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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 지리산 식생⑤

월간산
  • 입력 2005.01.25 13:56
  • 수정 2018.12.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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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많은 식물종 자란다
고산·특산·멸종위기·빙하기 잔존식물이 풍부하게 분포

지리산은 남한의 어느 산보다 덩치가 크다. 백두대간의 시원인 백두산의 웅자를 닮으려는 듯 대간의 끝자락에서 크고 너른 품을 뽐내고 있는 것인데, 남한 백두대간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을 비롯하여, 제석봉(1,806m), 촛대봉(1,704m), 명신봉(1,652m), 칠선봉(1,576m), 토끼봉(1,534m), 반야봉(1,732m), 노고단(1,507m) 등 1,500m가 넘는 산봉우리들이 장장 45km에 이르는 주능선을 형성하며 솟아 있다.

이 주능선은 한반도 산줄기의 뼈대를 이루는 대간의 대미를 장식하고 있다. 백두산에서 남하하기 시작해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을 아우르고, 소백산, 덕유산을 거쳐 숨 가쁘게 달려온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러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채 남은 기운을 모아 마지막으로 긴 능선과 높은 봉우리들을 우뚝우뚝 솟구친 후 그 여력을 낙남정맥으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산세가 웅장한 만큼 그곳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도 다양하다. 산자락을 포함해서 지리산에는 대략 1,500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남한에서 한라산을 제외하고는 가장 많은 식물종이 이 지역에 자라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며, 서울 근교의 북한산이나 관악산 등 800m급 산에 700~800종의 식물이 자라는 것에 비하면 두 배쯤 많은 숫자다.

이름부터 지리산과 관련된 식물이 많다

지리산 식물에 대한 연구는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가 1913년의 조사를 바탕으로 1915년에 발간한 조사보고서를 통해 470여 종을 기록한 후, 1935년과 1961년에도 일본인에 의한 조사보고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인에 의한 조사보고는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이루어지지 않다가 1965년 이창복 박사가 우리나라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824종을 보고하였다.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리산 식물이 연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풍부한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는 지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었거나 채집되어 우리말 이름에 ‘지리’ 또는 ‘지리산’이 붙은 것만 꼽아 보아도 많다. 지리고들빼기, 지리괴불나무, 지리대극, 지리대사초, 지리말발도리, 지리바꽃, 지리사초, 지리실청사초, 지리오리방풀, 지리터리풀, 지리강활, 지리산고사리, 지리산김의털, 지리산바위떡풀, 지리산숲고사리, 지리산싸리, 지리산오갈피, 지리산하늘말나리, 지리산괴불나무 등이 그것이다.

또한, 학명에 ‘지리산’을 뜻하는 말이 붙은 것도 여럿 있다. 한국특산식물인 누른종덩굴의 종소명은 ‘chiisanensis’인데, 이것은 ‘지리산의’ 또는 ‘지리산에 자라는’이라는 뜻이다. 지리산 반야봉 부근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런 학명이 붙여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식물은 이후에 지리산 외에도 강원도 등지의 높은 산에서도 발견, 기록되었다.

우리말이나 학명에 지리산을 뜻하는 말이 붙지는 않았지만 지리산에서 처음 알려진 식물들도 있는데, 모데미풀, 노각나무 등이 그것이다. 모데미풀은 지리산 운봉 근처의 모데미에서 처음 발견되어 1935년에 일본인 식물학자 오위에 의해 한국특산속 식물로 발표된 것으로서, 지리산 외에도 광덕산, 점봉산, 태백산, 소백산, 덕유산, 한라산 등 높은 산의 계곡과 능선 숲속에 분포한다.

