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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남원 문화

월간산
  • 입력 2005.02.15 11:09
  • 수정 2018.12.17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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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의 아픔과 사랑 노래 가득한 곳
백두대간으로 인해 문화현상도 다양해져

남원에는 전란의 아픔과 사랑의 노래가 가득하다. 그것은 백두대간을 머리에 이고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 바 크다. 남원을 예전에는 ‘고룡(古龍)’이라 했다. 그러다 통일신라 685년에 5소경 중 하나인 남쪽 지방의 서울이라 하여 남원경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흥부가 태어났다는 전북 남원시 동면 성산 마을 입구에는 흥부부부가 박타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흥부가 태어났다는 전북 남원시 동면 성산 마을 입구에는 흥부부부가 박타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더워, 추워’와 ‘더버, 추버’

남원에는 2개의 큰 물줄기가 있는데, 그 분수령이 백두대간이다. 하나는 남원 시내를 가로질러 곡성과 구례를 거쳐 섬진강으로 흘러가는 요천이고, 다른 하나는 운봉, 산내, 마천, 산청을 거쳐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만수천이다.

만수천의 발원지 덕산저수지 옆에 주천면 덕치리 노치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으로, 비가 와 왼쪽에 떨어지면 주천으로 흘러가고, 오른쪽으로 내리는 비는 운봉으로 흘러간다. 마을 가운데에서 물의 흐름이 갈라진다.

마을의 몇 집은 주천면과 운봉읍의 경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그래서 주방이 있는 아래채는 운봉에 속하고, 안방은 주천면에 속한다. 아침은 운봉에서 먹고, 잠은 주천면에서 자는 희한한 풍경이 생긴다.

노치 마을에서 여원재, 고남산, 봉화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생활문화권을 구별시키는 경계선이었다. 동쪽의 운봉, 인월, 아영, 산내는 역사적으로 신라에 속했으나, 서쪽의 주천, 이백, 산동은 백제였다.

백두대간에 의한 문화권의 구분을 오늘날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언어다. 백제였던 시내권은 전라 방언을 사용하지만, 신라였던 동부권은 경상 방언에 가깝다. 동부권은 경남 함양과 교류가 빈번해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남아 있다. 동부권 지역 주민들이 외지에 가면 경상도 사람이냐는 소리를 듣곤 한다.

사용 어휘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시내에서는 ‘더워, 추워’라고 말하는 반면에 동부권에서는 ‘더버, 추버’라고 한다. 이것은 옛말 ‘다, 다’의 ‘’이 전라 방언에서는 ‘ㅇ’으로 변한 반면 경상방언에서는 ‘ㅂ’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정유재란의 아픈 상처 만인의총과 오리 노래탑

백두대간을 경계로 한 남원에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역사가 있다. 남원은 지리적 여건상 군사 요충지여서 크고 작은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신라와 백제의 국경선으로 싸움이 잦아 산성이 많은데, 남원성과 교룡산성이 대표적이다. 고려 말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친 황산대첩비와 피바위, 정유재란 때의 만인의총, 근대에 들어서는 동학농민전쟁, 현대에 와서는 6.25 때의 빨치산 등 전란의 아픈 상처나 호국의 몸부림이 유난스러웠다.

 

전남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워졌던 황산대첩기념비. 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정으로 쪼인 뒤 조각났다.
전남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에 세워졌던 황산대첩기념비. 대첩비는 일제에 의해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게 정으로 쪼인 뒤 조각났다.

정유재란 당시는 남원을 지키기 위한 남원성 싸움이 치열했다. 남원은 전라도 관문으로 왜군이 북상하는 데 꼭 확보해야만 하는 매우 긴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패배한 것은 전라도 지방을 점령하지 못한 데 있다고 판단, 정유재침 시에는 전라도 지방을 점령한 후 한양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조선은 수많은 병사들과 백성들이 힘을 합쳐 남원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남원 사람들은 왜군과의 싸움에서 참담한 패배를 맛보아야만 했다. 전라 병사와 구원병으로 온 명나라 병사, 그리고 성안에 있던 주민 등 총 10,000여 명이 죽고, 남원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후 순절한 시신을 한 곳에 모아 합장했는데 이것이 만인의총이다.

왜군은 남원성 싸움 후 성안에 남아 있던 도자기 기술자인 도공 70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도공, 목공, 인쇄공 등 손재주를 가진 모든 사람을 납치해 갔다. 심지어는 조선의 도공을 끌고 가서 조선의 도예 기술이 끊길 정도였다.

일본 역사에서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부른다. 조선의 도공들은 대한해협을 지나 큐수 남단, 지금은 가고시마로 불리는 사쓰마 해변에 도착했다. 그러한 사람들 가운데 심수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1.일본 텐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시습 초상. 2.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 3.동학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
1.일본 텐리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시습 초상. 2.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 3.동학교조 수운 최제우(1824~1864) 선생.
 

