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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지리산 르포①

월간산
  • 입력 2005.01.25 11:51
  • 수정 2018.12.1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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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걸불 같은 그리움의 산 지리산부터
천왕봉~노고단~정령치~고기리 르포

첩첩 유장한 지리산 연봉. 그 깊은 산 주름으로 하여 지리산은 한국인 모두에게 그리움의 산이 되는 건 아닐지.
첩첩 유장한 지리산 연봉. 그 깊은 산 주름으로 하여 지리산은 한국인 모두에게 그리움의 산이 되는 건 아닐지.

잉걸불 같은 그리움의 산. 그렇다. 지리산은 그런 산이다. 그 산 그림자, 시정(市井)의 팍팍한 두레박질에 지친 영혼엔 영원한 안식의 요람이다.

만약 서울 종로 네거리(압구정 로데오 거리도 무방하다)에서 ‘나, 지리산 간다―!’ 하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대부분 ‘얼마나 좋았으면, 아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선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까. 이미 마음은 중산리 어름에 닿아 있는 모습으로. 물론 ‘미친 놈!’이라는 반응도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더 진한 선망의 표현이 아닐까(그렇게 우기고 싶다).

산에 묻어둔 그리움을 꺼내 먹는 즐거움은 늘 과장된다. 무해한 과장이다. 그래서 제어가 어렵다. 눈썰매 타는 재미에 빠진 아이에게 꼭대기로 다시 걸어 오르는 수고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산을 오르는 고통은 휘발성이 강하다. 오직 희열만이 사금(砂金)처럼 남는다. 하여, 우리(종주 취재팀, 그리고 독자)의 백두대간 종주도 ‘행복한 산행(山幸)’이어야 마땅하다. 

‘속도’에 즐거움을 저당잡히지 말자

12월7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터미널 특유의 부산스러움과 익명의 분위기가 싫지 않다. 느긋해진다. 자가용 승용차의 편리를 버리고 얻은 선물이다. 일탈의 불온한 자유보다 얼마나 건강한가. ‘산수간(山水間)을 노니는 즐거움’을 저잣거리에서 미리 맛본다.

같은 행색으로 만난 취재팀의 면면은 내 행복감에 구체성을 불어 넣는다. 좌장인 구인모 선생은 내게 산 보는 눈을 뜨게 해준 분이다. 그 분의 얼굴 주름만 봐도 나는 심산유곡을 느낀다. 사진가 손재식 선생은 나와 오랜 시간 작업을 해 왔다. 그와는 눈빛만으로도 느낌을 나눌 수 있다. 이들 두 분들과는 이미 백두대간을 종주한 바 있다. 그리고 또 심산씨(시나리오 작가)는 산악문학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지니고 있고, 김석우씨(영화감독)는 산악영화를 준비하고 있어 이들의 안목도 종주기의 표정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천왕봉 오름길의 입석. 벽공 위로 천왕봉을 들어올리고 있다.
천왕봉 오름길의 입석. 벽공 위로 천왕봉을 들어올리고 있다.
지난 밤 늦도록 지도를 펼치고 마음 산행을 한 탓일까.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저기 덕유산 좀 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손재식 선생이다. 역시 사진가답다. 정수리에 살짝 눈을 올려놓은 덕유산이 초로의 신사 같다. 나른한 관산(觀山)의 즐거움 속에서 진주에 닿는다.

일삼아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중산리 가는 버스를 탄다. 어차피 느긋한 산행을 즐기고자 한 바에는 어프로치 또한 고전적(?)인 방식이 좋지 않을까 해서다. 겨울에다 평일이어선지 등산복을 입은 사람은 우리들뿐이다. 산마을 사람들에 묻혀 가는 기분이 마치 고향 집으로 가는 느낌이다. 빛발이 사위어가면서 산 아래, 모든 것들이 산으로 삼투되기 시작한다. 앞으로 4일 동안 우리는 지리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것이다.

