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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경북 영주

월간산
  • 입력 2006.11.14 13:26
  • 수정 2006.11.27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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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죽령을 넘지 않고 어찌 영주를 논하랴”
영천·풍기·순흥 세 고을이 모인 영남좌도의 길목<br>영주,어떤 곳인가

영남좌도의 큰 고을 영주(榮州) 가는 길. 중앙고속도로로 달려도 좋을 것을 굳이 단양 나들목으로 나와 5번 국도를 탄 것은 옛 나그네들처럼 죽령(689m·竹嶺)을 넘기 위해서였다. 비록 다리품이나 나귀가 아니라 자동차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하면 마음에 둔 영주 고을을 좀 더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남한강의 아름다운 고을 단양을 뒤로 하고, 옅은 가을 안개 걸려있는 죽령을 오른다. 고갯길 둘레로는 옛 나그네들이 쉬어 가던 마을들이 산굽이마다 정겹게 들어서 있다.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사과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산골 노인들에게 ‘다자구 할머니’가 계신 죽령산신당을 물었다.

‘다자구 할머니’는 비록 단양 고을에 주소를 두고 있으나, 죽령을 넘으면서 어찌 찾아뵙지 않고 속 좁게 행정구역만 따지겠는가.

▲ 최근 역사를 겸한 산책 코스로 인기 끌고 있는 죽령 옛길.
▲ 최근 역사를 겸한 산책 코스로 인기 끌고 있는 죽령 옛길.
죽령 주변 마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아주 오랜 옛날, 죽령에 숨어 있는 도둑떼의 횡포가 심하여 행인들이 많은 피해를 보게 되자 조정에서는 산적 소탕령을 내렸다. 그러나 관군은 죽령의 날랜 산적들을 잡는 데 번번이 실패만 했다.

당시 죽령폭포 자락에는 산적들에게 두 아들을 잃은 노파가 외롭게 살고 있었다. 노파는 관군을 돕기로 하고 관군과 암호를 정하고 산적소굴로 들어갔다. ‘다자구’라고 하면 산적을 공격하고, ‘들자구’하면 계속 매복하라는 신호였다. ‘다자구’는 산적들이 ‘모두 잔다’는 뜻이고, ‘들자구’는 ‘아직 덜 자고 있다’는 뜻이다.

어느 날 산적이 모두 술에 취해 잠 든 사이 노파의 ‘다자구’ 신호로 관군은 산적을 섬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할머니는 그 와중에 목숨을 잃었다. 조정에서는 당시 전투 중에 목숨을 잃은 할머니를 위해 사당을 세우고 죽령산신당이라 하였다. 주민들은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이라고도 한다.

조선 말까지만 해도 죽령 동서쪽
단양·영춘·풍기 고을의 세 군수가 제주가 되어 이곳서 관행제(官行祭)를 지냈다. 허나 일제강점기에 이 제사가 폐지되면서 마을 사람들의 동제로 축소되었다. 지금도 매바우 마을 주민들은 매년 3월과 9월의 정사일(丁巳日)에 이곳에서 산신제를 정성 들여 지낸다. 다자구 할머니는 이렇듯 아직까지 제법 대우를 받는 모양이지만, 새로 생긴 중앙고속도로 때문에 사당을 찾아가는 길이 어려워진 것은 세월이 어지러워진 탓일까.

다자구 할머니뿐만이 아니라 죽령을 관장하는 신은 많았던가 보다. 주민들은 옛날에는 죽령에 김유신과 죽지랑(竹旨郞)을 모신 사당도 있었다고 말한다.

‘가는 봄이 그리워 / 모든 것이 서러워 우네 / 아담한 얼굴에 / 주름살 지는 것을 / 잠시 사이나마 / 만나 뵙게 되었으면 / 님이여 그리운 마음으로 가시는 길 / 쑥대마을에 자고 갈 밤 있으실까’

신라 효소왕 때 득오(得烏)가 지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라는 8구체 향가로 우리 귀에 익은 죽지랑은 김유신을 도와 삼국통일을 완성한 화랑이다. 삼국유사에는 죽령과 인연이 있는 죽지랑 탄생설화가 전한다.

신라 진덕여왕 때의 사람인 술종(述宗)이 삭주(朔州·지금의 춘천) 도독사로 부임하는 길이었다. 술종이 죽지령(竹旨嶺·지금의 죽령)을 지날 때 한 거사가 위험을 무릅쓰고 고갯길을 고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둘은 서로 호의를 느끼고 헤어졌다. 삭주에 도착한 술종은 어느 날 죽지령에서 만난 거사가 방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술종이 죽지령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꿈을 꾼 날 거사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인은 꿈 꾼 날부터 태기가 있더니 아들을 낳았다. 술종은 죽지령의 거사가 환생한 것이라 여기고 아들의 이름을 죽지(竹旨)라 지었다. 죽지랑은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김유신과 함께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태종·문무·신문 이렇게 네 임금을 모시는 재상이 되었다.

