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지리산 문화④

[423호] 2005.01
입력 2005.01.25 14:06 | 수정 2005.01.26 11:29

갈등과 대립의 끝, 화해와 대화의 시작인 지리산
유·불·선과 무속·문학·음악까지 배태한 모산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이면서 새롭게 시작되는 곳으로, 한 마디로 백두대간의 기운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그 기운 탓인지 지리산은 투쟁과 저항의 역사가 응집된 곳이며, 많은 인물과 사상을 낳았던 곳이다. 또한 그러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던 곳이다.



정여창의 학풍과 덕망을 흠모한 이들이 그를 추모해 ㅅ운 남계서원. 지리산 기슭인 함양에서 태어난 정여창과 남명 조식에서 지리산의 유학은 빛을 발했다.
정여창의 학풍과 덕망을 흠모한 이들이 그를 추모해 ㅅ운 남계서원. 지리산 기슭인 함양에서 태어난 정여창과 남명 조식에서 지리산의 유학은 빛을 발했다.
전략요충지로서의 지리산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주능선 방향이 서남서~동북동으로 이어진다. 삼도봉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구례·남원·함양·산청·하동 등 5개 시군에 속해 있다. 서쪽에 전남 구례, 북쪽에 전북 남원, 동북쪽에 경남 함양과 산청, 동남쪽에 경남 하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지리산을 영호남의 경계를 짓는 산으로 인식해 왔다.

고대로부터 영남과 호남의 4대 관문이 있었는데,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 구례의 석주관이 그것이었다. 특히 남쪽의 석주관과 북쪽의 팔량치는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하였다.

황석산성은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후 백제와 맞서면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팔량치 넘어 남원의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이곳은 가야·삼국의 각축장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서로 혼합되어 있다.
경남 산청군의 단속사지 3층 석탑. 지리산 서쪽으로 화엄사가 세워진 반면 같은 시기에 동편에는 단속사가 세워졌다.
경남 산청군의 단속사지 3층 석탑. 지리산 서쪽으로 화엄사가 세워진 반면 같은 시기에 동편에는 단속사가 세워졌다.
후삼국 시기 후백제 견훤은 신라 정벌의 전략적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남원과 함양을 장악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 지역의 정벌과 함께 남해안을 따라 승주(순천) 호족 박영규와 강주(진주)의 왕봉규와 연결되면서 후백제를 압박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침공할 때에도 운봉을 넘으려다가 황산에서 이성계에 크게 패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이 호남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 지역을 넘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가 진주대첩과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 전투였다.

한말에도 영남으로 진격하려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쪽에서는 운봉을 사이에 두고 민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남쪽에서는 광양·순천의 농민군이 하동과 진주로 나아가 영·호남 연합농민군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은둔지·피난처로서의 지리산
지리산은 천왕봉·반야봉·노고단의 3대 주봉과 함께 해발 1,500m 이상의 큰 봉만도 10개가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의 강한 침식작용으로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피아골, 밤밭골, 뱀사골, 연곡골 등 지리산 계곡은 약 80여 개나 되며, 길이가 10㎞ 이상의 계곡도 10여 개나 된다.

