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지리산 역사지리

[424호] 2005.02
입력 2005.02.07 10:50 | 수정 2018.12.17 16:30

수많은 격전장이자 생명을 보전한 현장
국토의 남쪽을 지키고 수호하는 요충지로 역할

지리산의 역사·지리는 거시적으로 지리산의 자연사와 생태사, 그리고 지리산에 살았던 사람들이 산에 뿌리내리면서 빚어낸 사상사와 문화사, 지리산을 무대로 전개된 전란 및 정치사적 소용돌이 등 유 무형의 역사와 지리적 내용, 그리고 그 변천 과정을 일컫는 광범위한 말이다.

그러므로 지리산의 역사·지리에 대한 접근은 지리산에 관한 문헌사뿐만 아니라 유적 유물 등 현지 역사경관에 대한 총체적인 해독이 병행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다만 지리산의 자연적이고 역사·지리적인 환경조건과 입지 특성에서 그 실마리를 풀어나갈 수 있다.



 

지리산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이 얽힌 구형왕릉.
지리산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이 얽힌 구형왕릉.

지리산의 역사·지리를 푸는 단서로서 산이름의 호칭을 들 수 있다. 왜냐하면 이름에는 대상의 역사적 실상과 이름을 부른 사람들의 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과정에서 지리산은 여러 가지 호칭으로 일컬어져 왔는데,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들어 보자면, 신선사상의 발로이자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 백두산의 맥이 남으로 흘러내려왔다는 백두대간의 전통적 산맥인식이 드러난 두류산이 있다. 또한 지리산 산세와 풍모의 미학적 장중함을 드러내는 표현인 덕산(德山), 그리고 민중적 변혁의식의 장소성이 반영된 불복산(不伏山)과 반역산(反逆山) 등도 지리산의 또 다른 별칭이었다.

지리산이라는 명칭의 역사·지리적 기원을 추적하는 문헌상의 단서로서, 신라 정강왕 2년(887)에 최치원이 쓴 진감선사대공탑비 내용 중에 ‘智異山'이란 표기가 있다. 한편 삼국사기 권32, 잡지 제사 조에는 신라에서 삼산오악 명산대천을 나누어 대, 중, 소사를 지낸다고 했는데, 여기서 지리산은 ‘地理山’이라는 명칭으로 오악 중의 남악에 지정되어 등장한다.

그밖에 토함산(동악), 계룡산(서악), 태백산(북악), 팔공산(중악)이 모두 오악으로 정해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조에 이어 조선조에서도 여전히 지리산은 남악으로 지정됐으며, 그 외에 삼각산(중악), 송악(서악), 비백산(북악) 등으로 설정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은 통일신라, 고려, 조선왕조에서 국토의 남쪽을 지키고 수호하는 요충지의 산으로 인식됐음을 알 수 있다.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은 산”

지리산은 지정학적 요충지로 말미암은 격전장이기도 하였지만 지리산 특유의 깊은 골과 풍부한 수원 및 온화한 기후 조건으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골짝 마다 깃들고 마을을 이루며 생명을 보전한 현장이라는 측면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 하황 마을. 원주민의 구성은 임란 등의 전란과 정치적 혼란을 피해 은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남원시 산내면 중황리 하황 마을. 원주민의 구성은 임란 등의 전란과 정치적 혼란을 피해 은거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역사 이래로 지리산의 전란사를 굵직한 것만 살펴보자. 삼한과 가야 및 삼국시대에는 국경의 접변 지대로서 싸움터의 무대가 됐고, 고려 때는 왜구의 침입과 민란의 현장이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대변되는 침략의 밀물을 겪어야 했고, 근대의 동학민중운동과 건국 이후의 여순반란과 한국전쟁에서 피로 얼룩진 전장터가 됐다.

구례의 석주관과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섬멸한 남원의 황산대첩비지, 여원치와 피아골 등은 왜적을 막던 지리산의 역사적 현장이며, 특히 석주관에는 정유재란 때 순절한 의사의 위패를 모신 칠의단과 승병 및 의병을 모신 비석이 당시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다. 더욱이 지리산은 현대사에 접어들어 1948년 10월 여순반란에서 시작하여 1955년까지 계속된 좌우 대립의 치열한 격전으로 수만 명의 목숨이 스러진 뼈아픈 역사도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한편 지리산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피난과 보신지의 터전이기도 했다. 이규경(1788-?)도 ‘청학동 변증설’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형승은 험조한데, 산이 서리고 물이 감돌아 양의 창자 같은 곳이 아님이 없고, 그리하여 사이사이에 동천(洞天)과 복지(福地)가 많다’고 했으니 바로 골짝마다 삶터를 일굴 수 있는 지리산의 지형지세를 염두에 두고 일컬은 평인 것이다.