이런 사연을 안고 있는 죽령은 백두대간에서 두번째로 열린 고개다. 158년(아달라왕 5)에 신라의 죽죽(竹竹)이 처음으로 고갯길을 열었으니 고개 나이가 무려 2,000살 가까이 된다. 첫 고갯길은 죽령보다 2년 전인 156년에 열린 계립령, 곧 지금의 하늘재다. 저 유명한 문경새재가 열리기 훨씬 이전인 삼국시대에 죽령은 하늘재와 더불어 고구려와 신라가 피 튀기며 패권을 다투던 곳이었다. 소백산 서쪽에 있는 단양의 온달산성이 그 흔적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세력이 약해진 하늘재 대신에 죽령은 문경새재,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한양을 연결하는 3대 관문에 속했다. 당시 영남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죽령으로 한양과 인연을 맺었다. 세월이 흘러 1942년 국내에서 두번째로 긴 4.5km의 죽령굴이 뚫리며 죽령 아래로 중앙선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였으나 5번 국도가 지나는 고갯길은 언제나 인파로 붐볐다.

그러다 2002년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4.6km 직선의 죽령터널이 뻥 뚫렸다. 그렇게 되자 안동·풍기·순흥 선비들과 보부상들을 힘겹게 하던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 꼭 하룻길의 죽령 고갯길을 누구나 눈 깜빡할 사이에 지날 수 있게 되었다.

▲ 죽령 고갯마루에 세워진 장승.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통방울눈을 부릅뜨고 오가는 행인을 지켜봤을 것이다.
▲ 죽령 고갯마루에 세워진 장승. 조선시대에도 이렇게 통방울눈을 부릅뜨고 오가는 행인을 지켜봤을 것이다.
그러자 5번 국도는 순식간에 옛길이 되었다.
오르내리던 차량으로 밀리던 그 고갯길이 한참을 기다려도 차 한 대 만날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변해버린 것이다. 길도 썰렁하고 마을들도 왠지 스산해 보였다. 죽령이 죽은 걸까. 아니다. 오히려 죽령은 살아나고 있었다. 행인들은 이전에 비해 훨씬 여유롭게 죽령과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길손이 죽령을 지나던 날도 고갯마루에는 소풍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따사로운 가을 햇살 아래 삼삼오오 모여 노닐며 죽령의 역사를 자연스레 체득하고 있었다. 더불어 희방사역에서 고갯마루까지 이어지는 오솔길인 죽령 옛길을 찾는 이들도 늘어났다. 예전 같으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광경이 아닌가. 죽령의 주인이 자동차에서 인간으로 돌아온 것이다. 죽령 일대는 역사와 자연을 아우르는 콘텐츠도 넘쳐난다. 이를 잘 가꾸면 죽령은 아마 문경새재에 버금가는 관광 명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이즈음이면 성미 급한 독자들은 길손에게 “아니, 언제까지 죽령에만 있을 거냐”고 타박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길손이 죽령을 빠르게 넘지 못하는 까닭은 죽령의 역사성이 그만큼 높고 크기 때문이다. 죽령만 제대로 이해하면 이 고개에 기대어 살아온 영주 고을의 절반은 이미 둘러본 것이나 마찬가지다.

고갯마루에서 영주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길 왼쪽으로 10여 기의 장승 무리가 퉁방울 눈을 부릅뜨고 행인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인다. 입을 쩍 벌린 소백대장군이 가운데 자리를 잡고, 그 주변으로 경천애인, 평화통일, 인자요산 장승들이 무서우면서도 우스운 인상을 쓰고 있다. 그들 중 몇몇은 솟대를 껴안고 있다. 장승 바로 아랫자락에는 ‘죽령주막’이란 간판을 단 초가 한 채가 터를 잡고 있는데, 장독 있는 텃밭과 초가 분위기가 제법 어울린다. 주차장의 승용차들, 그리고 텔레비전에 출연했다는 광고 간판만 아니면 잠시 조선시대의 주막으로 착각했을 것이다. 

주막에서의 탁주 한 잔은 다음으로 미루고 죽령을 내려선다. 전형적인 분지를 이룬 영주 일대의 널찍한 땅덩어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누릇누릇한 것은 추수를 앞둔 논이요, 까무잡잡한 것은 인삼밭, 푸른 기운이 남아있는 언덕은 사과 과수원이리라.

영주는 영천·풍기·순흥이라는 그리 너르지 않은 규모의 세 고을이 하나로 합쳐진 고을이다. 이중에서 죽령을 내려서서 가장 먼저 만나는 고을은 이방인들에게 인삼과 십승지로 널리 알려진 풍기(豊基)다.

