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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영동

월간산
  • 입력 2006.10.26 17:29
  • 수정 2006.10.2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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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정·경상·전라 3도의 화합을 꿈꾼다

금강을 품고 있으면서 백두대간 분수령도 끼고 있는 충북 영동(永同)의 성격을 이해하려면 충북이라는 땅덩어리를 먼저 짚어 봐야 한다. 남한 내륙 한가운데 초승달 모양으로 위치한 충북은 경남과 전남을 제외한 나머지 5도(道)와 붙어 있다. 충북 사람들은 결국 동북부는 강원, 동부는 경북, 서남부는 전북, 서부는 충남, 서북부는 경기와 교류하며 나름대로의 독특한 문화와 언어를 형성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그런 충북 땅에서 3도가 동시에 만나는 접경은 모두 5곳이다. 지형도를 놓고 살펴보면 영동군 학산면 황산리(전북 무주읍, 충남 금산 부리면), 진천군 백곡면 서수리(충남 천안시 북면, 경기 안성시 서운면),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경기 여주군 점동면, 강원 원주시 부론면), 단양군 영춘면 의풍리(강원 영월군 하동면, 경북 영주시 부석면), 영동군 상촌면 물한리(경북 김천시 부항면, 전북 무주군 설천면)가 5개의 접경 지역인데, 이 중에서 영동에 2군데나 있다는 사실에서 영동이라는 고을의 언어, 문화, 풍습 등이 다양할 개연성이 충분히 엿보인다.

▲ 양산팔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강선대.
▲ 양산팔경의 으뜸으로 꼽히는 강선대.
20세기까지만 해도 영동 사람들은
주로 4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를 이용해 충청권이나 영남권으로 넘나들었다. 영동역과 황간역, 그리고 추풍령역을 지나는 경부선 열차도 이들의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따라서 예전에는 외부에서 영동으로 접근하려면 어쨌든 이런 이동수단을 이용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에 몇 년 전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건설되면서 금강이 흐르는 영동의 서부 지역도 이젠 눈 깜박할 사이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대전-통영간고속도를 타고 금산 나들목으로 나와 양산 방면으로 10여 분 달리면 금강 물줄기를 만난다. 좁은 포장길은 사행천으로 휘돌아가는 강에 바싹 붙어 겨우 뚫려있으니 예전에는 이쪽 길이 얼마나 험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이쪽에 제대로 된 포장도로가 제대로 뚫린 지는 그리 오래지 않다.

이렇게 도착한 양산은 굽이굽이 흐르는 금강 물줄기와 더불어 천태산(天台山·715m) 주변의 산줄기 풍광이 일품인 곳이다. 양산 일대의 뛰어난 여덟 가지 경치를 양산팔경(陽山八景)이라 하는데, 천태산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영국사, 강 남쪽의 비봉산(482m), 그리고 강변의 강선대, 용암, 봉황대, 함벽정, 여의정, 자풍당 같은 명소들이 그것이다.

천태산에 안긴 영국사(寧國寺) 가는 길. 기암괴석과 맑은 계류, 그리고 짙은 숲이 조화를 이뤄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삼단폭포며 바윗돌 사이로 굽이도는 산길에 취해 오르다가 고개 하나를 넘어서면 문득 아름드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 한 그루가 눈길을 붙든다. 수령 600년이 넘는 이 나무는 높이 35m, 둘레 11m로 국내에서 크기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 땅에 닿은 은행나무의 곁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리고 거기서 새로운 은행나무가 곧게 자라는 광경은 마치 윤회를 상징하는 듯 참 특이하다.

▲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풍경으로 사랑받는 영국사 은행나무.
▲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든 풍경으로 사랑받는 영국사 은행나무.
영국사 지세를 살펴보면, 금강 물줄기와 천태산에서 뻗어내린 험한 산줄기로 둘러싸인 형국은 마치 견고한 요새 같다. 산 중턱에 자리한 절집 주변으로는 널찍한 평지가 여기저기 펼쳐져 있다. 무엇보다 반드시 필요한 물도 그 양이 적지 않은 천태산 계곡수가 있으니 걱정이 없다. 수천 명에 이르는 대규모 인원은 아니라 해도 적어도 몇 백 명은 한동안 숨어서 지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지역이다. 절의 역사를 살펴보면 대략 이런 용도로도 사용되었던 것 같다.

신라 문무왕 때 만월사(滿月寺)라는 이름으로 처음 창건되었다고 전하는 영국사는 신라 제32대 효소왕(孝昭王)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피난하였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고려 제23대 고종 때 탑·부도·금당을 중건하고,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고 하였다. 그러다 홍건적의 난을 피해온 공민왕이 이곳으로 피난 와 국태민안을 빌었는데, 부처님께서 그 소원을 들었는지, 마침내 고려군이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을 수복하게 되자 절 이름을 지금의 이름인 영국사라고 바꿔 부르게 하였다고 전한다.

공민왕과 관련된 이야기는 주민들 사이에 전설의 형태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공민왕이 난을 피하기 위하여 머물던 어류산, 칡덩굴로 임시로 다리를 만들었다는 누교리 등의 지명도 당시와 관련 있는 흔적이다.

이런 사연으로 봐서 영국사는 과거에 제법 떵떵거리던 큰 절이었을 것이다. 증거도 많이 남아있다.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533호), 그리고 절 뒤쪽 능선에 있는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 8각원당형부도(보물 제532호)가 영국사의 옛 영화를 잘 설명해준다. 등산로에서 벗어나 있어 지나치기 쉽지만, 영국사에 들렀을 때 빼놓지 않고 봐야할 것은 바로 망탑봉삼층석탑(보물 제535호)이다.

▲ 바위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영국사 삼단폭포.
▲ 바위절벽에서 쏟아져 내리는 영국사 삼단폭포.
은행나무에서 산길을 따라
10여 분 올라가면 망탑봉이 보인다. 위쪽의 천태산 봉우리와 아래쪽의 마을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세워진 망탑은 고려시대 제작된 3층석탑. 자연암반 위에 세워진 망탑 옆에 있는 바윗덩이들은 상어바위, 애벌레바위 등의 이름으로 사랑 받고 있긴 하지만, 무엇보다 탑 앞에 가만히 앉아서 주변을 바라보면 왜 이름이 망탑(望塔)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영국사 스님의 말을 빌면 달 밝은 밤에 망탑에 오르면 천지의 기운이 온 가슴을 적신다 하니, 언젠가는 달이 휘영청 밝은 달밤에 한번 오르리라 하는 결심도 하게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길손이 이번에 들렀을 때는 마침 보수공사 중이라 탑은 해체된 채 천으로 둘둘 싸여있었다. 묘하게도 탑이 없는 망탑봉은 비록 조망이 좋다 해도 왠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다. 망탑봉은 3층석탑이 제자리에 있을 때만 빛을 발한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으로 깨달았다.

영국사에서는 천태산 정상도 탐나고, 아름드리 은행나무 아래서의 오랜 휴식도 너무 좋다. 그러나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잡고 있을 수는 없다. 아쉬운 마음으로 영국사를 빠져나와 호탄교를 건너 강물을 따라 내려가면 양산팔경의 중심인 솔밭을 거느리고 있는 송호리다. 솔숲은 비록 양산팔경에는 꼽히지 않았지만 이곳을 양산팔경의 중심이라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다. 아니 오히려 이곳 강변에서 자라고 있는 100~300년 묵은 1만여 그루의 소나무들이 없었다면 세상 사람들은 양산팔경의 명성을 허언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 땅에 닿은 은행나무의 곁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린 영국사 은행나무.
▲ 땅에 닿은 은행나무의 곁가지가 다시 뿌리를 내린 영국사 은행나무.

