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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백두대간 역사지리②

월간산
  • 입력 2005.01.25 14:16
  • 수정 2018.12.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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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국토 산천에 기를 생성시킨 ‘생명길’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등줄기인 산맥 대계

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동국여지승람>(16세기)에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곳이라고 하여 두류(頭流)라고 한다’고 밝혀 놓았다.
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동국여지승람>(16세기)에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곳이라고 하여 두류(頭流)라고 한다’고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산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정해진 해답을 요구하는 형식논리적 질문이라기보다는 산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를 통찰하고,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 배어 있는 산그늘과 같은 원형질, 그리고 겨레정신의 집단무의식에서 차지하는 산의 의미와 가치를 밝혀내는 화두(話頭)와도 같은 물음이다.

우리는 흔히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다만 산이 국토에서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생활 및 문화와 심지어 의식에서조차 산의 비중과 영향이 그만큼 깊고 크다는 뜻으로 넓게 해석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산은 겨레 정신의 유전인자요, 고유한 전통문화라는 그릇을 구워낸 가마였으며, 삶과 죽음으로 순환하는 생활의 근거이자 토대로서의 1차적인 생태환경이었다. 다시 말해 산은 우리의 생명과 겨레문화를 잉태한 태반이자 탯줄이었던 것이다.

우리네 삶의 터전은 산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산에서 시작하여 산의 맥과 산의 길을 따라 확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다. 취락의 입지와 공간구조를 살펴볼 때 나라의 수도나 지방도시, 그리고 마을 등 규모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삶의 터전은 산의 둥지에 입지하였고, 비록 평지에 입지한 취락이라도 주위의 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의 삶의 과정이 이럴진대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도 산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흔히 죽어서 돌아가는 생명회귀의 공간을 ‘산소(山所)’라는 일반명사로 부르는 사실도 바로 산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산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밭을 일구며 살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이 바로 겨레의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백두대간은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등줄기인 셈
백두대간은 산과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등줄기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아니 우리는 백두대간으로 말미암아 지리생활사와 겨레정신사의 능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그 속에는 우리가 그토록 지향했던 삶의 염원과 이상향이 산새의 둥지처럼 깃들어 있고, 산과 계곡의 너울을 닮은 우리의 춤사위와 노래가락, 그리고 전통 조형적 선(線)의 자연미학이 풀려나오며, 겨레정신사에서 무(巫)의 얼 울림과 불(佛)의 청정심과 유(儒)의 경(敬)이 비롯되고, 하늘로 이끄는 부정(父情)의 고결함과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품고 감싸는 모정(母情)의 아늑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요컨대 백두대간은 국토 생활사의 척추로서 온 국토 산천에 숨길과 기(氣)를 생성시키고 전달하는 ‘생명 길’인 것이다.
그러면 백두대간의 역사지리는 어떻게 살펴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산수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여암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다. 그는 ‘산수고(山水考)’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우리나라 산천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산과 물의 경위(經緯)를 고찰한 ‘산수고’란 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성모석상.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있었고, 노고단에는 여자 산신의 전설이 있어 무(巫)의 발원지가 되었다.
성모석상.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있었고, 노고단에는 여자 산신의 전설이 있어 무(巫)의 발원지가 되었다.
‘하나의 근본이 만 갈래진 것이 산이고, 만 갈래 다른 것이 하나로 합하는 것이 물이다. 나라의 산수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다. 백두산에서부터 나뉘어 열두 산이 되고, 열두 산은 나뉘어 팔도의 뭇 산이 된다. 팔도의 뭇 물은 합하여 열두 수(水)가 되고, 열두 수는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흐르고 [산이] 솟아오르는 형세와, [산이] 나뉘고 [물이] 모이는 묘리(妙理)는 여기에서 가히 볼 수가 있다. 열두 산은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여덟은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치, 지리산이라 일컫는다.’    
신경준이 정한 우리나라의 열두 산에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삼각산을 제외한 열한 개의 산들은 모두 백두대간의 본줄기에 해당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삼각산은 수도 한양의 진산(鎭山)이었기 때문에 열두 반열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두번째 특징으로는 이 산들이 우리나라 산맥체계(대간, 정간, 정맥)의 분기점이 되는 산들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의 시작이고, 낭림산은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의 가지가 비롯하는 곳이며, 두류산은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출발하는 곳이고, 분수령은 한북정맥의 가지가 뻗는 곳이며, 태백산은 낙동정맥, 속리산은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 및 금북정맥이, 육십치는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끝맺는 곳인 동시에 낙남정맥의 줄기가 뻗어나가는 지점이다.