먼저 인삼 이야기로 풀어보자. 북한에서는 개성인삼이 독보적이지만, 남한에서는 금산·강화·풍기를 3대 인삼재배지로 꼽는다. 어느 고을이나 마찬가지지만 풍기 주민들의 인삼 자랑은 유별나 어느 자리서나 빠지지 않는다. 풍기 인삼은 두세 번 달여 먹어도 약효가 줄지 않으며, 말렸을 때도 굵기가 변하지 않아 산삼에 버금가는 인정을 받았다. 또 풍기 인삼을 담았던 봉지는 백날이 가도 향이 가시지 않을 정도로 약효가 있다고 한다.

▲ 소백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풍기 고을. 인삼과 십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소백산을 등지고 자리 잡은 풍기 고을. 인삼과 십승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풍기에 인삼재배가 성행한 것은 16세기 중엽부터라 알려져 있다. 1545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산삼을 조정에 바치느라 고생하는 주민들을 위해 산삼의 종자를 직접 심어 퍼뜨리면서 시작된 것이라 한다. 이후 주세붕이 1551년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게 되자 인근 산에서 산삼 씨앗을 채취해 재배하게 했는데, 이것이 또한 개성인삼의 시초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인삼을 재배한 것은 이보다 이전이지만, 주세붕은 인삼 재배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 풍기역 앞에 있는 풍기인삼시장. 풍기 인삼은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 선생이 백성들에게 산삼 종자를 재취하여 재배케 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 풍기역 앞에 있는 풍기인삼시장. 풍기 인삼은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 선생이 백성들에게 산삼 종자를 재취하여 재배케 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인삼을 재배하고, 사과를 따고, 인견을 짜며 생계를 이어가는 풍기의 주민들은 대부분 조선 말기를 전후해 전국에서 모인 비결파의 후손들이다. 정감록의 감결은 나라 제일의 피란지로 손꼽은 열 군데의 승지 가운데서도 풍기 금계동(金鷄洞)을 으뜸으로 쳤다.

‘금계’라는 지명은 풍수에서 ‘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형에서 유래했다. 일반적으로 십승지라 하면 전란을 피할 수 있고, 질병이나 굶주림, 가뭄이나 홍수 등의 피해가 없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소백산 지역 역시 임진왜란과 6·25전쟁 때 참혹한 피해를 입었고, 금계동이 있는 마을 역시 전란의 참화를 피하지는 못했다.

풍기에서 올려다보면 어디서나 소백산(小白山·1,440m)이 올려다보인다.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이 동해로 치우쳐 흐르다가 태백 매봉산부터 문득 내륙으로 머리를 돌려 내려와 처음으로 빚은 소백은 우리 조상들이 예부터 신령스럽게 여겨온 산이다. 일찍이 한국 최고의 예언자로 불리던 남사고(南師古·1509-1570)는 이 소백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사람이 살 만한 산’이라며 넙죽 절을 올렸다.

여인의 육체처럼 부드러운 능선을 따라 펼쳐지는 소백의 평원은 어디서나 돋보인다. 특히 연화봉에서 비로봉, 국망봉에서 상월봉 구간의 고원 평원은 누구나 반할 만한 경관을 갖고 있다. 늦봄의 진달래와 철쭉, 겨울의 설화와 상고대의 명성은 이미 나라 안에서 으뜸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관에 마음이 풀어지기도 하지만, 영마루를 넘나드는 겨울철 칼바람은 웬만한 돌멩이는 모두 날려버릴 정도로 거세다. 북동에서 남서 방면으로 뻗어내린 소백의 능선이 늘 북서풍을 맞받기 때문이다.

풍기에서 부석사까지 이어지는 20km 정도의 지방도는 일명 ‘사과 드라이브’ 코스다. 가을철이 되면 이곳은 새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과수원이 길 양쪽으로 펼쳐진다. 차를 세우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사과나무의 사열을 받으며 달리는 기분은 이 길의 큰 매력이다.

풍기와 부석 사이에 자리한 순흥(順興)은 조선시대에 영월·태백·봉화·울진 지역을 관할하던 한강 이남 제일의 도호부(都護府)가 있던 고을이다. 영주 지역에서도 특히 이 지역에 고분이 제일 많이 분포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넉넉한 농토와 소백의 자연은 이 고을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이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백산 동쪽 고을들을 호령하던 이곳은 1457년(세조 3) 피바람이 불면서 쑥대밭이 되었다. 바로 ‘금성의 변’이라 부르는 단종복위사건 때문이다.

▲ 단종복위를 꿈꾸던 금성대군이 귀양을 와서 머물던 곳. 탱자나무 울타리가 눈길을 끈다.
▲ 단종복위를 꿈꾸던 금성대군이 귀양을 와서 머물던 곳. 탱자나무 울타리가 눈길을 끈다.
수양대군이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김종서·황보인 등을 죽이자, 동생인 금성대군은 옳지 못함을 지적하다 순흥으로 귀양 오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 금성대군은 단종을 복위시키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했다. 금성대군은 순흥부사로 부임한 이보흠과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우선 병력을 모으고 군량을 넉넉히 준비해 놓고 힘이 생기면 영월에 있는 단종을 순흥으로 모셔온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군사를 풀어 백두대간의 죽령과 새재를 막고 힘을 기른 후, 한양으로 진격해 단종을 다시 왕으로 모시려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허나 이들의 희망은 금성대군의 몸종과 순흥부사의 부하가 공모해서 세조측에 밀고함으로써 실패하고 만다.