그들은 400년 동안 수많은 시련을 겪어 오면서도 혈통과 한국의 얼을 꿋꿋하게 간직해왔다. 그동안 그리움이 사무쳐 고향을 잊을 수 없던 조선 도공들은 자신들이 한민족임을 나타내는 단군 묘인 다마야마궁(玉山宮)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9월14일이 되면 큰 제사를 올리는데, 이 때 우리 음 그대로 망향의 노래 ‘오리 오리소서’를 부른다. 이 노래는 ‘새로 돌아오는 내일은 오늘과 같이 화평한 날이 되게 해달라’는 송축의 노래로 평민층부터 궁궐에서까지 부르던 노래다.

오리 오리쇼셔
일에 오리쇼셔
졈그디도 새디도 마시고
새라난 식에 오리쇼셔
(오늘이 오늘이소서 / 매일 오늘이소서 / 저물지도 새지도
 말으시고 / (날이) 새거든 / 주야장상 오늘이소서)
-<양금신보>

이성계의 황산대첩비와 여원재

운봉을 지나 인월로 조금 가면 왼쪽에 황산대첩비가 있는 화수리 비전 마을이 있다. 비전 마을을 지나 조금 더 가면 왼쪽에 황산이라는 작은 산이 있다. 황산은 운봉의 길목에 있는 산이고 운봉 평야지대를 제압할 수 있는 산이다.

고려 말에 함양과 운봉을 노략질하며 인월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장수 아지발도를 이성계가 이 곳에서 섬멸했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투구를 활로 쏘아 입을 벌리게 하고, 그 때 이지란이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죽였다. 적장이 죽자 적의 기세는 단번에 꺾여 고려군들이 크게 격파했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황산대첩비 건너편 높은 산에는 철쭉이 만발하여 장관인 바래봉이 있다. 바래봉은 스님들의 밥그릇인 바리때를 엎어놓은 모습과 닮았다고 하여 생긴 것이다. 바래봉 아래에는 운봉목장의 초원이 펼쳐져 있는데 이국적인 풍경이다.

남원에서 함양으로 가는 국도에 해발 485m의 여원치가 있다. 황산대첩시 여원치에서 이성계 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받았다. 그녀는 왜장 아지발도가 자신을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자 칼로 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후에 이성계는 노파가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산신각을 지었다. 지리산 산신령은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고, 이곳을 여원치라 부르게 됐다.

연재라고도 불리는 이 고개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남원 접주 김개남 장군이 이끌던 동학군이 처참하게 패한 곳이기도 하다. 운봉의 박봉양(일목장군)이 진주와 함양에서 원병을 받아 방아치(장교리에서 부절리 가말재로 넘는 고개) 전투에서 동학군을 대파했고, 이어 11월 관음치(가동에서 대기리로 넘는 고개)에서 재차 승리해 그 기세를 몰아 남원 동학군을 물리쳤다.

남원은 동학 창시자 최제우의 은둔 포교지이자 수행지이기도 하다. 남원의 교룡산성 은적암은 최제우가 동학경전을 편 곳이며, 이곳에서 기거하면서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동학이라 고치고 유·불·선, 인내천을 주창했다.

춘향전과 흥부전도 백두대간이 풀어냈다

창극 춘향전의 한장면.
창극 춘향전의 한장면.
 산이 깊으면 품어내고 싶은 것도 많은가 보다. 그만큼 할 말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지리산이 굽어보는 남원은 문학의 고장이다. 예전에는 구례도 남원에 속했는데, 백제 시대 때 이곳 이야기를 노래한 ‘지리산가’가 있다. 구례의 한 여인이 지리산 밑에서 살고 있었는데, 용모가 아름답고 부덕이 뛰어났다. 이런 소문을 들은 왕이 궁으로 데려가려 하자 그 여인은 ‘지리산가’를 지어 부르고 죽었다. 결국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아내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춘향전은 고대소설의 대표작이며. 판소리 12마당의 하나다. 춘향전은 처음 판소리로 생성되어 불리다가 나중에 소설로 정착됐다. 원각사(圓覺社) 이후에 창극이 됐으며, 그 뒤 신소설, 희곡, 연극, 영화, 시나리오, 뮤지컬, 오페라의 대본 등 다양한 장르로 개작됐다.

춘향전의 주제는 사랑이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신분을 초월한 사랑, 신분적 제약 극복의 의지가 담겨 있는 사랑이다. 그리고 흔히 춘향전에 표현된 사상으로 계급 타파나 신분적 저항, 또는 근대적 자각 등을 말하기도 한다.