중산리에서 월간山 일출맞이 산행 취재팀을 만났다. 평소에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반가움의 농도는 묽어지지 않는다. 늦은 저녁을 먹고 로타리산장(공식 명칭은 대피소지만 이 글에서는 산장으로 쓴다. 귀에 닿는 맛을 버리기 아까워서)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기로 했다.
헤드램프를 징검다리 삼아 산으로 스며든다. 사그락 사그락, 살짝 얼어붙은 산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청명하다. 하늘도 청명하다. 잘 여문 별빛이 쏟아진다.

“나뭇가지에 별이 조롱조롱 열렸네.”
일출 취재에 동행한 진주의 산악인 유동훈씨의 말이다. 산사람의 ‘몸’이 쓴 시다. 머리로는 이런 표현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속도’에 즐거움을 저당 잡힌 산행으로는 어림도 없다. ‘보는 것은 하는 것만 못하고, 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했다. 공자의 말이다.
로타리산장에서 첫날 밤, 오줌 누는 것을 핑계로 나는 몇 번이나 마당으로 나와 밤하늘을 우러러야 했다.

12월8일, 종주 취재팀에 두 명의 진주 산꾼이 합류했다. 이미 우리와 하룻밤을 지낸 김종현씨(흥한건설 진주~완사 간 도로공사 현장소장) 외에 새벽 버스 타고 조점선(진주 교보생명 직원), 정인숙씨(진서산악회)가 올라온 것이다. 남한 최고(最高)의 산을 동네 뒷산(?)으로 삼은 이들은 이미 백두대간 종주도 한 바 있다고 한다. 지리산을 젖샘으로 삼은 남강 물을 먹고 자란 그들은 확실한 ‘메이드 인 지리산’이다. 그들은 지리산을 잘 아는 것을 넘어 지리산과 친했다. 지리산과 육친적으로 만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산행의 한 모범을 본다.

반야봉 두 봉우리 곡선의 미학이 가르치는 바

로타리산장에서 법계사로 키를 높이는 순간 입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법계사가 빨치산의 아지트였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불꽃사단’, 지리산 하봉을 근거로 한 경남도당의 지휘본부가 법계사였다는 얘기다. 이 기막힌 모순이라니. 한국 근대사의 앙가슴이다.

더 이상 인간사의 비극이 산에 투사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산허리를 파헤치는 것보다 더 나쁜 형태의 자연에 대한 테러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이라는 말은 결코 암호 같은 선가의 화두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라는 것이다. 자연의 본성을 따르라는 것이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발걸음에 군더더기가 묻지 않는 암릉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숲을 헤치면 개선문이다. 벼랑 위에 선 입석과 산기슭 사이를 지난다고 붙인 이름인 것 같은데, 그래도 개선문이라는 이름은 좀 그렇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동문(東門)격인 이곳은, 다른 이름인 ‘개천문(開天門)’이 훨씬 잘 어울린다. 장터목에서 오르는 서문(西門)격인 ‘통천문(通天門)’과 짝하면 더욱 그렇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天柱)인 천왕봉으로 오르는, 하늘로 열린 길과 하늘로 통하는 길. 이래야 대구(對句)가 되지 않겠는가. 어쨌든 나는 개선문을 개천문으로 부르려 한다.