피가 튀는 처절한 응징이 뒤를 따랐다. 주모자뿐만이 아니라 역모에 가담했다는 굴레를 쓴 숱한 주민들이 희생됐다. 이때 이들이 참살 당하며 흘린 피가 순흥의 죽계천을 따라 30리 밖까지 흘러내렸는데, 지금도 하류에는 ‘피끝’이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이 남아있다. 순흥 읍내에는 묵밥으로 유명한 식당이 있어 외지인들이 별식이라며 즐겨 찾는데, 이 음식 역시 당시 사건의 여파라는 의견도 있다. 즉 순흥이 도호부로 명예회복될 때까지 200여 년간 조정의 감시와 핍박을 받아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에 그나마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만든 묵밥이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 소수서원
▲ 소수서원
한편, 순흥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으로 유명한 고을이기도 하다. 단종복위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어느덧 1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뒤인 1543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세운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처음 건립 당시에는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 했는데, 나중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국가지원을 조정에 건의하여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다.

당시 임금인 명종은 손수 편액 글씨를 써서 하사했던 것인데,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교학을 닦게 한다’는 뜻으로 학문 부흥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액서원(賜額書院)은 나라로부터 책·토지·노비 등을 하사받고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가진 서원을 말한다.

▲ 은은히 퍼지는 솔향이 일품인 소수서원 솔밭. 소수서원의 소나무는 학자수라 불린다.
▲ 은은히 퍼지는 솔향이 일품인 소수서원 솔밭. 소수서원의 소나무는 학자수라 불린다.

소수서원은 고려 후기의 명신 안향의 영정으로서 한국 영정 가운데 가장 오래된 회헌 영정(국보 제111호)을 비롯해 수많은 문화재가 있으나, 무엇보다 울창하게 들어찬 솔숲이 좋다. 이 나무들은 흔히 학자수(學者樹)라 불리는데, 그 숲에는 유생들이 공부하며 식히던 소혼대(消魂臺)라는 바위가 있다.

그런데 소수서원에 들어서면 솔숲 오른편에 서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59호)가 유독 눈길을 끈다. 소수서원을 처음 찾은 이는 누구나 “서원에 웬 당간지주?” 하며 의아하게 생각하지만, 원래 소수서원 자리는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고개를 끄덕인다.

▲ 소수서원에 있는 당간지주는 원래 이곳이 숙수사라는 절집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 소수서원에 있는 당간지주는 원래 이곳이 숙수사라는 절집이 있던 곳임을 알려주고 있다.
소수서원에는 한때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흔적이 많다. 서원 입구의 경렴정이라는 정자 너머로 보면, 맑은 죽계수 건너편 바위에 ‘敬(경)’이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여기에는 절터와 관계된 전설이 전한다. 주세붕이 숙수사를 헐어내고 서원을 건립할 때, 절에 있던 불상들을 모두 이 바위 아래의 물에 던져 버렸다. 그러자 한 맺힌 불상들이 밤이면 소를 첨벙거리며 뛰어올라 사람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다. 이를 전해들은 주세붕은 바위에 ‘敬’ 자를 새겼더니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가하라’는 이 글귀는 억불숭유라는 조선의 정책에 따라 불교의 힘이 축소되고 유교의 세력이 커지던 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절터가 서원터로 바뀌는 일이 적지 않았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소수서원 일대에서는 1960년대 초에 국보급 금동불상 등이 10여 점이나 발견되기도 했다. 소수서원 충효교육관 앞뜰에는 숙수사터에서 출토된 석조유물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와서 소수서원과 길 건너의 금성단만 보고 떠나려니 왠지 허전하고 아쉬웠는데, 최근 소수서원에서 이어지는 죽계천 건너편에 서원과 향교 등 전통 교육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소수박물관과 선비촌이 조성됨으로써 제법 넉넉하게 둘러볼 수 있게 되었다.

▲ 선비촌
▲ 선비촌
소수서원 옆에 위치한 선비촌은 전통 가옥을 복원해 모아놓은 민속마을이다. 널따란 부지에 기와집인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등 7동과 아담한 초가인 장휘덕 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이후남 가옥, 김상진 가옥 등 5동이 자리하고 있다. 영주에 있는 기념할 만한 모든 가옥을 한 자리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강학당, 물레방앗간, 대장간, 정자, 산신각 등 모두 40여 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영남 선비 마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촌의 장점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직접 살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복원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겉만 멀쩡해 보이는 드라마 야외 세트장과 달리 직접 난방을 하고 사람이 살 수 있게끔 지었다. 거기에 배추, 무, 조, 수수 등이 자라고 있는 텃밭도 좋았으나, 마을 한쪽에 아담하게나마 사과밭을 조성해놓았다면 금상첨화였을 거란 생각을 해봤다.

