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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 지리산 풍수⑥

월간산
  • 입력 2005.01.25 13:53
  • 수정 2018.12.17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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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은 천하의 대명당이 산재한 곳
고종 때는 지리산에서 일본으로 간 맥 끊으려 시도하기도

중국의 곤륜산(崑崙山)에서 시작한 산줄기 중 하나가 동쪽으로 뻗어와 백두산이 되었다. 여기에서 곤륜산은 중국전설 속에 나오는 산으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중국 티벳고원 부근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산이다(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월간山 2004년 3월호~6월호에 연재한 박용수의 ‘곤륜산을 다시 생각한다’ 참고).

청학동의 산형을 나타낸 수많은 청학동도 중 하나.
청학동의 산형을 나타낸 수많은 청학동도 중 하나.
조선시대 중기의 지리학자인 이중환(靑華山人 李重煥·1690-1756) 선생이 지은 <택리지(擇里志)>의 팔도총론(八道總論) 첫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곤륜산(崑崙山)의 한 산줄기가 대사막(大沙漠·고비사막을 지칭) 남쪽을 지나 동쪽에 이르러 의무려산(醫巫閭山·중국 요령성에 있는 산)이 되었고, 여기에서 크게 끊어져 요동(遼東)평야가 된다. 평야를 지나서 다시 일어나 백두산이 되는데,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는 불함산(不咸山)이 이것이다.
산의 정기가 북쪽으로 천 리를 뻗고, 두 강을 사이에 끼고 남쪽으로 향한 것이 영고탑(寧固塔?중국 길림성에 있는 지명)이 되었으며, 뒤쪽으로 높게 뻗은 일맥이 조선 산맥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바다 건너 한라산, 오키나와까지 맥 이어져

우리나라 산맥체계인 백두대간을 거론하는데 필자나 이중환이 중국의 곤륜산을 거론하는 이유는 산줄기를 따라 근원을 찾기 위함이지, 과거의 모화사상 때문이 아니다. 중국 역대 왕조의 국경개념으로 보면 곤륜산이나 백두산은 만리장성 밖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지리학에서는 산맥이란 말을 익히 사용하지만, 전통풍수지리에서는 간룡(幹龍·큰 산줄기)이란 말을 사용해왔다.

아래 그림은 풍수지리학의 백과사전격인 <인자수지(人子須知)>(중국 송의 徐善繼 형제가 지은 풍수서적)에 나오는 ‘중국삼대간룡총람지도(中國三大幹龍總覽之圖)’다. 이 지도를 보면 앞서 거론한 곤륜산의 그림과 산이름이 명기되어 있다. 또한 제목 중의 간룡이란 말이 있듯이 풍수지리학에서는 이미 ‘간룡’이란 용어를 오래 전부터 사용하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산이란 말 대신에 ‘용(龍)’이란 특별한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가 있다. 산이 마치 살아있는 용처럼 산줄기가 상하좌우로 기복을 하고 굴곡을 하면서 천변만화하여야 좋다는 뜻에서 단순히 정적인 뜻을 가진 산이란 말 대신에 그렇게 부른다.
또한 맥의 의미는 용과 약간 다른 점이 있다. 용이란 실제로 눈으로 보이는 산세를 뜻하는 반면에 맥은 눈에 보이지 않고 땅속에서 움직이기 기세(氣勢)의 의미를 두고 있다. 따라서 풍수지리에서는 용 또는 맥이란 용어와 함께 용맥(龍脈)이라는 용어를 곧잘 사용한다.

우리나라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설악산, 태백산,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에서 일단 끝이 난다. 지리산에서 더 작은 단위로는 호남정맥으로 이어져 있는데, <택리지>에 의하면 월출산(전남 영암)에 이어 해남의 산으로 이어지며 섬을 따라 바다 건너 제주도 한라산에 이어지고, 유구국(琉球國?현 일본의 오키나와)까지 이어진다고 하였다.