노각나무는 1909년 일본인 식물학자 나카이에 의해 신종으로 발표된 나무로서, 한때 북미 동부 지역의 것과 동일하다는 견해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북미의 것과는 다른 한국특산의 변종으로 취급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지리산 일대에서부터 백두대간을 타고 덕유산, 소백산까지 올라가 분포하며, 이 지역과 동떨어진 평안도에도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리산 식물들 가운데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많다. 특산속인 모데미풀은 물론이고, 히어리, 세뿔투구꽃, 지리터리풀, 노각나무, 세모부추, 노랑매미꽃, 누른종덩굴, 산앵도나무, 구상나무, 금마타리 등의 특산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히어리는 송광사 계곡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송광납판화라고도 하는 낙엽성 떨기나무로서, 남부와 중부 지방의 산지에 드물게 분포한다. 지리산에서는 화엄사계곡, 장당골 등지의 해발 300m 이하의 지역에서 발견된다. 노란 꽃이 이른봄에 잎보다 먼저 피어, 생강나무와 같은 시기에 같은 색깔 꽃이 피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생강나무로 오인하기 쉽다.

노랑매미꽃은 중부 이북에서 자라는 피나물을 대치하며 남부 지방에 분포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잎이나 줄기를 꺾으면 핏빛 즙액이 나오므로 지역에서는 ‘피나물’이라고도 부르지만, 식물도감에서 피나물이라 부르는 식물은 따로 있다. 세계적으로 지리산 등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므로 학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늦봄부터 초여름까지 꽃이 피는데, 아름다우면서도 오래 가고 어디서나 잘 살므로 원예식물로 개발할 여지가 많다. 지리산 여러 곳에 자라고 있고 개체수 또한 아직까지는 많은 편이지만, 지리산의 귀중한 식물로서 보호해야 할 것이다.

세뿔투구꽃, 자주솜대 등은 법으로 보호하는 식물

지리산의 식물 가운데는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멸종위기식물들도 있다. 자연환경보전법에 의해 보호야생식물로 지정된 세뿔투구꽃, 히어리, 기생꽃, 자주솜대, 가시오갈피, 깽깽이풀, 천마 등이 분포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법이 바뀌더라도 천마를 제외한 다른 식물들은 계속해서 멸종위기식물로서 지정되어 보호받게 될 전망이다.

자주솜대는 자주지장보살이라 부르기도 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한때는 북부 지방의 고산과 남한에서는 지리산 고지대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90년대 중반 이후 설악산, 태백산, 덕유산 등지에서도 발견되었다. 지리산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워 환경부가 지난 94년 발간한 <특정야생동식물 화보집>에는 섬시호, 홍도서덜취, 큰솔나리 등과 함께 사진을 수록하지 못한 법정보호식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이 식물이 사진으로서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95년으로 이영노 박사 등이 94년 지리산의 식물을 조사할 때 문순화, 송기엽씨가 촬영한 것을 <지리산의 꽃>(평화출판사)에 발표한 것이다. 꽃은 6월에 피고 처음에는 녹색에 가까운 황색이지만 점차 자주색으로 변하는데, 학명의 종소명 ‘bicolor(두 가지 색깔이라는 뜻의 형용사)’도 그런 특징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주색으로 변할 즈음 특히 아름답다. 환경부가 1998년부터 이전의 특정야생식물 지정에 이어서 보호야생식물로 이름을 바꿔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지리산에 이처럼 다양한 식물이 살고 있다는 것은 지리산은 너른 품에 걸맞게 여러 식물이 독특한 모습으로 자랄 수 있는 환경여건을 갖추고 있음을 방증해 준다. 해발 1,500m 이상의 긴 능선이 발달해 있기 때문에 고산능선이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생육하고 있는 식물이 많다. 특히 주능선 곳곳에 발달한 바위봉우리나 초원에는 이런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특수한 지역에만 적응해 살아가는 식물들로서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것들이다. 지리산을 찾는 사람이나 관리하는 사람 모두 능선과 정상부의 보존에 힘써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곳에는 북방계 식물 또는 고산식물로서 분류할 수 있는 가문비나무, 참바위취, 산오이풀, 만병초, 흰참꽃, 기생꽃, 회목나무, 땃두릅나무, 네귀쓴풀, 두루미꽃, 자주솜대, 금강애기나리, 구름병아리난초 등이 떨기나무숲, 바위 겉이나 풀밭에 자라고 있다. 이들은 지리산 능선을 대표할 만한 식물들로 다른 산에서도 볼 수 있고, 또한 현재는 개체수가 많은 종들도 일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일단 지리산 능선이 생육 불가능하게 훼손된다면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식물들이란 점에서 보존가치와 중요성이 높다. 지리산의 특기할 만한 북방계 식물 가운데 하나인 너도바람꽃도 능선은 아니지만, 장당골 상류에서 관찰된다.