또한 불일폭포·구룡폭포·칠선폭포·가내소폭포·천령폭포·법천폭포 등 아름다운 풍광을 갖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남강이, 남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강과 산의 조화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의 10경을 꼽고 있지만, 사실 곳곳이 비경이요 선경이라, 단지 10경만을 꼽는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도 그것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이라 하여,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두류산이 가까이 있지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800여 리의 넓은 산역과 깊은 계곡과 준령은 선경에 비유되니 도인을 꿈꾸는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지리산은 신선이 사는 방장산으로도 불렸으며, 지금도 도인(道人)들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있다. 신라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도 지리산 운상원에서 거문고를 배우고, 말년에 선도(仙道)를 얻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도 은연 자중하는 도인의 자취를 흘렸다.
지리산은 피난처였다. 가혹한 부역과 조세를 피해 많은 농민들은 지리산을 찾았다. 조선시대에는 중들에게도 많은 부역을 부담시켰는데, 일반 백성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리산의 깊은 계곡에는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갖추고 있는데, 큰 곳은 천 석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섬진강, 남강 유역은 토양이 비옥하여 비교적 물산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만큼 정부의 수탈도 뒤따랐고, 단성 농민봉기와 1862년 진주 농민봉기, 진주 형평사운동 등도 지리산의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동학농민군도 관군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가 저항하였고, 의병부대들도 일본군에 쫓겨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여수·순천 사건과 빨치산의 활동 무대도 바로 지리산이었다. 깊은 계곡과 준령은 이들의 은신처로 적합하였고, 비교적 풍부한 물산은 장기간 머물며 전력을 정비하기에 적지였다. 십승지의 하나로 운봉 두류산 동점촌(현 산청군과 함양군 경계지역으로 추정)이 꼽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상과 문화의 산실, 지리산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혼과 정서가 깃든 곳으로, 역사의 현장이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다분히 불교 색채를 띠고 있다. 또한 백두대간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어졌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이 이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즐겨 불렀으며, 유교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밖에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불렸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지리산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다양한 문화, 즉 도교·불교·유교문화를 낳고 키웠다.

산신신앙과 신선사상

1) 남명 조식의 초상화.
1) 남명 조식의 초상화.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두류산이 가까이 있지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지리산을 묘사했다. 2)최치원의 초상화. 지리산의 유교는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산에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령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쳐준다는 산신이 있다. 조상들은 대접을 소홀히 한다면 큰 벌을 내린다고 해서 산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지리산 천왕봉에는 1,000년 전에 성모사(聖母祠)라는 사당이 세워지고, 성모 석상을 봉안해 제사를 받들었다. 노고단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었다. 성모는 나라의 수호신이었고, 매년 봄·가을에 국태민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왔다. 후대에 성모사의 성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신앙되었고, 남악사의 성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앙되었다. 지리산은 결국 신라와 고려의 시조를 잉태했던 산이었던 것이다.

성모는 나라의 시조를 낳은 것만 아니라 불교 승려와 만나면서 무당을 낳았다. 무당의 시조 전설에 함양의 지리산 암천사(巖川寺)에 법우화상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천왕봉의 성모천왕(聖母天王)과 혼인하게 되어 8명의 딸을 낳아 무술(巫術)을 가르쳐 8도에 하나씩 보내어 무업을 행하였다고 한다.

교종과 구산문의 형성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면서 지리산 자락에는 많은 사원과 암자, 승려들의 수도처가 만들어졌다. 특히 지리산에는 화엄종과 북종선, 구산문 중 3개 산문이 형성되었다.
지리산 서쪽으로 화엄사(구례)는 백제 때 창건되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대 연기조사(緣起祖師)에 의해 중창되었다. 연기는 754년 화엄경을 사경(寫經)하였고, 이후에는 석경(石經)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는 신라인들이 화엄의 불국토인 연화장세계를 신라 땅에 구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반대편 동쪽에는 단속사(산청)가 세워졌다. 신행(神行)이 759년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와 이곳에서 최초로 북종선을 전하였다.
지리산 북쪽으로 실상사(남원)가 있다. 이 사찰은 828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면서 창건되었다. 그는 신라 하대 구산산문의 선구자였다.

실상사의 정남쪽에는 쌍계사(하동)가 있다. 이 사찰은 혜소(774-850)가 830년(흥덕왕 5)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운 것이다. 그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오탁악세에 안주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갈증이 나도 마시지 못한다'고 걱정하였다.
혜철(785-861)은 839년(신무왕 1)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리산(桐裏山) 태안사(곡성)를 창건하였다. 그의 선풍은 유식사상과도 연결을 가지면서 구산문 중 동리산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혜철의 제자 도선은 옥룡사(광양)를 세웠다.