한국의 백두대간이 멈추는 지리산은 천하의 대명당이 산재하고 있다. <택리지>를 보면 ‘고어왈천하명산승점다(古語曰天下名山僧占多·천하의 명산 중에 중이 많이 차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역시 지리산에도 유명한 사찰이 자리를 잡고 있다. 지리산 산자락에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사(전북 남원), 화엄사(전남 구례), 연곡사(구례), 쌍계사(경남 하동), 법계사(하동), 벽송사(경남 함양) 등의 명찰이 있다.

또한 옛말에 지세가 뛰어나 선비가 많이 배출한 좋은 고을을 꼽을 때에 ‘경상도는 좌 안동 우 함양이고, 전라도는 좌 남원 우 장성’이라는 말이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데, 이 네 고을 중에 남원과 함양이 지리산 자락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역시 지리산 지역은 명당이 많은 길지(吉地)임이 증명된다고 할 것이다.

‘맥 끊으려 하자 지리산 울었다’

지리산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당한 적도 있다. 조선 말기의 유학자인 매천 황현(黃玹) 선생이 지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록 의하면 지리산의 맥을 끊으려고 시도한 대목이 나온다.

‘안영중(安永重)이란 이가 광무 5년(1901년)에 고종과 독대하고 『지리산의 산맥이 바다를 건너 일본 땅이 되니 지리산의 맥을 끊으면 일본이 스스로 망할 것입니다』라고 하였고, 이 말을 들은 고종은 기특하게 생각하고 안영중을 양남도시찰사(兩南都視察使)로 임명하였고, 많은 장정을 동원하여 운봉(현 남원시 운봉읍)으로 뻗은 산맥을 끊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일을 시작한 시기가 겨울철인데다가 암반이 나오고 물도 솟아올라 삽으로 팔 수가 없었다. 이 때 관찰사인 조한국(趙漢國)이 누차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듣지 않고 있다가 안영중이 산의 울음소리를 듣고 두려움을 느껴 중지하였다.’

이 기록과 함께, 이 때에 지리산이 3일 동안 울었는데, 그 울음소리가 수백 리까지 들렸다고 전한다.
<매천야록>은 재야학자가 관찰에 의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오전(誤傳)도 있어 전적으로 신빙할 수는 없으나, ‘지리산맥 끊기’사건은 당시에 황현 선생이 운봉에서 가까운 구례에 살았던 사실을 감안하면 상당히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다. 당시의 사건 현장은 고기리(전북 남원시 주천면 고기리)에 너무 오래되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흔적이 조금 남아 있다. 