춘향전의 배경인 광한루는 누각이고, 누가 있는 정원을 광한루원이라고 한다. 광한루 앞에는 신선사상이 반영된 영주섬, 방장섬, 봉래섬이 있고, 그 옆에는 유명한 오작교가 있다. 광한루 왼편으로 30여 기의 비석과 춘향사당이 대나무숲 속에 있다. 주천면 호경리 구룡계곡에 춘향묘와 육모정이 있다.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을 기리는 춘향제가 매년 5월5일에 열리고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 얼픔에 흥보가 살았는디’라고 하여 도계인 인월의 성산리와 아영의 성리가 흥부마을로 알려져 있다. 두 마을에는 흥부전을 연상시키는 지명들이 많이 있다. 성산리에는 제비가 흥부집을 맴돌았다는 마을 뒷산 연비봉, 흥부가 도승의 말에 따라 집터로 잡아 부자가 됐다는 흥부네 텃밭, 흥부가 놀부에게서 쫓겨나 짚신을 털며 아픈 다리를 움켜쥐고 신세를 한탄했다는 신털바위, 흥부가 제비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놓았다는 연하다리 등이 있다.

성리에도 흥부전과 관련된 지명과 설화가 있다. 지명으로는 놀부가 부자가 된 흥부에게서 화초장을 얻어 돌아가던 중 쉬었다는 화초장바위, 도승이 춘보에게 잡아준 집터인 고둔터, 춘보가 허기져 쓰러졌다는 고개인 허기재 등이 있다.

흥부전에 등장하는 중심 인물은 흥부지만, 놀부가 차지하는 비중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흥부와 놀부는 각기 다른 인생의 자세를 대변하는 인물이다. 흥부를 도덕적 인물로, 놀부를 반도덕적 인물로 평가한다. 그러나 흥부는 가난을 타개할 의지도 정열도 없이 주어진 운명에만 자신을 맡기는 소극적 인물이고, 놀부는 재산을 모으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이는 적극적 인물로 보기도 한다.

남원의 문학·문인-금오신화와 김삼의당과 혼불

1997년 7월 14일 서울 국립국악원 뒤뜰에서 가졌던 ‘혼사모’ 창립식. 왼쪽부터 김병종(화가), 김수남(사진작가), 김미숙(탤런트), 이기웅(열화당 대표), 안숙선(명창),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김경(종이 공예가), 한풍렬(화가), 김언호(한길사 대표), 전용복(칠 공예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1997년 7월 14일 서울 국립국악원 뒤뜰에서 가졌던 ‘혼사모’ 창립식. 왼쪽부터 김병종(화가), 김수남(사진작가), 김미숙(탤런트), 이기웅(열화당 대표), 안숙선(명창),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김경(종이 공예가), 한풍렬(화가), 김언호(한길사 대표), 전용복(칠 공예가) 등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은 김시습의 금오신화인데, 그 중 남원을 배경으로 한 만복사저포기가 있다. 이 작품은 만복사 절에서 양생이라는 노총각과 귀신 처녀가 3일간 사랑을 나눈 이야기다. 귀신 처녀는 왜구의 침입으로 가슴에 한과 슬픔을 지니고 죽은 사람이다. 귀신 처녀와 사랑을 나눈 양생은 처녀를 위해 지리산으로 들어가 그 처녀만을 생각하며 지냈다.

뛰어난 재능을 접어둔 채 방랑하며 세조의 정권을 거부하던 김시습이 한가롭게 사랑 이야기나 다루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보다는 생육신의 한 사람인 그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그리워하며 그를 위하여 절개를 지키겠다는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풀어놓은 이야기일 것이다.

김삼의당(金三宜堂)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남원의 조선시대 후기 여류시인이다. 주로 남원에서 활동한 주부시인으로, 명문거족의 자녀도 아니고 세인들의 관심을 끌만한 이야기도 없었던 평범한 사람이지만, 우리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김삼의당은 일상적인 농촌의 생활을 부부화애의 시, 자연교감의 시, 농촌생활의 시, 세시풍속의 시로 잘 표현하고 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풍속사를 10권의 대하소설에 담아낸 혼불을 쓰기 위해 최명희는 젊음을 고스란히 바쳤다. 민속학의 보고, 민족어의 산실로 칭송받는 혼불은 남원 사매면 노봉 마을의 몰락해가는 매안이씨 양반가를 지키는 며느리의 이야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힘겨웠던 삶과 인간의 보편적인 정신세계를 서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양반촌인 매안 마을과 매안이씨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들의 거멍굴이 소설 혼불의 무대다. 사매면 노봉 마을에 혼불문학관이 있다.

/글 서정섭 문학박사·서남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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