조선 중기의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도 지리산의 주거환경 조건을 지적하기를, ‘지리산은 흙이 두텁고 기름져서 온 산이 모두 사람 살기에 알맞다. 산 안에 백리나 되는 긴 골짜기가 있어 바깥쪽은 좁으나 안은 넓어서 가끔 사람이 발견되지 못한 곳도 있다’고 적고 있으니,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피난지와 은거지로서 적합한 지리산의 자연지형적 조건을 잘 나타낸 것이다.

 

1.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 2. 국가적 요충지로서 지리산의 위상을 대변하는 화엄사 각황전.
1.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 2. 국가적 요충지로서 지리산의 위상을 대변하는 화엄사 각황전.
 

피세피병지로서 지리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역사시기에만 보아도 마한으로 거슬러 오른다. 마한의 도성이 지리산 달궁으로 피난했다는 설이 전해지며, 산청에 있는 구형왕릉은 신라왕국을 피해 6세기 경에 지리산 자락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가야국의 전설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 자락 골골이 숨어들어선 전통마을의 역사적 기원이나 형성 동기를 살펴보면 많은 경우가 조선시대의 전란을 피해서 입지하고 있다.

이렇듯 지리산의 온화한 기후와 맑고 충분한 수원, 농경에 필요한 토양 조건, 그리고 생태적인 풍요로움은 이곳이 한라산 혹은 변산(영주), 금강산(봉래)과 함께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여겨졌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게다가 외부와 차단된 깊은 골짜기와 뛰어난 자연경관은 정감록의 십승지나 청학동 전설을 비롯한 이상향 관념이 생겨난 조건이 됐다.

그밖에도 의상의 청구기에서 ‘두류산은 1만의 문수보살이 머무는 세계인데, 산 아래 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은 공손하다’고 하여 지리산을 불국정토로 보았고, 한편 ‘지리산은 태을(太乙)의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선계(仙界)’라고 하여 신선 세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새로이 유입된 문화 발상지 역할도 

지리산의 지리적 입지는 국가적인 요충지로서의 중요성과 아울러 국토의 남쪽 변방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고 있었다. 아울러 바다에 인접해 외국의 선진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새로이 유입된 문화의 발상지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지리산 권역에서 불교문화의 역사·지리적 전개 양상을 보더라도 그렇다. 통일신라의 국찰이자 화엄십찰의 하나인 구례 화엄사의 입지는 국가적 요충지로서의 지리적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신라 말에 새로이 중국에서 유입된 선종의 구산선문 중에 실상산문의 실상사, 동리산문의 태안사 등 2개 산문 역시 지리산 권역에 동하였던 것이다.

통일신라의 화엄십찰에는 지리산 화엄사 외에 팔공산 미리사, 소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와 보광사, 서산 보원사, 계룡산 갑사, 금정산 범어사, 비슬산 옥천사, 모악산 국신사, 삼각산 청담사, 삭주 화산사 등이 있었는데, 모두 지리적 요충지의 주요 교통로 인근에 입지하거나 왕도 주변부의 지방행정 중심지에 입지해 국가의 영토를 수호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선종 구산선문중 동리산문의 본거였던 태안사 부도지.
선종 구산선문중 동리산문의 본거였던 태안사 부도지.
 

국토의 남쪽에 크게 둥지를 틀고 있는 지리산의 입지적 무게는 중심지에 대한 변방지역의 독립성과 근거지를 확보하는 장소성을 띤다. 따라서 지리산은 지배층의 견지에서는 반역지의 속성이 있었지만, 민중의 입장에서는 변혁의 근거지요 산실이기도 했다. 구산선문의 2개 산문이 지리산에서 일어난 통일신라 말 불교의 변혁 과정도 그러했고, 동학을 위시한 근대의 민중 운동은 그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리산의 호칭으로서 불복산(不伏山), 혹은 반역산(反逆山)이라는 것도 있다. 이는 이성계가 조선 창업의 뜻을 품고 명산을 순례하며 기도할 때 유독 지리산만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생겨난 이름으로, 지리산의 변혁적 장소성에 대한 지배계층의 의식을 잘 드러내어 주는 단면이다.