도선은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승려였다. 그는 남해의 물가에서 이인(異人)을 만나 산천의 순역(順逆) 형세를 전해받고, 더욱 음양오행설을 깊이 연구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하였다. 이밖에도 지리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으나 이상에서 제시한 사찰은 역사가 오래되었고, 이후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1) 남명 조식이 61세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와 기거하다 여생을 마친 곳인 산천재.
1) 남명 조식이 61세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와 기거하다 여생을 마친 곳인 산천재. 2) 화엄사 경내의 사사자석탑과 석등. 여기에도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남명학파의 성립
현재 지리산 일대에는 함양 남계서원, 산청 덕계서원·도천서원, 진주 도동서원·임천서원 등의 서원과 각 시군의 향교와 구례의 매천사당, 곡성의 충렬사 등의 사우가 남아 있다.

지리산의 유교는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 말 강회백은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그 때 심어놓은 정당매(사실 100년 후 죽자 후손이 심어놓은 것)가 지금까지도 꽃을 피우고 있다.
지리산의 유학은 일두 정여창과 남명 조식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정여창은 함양 태생으로 초기 사림세력의 영수인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그는 37세 때 모친상을 치르고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 부근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竹]와 매화를 심으며 평생을 마치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평소에 도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하며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강조하였다. 사후 그의 학풍과 덕망을 흠모한 함양 사족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 사림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를 추모하는 남계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남명 조식은 어릴 때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기 위해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유학 서적 외에 노장과 불교 서적을 섭렵하기도 하였다.

그가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61세 때였다. 김해와 고향 합천 삼가에서 문인을 양성하다가 이때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와 산천재에 거처하며 여생을 마쳤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처사적인 선비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았다. 또한 실천을 중시하였다는 것과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수용하려는 학문 자세를 잃지 않았다.

도가의 수련법을 익히기도 했으며, 승려와 교유하였으며, 양명학자들과도 교류하였다. 그의 이런 점은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임진왜란 때 많은 문인이 의병활동에 나서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고, 한말 황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남명은 지리산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지리산 사랑은 그의 12번 이루어진 지리산 산행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지리산 앞에서 인간의 왜소함을 배웠고, 산행을 통해 선현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부족한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다.

민중소설의 유행과 동편제
지리산은 행정구역 상 동과 서의 경계선이었지만 자연지리적 구분으로 지리산의 주능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눌 수 있다. 주능선 남쪽을 겉지리(또는 외지리)라 하는데, 구례·하동·산청이 이에 속한다. 지리산 북쪽은 속지리(또는 내지리)로 남원·함양이 이에 속한다.

하동·산청 등 지리산의 남쪽은 북쪽과 많은 차이가 있다. 남쪽의 여름은 고온다습한 남동계절풍이 남동 사면에 부딪쳐 상승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형성 강우로 많은 비가 내린다. 겨울은 산이 계절풍을 막아주고, 남해를 흐르는 동한난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다. 반면 북서쪽(남원·구례·함양)의 겨울은 한랭건조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고, 기온차가 심하다.

남쪽의 온화한 기후는 목화나 차의 재배에 적합하였다. 산청은 고려 말 목화 시배지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도 마포를 여러 겹 겹쳐 입으며 추위를 견뎌야 하였다. 목화 재배가 성공하고 보온성이 좋은 목면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음으로써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이는 지리산이 주는 혜택이었다.

문익점이 지리산 일대에 목면을 재배한 것은 이 지역이 기후가 온난하고, 이미 중국에서 들여온 차(茶)가 하동의 지리산 자락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북쪽의 심한 기온차와 지역성 강우 등 자주 변하는 기후 조건에서 불교보다는 민간신앙에 더욱 매료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함양·남원을 중심으로 해서 변강쇠전·흥부전·춘향전 등 민중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지리산의 장승은 변강쇠전의 모티브가 되었고, 지리산의 신선사상은 흥부전의 강남제비와 박의 씨를 낳았다.

