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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지리산 지형지질

월간산
  • 입력 2005.02.03 10:57
  • 수정 2018.12.1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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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과 계곡이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한 이유?
태평양판 횡압력 받아 생긴 균열이 집중 침식된 탓

백두대간이 남쪽으로 뻗어내리다가 태백산에 이르러 그 방향을 서남쪽으로 틀어 달리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일구어놓고, 남해 바다에 이르기에 앞서 마지막 여세를 몰아 다시 한 번 힘차게 용솟음하며 이 땅에 또 하나의 명산을 만들어 놓았다. 바로 지리산이다.

여인네들 치마 주름처럼 아름답게 휘감아도는 능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산자락, 유장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태고의 생기를 잃지 않은 원시림, 선계를 드러내듯 장엄하게 펼쳐지는 운해…. 자연의 형상으로서 지리산은 더할 나위 없이 중후하고도 장엄한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하늘에서 본 지리산. 지리산의 능선과 계곡은 하나같이 북동~남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는 해양 지각인 태평양판의 횡압력을 받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본 지리산. 지리산의 능선과 계곡은 하나같이 북동~남서 방향을 취하고 있다. 이는 해양 지각인 태평양판의 횡압력을 받아 그와 같은 방향으로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경계 상에 위치하여 경남 함양군·산청군·하동군, 전북 남원시, 전남 구례군 등 3개도 5개 시·군에 걸쳐 있으며, 산지 둘레가 약 300km를 넘는 약 800여 리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국립공원 면적 485㎢)을 아우르고 있다. 또한 남한 내륙의 최고봉인 천왕봉(1,915m)에서 노고단(1,507m)까지 약 45km 장장 100리에 걸쳐 동서로 길게 뻗은 주능선이 하나의 산맥을 이루고 있으며,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 준봉을 20여 개나 거느리고 있어 과히 남녘의 지붕이라 할 만하다.

20억 년 된 편마암층이 거대한 육산(肉山) 형성

지리산의 산세를 보면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기암괴석이 별천지를 연출하는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등의 산세와는 확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완만한 산릉으로 이어져 부드럽고 유려해 보이는 산세는 마치 어머니의 품과 같은 편안한 느낌을 갖게 한다.

지리산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지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암석인 편마암에서 찾을 수 있다. 암석의 절리에 따른 풍화의 발달이 탁월하여 절리면을 따라 복잡한 형태를 이루는 화강암 지형과는 달리, 편마암은 암석의 구조가 수평적으로 단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지리산에서는 수분의 침투가 쉽지 않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된 설악산 등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그런 독특한 기암절벽 등의 경관을 찾아보기 어렵다.

지리산 일대를 이루는 편마암은 그 형성 연대가 약 20억 년~18억 년 전의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땅덩어리 가운데 하나인 영남지괴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편마암이 오랜 세월을 두고 수평적으로 표층에서 침식과 풍화를 받아 산지 전 사면에 걸쳐 일정한 두께의 피복물이 쌓였기 때문에 지리산의 토양은 층후가 두터운 편이다. 따라서 기반암의 노출이 적은 가운데 전체적으로 밋밋하고 평탄한 느낌을 주어 거대한 육산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지리산 일대에 식생의 안착을 보다 쉽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밀도와 영속성을 높여 울창한 삼림지대를 이루는 데 기초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리산지 가운데 화강암이 관입한 악양과 청학동 등 일부 지역은 심층 풍화를 받은 기반암이 부분적으로 노출되어 다양한 암석지형을 띠고 있기도 하다.

