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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지리산 지명

월간산
  • 입력 2005.02.21 11:28
  • 수정 2018.12.1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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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골은 피(血), 뱀사골은 뱀(蛇)과 무관한 지명
둘 모두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이름 유래했을 것

‘가을에 붉은 단풍 봄꽃보다 고와라 / 천공(天公)이 나를 위해 뫼꽃을 꾸몄으니 /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마저 붉어라.’

조선 중종 때 학자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은 지리산의 삼홍소(三紅沼)를 보고 이 시를 읊었다. 읊는 이의 마음까지도 붉게 만드는 이 시는 지리산 단풍의 멋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 주고도 남는다.

 

단풍이 좋기로 유명한 피아골. 그러나 피처럼 붉다는 뜻의 이름이 아니다.
단풍이 좋기로 유명한 피아골. 그러나 피처럼 붉다는 뜻의 이름이 아니다.

피아골 속의 마을과 고개

지리산 피아골의 관문은 전남 구례군 토지면. 경남 하동에서 섬진강을 따라 19번 국도를 타고 북서쪽의 구례로 달리다가 화개장터 앞을 지나 2km쯤 더 간 외곡(外谷) 마을이 바로 그 곳이다.

이 마을에서 섬진강 큰 물줄기와 헤어져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연곡천의 작은 물줄기를 따라 오르면 피아골의 긴 골짜기가 주위의 갖가지 풍경을 펼쳐 보이며 산길을 안내한다. 목아재와 촛대봉이 반원형으로 터 준 골짜기를 오르면, 양쪽 산기슭에 기촌(燕谷), 가락골(楸洞), 중터(中基), 조동(助洞) 등의 마을들이 차례로 나타나면서 외진 산길의 적적함을 덜어 준다.

촛대봉 능선이 경남과 전남을 갈라놓았다. 옛날부터 두 도(道)의 사람들이 짚신을 끌고 오가던 가느다란 길 줄기들이 등성이를 나란히 얽어 느랏목, 뒷골재, 새끼미재 등의 고개들을 만들어 놓았다. 목아재를 감돌아 산길 왼쪽으로 비스듬히 발길을 꺾으면 조선시대에 원집이 있었다던 원터(院基)에 닿는다.

더 오르면 피아골을 만난다. 마을의 한자명은 직전(稷田), 피아골 골짜기를 직전계곡(稷田溪谷)이라고도 한다. 6?25 전후에 빨치산의 본거지이기도 했고, 영화 ‘피아골’의 주무대이기도 해서 우리 귀에 그 이름이 생소하지 않다.

세간에선 이곳이 임진왜란 때 많은 살상이 있었고, 한말의 격동기, 여순반란사건, 6?25 등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이곳에서 피를 많이 흘려 ‘피의 골짜기’란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피와 관련 없는 피아골

그러나, 피아골을 피(血)와 관련지어 땅이름의 원뜻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6?25동란 같은 때 피(血)를 본 곳이라고 해서 피아골이라고 했을 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도 이 곳이 엄연히 ‘피아골’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피아골을 ‘피밭골’이 원이름일 것이라고 단정 짓는 것도 경솔하다. 지리산뿐 아니라 전국에는 수십 곳의 ‘피아골’이 있는데, ‘피(稙)’와 전혀 관련 없는 것이 적잖게 있기 때문이다.

먼저, 피아골이란 땅이름을 가진 곳(주로 골짜기)을 둘러보자. 경기도 포천시 내촌면 마명리, 이동면 도평리 / 전북 임실군 관촌면 운수리, 삼계면 덕계리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반곡리 / 순창군 동계면 수장리 / 충남 부여군 초촌면 소사리 / 서산군 지곡면 연호리 / 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발리, 어의곡리 /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장재리, 내속리면 상판리 /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 /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

피아골과 비슷한 피아실, 피실(稷谷) 등의 땅이름이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고사리,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등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피를 꼭 ‘피’라는 음(音)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땅이름에서는 ‘비’가 격음화해서 ‘피’가 된 것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핏재(稷峙) 마을을 한 예로 들어보자. 이 마을은 원래 ‘빗재’라는 고개 밑에 있어 ‘빗재’로도 불리는데, ‘핏재’는 ‘빗재’가 격음화한 것이다.

뱀사골. 밴(가파른) 샅골(사이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쉽다.
뱀사골. 밴(가파른) 샅골(사이의 골짜기)에서 유래한 이름이기 쉽다.
‘핏재’는 ‘피(血)의 재’처럼 느껴졌던지 한자로 혈치(血峙)가 되었다. 이 혈치는 다시 설치(雪峙)로 구개음화되어 핏재 마을에서 단양읍 가칠미(佳山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붙어 있다. 주민들은 설치의 ‘설(雪)’이 ‘피’에서 나온 이름이라 하지 않고, 고개가 높고 응달져서 눈이 잘 녹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고개는 ‘피티재’로도 불린다.
·빗재 > 핏재 > 피티재
·빗재 > 핏재 > 血峙 > 雪峙
‘빗재’는 ‘빗긴(橫, 斜) 재’의 뜻이다. ‘빗’은 땅이름에선 거의 ‘비탈’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즉, 지명에서의 ‘빗은’ 지형이 바로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닌 기울어진 상태를 많이 가리키고 있다. 이 ‘빗’이 파생시킨 ‘빗나감’, ‘비탈(비알)’, ‘비스듬히’, ‘빗기다’, ‘빗금’ 등의 말들을 생각하면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빗’에서 나온 ‘비알’이란 말은 ‘벼랑(별+앙)’과 거의 뜻을 같이 하고 있는데, 이것은 ‘밸’, ‘배랑’, ‘빌’, ‘비랑’ 등의 방언으로도 옮겨갔다.