지리산은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을 배태하였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음악은 판소리인 동편제였다. 동편제는 남원·구례 등지의 전라도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제였다. 동편제는 전라도 보성·광주·나주 등 서남지역에 전승된 서편제와 비교해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끝을 짧게 끊는다. 동편제 소리는 바로 지리산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지리산의 계곡과 폭포수 곳곳이 모두 소리공부터였기에 웅장하고 선이 굵은 남성적인 소리가 나온 것이다.

동편제 성립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의 고수 옥보고와 불교 가요인 범패의 대가 혜소와 무관하지 않다.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힌 후 30여 곡을 지었다. 운상원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원과 인접한 지리산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 음악인 범패는 하동 쌍계사에서 시작되었다. 쌍계사를 창건한 혜소는 성품이 꾸밈 없고,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이 몸소 닦은 실천행과 아울러 범패를 중생제도의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이후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또는 중생제도의 방법으로 많은 선사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3) 지리산 남서쪽 기슭의 화엄사. 지리산에 가장 먼저 만개한 불교 사상인 화엄사상은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3) 지리산 남서쪽 기슭의 화엄사. 지리산에 가장 먼저 만개한 불교 사상인 화엄사상은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4) 스님들이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인 범패는 소리와 춤을 함께 하는 불교음악으로서, 지리산 쌍계사에서 시작되었다.
 갈등과 대립을 초월, 하나로 융합하는 마당
어질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한다. 산과 바다는 그런 의미에서 서로 상반되는 대상으로 인식해왔다. 바다는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시내물, 강물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서로 다른 물이 바다에 모이면 이제는 더 이상 서로가 아니라 하나가 된다.

도인을 꿈꾸며, 혹은 부세와 전쟁를 피해, 또는 호연지기를 위해 들어온 사람 등 모두 제각각의 사정으로 들어왔지만, 산을 그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산 또한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을 거부하지 않고 전부 거두어들인다. 산은 자신이 품에 안은 모든 것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산과 바다는 둘이 아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산에는 산신이 아닌 부처나 보살로 대체되었다.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낙가산에는 관음보살이, 천관산에는 천관보살이 있어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불(巫佛)이 대립하였으나 종국에는 서로 하나로 신앙하게 되었다.
지리산에 가장 먼저 만개한 불교 사상인 화엄사상은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화엄사 경내의 사사자석탑과 석등도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이들 유물은 불교의 출가와 유교의 효도가 다르지 않고, 구도와 수기(修己)가 다르지 않으며, 제도(濟度)와 치인(治人)이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의 사상 풍토는 조선시대 남명학파의 학풍과도 연결되고 있다.

도선은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웠고, 이후 태안사 혜철에게서 유식과 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 사상를 집대성한 신승(神僧)이기도 하였다. 전남 영암 출신이었던 그가 모든 불교종파와 사상을 융합하고, 도교적인 음양오행과 풍수를 집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리산과 함께 강·바다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화해와 대화의 시작, 영호남의 화합
지리산의 사찰과 승려들 간의 교류는 영호남 구별없이 자유스럽게 유지되어왔다. 조선 인조 때 구례 화엄사를 중건했던 벽암선사는 하동 쌍계사 중건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남명의 문인은 영호남을 넘나들며 교류하였고, 영호남인의 통혼이 있었다. 동편제는 경상도 서부인 마산이나 진주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강을 따라 사람과 물산이 교류해 하동의 탑원장, 즉 오늘날 화개장터에는 영호남의 구별이 없다.

언제부터 영남과 호남이 대립과 갈등을 가졌는가. 경남 산청군의 지리산평화제에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제신단을 만들고 평화·풍년을 기원하며, 이어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죽은 무고한 민간인의 원혼을 달랜다고 한다. 지리산은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데….

이제는 화해와 대화의 시작이다. 백두대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씻고, 좌우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앞으로 전개될 통일을 위하여… .
지리산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글 여성구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테마특집
내가 본 뉴스 맨 위로

내가 본 뉴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