소수서원을 나와 금성단,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순흥향교 등을 둘러보고 부석사로 가는 길. 마음이 급하지만, 고치령 산신령이 소매를 잡아끈다. 하늘이 점지해준 승지가 존재한다는 양백지간(兩白之間)은 백두대간의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를 말한다. 지역적으로 크게 보면 강원도 영월, 충청북도 단양, 그리고 경상북도 영주·봉화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중에서도 고치령은 소백이 끝나고 태백이 시작하는 고개로 여겨진다.
▲ 고치령 가는 고갯길. 순흥의 금성대군과 영월의 단종이 서로 소식을 전하던 고갯길이기도 하다.
▲ 고치령 가는 고갯길. 순흥의 금성대군과 영월의 단종이 서로 소식을 전하던 고갯길이기도 하다.
영주의 순흥과 단양의 영춘을 잇는 고치령(770m)은
신라시대에 근처에 절을 지으려고 터를 잡았던 일로 절터고개라 불렸으나 세월이 흐르며 고치가 되었다. 대동여지도에는 곶적령(串赤嶺)으로 적고 있다. 고치령은 큰 고개인 죽령을 포함해, 영월 하동과 영주 부석을 잇는 마구령과 함께 소백산을 넘는 세 개의 고갯길 중 하나였다. 지금은 백두대간 종주자들이나 고갯마루의 산신각에서 치성드리는 무속인들 외엔 찾는 이 별로 없는 고개지만, 20여 년 전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주민들의 통행이 잦은 고갯길이었다.

고치령 산신각엔 금성대군과 단종대왕이 모셔져 있다. 민간에 전승되는 무속신앙에 의하면 세조에게 쫓겨나 유배지 영월에서 죽은 단종은 태백산신령이 되었고, 조카를 보호하다 형인 수양대군 눈밖에 난 금성대군은 순흥에서 단종복위를 꾀하다 죽임을 당한 후 소백산신령으로 모셔졌다. 비록 올바른 세상을 꿈꾸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초들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살벌한 분위기에서도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고치령은 금성대군과 단종을 이어주는 길목에 있다. 영주의 향토사학자들은 순흥으로 유배당한 금성대군이 영월 청령포에 갇힌 단종과 소식을 주고받을 때 그의 밀사들이 이 고치령을 넘나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치령은 순흥에서 영월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치령은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라 정의로운 세상을 꿈꾸는 의리의 통로로 승격되는 것이다.

고치령 산신당은 마을사람들이 매년 소를 잡아 제를 올릴 정도로 영험한 제당이라 타지에서도 무속인들이 많이 들락거렸다. 물론 백두대간 종주자들도 쉬어가면서 무사 산행을 빌기도 한다. 짙은 숲과 어우러져 성스러운 기운이 넘치던 산신각은 그러나 2001년 어떤 기도객이 켜 놓은 촛불 때문에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전소되었다. 현재의 산신각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여기서는 백두대간 분수령이 행정구역을 나누지 못하고 있다. 고치령 북쪽의 마락리를 비롯해 마구령 북쪽의 남대리, 도래기재 서북쪽의 우구치리도 모두 그렇다. 이 마을들은 모두 행정구역으로는 영주에 속하면서도 백두대간 너머에 있는 탓에 남한강 수계가 된다. 이곳의 분수령은 도계를 이루고도 남을 정도로 제법 굳센 편이다. 그래서 흔히 첩첩산중에 갇힌 이 마을들을 ‘영남의 고도(孤島)’라 부르기도 한다.

▲ 고치령 너머의 마락리에 있는 마지바위. 보부상의 말이 이곳서 자주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 고치령 너머의 마락리에 있는 마지바위. 보부상의 말이 이곳서 자주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고치령의 마락리(馬落里)는
순흥과 영월을 오가던 보부상의 말들이 마지바위라 불리는 곳에서 자주 떨어져 죽었다 하여 불리는 지명이다. 이 마을 주민들은 해마다 정월 초나흗날과 시월 초정일에 고치령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이곳 주민들은 영월이나 영춘으로 나가는 대신 고치령을 넘어 다녔다. 새벽에 대문 나서면 한밤중에야 돌아오는 먼 하룻길이었지만 순흥장(2·7일)이나 부석장(1·6일)의 규모가 제법 컸기 때문이다.