‘산수고’와 ‘여지고’ 이후에는 각각 산을 중심으로 한 지리서와 강을 중심으로 한 지리서가 편찬되어 산천에 대한 인식이 한층 더 심화되기에 이른다. 그 중 우리나라의 산줄기 체계를 밝혀 놓은 것이 <산경표(山經表)>이며, 강줄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한 저작이 정약용(1762-1836)의 <대동수경(大同水經)>(1814)이다. 이 두 가지는 비로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4)에 의해 지지(地志)와 지도로 완성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다. 
대간과 정간과 정맥의 차이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산의 갈래, 그리고 산의 위치를 족보식으로 체계화하여 나타낸 지리서다. 더욱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는 우리나라 산맥의 대계(大系)를 백두대간, 장백정간, 그리고 13개 정맥으로 체계화하여 분류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점이 산맥에 대한 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이라는 계통적인 개념 체계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산맥 구조를 큰 줄기[大幹] 하나와, 여기서 갈라진 곧은 줄기[正幹] 하나, 그리고 열세 개의 뻗은 산맥[正脈]으로 보았다. 정간과 정맥 개념을 구분하여 썼다는 사실도 깊은 의미가 있는데, 정맥은 산맥 중에 강물을 끼고 있는 것을 특화(特化)하여 일컫는 개념으로 보인다. 즉 장백정간과 기타 정맥의 산수체계를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점이 발견되니, 정맥들은 모두가 큰 줄기 강물을 사이에 끼고 뻗어나가고 있으나 장백정간은 그렇지 않다.
지리산의 품에 안긴 삶터. 우리네 삶의 터전은 산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산에서 시작하여 산의 맥과 산의 길을 따라 확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다.
지리산의 품에 안긴 삶터. 우리네 삶의 터전은 산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산에서 시작하여 산의 맥과 산의 길을 따라 확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다.
우리나라 산맥의 큰 줄기는 백두산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백두대간인데, 백두산을 머리로 하여 금강산 태백산의 등뼈를 타고 내려오다가 속리산 허리에서 아래로 지리산까지 이르는 큰 줄기를 말한다. 그래서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16세기)에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곳이라고 하여 두류(頭流)라고 한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잠깐 여기서 우리는 숨을 돌려 지리산의 비밀과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을 생각해 보자. 바로 동양의학의 정수를 이루는 한의학의 경락 및 혈 체계와 요가의 차크라 구조로 백두대간과 백두산 및 지리산의 위상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한의학적인 인체의 혈 구조로 비유하자면, 백두대간이 경락체계 상의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으로서 백두산이 머리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이라면 지리산은 성기와 항문 사이에 있는 회음혈(會陰穴)과 같은 지리적 위치에 있으니, 두 혈 자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자리가 된다.

한편 요가의 인체구조로 비유해도 보다 선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요가에서는 인체의 기가 응집되어 생명의 원천이 되는 곳을 차크라라고 하는데, 제1 차크라는 항문 차크라로서 한의학의 회음혈과 같은 부위이며, 한반도의 산맥체계에서는 지리산이 그곳에 해당한다. 제1 차크라 위로 제2 단전, 제3 배꼽, 제4 심장, 제5 목, 제6 미간, 그리고 제7 정수리 차크라로 이어지는 중앙 기도(氣道)가 마치 백두대간의 줄기처럼 뻗어 있으며, 정수리 차크라가 한의학의 백회혈로서 바로 백두산의 위치가 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가에서 세계를 창조한 샤크티 여신이 인체에 머무는 장소가 항문 차크라이며, 여기에는 삼각형의 태궁(yoni)이 있는데, 이 태궁 속에는 여신 쿤달리니 샤크티가 뱀의 형상으로 기도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우리 땅에서 음(陰)의 극(極)
이러한 유비적(類比的)인 접근은 지리산에 숨겨진 지식고고학적인 비밀을 조명하는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지리산의 천왕봉 아래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있었고, 노고단에는 여자 산신의 전설이 있어 무(巫)의 발원지가 되었던 사실은 샤크티라는 여신과 대비하여 볼 때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지리산 기슭의 한 사찰인 법계사. 선조들이 지리산의 얼과 호흡하고 공명하며 펼쳐낸 ‘역사 경관’ 중 하나다.
지리산 기슭의 한 사찰인 법계사. 선조들이 지리산의 얼과 호흡하고 공명하며 펼쳐낸 ‘역사 경관’ 중 하나다.
 그리고 뱀사골에서 뱀이란 땅이름 역시 뱀의 형상을 한 쿤달리니 샤크티와 대비될 수도 있다. 지리산의 신비로운 곳 ‘달궁’이란 지명은 태궁에 유비되는 ‘땅(딸->달)의 자궁’으로도 풀 수 있지 않을까? 풍수에서도 지리산은 우리 땅에서 음(陰)의 극(極)이고, 국토의 자궁의 표상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중후한 지덕(地德)을 갖춘 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찌 지리산의 형세에서만 연유했을 뿐이겠는가?

지리산 화개동천 어딘가에는 청학동과 같은 신선 세계의 이상향도 숨어 있고, 법계사, 화엄사 등의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골짝마다 법계와 화엄의 극락정토를 구현해 놓은 사찰들이 당간을 높이 세우고 있으며, 천지를 한 몸으로 지탱할 듯한 꼿꼿한 기개를 갖춘 푸른 선비들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들이 모두 지리산의 얼과 호흡하고 공명하며 정신문화를 펼친 역사의 산 증인이요 생생한 역사 경관들인 것이다. 

지리산의 정신사에서 지리산인(智異山人)의 한 사람이라고 꼽을 만한 남명 조식(1501-1572)이 절창한 시를 한번 읽어본다.
 
천근이나 되는 저 종을 보게나(請看千石鍾)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네(非大無聲)
두류산(지리산)이 그렇지 아니한가(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네(天鳴猶不鳴)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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