그렇다면, 옛 지명 중에 ‘빗?골(비?골)’이라는 곳을 여럿 볼 수 있는데, 이 뜻도 어렵지 않게 짐작해 낼 수가 있잖을까. 그리고, 이것이 ‘비아골’로 음(音)이 쉽게 변해갈 소지가 있다는 것도. 또, 한 발 더 나아가 앞의 설명에서 ‘빗재’가 ‘핏재’로 변한 것처럼 ‘피아골’까지 옮겨갈 수 있다는 것도.

전국에는 ‘비아골’이라 하는 곳이 무척 많은데, 비탈 심한 골짜기의 뜻으로 붙은 것이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지명(비아골)을 ‘피아골’로도 부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경북 안동시 와룡면 이상리, 영덕군 남정면 남호리, 전남 순천시 승주읍 서평리 등에 있는 골짜기인 ‘비아골(비앗골)’ 등이 그것이다.

필자는 20년 전에 출판한 <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저서에선 지리산의 피아골을 ‘피밭골’에서 나왔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설명한 일이 있다. 그러나, 현지답사나 문헌 자료 등의 조사를 통해 이와 유사하거나 똑같은 지명이 많음을 보고, 지금은 그 설명이 백번 옳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지리산 일대에는 40여 곳에 뱀 관련 지명이 깔려 있다. 지리산에서 모은 뱀 지명들을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북서쪽(전북 남원쪽) : 비암쏘(산내면 대정리, 덕동리, 부운리 등 여러 곳) / 뱀사골(산내면 부운리) / 비암등(동면 서무리).
남서쪽(전남 구례쪽) : 비암재(巳浦?산동면 관산리) / 뱅모링이(산동면 이평리) / 밴들(산동면 계천리) / 비암새(토지면 내동리) / 비암바위(토지면 외곡리) / 비암바위(광의면 수월리).
북동쪽(경남 함양쪽) : 배암날모랭이(마천면 군자리) / 배암골(휴천면 태관리, 함양읍) / 뱅목안(휴천면 금반리).
남동쪽(경남 산청?하동쪽) : 뱀밧골(산청군 시천면 내대리) / 뱀거리몬댕이(시천면 동당리) / 배양이(삼장면 내원리) / 배암다리(삼장면 대포리) / 배암다릿걸(삼장면 대포리) / 뱅이재(삼장면 대포리) / 배암머리(삼장면 홍계리) / 배암사재(=뱀사재 :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 뱀몬당(하동군 화개면 탑리)

재미있는 것은 지리산이 3개 도에 걸쳐 있는 산이어서 뱀 지명이 산 덩어리를 가운데 두고 각각 그 고장의 방언을 반영하고 있는 점이다. 예를 들면 ‘뱀소’라는 곳이 여러 곳 있는데, 전라도쪽에서는 ‘비암쏘’나 ‘비얌쏘’로, 경상도쪽에서는 ‘뱀소’, ‘배암소’로 많이 불리고 있다.
지리산의 여러 뱀 지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곳은 뱀사골이다. 지리산 삼도봉(三道峰)을 시작으로 북쪽의 남원시 산내면을 거쳐 함양군 휴천면쪽으로 장장 80리를 임천강 지류와 함께 구불구불 이어나간 이 깊숙한 골짜기가 뱀사골이다.

뱀사골은 뱀과 관련 없을 듯

지리산에서 피아골과 함께 잘 알려진 뱀사골은 대개는 뱀(蛇)과 결부지어 그 지명을 설명한다. 흡사 왕뱀이 기어가는 모습을 닮아 그렇다거나 뱀이 많아서 그렇다거나. 그러나, 여기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서 다른 면으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뱀이 많아서 뱀 자가 들어간 이런 땅이름이 붙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뱀 자를 취한 지명 중에는 뱀과는 전혀 무관하게 붙여진 것이 많음을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뱀사골도 뱀과 관계없이 붙여졌을 가능성이 있다. 뱀의 골짜기란 뜻이라면 ‘뱀골’이 되어야 하는데, 하필 뱀의 뜻처럼 들리는 ‘사’가 또 들어간 ‘뱀사골’이 된 것은 쉽게 의문을 풀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전에도 없고, 쓰이지도 않는 말이 되었지만, 심하다는 뜻의 ‘배다(베다)’가 있다. 예를 들어 ‘비탈이 배다(베다)’라고 하면 비탈이 매우 심하다는 뜻. 따라서, ‘된 비탈’이나 ‘밴 비탈’이나 뜻은 거의 같은 것이다. 따라서, 비탈이 심한 골짜기는 ‘밴골’이 될 수가 있다. 이 ‘밴골’은 ‘뱅골’이나 ‘뱀골’로 들릴 수 있고, 또 그렇게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놓고, 뱀사골을 거꾸로 풀어 올라가 보자.

뱀사골<뱀샅골<밴샅골(밴+샅+골) 
‘샅골’을 ‘샅(사이)의 골짜기’로 보고, ‘밴’을 ‘심한(대단한)’의 뜻으로 보면 ‘밴샅골’은 비탈이 심한 골짜기란 뜻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가정을 우리에게 요구하고도 있지 않은가.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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