마구령의 남대리(南大里)는 정감록에서 이르는 십승지 가운데 한 곳이자, 남사고가 양백지간에 숨어 있다고 이른 명당으로 꼽히는 마을로도 알려져 있다. 순흥의 금성대군이 단종 복위를 꾀할 때 병사를 양성하던 곳이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마을 북쪽의 어래산(1,063m)은 영주와 충북 단양, 강원도 영월이 만나는 ‘삼도봉’이다. 주민들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영주의 순흥장, 단산장(4·9일), 부석장이 서는 날이면 단양 의풍리와 영월 와석리 사람들과 땔감이나 산약초를 둘러매고 고치령과 마구령을 넘어갔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화전민 이주정책 이후 주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마을은 한적해졌다.

고치령을 빠져나왔을 때 사위는 제법 어둑해졌다. 이튿날 이른 아침에 부석사(浮石寺)를 찾으려다 문득 한밤중의 부석사가 궁금해졌다. 어둠을 헤치며 부석사로 내달렸다. 산채정식 따위를 파는 식당이 즐비하게 늘어선 부석사 사하촌을 지나면 완만한 경사의 길 좌우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을 잇는다. 가을이 깊어 가면 샛노란 이파리로 뒤덮여 장관을 이루는 길이다.

▲ 부석사 야경. 달도 없는 깜깜한 밤이었으나 오히려 독경소리는 더욱 듣기가 좋았다.
▲ 부석사 야경. 달도 없는 깜깜한 밤이었으나 오히려 독경소리는 더욱 듣기가 좋았다.

또 은행나무 뒤로 펼쳐진 산비탈 과수원에선 주렁주렁 매달린 붉은 사과가 나그네를 유혹한다. 나라에서 가장 예쁘며 웅장한 절집으로 꼽히는 부석사는 일주문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렇게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러나 지금은 달조차 뜨지 않은 깜깜한 밤. 은행나무도, 사과나무도 모두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있을 뿐이다.

일주문 지나 천왕문 오르는 길. 왼편엔 절에서 깃발을 게양하던 당간지주가 어렴풋이 보인다. 전문가들이 ‘우리나라 절집의 당간지주 중 가장 세련되게 다듬은 명작’이라고 평가 받는 작품이다.

여기서 무량수전에 이르는 아홉 개의 거대한 석축은 극락에 이르는 구품정토(九品淨土)다. 석축에 쌓은 가파른 계단을 하나 오를 때마다 고통의 사바세계는 점차 멀어진다. 산사는 수직 공간의 경사에 수평으로 터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빛날 화(華) 자 형태로 오밀조밀하게 건물이 배치된 부석사는 여느 절집과는 다르다. 장딴지에 잔뜩 힘이 들어가게 하는 경사는 일주문 지나 천왕문, 범종각, 안양루에 이르도록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경사는 점점 가팔라진다. 부석사 계단이 가파른 줄은 알았으나 불빛 없는 한밤중에 랜턴도 없이 오르려니 더욱 까다롭다.

▲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부석사 무량수전.
▲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건물로 꼽히는 부석사 무량수전.
안양루(安養樓)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일제강점기 때 버트런드 러셀이 와서 보고는 ‘조선 국보 1호’라며 경탄해마지 않았던 석등 너머로 무량수전(無量壽殿)이 반긴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창건연대가 가장 오래된 무량수전은 전문가들로부터 ‘더하고 뺄 것 하나 없는 완벽함을 자랑하는 건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랫중간부분이 불룩한 배흘림기둥과 사뿐히 고개든 추녀의 어울림은 현대 건축가들도 탄복할 정도.

무량수전은 외부만이 아니라 내부 공간도 눈길을 끈다. 보통 불전(佛典)은 내부 정면에 불상을 놓지만 이곳의 주불(主佛)인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왼쪽 벽에서 오른쪽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무량수전의 건물이 남향이므로 불상은 동향인 것이다. 이는 불국정토의 올바른 정진을 바라는 불교정신의 발로라 한다. 왼쪽 끝에 불상을 배치하면 정면에서 볼 때보다 먼 거리의 공간감각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불상 앞의 기둥들에 의해 장엄함까지 더해진다. 거기에 천장도 막혀 있지 않으니 웅장함도 더불어 표현되는 것이다. 또 길이와 굵기가 제각기 다른 부재들은 뛰어난 절제미를 자랑하고, 기둥·대들보·서까래의 조화는 고저장단(高低長短)의 음률을 자아낼 정도로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양루에서 사찰 바깥을 바라보면 백두대간의 소백산에서 뻗어나온 산줄기들이 영남땅 아담한 분지들을 껴안은 풍경이 펼쳐진다. 김삿갓이 여기서 “인간 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을 볼까나”하며 읊조렸다던 풍경이다. 안개 낀 아침 풍경이 좋으나 역시 지금은 아무 것도 뵈지 않는 한밤중. 그래도 웬일인지 그다지 서운치 않다.