백두대간의 남쪽 들머리인 천왕봉에 선 취재팀. (왼쪽부터) 구인모(취재팀), 김종현(진주 진서산악회), 정인숙(진서산악회), 조점선(진주 교보생명 직원), 윤제학(취재팀, 필자), 김석우(취재팀).
백두대간의 남쪽 들머리인 천왕봉에 선 취재팀. (왼쪽부터) 구인모(취재팀), 김종현(진주 진서산악회), 정인숙(진서산악회), 조점선(진주 교보생명 직원), 윤제학(취재팀, 필자), 김석우(취재팀).
개천문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배낭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곳에 서게 된다. 반야봉이 코앞으로 다가서는 듯하고, 그 왼쪽으로 노고단이 아슴아슴 희푸르다. 반야봉. 지리산의 단전 같은 곳이다. 원만한 두 봉우리가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는 경계 아닌 경계인 그 사이에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반야의 뜻을 본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prajna의 음역으로, 궁극의 지혜,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무너진 자리, 혹은 원융과 불이(不二)의 정신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근본적으로 사물을 피차(彼此), 성속(聖俗), 이사(理事) 따위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끊임없이 둘 사이의 줄타기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그 줄타기를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건 없다. 그것이 바로 ‘업(業?카르마)닦음’이자 ‘업풀이’다. 살아내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평생 이쪽저쪽 살피다 탐진치(貪嗔癡)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반야봉의 두 봉우리 사이, 그 곡선의 미학이 가르치는 바. 차이의 인정, 차별의 타기(唾棄)다. 다시 봐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조망의 즐거움을 접고 다시 길을 줄이자 천왕샘. 12월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인데도 천왕샘 위 벼랑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다.
“저 고드름 따 먹어도 50만원 벌금 물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농담하길 좋아하는 손 선생의 말이다. 글쎄, 벌금 물 일까지는 아니겠지만 뒤에 올 사람을 위해 그냥 두는 것이 옳지 싶다.
흔히 한국 사람은 사철 선명한 계절의 순환을 복으로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울 지리산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느낀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와 지리산의 높이 덕분이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천왕봉(1,915m). 드디어 백두대간의 남쪽 관문에 선다. 옛사람은 이 봉우리를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 하기도 했고, 사찰의 수호 신장인 사천왕에 빗대기도 했다. 전자에 부여된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는 쉽게 백두대간의 실체를 그려볼 수 있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하나씩 이어 보면 된다. 지리산(천왕봉), 덕유산, 황학산, 속리산, 희양산, 소백산, 태백산, 두타산,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 그리고 백두산.

영신봉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취재팀.
영신봉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취재팀.
 우리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하늘 아래에 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백두대간이 가지 친 정간과 정맥이 하늘의 비를 머금었다 풀어내며 우리를 살린다. 문명의 발달이 극에 달해 달나라로 출퇴근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인간의 삶은 천지의 조화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선인은 또 다른 비유로 우리 국토의 실체를 일러 주었다. 이른바 수근목간(水根木幹), 우리 땅은 뿌리를 물(백두산 천지)에 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이다. <고려사>에 도선 스님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

통천문을 향해 천왕봉을 내려선다. 말뜻에 따르자면 속계로 내려서는 셈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속계다.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지리산 최대의 칠선계곡과 왼쪽으로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지는 협곡을 끼고 있다.
통천문을 지나 몇 개의 바위 봉우리를 지나면 평원 같은 고사목 지대다. 옛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던 곳이다. 오른쪽으로 등산로에서 비껴 둥싯 제석봉(1,808m)이 솟아있다.

흔히 고사목 지대라고 부르는 제석단 일대는 자연적인 고사목 지대가 아니다. 본디 그곳은 구상나무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던 곳으로, 현재의 모습은 6?25전쟁 후 도벌꾼들이 마구 잘라먹다가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해지자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구인모 선생은 1962년에 이곳에 왔을 때 장터목에 톱밥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봤다고 귀띔을 한다. 제재소까지 차려 놓고 도벌을 했다는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장터목산장에 도착했으나 금방 갠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의 따뜻한 환대와 먼저 온 일출 취재팀이 지어놓은 따뜻한 밥이 있기 때문이다. 1653m 산마루에서의 포식=단순한 기쁨=장기 도보 산행의 백미. 너무 단순하지 않냐고? 이건 약과다. 불혹도 지천명도 넘긴 사람들이 맛있게 초코파이를 먹는 장면에서 단순은 완성된다.