삼신봉에서 내려다본 청학동계곡.
삼신봉에서 내려다본 청학동계곡.
 지리산 청학동은 어디인가

한편 지리산에는 유명한 청학동(靑鶴洞)이 있다고 여러 문헌에 전해지고 있다. <택리지> 산수편에 나온 청학동에 관한 기록을 인용하면,
‘만수동(萬壽洞)과 청학동(靑鶴洞)이 있다는 말이 예전부터 전해온다. 만수동은 지금의 구품대(九品臺)이며, 청학동은 지금의 매계(梅溪)로 근래에 비로소 인적이 조금씩 통한다.’
이중환 선생도 청학동에 대한 말은 들었으나 정확히 어디인지는 몰랐으며, 물론 지금도 청학동의 확실한 소재를 모르고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청학동은 이상향으로서 지리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들어가는 입구에 폭포가 있고, 폭포를 지나면 석문이 나오고, 석문동굴을 따라 수십 리 들어가면 주위가 넓은 평야지대의 별천지가 있다. 이곳에 석정(石井)이 있는데 이 물을 마시면 오래 산다고 하였다. 청학동에서 특히 인재가 많이 날 것이라고 전하는데, 청학동도(靑鶴洞圖)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이름과 장소가 신비로워 흥미를 유발시키기에 충분하다.
지리산 도처의 마을에서 각기 청학동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진위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경남 하동군 청암면 묵계리에 이른바 ‘도인촌(道人村)’이라고 알려진 청학동은 매스컴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어린이 서당교육으로 인기가 높다.
다음은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명당결(明堂訣)>이라는 책의 말미에 실린, 조선 초기의 무학대사가 지었다는 청학동기 원문을 소개한다.
靑鶴洞(又無學論)
余遊於方丈山, 入于靑鶴洞, 草宿數三, 而夜觀天象, 晝觀山勢. ?然嘆曰, 美哉, 山水之美也. 大哉, 星辰之應也. 余未曾聞於大仙師, 天下山水第一美者, 唐國洛陽?京山水, 次則朝鮮三神山云. 故數年逼(逗의 오기)?於蓬萊, 數年逼(逗의 오기)?於臨海之間, 而未見方丈山. 故恒是營營, 今來觀之焉, 可謂天下明山也. 幽同抱大作聖君之象, 案山羅烈(列의 오기)重重, ?臣烈(列의 오기)侍之象. 以理言之, 聖帝明王之朝, 忠臣達士, 世世而出矣. 倉庫文昌, 特立其方, 文章名筆, 達人賢士, 運回則世世無數而富貴功名不可勝數也. 壽井在內, 老人星在天爲案, 人人其壽, 可期百世, 福德星左右特立, 孝子道學之士, 世世多出. 靑鶴左右之翼, 引作龍虎回抱, 而水口明?(?), 昭然應矣. 家家人人本外孫, 不可勝數而多矣. 若非運回, 則豈能然哉 運到何時. 申午數運, 未及開闢運, 是也. 開闢何時.「合三爲三, 一人一止, 人來兎走之年,」 是也. 雖然入此種裔, 在三十六姓, 俱入大昌, 其外各姓, 無非大昌之地, 豈不美哉, 豈不美哉. 仙鶴出谷, 柳之吉地, 物各如右, 不記山形, 以木體入首, 以鶴形作局. 故世人謂之靑鶴云. 白雲三峰爲案, 以子坐壬坐爲基, 木姓以水星爲基, 水姓以金爲基, 火姓以木爲基, 三十六姓皆有定基, 勿失理而爲之, 可也. 我東方首基也, 疾病不入, 凶年不入, 兵革不入矣. 豈有如此勝地乎? 然後世之人, 能識此山者無幾矣. 或有知者, 富者吝其財而不入 貧者無其財而不入 雖欲入者未指示之人而不入 愚者不入 多疑者不入 不知者不入 無福者知而不入 若非積善積德之人, 豈可得此山入乎. 李蒼(?)之後, 天下大勢, 爭雄於靑邱一片之中矣. 畿西畿東湖南湖北, 安能平安無事乎? 後世人, 勿爲泛於此山, 可也. 草宿三日, 遂拜山而去焉.

청학동(무학론·무학대사의 글)
내가 방장산(현 지리산)에 놀러갔다가 청학동에 들어갔다. 3일 동안 풀밭에서 잠을 자면서 밤에는 천상(天象·별자리)을 보고 낮에는 산세(山勢·산의 기세)를 보았다. 아! 감탄하면서 나는『아름답구나. 산수의 아름다움이여. 위대하구나. 성신(星辰)의 응함이여』라고 말하였다.

내가 대선사(大仙師)께 들은 적은 없지만, 천하의 산수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당나라 낙양(주, 동한, 당 등 중국 여러 왕조의 수도였으며, 현 하남성 낙양현)과 변경(?京?후량과 북송의 도읍으로 현 하남성 개봉현)이요, 그 다음은 조선의 삼신산이라 하기에 몇 년간은 봉래산(삼신산 중의 하나로 금강산의 별칭)에 다가가 머물고, 몇 년간은 임해산(삼신산 중의 하나로 한라산의 별칭) 사이에 다가가 머물렀으나, 미처 방장산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늘 오락가락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천하의 명산(明山)이라 할 만하다. 그윽하게 돌아 쌓아 성군의 형상으로 크게 만들어, 안산(案山)이 거듭거듭 늘어서서 주인을 섬기는 것은 여러 신하들이 모시고 늘어선 형상이다. 이치로 말하자면, 성스럽고 밝은 제왕의 조정에 충성스런 신하와 뛰어난 선비가 대대로 나오는 것이다.