무량수전에서 조사당(祖師堂)으로 가는 언덕길의 삼층석탑에서 바라보는 경관도 안양루에서의 그것에 빠지지 않는다. 부석사 내부 공간의 짜임새에 못지않게 외부 공간으로 펼쳐지는 백두대간 전망대로서의 경관은 정말 장하다. 의상과 선묘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의상은 이곳에 절터를 잡으려 무진 애를 썼다. 소백산의 비로사, 초암사, 성혈사, 그리고 직선거리로 20여 리 떨어진 봉화의 축서사 등 인근의 웬만한 절집은 대부분 의상이 부석사터를 찾기 위해 다니면서 첫 인연을 맺게 된 절집들이 아닌가.

어둠이 너무 짙어 조사당까지 오르지 못하고, 소박한 삼층석탑 옆에 앉아 밤 깊은 산사를 오랫동안 내려다본다. 밤하늘에 잔잔히 울려퍼지는 목탁소리와 염불소리…. 그리고 한 스님이 천 배를 올리고 있는 그 밤에 산사의 외형적인 조망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었다. 아니 그동안 우리는 너무 바깥의 경치나 건물의 외형에만 신경을 썼는지도 모른다. 가만 내려다보니 이곳은 삼라만상이 하나로 어울려 돌아가는 화엄의 공간이었다.

이런 밤이라면 종교가 달라도 부처께 삼배를 올린다 해서 누가 무엇을 탓하겠는가. 길손의 발걸음은 어느새 여래상이 굽어보고 계시는 무량수전으로 이끌려가고 있었다. 풀벌레 우는 가을밤이 제법 깊다.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경상북도 북부 중앙에 있는 영주시(榮州市)는 동쪽으로는 봉화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예천군, 서쪽은 충청북도 단양군, 북쪽은 강원도 영월군과 접하는 고을이다.

영주 북서쪽으로 선달산(先達山·1,236m)~국망봉(國望峰·1,421m)~소백산(小白山·1,440m)~연화봉(蓮花峰·1,394m)~죽령(竹嶺·689m)~도솔봉(兜率峰·1,314m) 등 백두대간 분수령이 기호지방과 경계를 이루며 뻗어 있다. 기호지방과의 교통은 주로 죽령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천은 소백산에서 발원한 남원천(南院川)·금계천·죽계천(竹溪川)·단산천이 남쪽으로 흘러 낙동강의 지류인 서천으로 모여 영주 시가지를 적시고 지난다. 또 부석을 적시고 흘러온 낙화암천을 받아들인 내성천(乃城川)이 서천과 나란히 남류하는데, 이들 하천 유역에는 비교적 비옥한 침식분지가 발달해 있다.

백두대간 분수령 동쪽 사면에 위치한 내륙 분지이기 때문에 기온의 연교차가 큰 대륙성기후를 나타낸다. 때문에 계절적으로 봄과 가을이 짧다. 1월 평균기온은 -2.9℃ 안팎이며, 8월의 평균기온은 24.5℃다. 연강수량은 약 1,515mm이며, 연최저기온은 -16.2℃이고, 최고기온은 35.5℃를 나타낸다.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으며, 진한 12국의 하나인 기저국(己?國)이 풍기읍에 있었다. 고구려 때 내이군(奈已郡)·급벌산군(及伐山郡)이, 신라 때 기목진(基木鎭)이 설치됐다. 757년(경덕왕 16) 내이군은 내령군(奈靈郡)으로, 급벌산군은 급산군(及山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고려 때 내령군이 강주(剛州)로, 급산군이 흥주(興州)로, 그리고 기목진이 기주현(基州縣)으로 바뀌었으며, 강주와 흥주는 각각 지영주사(知榮州事)와 순흥부로 승격됐다.

조선 초기에 군현의 등급이 조정되면서 영주와 기주는 군으로 바뀌었고, 기천군은 1450년(세종 32) 풍기군(豊基郡)이 됐다. 1896년(고종 33) 13도제 실시로 경북의 군이 된 뒤 1914년 군·면 통폐합 때 영주군·풍기군·순흥군(順興郡)이 통합됨으로써 영주군이 성립됐다. 1980년 영주읍이 시로 승격해 분리되고, 나머지는 영풍군(榮豊郡)으로 개칭됐다. 1995년 시·군 통폐합에 따라 영풍군이 영주시에 통합됐다. 2006년 현재 1읍 9개면 9개동을 관할한다.

농경지는 논이 45%, 밭이 55%로 밭농사를 많이 짓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보리 등의 곡류와 약초·잎담배·인삼 등의 특용작물이며, 사과재배가 성하다. 특히 풍기인삼과 풍기인조견직물이 유명한데, 이곳의 인삼 재배면적은 전국의 약 20% 정도에 이른다.
강원도와 충북 등 부근의 풍부한 임산자원을 기반으로 제재·목재·펄프 관련 산업이 발달했으며, 관동지방의 석탄 등 지하자원을 영남지방으로 수송하는 수송중심지가 되고 있다. 교통은 중앙선·영동선·경북선 등의 산업철도가 교차하고, 중앙고속도로와 국도, 지방도가 지나므로 편리하다.


|부석사|

부석면 봉황산(鳳凰山) 중턱에 있는 부석사(浮石寺)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이다.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창건 설화는 유명하다. 부석사라는 이름은 무량수전 서쪽 옆의 떠 있는 돌을 ‘뜬돌’이라 부른 데서 연유했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진 바위가 있다.