이 감탄스런 솔밭은 연안부사를 지낸 박응종(朴應宗)이 낙향하여 강 언덕에 만취당(晩翠堂)이라는 정자를 세우고 풍류를 즐길 때 심어 가꾼 것이라 한다. 그의 안목에 후손으로서는 마냥 고맙고 또 고마울 뿐이다. 만취당이 있던 자그마한 바위 위에는 1935년에 다시 세운 여의정(如意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여의정에 올랐다 강가로 나간다. 강물 한가운데 집채만한 바위가 떠있고, 그 너머 강변의 암봉에 정자 하나가 앉아있다. 용암(龍岩)과 강선대(降仙臺)다. 양산팔경 중에는 선녀가 목욕하기 위해 내려오던 곳이라는 강선대를 첫손에 꼽는다. 짙푸른 강물이 흘러가는 강변에 우뚝 솟은 바위에는 소나무들이 빼곡하고, 그 안에 아담한 정자 하나가 들어앉아 있다. 참으로 명당자리이거니와 정자에서 바라보는 강변 풍광도 일품이다. 이곳으로 내려온 선녀의 목욕 장면을 훔쳐보다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졌다는 게 바로 용암이다. 강선대는 어디서 보나 절경이지만, 그중 최고의 조망대를 꼽으라면 단연 강선대 옆의 봉곡교 다리 위다. 여기서 바라보면 푸른 강물과 강선대의 정자, 그리고 용암이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온다.

양산팔경에서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솔밭에 있는 여의정도 그렇지만 이 강선대에 있는 정자도 부족함이 많다. 일제강점기 때 보수공사를 한 탓인지 일본식 석축과 정자의 양식도 거슬린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정자 자체에는 그다지 눈길을 두지 않는다. 아마도 금강에 어울리게 우리 전통방식을 따라 정자를 복원해 놓으면 제법 사랑 받는 문화재가 될 것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돋보이는 팔경이 될 것도 자명한 일이다. 

송호관광지에서 동쪽으로 2km쯤 떨어진 금강이 휘도는 언덕에 자리한 자풍서당(資風書堂)도 전망이 빼어난 곳이다. 조선 초기에 처음 지을 당시엔 풍곡당(豊谷堂)이라 하였으나, 1614년(광해군 6)에 정구(鄭逑)가 강학하면서 자법정풍(資法正風)으로 학문을 장려하였다는 뜻으로 자풍서당이라 했다. 특이하게도 서당 마당엔 오층석탑의 지붕돌이 쌓여있다. 조선 초기에 배불숭유 정책으로 사찰을 폐하고 그곳을 향교 등을 지을 당시, 이 자리에 있던 풍곡사(豊谷寺)라는 절집을 허물면서 탑의 기단석과 몸돌은 서당의 주춧돌 등으로 쓰고 지붕돌만 땅 속에 묻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 양산팔경의 중심인 송호리 금강변의 솔밭.
▲ 양산팔경의 중심인 송호리 금강변의 솔밭.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모링이 돌아서 양산을 가세
난들 가서 배 잡아 타고
양산을 가세, 양산을 가요

금강 푸른 물결이 적시고 흐르는 영동은 천 년을 이어온 민요 ‘양산가’의 고을이다. 삼국시대 이 일대는 신라와 백제의 치열한 각축장이었는데, ‘양산가’는 신라 장군 김흠운(金歆運·?-655)의 넋을 달래려고 주민들이 지어 부른 노래라고 전한다. 화랑인 김흠운은 655년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군이 변방 33성을 빼앗자 왕의 명령으로 출전하여 양산에 진을 치고 조천성(沃川)을 공략하려다가 백제군의 기습으로 전투 중 전사하였다.

현재 양산 읍내 금강변의 가곡리에는 말무덤이라 불리는 아담한 고분 하나가 있는데, 출토된 유물로 보아 7세기 중엽의 무덤이라 한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이 무덤이 김흠운 장군이나 양산가와 연관이 있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양산가’의 가사는 간단하지만 여기에는 영동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우선 금강 수계에 속하면서 백제가 아닌 신라 장군의 혼을 달래는 노래가 영동에게 불려온 것은 이 지역 주민들의 성향이 백제보다는 신라에 가까웠음을 드러내고 있다. 양산가의 가사 중에 ‘모링이’는 모퉁이의 경상도 사투리다. 이는 영동이 영남과는 백두대간을 사이에 두고 갈라져 있기는 해도 언어도 경상도 방언의 영향을 받은 증거가 된다.

언어 이야기를 좀 더 짚어보자. 영동의 언어는 충청도 방언을 바탕으로 하여 경북 방언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전북 무주에 인접한 지역은 전북 방언의 영향도 어느 정도 받고 있다. 이렇듯 여러 곳의 영향을 받은 탓에 지금도 영동 사람이 타지에 나가면 다양한 반응을 얻는다. 황간·매곡면이 고향인 사람은 분명히 ‘경상도 사람’으로, 용화가 고향인 사람은 그리 심하진 않아도 가끔 ‘전라도 사람’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다. 이는 영동 언어의 특수성을 잘 말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동에는 ‘고개 하나를 넘을 때마다 말씨가 다르다’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학자들은 영동 언어를 크게 나눌 땐 영동읍과 용산·심천·양산·학산·양강·용화 6개 면을 포함하는 충북 방언, 그리고 영동 동쪽지역으로서 백두대간 본줄기와 인접한 황간·추풍령·매곡·상촌 등 4개 면의 경북 방언 두 언어권으로 나눈다.

▲ 심천 고당리에 복원해놓은 난계 생가.
▲ 심천 고당리에 복원해놓은 난계 생가.

양산팔경 외에 영동 사람들이 자랑하는 게 또 하나 있다. 바로 음악의 고장이라는 것이다. 이는 오래 된 민요 양산가가 전하는데다가, 왕산악·우륵과 더불어 우리나라 음악의 삼대 성인 중의 한 명으로 추앙받는 조선의 난계(蘭溪) 박연(朴堧·1378-1458) 선생이 푸르른 금강물이 휘돌아 흐르는 심천 고당리에 태를 묻었기 때문이다.

박연은 조선 세종 때 궁중음악인 아악을 발전시키는 데 큰 구실을 했던 음악가이자, 편경(돌을 깎아 만든 각조각을 매달아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 등을 만든 악기 제작자이기도 했다. 그는 또 당시만 해도 체계 없이 입으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우리 음악을 정리해 책으로 엮고, 종묘제례악도 뜯어 고쳤다. 난계는 흐트러진 악제를 바로잡기 위하여 상소문을 수십 차례나 올리기도 하였는데, ‘난계유고’에는 그가 올렸던 39편의 상소문이 실려 전한다.

사실, 난계의 업적은 고향인 영동에서조차 오랫동안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68년부터 박연을 추모하는 난계예술제를 매년 열어 국악을 바탕으로 한 전통문화 예술의 진흥을 꾀했고, 1972년 후손들이 난계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난계사를 세우면서 일반에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

난계사 주변에는 난계 관련 유적이 여럿 있다. 난계의 묘는 난계사 담장 옆 마을길로 올라가는 산자락에 있다. 관련 학술단체에 의뢰해서 강마을 안쪽 인삼밭 옆에 난계 생가를 복원한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뿐이 아니라 최근 난계사 둘레에 난계국악박물관, 난계국악기제작촌, 난계국악기체험전수관 등이 들어서 있으니 한적했던 고당리 강마을은 어느덧 난계유적지로 비약적인 탈바꿈을 하게 되었다. 한편 고당리에서 3km 정도 떨어진 월이산 기슭에는 난계가 예술혼을 다듬던 옥계폭포도 있다.