옛날, 천왕봉 남쪽의 시천 사람들과 북쪽의 마천 사람들이 매년 봄가을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목. 그 공평한 나눔의 현장을 상상하면서 연하봉(1,730m)을 향한다. 무시로 연기처럼 이내(煙霞)가 흘러서 붙여진 이름이겠다.
연하선경을 지나자 홀연히, 무리지은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촛대봉이다. 휴식년제로 통제 구간인 곳이지만 관리공단의 허락을 얻어 조심스럽게 암릉을 밟아나가자 세석평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석의 평전다움을 이곳에서 비로소 느낀다.

영신봉에서 일몰을 본다. 또 하루가 간다. 세석산장의 밤. 공단 직원들은 취재팀을 위해 세석의 생태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어지는 우리들의 생태 토론. 자생 반달곰이 있느냐 없느냐? 지리산 생태에 밝은 유동훈씨는 10마리 생존 가능성을 추정한다. 생태 사진 작업을 한 바 있는 손 선생의 슬픈 결론은 최소 50개체 이하면 멸종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인공 복원의 상징, 반달이와 장군이의 운명은? 생태계의 후안무치한 포식자, 인간. 그 모진 이름이 왜 이리 부끄러운가. 

만복대-그 이름만으로도 마음 속에 억새가 일렁인다

폐허가 된 외국인 휴양촌 교회건물. 찰나에 불과한 인간사의 속절없음을 본다. 영원은 오직 변화하는 자연으로 존재한다.
폐허가 된 외국인 휴양촌 교회건물. 찰나에 불과한 인간사의 속절없음을 본다. 영원은 오직 변화하는 자연으로 존재한다.
 12월9일. 식생복원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세석평전의 모습을 위안 삼으며 또 길을 나선다. 서리 앉은 산기슭에 별처럼 햇살이 돋아나고 있다.
벽소령을 지나 연하천까지 편안한 걸음이다. 사방 걸림 없는 조망, 눈 아래로 첩첩이 물결치는 산줄기. 걸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우리 산하의 진경. 지리산 100리 종주(실측거리는 25.5km, 바로 이 실측거리의 만만함 때문에 낭패를 겪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인형 세석분소장의 말을 전한다. 숫자의 우상, 준비 없는 산행의 부비트랩이다)의 즐거움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연하천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명선봉을 오른다. 명선봉(1,586m) 앞으로 토끼봉(1,534m)과 삼도봉이 우뚝하다. 예전엔 삼도봉은 토끼봉과 나란히 섰다 하여 날라리봉으로 불리었으나 경남, 전남, 전북 삼도의 경계가 합쳐진 지점이라는 이유로 삼도봉으로 개명되었다. 지역감정의 완곡어법으로 들려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것이 취재팀 대부분의 반응이다.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는 좌우로 수림이 바다처럼 펼쳐지는 화개재. 왼쪽 계곡을 따라 흐르면 칠불사와 쌍계사를 지나 화개장터에 닿는다. 그래서 고개 이름도 화개재다.

삼도봉을 지나 오른쪽으로 반야봉의 옆구리에 기대어 임걸령으로 내려선다. 옛날, 임걸이라는 도적 두목이 지리산 일대를 쥐락펴락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바로 여기서 그 옛날 임걸에게 치도곤을 당한 신세가 되고 만다. 조금씩 새큰거리던 왼쪽 무릎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파온다. 글품 파느라 노트북만 끼고 산 벌이다. 기꺼이 받기로 했다. 씩씩하기만 한 진주의 두 ‘줌마 파워’에 경의를 표하면서.

지리산 주능선 중 가장 편하다는 삼도봉에서 노고단(1,507m)까지의 그 길을 나는 가장 고통스럽게 걸었다. 느린 걸음 탓에 깜깜한 길을 걸으며,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위안 삼았다. 행복한 산행의 필수 조건이 체력임을 절감한다. 머리에 우선하는 몸의 정직. 새삼 되새기는 산의 가르침이다.