아직까지도 새로운 식물 발견되는 고산

북방계 식물들이 지리산 높은 곳에 자라고 있는 것은 빙하기 때 남쪽으로 내려왔던 북쪽에 고향을 둔 식물들이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고산지역에만 잔존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을 빙하기 잔존식물이라고 하는데, 가문비나무, 만병초, 기생꽃, 네귀쓴풀, 두루미꽃, 자주솜대, 구름병아리난초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의 고산이 백두대간에 집중되어 있는 남한의 지형 특성을 고려할 때, 백두대간이 식물 분포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 다양한 식물이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원동력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지리산 곳곳에는 습지가 발달해 있다. 대표적인 고층습원으로는 90년대 중반에 발견된 대원사 북서쪽 왕등재 부근의 해발 1,000m 지역에 있는 왕등재늪이다. 이 늪은 길이 200여m, 폭 80여m로 사람의 손을 전혀 타지 않은 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숫잔대, 동의나물, 감자개발나물, 애기부들, 세모부추, 방울새란, 닭의난초 등 고산지역의 습원에 오랜 세월 적응해 살아온 습지식물들이 대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어 학술적 가치도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리산의 습지는 이것 말고도 몇 곳에 더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리산 주능선의 연하천대피소 일대도 습기가 많은 지역이다. 과거 대피소 주변에서의 무분별한 야영으로 인해 상당 부분 이미 훼손되었지만, 최근 공단의 보전 노력으로 자연적인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일대에는 북방계 고산식물인 두루미꽃 등이 자라고 있다.

지리산에서는 아직도 새로운 식물이 간간이 발견되고 있다. 중부 이북 지역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온 식물들이 발견되고 있음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삼지구엽초, 긴병꽃풀, 흰 꽃이 피는 칡, 흰 꽃이 피는 산오이풀, 유명난초 등이 그런 것들이다.

삼지구엽초는 근래 지리산 중산리계곡에서 분포가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는데, 식물지리학적으로도 매우 흥미 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경기도 가평, 강원도 화천 등지가 주산지로서, 이들 지역에서는 줄기와 잎을 말린 것을 상품화해 팔기도 한다. 

유명난초는 아직까지 학계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옥잠난초속 식물로서 최근 유명산, 제주도 등지에서 보고된 바 있다. 지리산에서는 필자 등이 1999년에 노고단 부근에서 발견하였다. 그 동안 일본의 후지산 등지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꽃이 보통 진한 자줏빛을 띤다.

지리산에서 아직도 새로운 식물들이 발견되는 것은 이 산 일대에 분포하는 식물의 전모가 아직도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증거인 셈이고, 지리산의 드넓은 산세가 곳곳에 미세기후와 환경을 만들어내 상식으로는 예상하기 어려운 식물분포를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1,500m가 넘는 여러 봉우리들이 연이어진 고산능선이나 이 산봉들이 빚어내는 유장한 계곡들은 남한의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리산만의 특징이라 하겠는데 이러한 환경이 현재까지도 분포상으로 흥미 있는 식물들이 발견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백두대간이 한반도 식물 분포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다. 아직 관찰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지만, 백두대간의 여러 산들이 북방계 고산식물의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감을 잡게 되었다. 지리산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가장 남쪽에 자리 잡은 백두대간의 고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곳에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http://www.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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