대전과 옥천을 지나 심천 고당리 앞을 달리는 4번 국도는 영동 읍내와 황간을 거쳐 추풍령으로 이어진다. 일반에게 영동은 감나무 가로수로 잘 알려져 있는 고을이다. 영동이라는 고을의 기후 특성을 잘 살려 거기에 알맞은 감나무를 가로수로 특화시켰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영동 사람 치고 곶감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아이들은 감꼭지를 따고 어른은 감을 깎고 하던 기억을 하나씩 품고 있다. 또 가을이 깊어지면 집집마다 처마 아래에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영동은 바람도 많은 고을이다. 그런 까닭인지 이곳에는 바람의 신(神)인 영동할미에게 제사를 올리는 풍습이 오래 전부터 전해져왔다. 음력 2월 초순에 바람이 세게 불면 나이 든 노인들은 ‘영동할미가 온다'고 말한다. 마음 착한 관리의 넋이 바람으로 변해 원을 풀려고 한다는 영동할미 이야기는 부패한 현실을 꾸짖는 이야기여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 제주도와 전남 등의 해안 지방에 퍼져있는 영동할미제는 내륙지방에는 영동에만 있다고 한다. 예전엔 바람 심하게 부는 음력 2월 초순에 집안에 간단한 제물을 차려놓고 안주인이 제사를 올려왔으나 요즘에는 영동할미제를 지내는 집은 거의 없어졌다. 백두대간을 넘는 바람은 여전하건만, 현실이 더 이상 부패하지 않았다는 뜻일까?

영동 읍내를 지나면 4번 국도 옆으로 경부선 철도가 나란히 따른다. 이 길은 추풍령을 넘어 김천까지 이어진다. 황간이 가까워지면 왼쪽으로 노근리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26일 인민군에게 쫓기던 미군들이 쌍굴다리 밑에서 피난민들을 향해 사격을 가해 250여 명의 사망자를 낸 양민학살사건의 현장이다.

미군들은 노근리 옆 주곡리란 마을에 살던 주민들과 이곳으로 피난 왔던 민간인들을 이틀간이나 끌고 다니다가 마침내 철로 위를 걷게 하고서는 전투기에서 기총소사로 학살했다. 이를 피해 철로 밑 쌍굴다리로 피신한 사람들마저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미군이 기관총으로 다시 학살했다. 그래서 주변 마을에서는 아직도 집집마다 제삿날이 같다.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과 유족들은 1960년 민주당 정권 때 미군 소청심사위원회에 소청을 제기했으나 미군측이 기각하면서 이 사건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이후 군사독재시절 입 밖에 내지도 못하고 속병을 앓다가 1994년 노근리 양민학살 대책위원회 위원장 정은용씨가 유족들의 비극을 담은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라는 실록 소설을 출간하면서 이 사건은 다시 일반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99년 9월 AP통신은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되는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이 명령에 따라 학살사건이 발생했다’고 보도하였다. 이 기사에서는 비밀 해제된 당시 군 작전명령 중에서 '그들(피난민들)을 적군으로 대하라'는 명령의 원문(原文)이 공개되기도 했다. 1999년 유족들이 미국을 방문하자 미육군성은 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를 한국측과 협의할 예정임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최근 보도를 보면, 사건 현장 인근의 노송초등학교 일대에 2009년까지 위령탑과 역사자료관이 들어선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인근 야산에 노근리 사건 희생자 합동묘역도 조성할 예정이라 한다.

▲ 영동의 대표적인 명소인 월류봉의 한천팔경. 최근 지은 정자가 돋보인다.
▲ 영동의 대표적인 명소인 월류봉의 한천팔경. 최근 지은 정자가 돋보인다.

역사의 아픔이 있는 노근리 쌍굴다리를 지나 경부고속도로를 가로지르면 이내 황간면 소재지다. 황간의 산수는 단연 월류봉으로 대표되는 한천팔경(寒泉八景)이다. 영동 서쪽에 양산팔경이 있다면 동쪽에는 한천팔경이 있다. 사군봉에서 이어지는 암봉을 초강천이 휘돌아 흐르면서 빚은 빼어난 산수는 볼 때마다 감탄하게 만드는 명품이다.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寒泉精舍)에서 한천팔경이란 이름이 유래했는데, 우암은 병자호란 직후 32세 되던 해 이곳에서 은둔하면서 여러 해 지낼 당시 아침마다 월류봉 중턱의 샘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월류봉, 화헌악, 용연동, 산양벽, 청학굴, 법존암, 사군봉, 냉천정의 여덟 경치 중에서 으뜸은 달 뜨는 밤에 감상하는 월류봉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천팔경이란 대부분 월류봉의 여러 모습을 지칭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봄에 진달래와 철쭉으로 산이 붉어지면 화헌악(花軒岳)이라 했고, 용연동(龍淵洞)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를, 산양벽(山羊壁)은 월류봉의 깎아지른 절벽을 이른 것이다.

▲ 월류봉 정자에서 바라본 경치. 마치 잘 그린 산수화 같다.
▲ 월류봉 정자에서 바라본 경치. 마치 잘 그린 산수화 같다.

월류봉은 여러 인연이 있어
길손이 어릴 적부터 자주 들렀던 곳이라 제법 낯이 익다. 그런데 이번에 아침 일찍 가서보니 맨 끄트머리 암봉에 정자 하나가 날아갈 듯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참으로 아주 적절한 자리에 들어선 정자 덕분에 월류봉은 최근에 본 어떤 풍광보다도 돋보였다. 그런데, 정자는 거의 완성된 듯한데 둘레에 비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내판을 보니 약속한 공사 마감날짜가 며칠 남지 않았다. 정말 아쉬웠다. 그때 주차장에 승합차가 한 대 서더니 인부인 듯한 차림의 사내들이 내렸다.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인상 좋은 사내에게 슬쩍 물었다.

“정자 건축 때문에 오셨어요?”
“예-.”
귀가 번쩍 뜨였다.
“아직 완성이 안 되었나 봐요?”
“아뇨, 오늘 끝나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입이 귀에 걸렸다.
“비계 철거는 언제쯤 하나요?”
“점심 들고 와보면 아마 깨끗하게 치워져 있을 거유-.”

▲ 황간면 우매리 백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반야사.
▲ 황간면 우매리 백화산 기슭에 자리 잡은 반야사.

사내는 싱긋 웃고, 길손은 드러내놓고 쾌재를 불렀다. 백화산에 기댄 반야사(般若寺)와 물한계곡을 이리저리 들쑤시고 돌아다니다 국밥으로 이른 점심을 들고 다시 월류봉으로 돌아왔을 때 정말로 비계가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초강천에 걸린 공사용 임시 철다리를 조심스레 건너 정자로 올라갈 때에는 야릇한 흥분도 일었다. 길손은 공사 관계자 말고 이 정자에 처음으로 올라가는 일반인인 것이다.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던 사내들도 첫손님인 길손을 축하해주었다. 그들의 얼굴 표정에는 멋진 정자를 만들었다는 자부심도 넘쳤다. 청주에서 왔다는, 보은 삼년산성 보수작업도 한 적이 있다는 사내들은 정말 친절했다.
“증말 운 좋구만유-. 쫌 있다가 저 임시다리도 철거할 거유-.”

월류봉 정자는 한천팔경의 화룡점정이었다. 남한강 단양팔경의 으뜸인 도담삼봉과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 풍광이다. 아마도 이곳은 앞으로 영화 촬영의 단골 명소가 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지만 월류봉 정자는 관광객들에게 찬탄과 원망을 동시에 듣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월류봉의 아주 적합한 자리에 멋진 정자를 그림처럼 앉혔다는 찬사를 보낼 것이지만, 그 정자 쪽으로 건너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아마도 거기에 그토록 아름다운 정자를 세운 사람을 힐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디 이 자리를 빌어 부탁하건데, 관광객들의 원성을 사더라도 당국자는 절대 원망을 흘려들어야만 할 것이다.