12월10일. 노고단산장에서의 따듯한 하룻밤은 보너스까지 준비되어 있다. 아침밥을 마치기 바쁘게 김승희 과장이 촬영한 야생 삵을 본다. 2시간 동안 문수대 화장실에 숨어 기다리다 4마리 야생 삵을 관찰하고, 그 중 한 마리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 대목에서 김 과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산사람의 에너지와 직업적 긍지가 듬뿍 담긴 모습이다. 지리산의 야성이 회복될 것이라는 가냘픈 희망의 근거를 본다.

종석대(1,356m)에 올라 게으르게 사위를 살핀다. 노고단 천왕봉, 만복대는 물론 멀리 무등산까지 구름 위로 떠다닌다. 성삼재에 내려서서 배낭을 매만진 다음 호화로운(?) 오찬을 즐긴 후 만복대를 향한다.
만복대(1,433m). 입속에서 혓바닥만 굴려도 마음 속에 억새가 일렁이는 곳이다. 순한 능선으로, 두어 시간이면 족하지만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작은고리봉(1,248m)과 같은 덩치 큰 봉우리들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공룡릉이 육식공룡의 잔등이라면 만복대 능선은 초식공룡의 그것이다.

세석 가는 길에서 바라본 반야봉(화면 왼쪽 높은 봉우리). 화면 위 오른 쪽의 아스라한 봉우리가 노고단이다.
세석 가는 길에서 바라본 반야봉(화면 왼쪽 높은 봉우리). 화면 위 오른 쪽의 아스라한 봉우리가 노고단이다.
 산과 산 사이에, 우리가 가야 할 또 다른 길이 있다

아픈 다리를 끌다시피 만복대 정상 아래에 이르자 반가운 얼굴이 마중을 나온다. 함께 출발하지 못한 심산씨가 가족과 함께 만복대에 막영 준비를 해 놓고 패잔병 같은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내 배낭이 그의 등에 눕는다. 
우모복까지 꺼내 입고 만복대에서 밤을 맞는다. 매운 바람이 눈물샘을 들쑤신다. 그런데도 고개는 자꾸만 하늘로 젖혀진다. 별은 또 왜 그리 빛나는지. 찬 바람에 부르르 몸을 터는 큰 별의 등쌀에 작은 별들은 빛 부스러기처럼 종적 없이 반짝인다.

12월11일. 종주 첫 산행의 마지막 날이다. 산과 함께 깨어난다. 차오르는 빛과 스며드는 어둠 사이에 선다. 우리는 저마다 만복대의 기슭 한 자락씩 차지하고 해를 안는다. 날마다 맞이하는 똑 같은 해인데 왜 이리 각별한가. 자기최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일까? 하늘과 땅의 순일한 결합, 그 성스런 만남에 제의적으로 동참하는 까닭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섬진강 긴 물줄기를 담은 지리산의 가슴을 본다. 노고단에서 광양 백운산 쪽을 바라본 모습.
섬진강 긴 물줄기를 담은 지리산의 가슴을 본다. 노고단에서 광양 백운산 쪽을 바라본 모습.
 음식 쓰레기 처리에 가까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정령치로 내려선다. 반야봉 가지능선 위 잎 떨군 나뭇가지들이 강아지 솜털 같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찰랑댄다.
정령치까지는 경쾌한 내리막. 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어슬렁거리듯 고리봉(1,304m)을 오른다. 주능선을 벗어난 샛길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보물 제1123호)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인다. 마실 나서듯 그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속도 경기하듯 해치우는 대간 종주자에겐 쓸데없는 걸음이다. 12구에 달하는 마애불이 숨은 그림처럼 돋을새김 돼 있다. 고려 양식으로 가장 큰 불상 옆에는 명월지불(明月之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로자나, 즉 빛의 부처라는 말이겠다. 신격화 된 빛의 초상에 합장의 예를 올린다.

고리봉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고기리까지는 급전직하. 구르듯 미끄러져 아스팔트 위에 뒹구는 다른 시간을 만난다. 산과 산 사이에, 우리가 가야 할 또 다른 길이 있다.

/글 윤제학·사진 손재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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