2300만 년 전 횡압력 받을 때 지리산도 융기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동서로 밋밋한 모습으로 이어지는 지리산의 주능선 자락에는 남과 북으로 15가닥의 지능선이 펼쳐져 있고, 그 능선과 능선 사이에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계곡들이 발달해 있다. 그런데 그 능선과 능선 사이로 발달한 계곡, 즉 북으로 달궁계곡, 심원계곡, 뱀사골계곡, 백무동계곡, 칠선계곡과 남으로 피아골계곡, 천은사계곡, 화엄사계곡, 선유동계곡이 놓인 방향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같이 북동~남서 방향을 취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리산의 주능선을 제외한 지능선들과 그 사이의 계곡들 모두 한결같다. 어떤 연유일까?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북사면. 지리산의 산세가 완만한 산릉을 이룬 것은 암석의 구조가 수평적으로 단단하여 침식에 강한 편마암으로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천왕봉에서 본 지리산 북사면. 지리산의 산세가 완만한 산릉을 이룬 것은 암석의 구조가 수평적으로 단단하여 침식에 강한 편마암으로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대륙지각은 북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해양지각인 태평양판의 횡압력을 받아 지각에 많은 구조선과 단층선이 형성되었다. 이는 얼음을 쇠망치로 내려치면 깨지기에 앞서 얼음에 금이 가듯이 한반도가 속해 있던 대륙지각 또한 태평양판에 의해 막대한 횡압력을 받게 되면서 지각의 여러 곳에 단열선, 즉 금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금이 간 주 방향이 북동~남서 방향을 이루었던 것이며, 이 금이 간 자리로 빗물이 흘러 지표를 깎아내어 하천을 이루었던 것이다. 지리산 일대에 발달한 단열선 위로 흐르던 하천 또한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산자락을 깎아내기 시작하여 지금의 깊은 골짜기를 이루었다.

특히, 2300만 년 전 동해의 해저 지각이 팽창하면서 한반도 지각을 밀어붙이자 횡압력을 받은 한반도는 대대적인 습곡 및 요곡 작용의 영향으로 융기하게 되었다. 이때 한반도 땅덩어리는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하여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동고서저의 경동(傾東)지형을 이루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소백산맥 군(群)의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지리산 또한 이 당시 전체적으로 융기하여 높이 솟아올랐다. 지리산의 능선 곳곳에 평탄하게 남아 있는 고위평탄면들이 그 증거가 되는데, 잔돌이 많은 평야와 같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세석평전(細石平田)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백산맥의 형성과 함께 지리산 일대의 지반의 융기는 하천의 물길을 더욱 급하게 만들어 지금의 깊은 골짜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지리산 남사면의 법천계곡. 지리산 북족에 비해 일조량이 강하여 동결과 융해에 따른 기계적 풍화 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에 골짜기에 암설과 괴력 등이 많다.
지리산 남사면의 법천계곡. 지리산 북족에 비해 일조량이 강하여 동결과 융해에 따른 기계적 풍화 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에 골짜기에 암설과 괴력 등이 많다.
 

지리산은 천왕봉에서 노고단에 이르는 동서 약 45km의 주능선을 경계로 남과 북 사이에 기후, 식생, 지형 등에 있어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일차적으로 주능선을 분수령으로 북쪽과 동쪽의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들고, 남과 서쪽의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들어 수계가 구분된다.

주능선 경계로 남북간 지질과 기후 큰 차이

그리고 남북 간에 기온과 강수량 등에서 있어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연평균기온을 보면 남쪽은 13℃, 북쪽은 12℃를, 여름철(6-8월) 평균기온은 남북 모두 24℃인 반면 겨울철(12-2월)은 북쪽이 0℃ 이하이나 남쪽은 영상을 유지하여 남쪽이 더 높은 기온을 보인다.

지리산의 연간 강수량은 약 1,200mm로서 여름철에 강수량의 60% 가량이 집중된다. 특히 여름철 남쪽 사면에는 남해를 통과하며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주능선의 남쪽 사면에 부딪히며 지형성 강수를 일으켜 1,600~1,800mm에 달하는 막대한 비를 퍼붓기도 한다. 그래서 섬진강 상류에 해당되는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서 강수량이 가장 많은 최다우지에 속한다.

반면, 북사면은 여름철 비가 적은 데 비하여 겨울철 북서계절풍 의해 눈이 많이 내리는데, 그 양이 남쪽에 비해 월등히 많다. 철선계곡과 한신계곡은 겨우내 약 12m 정도의 적설량을 보이는데 이듬해 5월경에야 완전히 녹는다.

집중호우로 인해 폐허가 된 피아골 하류(98년). 남해를 통과하며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지리산 주능선의 남쪽 사면에 부딪히며 지형성 강수를 일으켜 1,600~1,800mm에 달하는 막대한 비를 퍼붓기도 한다.
집중호우로 인해 폐허가 된 피아골 하류(98년). 남해를 통과하며 수증기를 잔뜩 머금은 대기가 지리산 주능선의 남쪽 사면에 부딪히며 지형성 강수를 일으켜 1,600~1,800mm에 달하는 막대한 비를 퍼붓기도 한다.
 