월류봉 정자에서 얻은 즐겁고도 행복한 마음으로 황간에서 4번 국도를 타고 백두대간의 큰 고개 추풍령(秋風嶺·221m)으로 향한다. 고속도로와 국도를 지나는 차량, 그리고 경부선 열차가 쉴 새 없이 드나드는 추풍령은 백두대간에서 가장 통행량이 많은 고개다. 이 고개는 조선시대에도 한반도 중앙과 영남을 잇는 역할을 했지만, 영남대로의 문경새재보다는 규모나 명성에서 한참 뒤졌다. 그러다 상황은 1905년 추풍령에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이후 문경새재는 물론이요 죽령과 이화령을 넘나들던 물량까지 추풍령이 물려받았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완공되자 추풍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번잡한 고개로 등극했다.

한번이라도 추풍령을 넘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현재 백두대간을 넘는 고개 중 가장 큰 고개인 추풍령은 굽이굽이 이어지는 구절양장이 아니다. 고갯마루가 해발 200m가 조금 넘을 뿐이고, 경사도 언제 고개를 넘었는지도 잘 가늠이 안 될 정도로 완만하다. 열차를 타고 넘을 때도 그렇고, 고속도로나 국도를 이용해도 마찬가지다. 1900년대 이후 나라의 근간인 국도·철도·고속도로가 모두 이 고개를 통과하게 된 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 임진왜란 때 추풍령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장지현 장군을 기리는 사당.
▲ 임진왜란 때 추풍령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장지현 장군을 기리는 사당.

하지만 그렇게 낮고 완만한 고개일지라도 추풍령은 전략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나라에 전쟁이 있을 때마다 이 고개에서는 피 터지는 싸움이 벌어졌다. 추풍령면 사부리의 장지현 장군 사당은 추풍령이 지니고 있는 아픈 역사의 상징이다.

의병장 장지현(張智賢·1536-1593)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2,000여 명을 모아 추풍령에서 이세영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하여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적군을 맞아 싸웠다. 처음 싸움에서 관군은 패주하였으나, 장지현이 이끄는 의병들은 필사적으로 싸워 적병을 김천 방면으로 퇴각시켰다. 이어 금산 방면에서 진격해온 왜군의 협공을 받아 백병전까지 벌였으나 관군은 중과부적으로 패해 장군은 58세를 일기로 전사하였다. 장군은 사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영동의 화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지명에 얽힌 사연도 있다. 조선시대 과거를 보러 가던 영남의 유생들 중 마음 약한 이들은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낙방한다 하여 추풍령 남쪽의 궤방령을 넘었다. 추풍령을 직접 넘는 것보다 10~20리 정도 더 멀었으나,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궤방령의 방(榜) 자가 합격자 발표 때 붙이는 방(榜)과 같은 글자라는 사실은 이들을 궤방령으로 더욱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떨어진 유생들이 돌아갈 때는 그냥 추풍령을 이용했는가 보다. 고갯마루에 있던 당마루 마을은 과거에 실패하고 낙향하던 선비가 고향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면서 생긴 마을이라고도 한다.

조령이나 죽령 등과 달리 추풍령은 고개 이름이기도 하면서 마을을 지칭하기도 한다. 농사를 지을 땅이 고갯마루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인지 오랜 옛날부터 고갯마루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과객들을 상대하는 주막거리가 있었고,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인 후에는 식당도 즐비하고 여인숙도 두 개나 있었다. 당시에는 황간과 김천이라는 고을에 이름 기대지 않고도 추풍령이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추풍령의 호황은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급속하게 쇠퇴하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국도를 타고 넘다가 고갯마루에서 머물러 잠도 자고 식사도 하고 떠나던 여행객들이 고속도로를 이용하게 되면서 국도의 통행량이 급격히 줄었던 것이다. 추풍령에서 성황을 누리던 식당과 가게도 문을 닫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추풍령은 조금씩 다시 활기를 찾아갔는데, 이는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등산인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물론 추풍령 주민들의 걱정처럼, 최근 새로 4차선으로 포장한 4번 국도가 추풍령 마을 외곽으로 돌아나가는 바람에 옛 추풍령 국도조차 조선시대 고갯길 정도로 추락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고개는 길의 역할에 따라 성장과 쇠락의 길을 걷게 되어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제 추풍령은 기억 속에서 지워질 우려가 크다”고 앉아서 걱정만 할 것이 아니라, 추풍령이 갖고 있는 교통의 역사성과 문화적 접경, 그리고 백두대간의 중간 기착지라는 특장을 잘 살려 4차선 국도를 지나던 행인들이 일부러라도 추풍령 마을을 들렀다 갈 수 있도록 가꿔야 할 것이다. 대체 가수 남상규의 ‘추풍령’ 노래가사가 새겨져 있는 표석 하나 달랑 세워 놓고 뭘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나저나 어찌된 일인지 추풍령을 지날 때 이 노래를 흥얼거리지 않으면 뭔가 허전한 것은 단지 이 길손뿐인가?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구비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영동, 어떤 곳인가

충청북도 최남단에 있는 영동군(永同郡)은 동쪽은 경북 김천·상주시, 북쪽은 충북 옥천군, 서쪽은 충남 금산군, 남쪽은 전북 무주군과 접하여 3개 도(道)의 접경지가 되고 있다.

백두대간 분수령이 지나는 남동부는 높은 산간지대, 금강이 흐르는 북서부가 낮은 지형을 이룬다. 남동부 산간지 북부에는 포성봉(捕城峰·933m)·지장산(芝庄山·772m)·추풍령(秋風嶺) 등, 남부에는 황악산(1,111m)·민주지산(眠主之山·1,242m)·각호산(角虎山·1,176m) 등이 험준한 산줄기를 이루고 있다. 북서부는 마니산(摩尼山·640m)·성주산(聖主山·624m) 등을 중심으로 구릉지가 발달하여 남동부에 비하면 고도가 낮다.

금강(錦江)이 북서부를 남에서 북으로 곡류하고 있으며, 그 지류인 남대천(南大川)·송천(松川) 등이 서류하여 합류하는데, 하천 유역 곳곳에 좁은 침식분지가 있을 뿐 넓은 평야는 없다. 그 중에서 영동읍과 황간면(黃澗) 주변에 다소 넓은 평지가 산재되어 있다. 기온의 연교차가 심하며, 연평균기온 11.8℃, 1월 평균기온 -3.5℃, 8월 평균기온 25.9℃로 기온의 연교차가 크다. 연강수량은 1,012mm.

▲ 홍건적의 난을 피해온 공민왕이 국태민안을 빌었던 영국사.
▲ 홍건적의 난을 피해온 공민왕이 국태민안을 빌었던 영국사.

영동군은 신라시대 길동군으로 불리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영동(永同)으로 개칭했다. 995년(고려 성종 14)에 계주(稽州)라 바꾸고 승격시켜 자사(刺史)를 두었으나 1005년(목종 8)에 폐지했다. 1018년(현종 9)에 상주(尙州)에 소속되었다가 1172년(명종 2)에 현(縣)이 됐다. 1413년(조선 태종 13)에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이관됐으며,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고, 1914년에 황간을 편입했다.