미학적인 견지로 지리산의 역사·지리를 살펴보자면, 서산대사가 지적했듯이 지리산은 한국의 산에서 산세의 장중함(壯)과 후덕함의 대표격이다. 그리하여 덕산(德山)이라는 별칭까지 얻기도 했다.

주지하다시피 지리산 권역에서 태동된 판소리의 동편제는 서편제와는 대조적으로 지리산 산세의 웅혼함을 닮아서 메아리쳐 이루어진 음률이었다. 그리고 남명 조식(1501-1572)의 장중한 사상적 무게와, 그가 일상에서 견지한 공경(敬)과 의로움(儀)은 61세 이후로 덕산 자락에 터를 정해 산천재에 거처하고 스스로를 방장산인으로 여기면서 지리산과 한 몸이 된 결과이기도 했다.

남명의 문하에서 의병대장인 곽재우를 비롯해 조종도, 정인홍, 김효원, 최영경 등의 수많은 인물이 지리산의 뭇 봉우리처럼 배출됐고, 남명의 사상은 1862년의 진주민란, 동학란 등의 위정척사운동과 3월 독립운동, 그리고 형평사운동 등의 정신적 원동력으로 이어졌다.

매천 황현 역시 구한말 어지러운 시국에서 관직을 포기하고 지리산 기슭으로 낙향했는데, 1905년 을사보호조약에 이어 1910년 한일합방이 체결되자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함으로써 지리산의 올곧은 정신을 떨쳤다.

무엇보다 생명을 기르는 어머니 산

무엇보다도 지리산은 생명을 기르는 어머니의 산이었다. 지리산의 생태적 조건이 남한에서 한라산에 이어 가장 많은 생물종의 다양성을 갖추고 있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지리산 권역에는 조선시대의 지방행정 중심지인 고을(邑)만도 1목, 1부, 2군, 5현 등 10여 고을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고을들은 지리산을 고을의 진산(鎭山), 혹은 고을의 주산이 비롯되는 조산(祖山)으로 설정했다.

그밖에도 지리산 기슭과 골짜기에 터둥지를 틀고 있는 수많은 전통 마을들을 보더라도 지리산의 지형과 기후적 환경은 사람과 생명을 키우는 어머니의 산으로 대변될 배경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지리산의 모성적 장소성은 고대적인 신화와 의례에서도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가 지리산에 하강해 딸 여덟 명을 낳아서 팔도에 보내 민속을 다스리게 했다는 전설이 전해질 뿐만 아니라, 김종직(1431-1492)의 유두류록에 의하면 석가여래의 어머니 마야 부인을 산신령으로 모셨다는 언급도 나온다.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남악사에 봉안했고, 고려 때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지리산의 산신으로 성모사에 봉사한 사실도 어머니 산으로서의 지리산의 역사적 상징 과정을 잘 표현해 준다.

지리산은 조선시대 수많은 사대부들의 유람과 기행을 통해 찬탄됐는데, 그 중 일부를 읽어 본다.

‘아, 지리산은 숭고하도도 빼어나다. 중국에 있었다면 반드시 숭산이나 대산보다 먼저 천자가 올라가 하늘과 땅에 제사하고 옥첩의 글을 봉하여 상제에게 올렸을 것이다.’(김종직의 유두류록)

‘두류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해 면면이 4천 리나 뻗어온 아름답고 웅혼한 기상이 남해에 이르러 엉켜 모이고 우뚝 일어난 산으로, 열두 고을이 주위에 둘러 있고, 사방의 둘레가 2천 리나 된다. 안음(안의)과 장수는 그 어깨를 메고, 산음(산청)과 함양은 그 등을 짊어지고, 진주와 남원은 그 배를 맡고, 운봉과 곡성은 그 허리에 달려 있고, 하동과 구례는 그 무릎을 베고, 사천과 곤양은 그 발을 물에 담근 형상이다. 그 뿌리에 서려 있는 영역이 영남과 호남의 반 이상이 된다.’(유몽인 1559-1623의 유두류산록)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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