분을 숨어있었다.

컴컴해진 후에야 두 발로 편안히 걸을 수 있는 상부 빙하에 내려섰다. 살아난 느낌이다. 배낭을 내리고 랜턴을 켰다. 이게 웬일인가! 떨어진 매트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옆에 떡 하니 있다. 한 마디 해 주었다.

“너처럼 하산 빨리 하는 놈은 처음 봤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미치도록 격렬한 유혹’

이제 편안히 쉬게 해줄 마을로 나가는 마지막 관문이 남았다. 무지막지한 200m 정도의 아 이폴지대다. 빙하 내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산사면의 밑발치를 따라 횡단한다. 이 미로를 빠져나가는데 아발라코프 시스템, 얼음턱, 클라이밍다운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3시간만에 잡석 모레인 빙하에 도착했다. 자일을 사리고 아이젠을 벗었다.

이제 올해 등반여행은 끝났다. 스웨덴 출신 대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은 말했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은 미치도록 격렬한 유혹이다. 그런데 이 여행이 불가능하다고 어디에 씌어 있단 말인가?’

목표했던 산을 찾고 올랐다. 내가 정해 놓은 방식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한 한 가지는 있다. 베이스캠프까지 직접 짐을 옮기겠다는 계획은 실행하지 못했다. 한 시즌에 한 봉우리를 오른다면 이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등반한 네 봉우리는 쉽지도,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다. 숫자로 난이도 등급을 매기고 싶지 않다. 다만 내가 20대였다면 이런 등반 여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등반한 네 봉우리에 내가 남겨 놓은 것은 하켄 1개와 슬링 몇 가닥, 그리고 올랐던 내 발자국뿐이다. 정상에 슬링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후에 어떤 등반가가 같은 봉우리를 오르더라도 그 산은 언제나 흔적 없는 미지일 텐데-. 이것 또한 욕심이었다.

오후 10시30분 텐트에 돌아왔다.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으며, 침낭 속에 들어도 잠이 오지 않는다. 내일은 어디로 갈까? 아무도 넘지 못한 저 고개를 넘어 볼까? 나는 다시 꿈을 꾸고 있었다.<연재 끝>   

■ 혼브록은 2000년 일본팀이 초등

등반과 탐사를 마치고 스카르두에 돌아온 9월27일, K2모텔에서 매년 등반대들이 남기고 간 엽서가 정리된 보드판에서 작은 메모지 한 장을 발견했다. 2000년 7월16일 일본의 모리 하츠요시 일행이 혼브록(아마 북동봉)을 등정했다는 기록이 붙어 있었다(모리 외에 사토시 하츠가이, 스즈키 쿠미코, 가즈노리 다카하시).

2003년까지 등산전문지에 공식적인 등정기록이 없어 미등봉으로 알았다. 일본대가 정식 입산 신청서를 받아 등정했다고 생각되며 행여 불법등반이었을지언정 그들의 등정을 믿는다.

이들의 스케치 지도에 후세의 알링 빙하로 진입했다고 그려져 있는데, 이 빙하로 등반하기에는 불가하며 혼브록 계곡으로 오른 것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에도 일본팀의 등정기는 아직 찾지 못했다. 월간山 2002년 12월호 혼브록 사진에 미등봉이라는 틀린 자료가 나간 데 대해 사과드린다.

김창호 서울시립대OB. 쎄로또레 등산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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