황간은 신라시대에 소라현(召羅縣)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때 황간으로 바뀌고 영동군에 소속됐다. 고려 현종 때 경산부(京山府, 경북 성주)에 속했다가 조선 태종 때 충청도에 이관되어 청산현(靑山縣)과 합해 황청현(黃靑縣)이 됐다. 1906년 옥천군의 학산·양산·용산의 3면을 합하고, 1914년 영동과 합병했다. 2006년 현재 영동읍과 용산·황간(黃澗)·추풍령(秋風嶺)·매곡(梅谷)·상촌(上村)·양강(楊江)·용화(龍化)·학산(鶴山)·양산(陽山)·심천(深川)면의 1읍 1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동군은 산간지대로서 임야가 전체 면적의 77.8%를 차지한다. 총경지면적은 1만995ha로 논은 3,619ha, 밭은 7,336ha로서 밭이 훨씬 많다. 주민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며 호당 경지면적은 적은 편이다. 농업은 주곡생산을 위주로 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포도·사과·감 등의 과실류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포도는 영동읍·황간면·용산면, 사과는 양강면·심천면·영동읍, 감은 영동읍·상촌면·황간면의 순서로 많이 생산된다. 특산물로는 감·호두·표고·인삼·고추·마늘 등이 생산되는데, 특히 감은 명산물로 이름이 높다.

|양산팔경|

금강이 휘돌아 흐르고 소나무숲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양산면 송호리 주변의 여덟 가지 경치를 양산팔경(陽山八景)이라 한다. 천태산(715m) 동쪽 자락에 자리한 천년고찰 영국사, 강 남쪽의 비봉산(482m), 그리고 금강변의 강선대, 용암, 봉황대, 함벽정, 여의정, 자풍당이 그것이다.

양산팔경을 중심으로 86,000평 규모로 조성된 송호국민관광지는 관리사무소를 비롯하여 주차장 샤워장 취사장 체력단련장 어린이놀이터 산책로 방갈로 캠프파이어장 물놀이장 등이 100년 이상 된 울창한 소나무숲 사이에 펼쳐져 있다.
입장료는 어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500원. 주차료 1,000원. 전화 043-740-3228.

|한천팔경|

초강천 상류의 휘돌아 흐르는 황간 월류봉 일대의 빼어난 산수를 가리켜 한천팔경(寒泉八景)이라 하는데, 우암 송시열 선생이 머물던 한천정사가 있어 한천팔경이란 이름이 유래했다. 우암은 병자호란 직후 32세 되던 해 이 한천정사로 은둔해 들어와 여러 해를 지냈고, 아침마다 월류봉 중턱의 샘까지 오르내렸다고 한다.

월류봉을 비롯해 화헌악, 용연동, 산양벽, 청학굴, 법존암, 사군봉, 냉천정의 여덟 경치 중에서 으뜸은 월류봉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천팔경이란 대부분 월류봉의 여러 모습을 지칭한 것이다. 봄에 진달래와 철쭉으로 산이 붉어지면 화헌악(花軒岳)이라 했다. 삼경인 용연동(龍淵洞)은 월류봉 아래의 깊은 소를, 사경인 산양벽(山羊壁)은 월류봉의 깎아지른 절벽을 이른 것이다. 한천정사 앞에서 보면  이르면 잘 생긴 수석을 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우뚝한 암봉들이 강 건너로 보인다.

|영동 곶감축제|

영동은 감나무로 유명하다. 영동 읍내의 가로수가 온통 감나무로 가꾸어져 있기 때문에 가을이면 감이 주렁주렁 달린 이색적인 경관이 펼쳐진다. 보통 12월 중순경 사흘간 열리는 영동 곶감축제는 영동 지역에서 생산되고 있는 곶감 등 우수 농특산품을 홍보하기 위해 10여 단체와 수많은 농가가 참여한다.

분야별 행사 내용을 보면 감, 곶감 등 농특산물, 농산가공품, 천연염색가공품, 감식초, 전통한과, 포도즙 등 지역특산품 전시분야가 있다. 이외에도 감, 곶감, 사과, 배 등 특산물, 1차가공 식품, 임산물 등 특판 행사, 감 깎기, 길게 깎기, 아이스카빙 등 방문객체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놀이, 고적대공연, 품바공연, 연날리기, 불꽃놀이 등 이벤트행사도 볼 만하다. 홈페이지 http://gam.yd21.go.kr/

|난계국악축제|

심천면 고당리 난계유적지 일원에서 열리는 난계 국악축제는 난계 박연 선생의 국악 얼을 잇기 위한 지역 축제다. 원래 매년 가을에 열렸으나 영동 특산물인 포도를 홍보하기 위해 올해부터 포도축제와 연계해 포도가 익어가는 8월 말에 열었다.
난계사, 난계국악당, 영동천 둔치특설무대, 영동문화원, 군민운동장 등에서 다양한 국악공연과 포도낚시, 포도밟기, 와인만들기, 다듬이질 체험, 민속놀이체험 등 등 관광객을 위한 이벤트가 풍성하다. 영동군청 문화관광과 043-740-3255, 740-3225.

|영국사|

양산면 누교리 천태산 기슭의 영국사(寧國寺)는 통일신라 후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고려 명종 때인 12세기에 원각국사에 의해 중창이 있었다. 고려 고종 때 안종필이 임금의 명을 받아 탑과 부도, 그리고 금당을 새로 짓고 절 이름을 국청사(國淸寺)라 했다.

영국사로 부르게 된 것은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원나라의 홍건적이 개성까지 쳐들어와 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이곳에 몽진(蒙塵)하여 국태민안의 기도를 계속했다. 그러다 마침내 근위병들이 홍건적을 무찌르고 개경(開京)을 수복하게 되자 왕이 기뻐하며 부처에게 감사드리고 떠나면서 절이름을 영국사로 바꾸었다.

|영국사 부도|

영국사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영국사 부도(보물 제532호)는 기단부·탑신부·머리장식부로 나뉘며, 전체적으로 8각의 모습을 이루고 있다. 기단의 아래받침돌은 바닥돌과 한 돌이고, 가운데받침돌은 8각의 면마다 무늬를 조각하여 넣었다. 윗받침돌 옆면엔 한 겹의 연꽃잎을 위아래로 장식했다. 탑신에는 한 면에 직사각형의 문짝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 모양을 돋을새김했다.

지붕돌의 각 면에는 기왓골을 본떠 새겼는데, 처마의 곡선과 잘 어울려서 경쾌한 인상을 준다. 머리장식으로는 복발(覆鉢)과 보주(寶珠)가 남아있다. 이 부도가 세워진 연도는 절 안의 원각국사비와 연관지어볼 때 고려 명종 10년(1180)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국사 삼층석탑|

영국사 대웅전 앞에 서 있는 영국사 삼층석탑(보물 제533호)은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완전한 형태다. 위·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특히 위층 기단의 무늬는 모서리까지 침범할 만큼 크고 넓다. 기단 맨 윗돌에는 네 모서리 끝부분에서 약간의 치켜올림이 있어 주목된다.

탑신부는 각 몸돌의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겨 놓았으며, 1층 몸돌 정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까지 있는 문짝 모양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윗면의 경사가 완만하고, 네 귀퉁이는 바짝 치켜 올려진 상태이며,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각 4단씩이다. 이 탑은 기단과 탑신부가 간결해 조형품의 규모가 작아지고 양식도 간략화되던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영국사 원각국사비|

영국사 경내에 있는 원각국사비(보물 제534호)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각국사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원각국사(圓覺國師)는 어려서 출가해 대선사가 된 명승으로, 1174년(명종 4)에 입적하자 왕은 그의 유해를 영국사에 안치했다.

고려 양식의 귀부(龜趺) 위에 비몸을 세우고, 비머릿돌을 얹은 일반적인 모습이다. 용의 머리를 형상화한 거북 머리는 퇴화됐고, 거북등의 6각형 무늬와 비를 끼워두는 곳의 덩굴무늬는 생략됐다. 비몸은 훼손이 심하다. 비머릿돌에는 구름과 용이 형식적으로 새겨져 있고, 앞면 중앙에는 원각국사비명(圓覺國師碑銘)이라 새겨져 있다. 비몸에 비하여 비받침이 커서 안정감을 주는 반면, 비머릿돌이 지나치게 커서 중압감을 주고 있다.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비문을 지은 이는 한문준이고, 건립연대는 1180년(고려 명종 10)이다.

|망탑봉 삼층석탑|

영국사에서 동쪽으로 500m 지점의 망탑봉(望塔峰)이라는 작은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망탑봉 삼층석탑(보물 제535호)은 커다란 화강암을 기단으로 삼고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렸다. 기단은 암석 윗면을 평평하게 다듬고, 그 중앙에 돌출된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했다.