일조량 또한 남쪽이 북쪽에 비해 더 많은데, 기온과 강수량을 포함한 이러한 기후 특성은 지리산의 식생의 남북간 분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지리산의 수직적 삼림분포는 해발고도 1,300~1,400m에서 온·한대림의 경계고도를 이루는데, 북사면의 경우는 1,300m에서, 이보다 따뜻한 남쪽은 1,400m에서 그 한계를 이루고 있다.

남북 간의 기후 차이는 식생뿐만 아니라 지형의 차이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북쪽보다 여름철 강수량이 많은 남쪽은 지표의 토양 침탈이 보다 빨리 일어나 암괴의 노출이 심하다. 뿐만 아니라 북쪽에 비해 일조량이 강하여 동결과 융해에 따른 기계적 풍화작용이 활발하기 때문에 골짜기에 암설과 괴력 등이 집중 분포하고 있다. 특히, 화강암이 분포하는 피아골과 청학동 등지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반면, 북사면은 남쪽에 비해 겨울철 눈이 많은 영향으로 봄철에도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수분 침투가 어려운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때문에 표층 풍화가 전 사면에 걸쳐 고르게 진행되어 일정한 두께의 토양층을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식생 발달에 유리한 특성을 지니게 되어 한반도 최고의 울창한 삼림지대를 이룬 것이다. 북사면은 기반암의 노출이 적으며, 계단형을 이루는 남쪽 사면과 달리 산정에서 골짜기까지 직선을 이루는 평활한 모습을 띠고 있다.

지리산은 한국전쟁 전후를 제외하고는 다른 산들에 비해 비교적 인위적인 피해를 적게 입은 산에 속한다. 그래서 지리산은 현재 생태계의 보고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한 자연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참화를 벗어나면서 점차 울창한 숲을 이루며 자연성을 되찾게 되었던 지리산은 다시금 그 자연성이 훼손당하고 있어 안타깝다. 등산로가 깊이 패어나가고, 등산로 주변 식생이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희귀 수목과 초본을 몰래 캐가거나 고로쇠나무의 수액을 채취하기 위한 파이프라인들이 골짜기마다 어지럽게 널려 있다.

/글 이우평 지리학자·교사


<환경>
섬진강이 북서~남동방향으로 긴 것은
기반암의 주구조선 따라 물길 형성되었기 때문

좁고 길게 이어진 하곡을 보이는 섬진강.
좁고 길게 이어진 하곡을 보이는 섬진강.
 전북 진안읍 백운면 마이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지리산을 끼고 돌아 흐르는 섬진강은 남도의 동맥이라 할 수 있다. 212.3km의 섬진강 물줄기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에서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어 두 지방의 정취를 함께 느끼게 한다.

본래 섬진강은 일찍이 고운 모래로 유명하여 모래가람, 다사강(多砂江), 사천(砂川)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한편, 섬진강은 두꺼비 섬(蟾), 나루 진(津) 자를 사용하고 있어 우리말로는 두꺼비나루가 되는데, 이는 이 강 일대에 전하는 두꺼비와 관련한 이야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섬진강의 가장 큰 지형적인 특징은 다른 하천들과는 달리 북서~남동 방향으로 좁고 길게 이어진 하곡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는 이 일대의 기반암이 풍화에 강한 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유수에 의해 큰 변형을 받지 않은 가운데 기반암에 발달한 주구조선을 따라 하도가 형성·유지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섬진강의 물이 다른 하천에 비해 매우 맑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유 하중으로 실리는 실트류나 점토류가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토록 맑은 물을 자랑하던 섬진강은 그동안 곳곳에서 무분별하게 이루어진 골재 채취로 인하여 하상이 낮아지면서 바닷물이 역류하게 되자 하구의 생태계가 파괴되는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예부터 풍부했던 재첩, 황어, 은어, 참게, 장어 등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이렇듯 문제가 심각해지자 1999년 섬진강을 끼고 있는 구례, 하동 등을 포함한 11개 지방자치단체들은 섬진강 모래 채취를 일시 중단하는 휴식년제를 도입하기로 합의했다. 이후 ‘섬진강을 살리자’는 사회적 목소리가 점차 힘을 얻게 되자 2004년 11개 지방자치단체들은 ‘섬진강의 모래 채취를 영구히 금한다’는 내용의 보다 진전된 합의를 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약 30년에 걸쳐 수많은 모래더미들이 실려 나가며 상처투성이가 된 섬진강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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