창고사(倉庫砂·산의 모양이 등변사다리꼴 모양의 산)와 문창성(文昌星·산의 모양이 붓끝처럼 생긴 산)이 제 자리에 빼어나게 섰으니 문장가, 명필, 달인, 현사가 시운이 돌아오면 대대로 수없이 많은 부귀공명을 모두 헤아릴 수 없다.
수정(壽井·노인성 별에 상응하는 청학동에 있다는 지명)이 안에 있고, 노인성(남극 부근에 있는 별자리로 2월 무렵 남쪽 지평선 가까이에 잠시 보이는 별로 용골자리에 위치하며, 고대 천문학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맡아보는 별이라 하여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믿었다. 일명 남극성(南極星) 또는 수성(壽星)이라고도 함)이 하늘에서 안대(案對)가 되니, 사람마다 그 수명이 100세를 기약하고, 복덕성(福德星·목성을 이르는 말로 길한 의미임)이 좌우로 특별히 뛰어나니, 효자와 도학하는 선비가 대대로 많이 나온다.

청학의 좌우 날개가 길게 뻗어 좌청룡과 우백호가 되어 둘러 싸안고, 수구(水口·물이 나가는 곳)를 잘 얻어 밝게 응한다. 집안마다 사람마다 본손(本孫)과 외손(外孫)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만약 운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시운이 언제 이를 것인가? 신(申·낙서수로 2를 뜻함)과 오(午·낙서수로 9를 뜻함)의 숫자 운인데, 아직은 개벽(開闢) 운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 이것이다.

개벽은 언제인가? ‘合三爲三一人一止人來兎走之年(합삼위삼일인일지인래토주지년)’의 해다. 비록 이곳에 여러 성씨가 들어와 모두 크게 창성하게 되고, 그밖의 각 성씨도 크게 창성하지 않음이 없는 땅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선학이 골짜기에서는 유(柳)씨의 길지로서 물형(物形)이 각각 다음과 같으니, 산의 형태를 모두 기록하지 못하지만, 목체(木體·산이 솟고 산봉우리가 원형 모양인 산)로 입수(入首)하여 학 모양의 국을 이루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청학’이라고 일컬으면서 말하기를, 백운산(白雲山·전남 광양)의 3개 봉우리를 안대(案對·정면으로 보이는 산)로 삼고, 자좌(子坐·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24방향 중 하나로 정남향)와 임좌(壬坐·풍수지리에서 사용하는 방향으로 정남향에서 남쪽으로 15도 기운 방향)로 터가 된다.

목성(木姓)은 수성(水星)을 터로 잡고, 수성(水姓)은 금성(金星)을 터로 잡고, 화성(火姓)은 목성(木星)을 터로 잡아, 36개 성씨가 모두 정한 터가 있으니, 이치를 잃지 않도록 해야 되며, 우리나라의 으뜸가는 터이니 질병이 침입하지 못하고, 흉년이 침입하지 못하며, 병화가 침입하지 못한다. 어찌 이와 같은 승지가 있겠는가!
그러나 후세 사람은 이 산을 제대로 알아보는 자는 거의 없다. 간혹 아는 자가 있어도 부자는 자기 재물에 인색하여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한 사람은 자기 재물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비록 감히 들어가고 싶어도 안내해주는 사람이 없어서 들어가지 못한다.

어리석은 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의심이 많은 자도 들어가지 못하며, 지혜가 없는 자가 들어가지 못하고, 복이 없는 자는 알면서도 들어가지 못한다. 만약 선을 쌓고 덕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산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이조 창업[李蒼] 이후 천하의 대세는 청구(靑邱·중국에서 우리나라를 이르던 말) 일대에서 자웅이 다투니, 기서(畿西·경기 서부), 기동(畿東·경기 동부), 호남(湖南·전라도), 호북(湖北·충청도) 지역이 어찌 평안하고 무사할 수 있겠는가?
후세 사람은 이 산을 널리 알리지 말아야 된다. 3일 동안 풀밭에서 노숙하고 마침내 산에 절하고 나왔다.

이 청학동기는 누구의 글인지, 그리고 혹시 모종의 의도성이 있는 글인지는 모르지만, 내용중에 ‘合三爲三一人一止人來兎走之年(합삼위삼일인일지인래토주지년)’은 개벽의 시기를 알려주는 대목인데, 독자분의 고명한 해석을 기대한다. 필자는 다만 ‘미래의 언제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최명우(崔明宇)·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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