기단은 기둥모양과 안상(眼象)을 조각해 형태를 완성했다. 그 위에 아무런 받침 없이 그대로 탑신이 놓여있다. 탑신은 윗부분이 아랫부분보다 좁아지는 몸돌을 쌓아올렸다. 1층 몸돌에는 네 면에 무늬 없는 문짝 모양을 돋을새김했는데, 위·아래가 돌출된 액자형이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며, 추녀는 수평의 직선을 이루다가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층이 5단이고 2·3층은 3단이다.

탑은 전체적으로 체감율이 일정하지 않지만, 몸돌의 상부를 좁게 함으로써 비교적 안정감이 있다. 기단을 한 층으로 하고 기단의 맨 윗돌을 생략하는 등 부분적으로 간략화된 고려 석탑의 유형을 보여준다. 각 부 양식과 조각수법으로 보아 고려 중기인 12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짐작된다.

|영국사 은행나무|

영국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223호)는 나이가 약 1,0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31.4m, 가슴높이 둘레 11.54m 정도로 영국사 정문에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다. 가지는 사방으로 퍼졌으며, 서쪽으로 뻗은 가지 가운데 한 개는 땅에 닿아 뿌리를 내리고 독립된 나무처럼 자라고 있다. 가을에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면 장관을 이룬다.

|신항리 삼존불입상|

용산면 신항리의 삼존불입상(보물 제984호)는 옛 석은사지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석불입상이다. 직사각형의 네모나고 평평한 돌에 새겨진 이 불상은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입상이 배치된 삼존불 형식을 이루고 있다.

본존불은 민머리 위에 작은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있고, 둥근 얼굴에는 미소를 띠고 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입은 두꺼운 옷은 가슴에서 U자형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형 모양의 띠매듭이 있다. 옷주름선은 오른손 아래에서 3가닥의 음각선을 이루며 흘러내리고 있다.

양쪽의 보살상은 각각 손으로 물건을 감싸 잡거나 합장한 자세다. 반듯하면서도 단아한 어깨와 중후한 체구 등 신체 각 부분에서 옛 형식이 나타나는 이 삼존불상은 태안 마애삼존불상 등과 함께 7세기 석불상을 계승한 것으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반야사 삼층석탑|

황간면 우매리 반야사에 있는 삼층석탑(보물 제1371호)은 원래 반야사 북쪽의 석천계곡 ‘탑벌’에 있던 것을 1950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한 것이라 한다. 지대석 위에 1층의 기단을 이루고 그 위에 3층의 탑신(몸돌)을 올린 석탑으로 높이는 335cm이다. 토단 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지대석으로부터 마지막 층까지 대체로 완전한 편이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초층 탑신의 결구수법은 신라 석탑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으며, 기단면석과 초층 탑신을 꼽도록 하면에 홈을 판 점은 충청도와 전라도 일원에 건립된 백제계 석탑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반야사 삼층석탑은 비록 일부 새로운 부재가 보충되었지만, 양식적인 면에서 백제계와 신라계 석탑의 양식을 절충한 고려 석탑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태종11년 이형 원종공신록권 부함|

공신록권은 나라에 공이 있는 인물에게 공신으로 임명하는 증서를 말한다. 태종11년 이형 원종공신록권(국보 제278호)은 태종이 잠저(潛邸, 동궁)에 있을 때 보좌한 신하들의 공로를 포상하고 수여한 원종공신록권으로서 1411년(태종 11) 11월에 당시 통훈대부판사재감사였던 이형에게 발급한 3등공신록권이다.

크기는 가로 243㎝, 세로 34.7㎝이며, 종이질은 닥나무종이다. 조선 전기 공신에 대한 대우와 공신록 양식을 연구하는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매천리 미선나무 자생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특산 식물로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영동읍 매천리 미선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364호)는 백천 냇가 낮은 구릉지에 자연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송재문 가옥|

심천면 초강리의 송재문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32호)은 1885년(고종 22)에 지은 집이다. 넓은 들 위에 자리 잡은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행랑채·광채 등이 있었으나 행랑채와 광채는 1920년대에 철거됐고,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이 멀찌감치 떨어져 남아있다.

넓은 들 위에 자리 잡아 편안하고 안정된 모습을 지닌다. 집의 앞쪽 약간 경사진 터에 ?자형의 사랑채가 위치하는데, 뒤편이 높고 앞쪽이 낮다. 사랑채는 중앙의 사랑방과 사랑대청을 중심으로 왼쪽 꺾인 부분은 뒷방·사랑부엌·앞방이 위치하고, 오른쪽으로는 골방·건넌방·누마루가 위치한다. 안채는 一자형 평면으로 왼쪽부터 부엌·안방·대청·건넌방이 배열됐다. 안방의 앞에는 툇마루를 설치해 대청과 연결되도록 했다.

|송재휘 가옥|

영동읍 계산리의 송재휘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40호)은 19세기 후기에 건축된 집으로 터가 상당히 넓다. 집 뒤쪽 길가에 서서 바라보면 맞담을 쌓은 길이가 꽤 길게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형 안채와 광채가 널찍이 둘러앉아 전체적으로는 튼 ?자 모양을 이룬다. 그러나 바깥살림에 해당하는 외부공간은 많이 변형되어서 전체적인 원형을 알 수 없다.

안채는 큰 규모의 당당한 건물로 남도 방식에 따른 안채에 사랑공간을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안방부터 작은방까지는 앞·뒤 모두 툇마루로 연결했다. 사랑공간 또한 툇마루를 포함하고 있는 마루방을 통해 안채와 연결이 되고 있다. 광채는 부엌 왼쪽에 뒤뜰을 둘러싸는 형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뒷간은 작은 초가 사모지붕으로 만들었는데, 모양이 아름다워 특히 인상적이다.

|김선조 가옥|

17세기 후기에 건축됐다고 전해오는 양강면 괴목리의 김선조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42호)은 현재 안채와 별당 형식의 안사랑채만이 남아있다. 안채는 18세기 중엽, 안사랑채는 훨씬 뒤인 19세기 중엽에 지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무성한 팽나무숲을 뒤로 하고 안채가 자리하며, 그 앞쪽으로 안사랑채가 직각으로 위치하는데, 담장을 앞뒤 좌우로 빙 돌려서 딴 공간으로 구분하며 쪽대문을 설치해서 사랑마당과 연결지었다. 안채는 사대부 집에서 흔히 쓰는 ?자형 구조로 부엌·안방·대청을 일직선으로 배열하는 남도 방식을 취하고 있다. 안사랑채는 대청·웃방·안방·부엌·모퉁이방이 배열된 一자형 집이다. 모두 툇마루와 쪽마루가 있어 동선이 연결된다.

|성위제 가옥|

학산면 봉림리의 성위제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44호)은 안채·사랑채·광채·문간채·일각대문·사당으로 구성됐다. 안채를 포함해 모두 20세기 초 이후에 지은 건물이며, 광채만 18세기 정도로 추정할 수 있는 아주 특이한 건물이다. 광채는 목조 초가지붕집으로 오른쪽의 한 칸만을 외부로 개방해 헛간으로 쓰고 있을 뿐, 나머지 3칸은 판자벽을 두르고 마루를 깔아서 광으로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건축수법과 구성은 대단히 오래된 기법이다.

안채는 왼쪽부터 건넌방·대청·안방·부엌이 배열됐다. 사당은 부엌 오른쪽에 자리했다. 사랑채는 안채의 맞은편에 위치했는데, 사랑방 2칸·부엌·부엌방으로 되어있다. 사랑방의 뒷벽은 처마 밑으로 내밀어져 벽장으로 사용된다.

|향토민속자료전시관|

영동 읍내의 영동군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은 영동 일대에 전해오는 민속자료를 수집, 전시하는 공간이다. 제1전시실에는 151점의 역사유물과 영동의 인물, 명승지, 상징물 등을, 제2전시실에는 139점의 민속 관련 유물과 식생활용구, 도정기구, 목공기구 등을 중심으로 전시했다. 야외 전시장에는 불상, 부도, 문인석, 연자방아, 지석, 연화좌대 등의 석조물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관람시간은 09:00~18:00. 1월1일, 설·추석 연휴에는 휴관한다.

|난계사|

심천면 고당리의 난계사(도기념물 제8호)는 난계 박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으로 1973년에 세웠다. 난계사 입구 좌측에 난계 동상과 비가 세워져 있다. 외삼문은 영당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형태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높은 사당자리를 내삼문이 막아서고 있다. 내삼문은 솟을삼문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현판이 걸려 있다. 영정각에는 난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난계국악당|

영동의 문화예술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난계국악당은 국악을 바탕으로 모든 전통문화예술을 꽃피워 왔으며, 전국적인 국악행사를 도맡아 해오고 있어 국악의 대명소로 손꼽을 만하다. 난계국악당 왼편에는 향토민속자료전시관, 오른편은 영동군민회관(청소년수련관, 여성회관) 등이 위치해 있다. 전화 043-740-3237, 3217.

|난계국악박물관|

2000년 개관한 난계국악박물관은 난계 박연의 일생과 국악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이다. 난계의 삶, 난계의 업적, 난계와 영동에 대한 자료와 한국인과 한국음악, 국악기의 이해, 국악기 전시, 국악기 체험장, 터치스크린 등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가야금을 비롯한 현악기 14종, 타악기 37종, 관악기 19종 등의 국악기가 전시되어 있다. 관람 요금은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200원. 관람시간은 09:00~18:00. 1월1일, 설·추석 연휴,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 다음날은 쉰다. 전화 043-742-8843, 740-3886.

|난계국악기제작촌|

난계 박연의 얼을 잇고 전통 국악기를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건립한 난계국악기제작촌은 영동군과 국악기 제작 전문업체가 협약을 맺고 전통 국악기를 제작·판매하는 전통 국악기의 산실이다. 현재 가야금·법금·거문고·아쟁·대아쟁·해금·양금·개량해금·개량아쟁·개량가야금(18현, 22현, 25현) 등 특별주문 제작하는 현악기 공방, 장구·북·소고·특수북 등 주문제작하는 타악기 공방, 현 작업실 등을 갖추고 국악기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높이면서 영동을 국악의 고장으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전화 043-742-7288.

|장지현 장군 전적지|

장지현(張智賢·1536-1593)은 영동 매천에서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였던 양정공 장필무(張弼武)의 2남으로 태어났다. 1590년(선조 23) 천거를 받아 전라도병마절도사 신립(申砬)의 부장이 됐다. 여진 토벌에서 큰 공을 세우고, 이듬해 사헌부 감찰이 됐으나 곧 사직하고 귀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2,000여 명을 모아 추풍령에서 이세영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해 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이끄는 1만여 명의 적군을 맞아 필사적으로 싸워 적병을 김천 방면으로 퇴각시켰다. 이어 금산 방면에서 진격해온 왜군의 협공을 받아 백병전까지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해 58세를 일기로 전사했다.

사후에 병조참의에 추증되고, 영동의 화암서원에 배향됐다. 1978년 그의 충정을 기리기 위해 추풍령면 사부리에 사당을 건립하고 비를 세웠다.

|물한계곡|

충북, 전북, 경북 3도가 만나는 지점에서 당당하게 솟은 삼도봉(1,177m)은 장엄한 산세에 어울리게 깊고 그윽한 계곡들을 여럿 거느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북쪽으로 흐르는 물한계곡이 첫손에 꼽힌다. 영동의 젖줄이면서 금강에 합류하는 물 맑은 초강천의 최상류를 이루는 물한계곡은 삼도봉에서 갈라져 나온 백두대간의 지맥인 석기봉(1,200m), 민주지산(1,242m), 각호산(1,204m) 등 1,000m가 넘는 산들에 둘러싸여있기 때문에 물이 맑다.

한천마을의 상류에서부터 시작해 20여km의 깊은 골을 이루고 있다. 상류로 오르면서 구시용소, 옥소, 의용암폭포, 음주암폭포 등이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다. 특히 기우제소라고도 하는 옥소는 통일신라 때 황간 현감이 기우제를 올리던 곳으로 신성시 여기고 있다.

|옥계폭포|

심천면 옥계리 달이산(551.4m) 남쪽 계곡에 있는 옥계폭포는 국악의 거성 난계가 즐겨 찾았고 시인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옥계폭포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약 150m 정도 걸으면 주변 숲길의 풍치도 좋다. 폭포도 유명하지만 옥계폭포에서 시작하는 달이산(월이산) 등산코스도 유명하여 등산객의 발길도 잦다. 산에서는 금강이 영동군 심천면과 옥천군 이원면을 휘도는 절경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조동 산촌마을|

용화면 조동리 일원의 산촌마을은 민주지산, 각호산, 천마산으로 둘러싸인 산간오지에서 생산된 버섯, 산채, 약초, 호도, 포도 등 특산물이 있다. 마을에 있는 조동 자연수련원은 1일 15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비롯해 회의실, 식당, 잔디광장, 어린이놀이터, ,야영장이 있어 직장인 및 학생, 단체모임의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삼림욕을 즐길 수 있도록 휴양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조동 자연수련원 043-745-6566.

|민주지산 자연휴양림|

용화면 조동리에 자리하고 있는 민주지산 자연휴양림은 백두대간 줄기의 각호산(1,176m), 민주지산(1,241.7m) 등 명산에 둘러싸여 사계절 숲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휴양시설이다. 건강지압을 위한 맨발숲길, 야간조명이 갖춰진 사방댐 분수, 13.4km의 임도시설을 활용한 MTB 코스 등이 있다. 자전거도 비치하고 있다.

숲속의 집 7평형(2실) 50,000원, 10평형(3실) 60,000원, 14평형(1동) 70,000원, 15평형(1동) 80,000원, 20평형(1동) 120,000원, 산림문화휴양관 6평형(5실) 35,000원, 7평형(4실) 40,000원, 야영데크(26개) 5,000원, 오토캠프장(12개) 7,000원, 캠프파이어장 138평 1개소 30,000원, 산악자전거(15대) 5,000원. 입장료 성인 1,000원, 청소년 800원, 어린이 300원. 주차fy 3,000원. 전화 043-740-3437~8 www.cbhuyang.go. kr/minjoojisan


길에서 만난 별미


|올갱이국|

영동에는 청정 자연 속에서 나온 재료로 요리한 먹거리들이 다양하다. 특히 금강 상류나 지류에서 잡은 올갱이(다슬기)로 끓인 올갱이국은 온가족이 여행 중에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맑은 금강에서 잡은 올갱이를 충분히 해금한 다음 집에서 담근 된장을 풀어 끓인다. 여기에 올갱이를 넣고 충분히 우려낸다. 그 다음 애기배추, 부추 등을 넣고 갖은 양념으로 조리하면 맛있는 올갱이국이 된다.
100% 금강 올갱이로 끊여내 맛이 아주 담백하다. 올갱이국(1인분) 5,000원, 삶은 올갱이(1접시) 5,000원, 올갱이 무침(1접시) 15,000원. 영동경찰서 근처의 뒷골집(043-744-0505)이 유명하다.

|어죽 & 도리뱅뱅이|

주로 금강 상류 주민들이 즐겨먹는 어죽은 민물고기에 인삼, 대추 등을 넣어서 특유의 향취가 좋아 입맛을 돋우는 음식이다. 민물고기의 내장을 제거하고 깨끗이 씻은 다음 물을 약간 넣고 삶는다. 채로 걸러 가시를 걸러낸 후 쌀, 국수, 수제비, 인삼, 대추, 그리고 갖은 양념을 넣고 조리하면 맛과 영양 모두 만점인 인삼어죽이 된다.

이와 함께 맛볼 수 있는 도리뱅뱅이는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으며 아삭하고 담백한 맛을 낸 민물고기 튀김으로서 술안주와 간식용으로 제격이다. 강에서 잡은 민물고기를 프라이팬에 빙빙 돌려 구워 요리하기 때문에 도리뱅뱅이라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영동군 관내의 금강 최상류 가선리의 가선식당(043-743-8665), 선희식당(043-745-9450)이 유명하다. 어죽(1인분) 4,000원, 도리뱅뱅이(1접시) 7,000원, 민물새우인 징기미튀김(1접시 6,000원)도 나온다.


일정별 길라잡이
 
● 서부권 금강 본류 수계에 속한 권역으로 학산·양산·심천면에 둘러볼 명소들이 많다. 금강 일대의 양산팔경은 영동의 대표적인 절경이다. 금강 주변은 송호 국민관광지로 지정되어 있다. 하류의 난계 유적지에서는 난계 박연의 예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
● 중부권 영동읍을 중심으로 북쪽의 용산면에는 신항리 삼존불입상이 있고, 남쪽의 양강면에는 김선조 가옥 등이 있다. 민주지산 자연휴양림의 용화면을 이 권역에 넣을 수도 있다.
● 동부권 대부분 백두대간 분수령을 끼고 있는 상촌·매곡·추풍령·황간면의 산간 지역이다. 물한계곡을 품은 민주지산, 전북·경북과 경계에 솟은 삼도봉, 그리고 김천쪽으로 직지사를 거느리고 있는 황학산 등의 명산이 여기에 솟았다. 황간의 한천팔경·반야사, 추풍령 고갯길의 장지현 장군 사당 등이 있다.


일정짜기

● 당일 남한의 중앙에 위치하면서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같은 충청권은 물론이고, 접근하는 데 3시간 정도 걸리는 영호남과 수도권에서도 모두 당일로 둘러볼 수는 있다. 수도권 기준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대전-통영간 고속도로~영국사~양산팔경~점심(올갱이국)~난계국악박물관~한천팔경~추풍령~경부고속도로 추풍령 나들목~귀가.
● 1박2일 첫날 영국사를 둘러본 다음 천태산 산행을 곁들이고, 양산팔경 주변서 숙박한다. 이튿날 영동 읍내의 향토민속자료전시관을 들러보고 황간의 한천팔경을 거쳐 물한계곡을 다녀온 다음 추풍령에서 마무리를 한다. 여행 동선은 당일 코스와 비슷하다.
● 2박3일  물한계곡 방향에서든 휴양림 방향에서든 민주지산 산행을 곁들일 수 있는 넉넉한 일정이다. 


# 교통

동북부로는 경부고속도로(영동·황간 나들목)가 지나고, 서쪽으로는 금산으로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금산 나들목)가 뚫려있기 때문에 서부권으로의 접근도 아주 용이하다. 또 경부선 철도가 중앙에서 각각 동서로 걸쳐 있어 교통이 편리한 편이다.

● 접근드라이브코스
수도권  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19번 국도→영동 /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간 고속도로→금산 나들목→68번 지방도→영동(서울서 3시간 소요)
영남권  대구→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19번 국도→영동(1시간 소요) / 부산→대구-부산고속도로→대구→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19번 국도→영동(2시간30분 소요)
호남권  광주→88올림픽고속도로→함양 분기점→대전-통영간 고속도로→금산 나들목→68번 지방도→영동(2시간30분 소요) / 전주→17번 국도→68번 지방도→영동(1시간30분 소요)
강원권 춘천→중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영동고속도로→호법 분기점→중부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 영동 나들목→19번 국도→영동(3시간 소요)

● 고속·시외버스 
서울→영동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2회(06:50, 15:10) 운행. 고속 2시간40분, 직통 3시간40분 소요, 요금 13,800원.
인천→영동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2회(11:50, 19:00) 운행. 3시간 소요, 요금 13,400원.
청주→영동 여객터미널에서 매일 23회(06:40~20:00) 운행, 1시간40분~2시간10분 소요. 요금 6,800원.
대전→영동 동부터미널에서 매일 12회(07:00~19:40) 운행, 1시간 소요. 요금 4,800원.
서울→황간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매일 40분 간격으로 수시(06:00~20:00) 운행하는 구미행 고속버스 이용. 2시간40분 소요.
*영동 시외버스터미널 043-744-1700~1

● 농어촌버스
영동→송호 국민관광지 매일 9회(07:30, 09:00, 10:10, 12:00, 12:50, 13:50, 15:10, 16:00, 18:00) 운행하는 죽산·봉곡행 버스 이용. 30분 소요, 요금 1,650원.
영동→영국사 매일 6회(06:20, 08:10, 11:00, 13:10, 17:00, 19:10) 운행하는 누교·명덕행 버스 이용. 영국사 입구에서 하차 후 1시간 정도 걸어가야 한다. 40분 소요, 요금 2,050원.
영동→물한계곡 매일 5회(06:20, 07:30, 12:10, 14:40, 17:50) 운행하는 물한리행 버스 이용. 1시간 소요, 요금 3,500원.
영동→황간 매일 20여 회(05:30~20:10) 운행. 30분 소요, 요금 1,400원.
*동일버스 전화 043-742-3971, 043-743-7500.

● 철도
서울→영동역 서울역에서 매일 25회(06:23~23:00) 운행하는 열차 이용. 새마을호 2시간10분, 요금 17,600원. 무궁화호 2시간40분 소요. 요금 11,900원.
*영동역 043-743-7759


# 숙식 (지역번호 043)

● 서부권  양산팔경이 있는 송호리 관광단지에 송호파크(745-0048), 궁전모텔(745-0011), 운주민박(745-1199), 수두리에 석영공원(744-5432), 광운관광농원(743-8851) 등의 숙박시설과 올갱이국을 파는 식당이 있다.
영국사 입구엔 천태파크(744-2361), 민박집인 천태산맑은물(745-2939), 푸른산민박(744-4659) 등이 있다.
국악박물관이 있는 심천면 고당리에는 주모편의점민박(742-5772), 비버리 힐(011-354-2834), 고당민박(742-7031)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 중부권  영동읍 계산리 영동파크(744-9220), 태일장(743-1006), 대흥장(744-8287), 신영장(742-0222), 구천파크(744-5553), 목화장(743-1366) 등의 숙박시설과 식당이 아주 많다.
● 동부권  황간읍에 비취파크(742-6001), 힐탑파크(744-9172), 민박은 원촌리의 월유봉집(742-8652), 우매리의 숲속민박(742-8118), 반야산장민박(744-6532) 등이 있다.
상촌면 물한계곡에는 파라다이스(745-2425), 종점민박(745-1350), 물한민박(745-0040), 딸부자집(745-1860), 동굴민박(745-2211), 민주지산민박(745-7977) 등이 있다.

용화면에는 민주지산 입구의 조동리에 산촌민박(745-6936), 조동민박(743-5667), 민주산민박(745-6939), 휴양림민박(745-1332) 등이 있다. 안정리의 산촌민박(745-1368), 여의리의 지구별여행(743-1201)이 있다.
*김제시청 홈페이지 www.egimje.net 
*김제시청 대표전화 063-540-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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