1016년(고려 현종 7)에 원융국사가 무량수전을 중창했고, 1376년(우왕 2)에 원응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이듬해 조사당을 재건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고,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인 무량수전을 비롯해 국보 5점, 보물 4점 등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는 대찰이다. 전화 639-6498, 홈페이지 www.pusoksa.org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석등(石燈·국보 제17호)은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꼽히고 있다.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무량수전(無量壽殿·국보 제18호)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지었으나, 1358년(공민왕 7)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건물은 1376년(고려 우왕 2)에 다시 짓고 1916년에 해체·수리했다.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부석사 조사당|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祖師堂·국보 제19호)은 1377년(고려 우왕 3)에 처음 세웠고, 1490년(조선 성종 21)과 1493년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 옆면 1칸 크기의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구조를 기둥 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건물이 아담하기 때문에 세부 양식이 무량수전보다 한결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부석사 조사당 벽화|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 안쪽에 있는 벽화(국보 제46호)는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 색, 백색, 금색 등으로 채색했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cm, 폭 75cm 가량이다.

양쪽의 두 보살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1377년(고려 우왕 3)임을 알게 됐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 됐으며, 회화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는 벽면 전체를 떼어 유리상자에 담아 무량수전에 보관하고 있고, 이곳에는 모사한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은 고려 초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돼 가치가 매우 크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이다. 불상의 높이는 2.78m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63호)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 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이 아미타불이라고 여기고 있다. 지금의 손 모양은 조선시대에 불상의 파손된 부분을 고치면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소수서원|

순흥면 내죽리의 소수서원(紹修書院·사적 제55호)은 한국 최초의 서원이다.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를 세우고 다음해에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설립한 것이 시초다. 1544년 안축과 안보,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가로 모셨다.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이 됐다. 1871년(고종 8) 서원철폐 때에도 철폐를 면한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화 054-639-6693

|회헌 영정|

소수서원에 있는 회헌(晦軒) 안향(安珦·1243-1306)의 초상화(국보 제111호)로 가로 29cm, 세로 37cm의 반신상이다. 안향은 고려 원종 1년(1260) 문과에 급제go 여러 벼슬을 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원나라에 다녀오면서 주자학을 우리나라에 보급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다.

세상을 떠난 지 12년 후인 1318년(고려 충숙왕 5) 공자의 사당에 그의 초상화를 함께 모실 때 1본을 더 옮겨 그려 순흥향교에 모셨다가 조선 중기 백운동서원을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초상화로, 고려시대 초상화 화풍을 알 수 있어 회화사 연구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시선의 방향과 어깨선에서 선생의 강직한 인상이 보인다.

|주세붕 영정|

조선의 문신이며 학자였던 주세붕의 상반신을 그린 초상화(보물 제717호)로 가로 62.5cm, 세로 134cm다. 주세붕(周世鵬·1495-1554)은 154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을 세웠다. 이 초상화는 사모관대의 정장 관복을 차려입고 왼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간략한 선으로 묘사하고, 넉넉한 몸체에 목은 거의 표현하지 않아 권위적인 기품이 엿보인다.

정확한 제작연대를 추정하기 힘들지만 색이 바라고, 훼손된 상태, 복식, 필법 등으로 미루어 제작연대가 상당히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다. 16세기 초상화가 대부분 공신상인데 비해 학자의 기품이 드러난 학자상으로 매우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선비촌|

소수서원 옆에 위치한 선비촌은 전통 가옥에서 숙박과 전통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민속마을이다. 18,000평 부지에 기와집인 만죽재 고택, 해우당 고택, 김문기 가옥, 인동장씨 종택, 김세기 가옥, 두암 고택 등 7동과 아담한 초가인 장휘덕 가옥,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 두암고택 가람집, 이후남 가옥, 김상진 가옥 등 5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외에도 강학당, 물레방앗간, 대장간, 정자, 산신각 등 모두 40여 채의 건물이 복원되어 조선시대 선비 마을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선비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전시와 이벤트, 전통문화 체험 등 각종 기획프로그램에서 수준 높은 전통문화를 체험할 수 있다.

숙박료는 기와집 2인1실 25,000∼30,000원, 4인1실 50,000원. 초가집 2인1실 20,000원, 4인1실 40,000원(054-638-5831). 요금은 어른 3,000원,  청소년 2,000원, 어린이 1,000원. 주차료는 없다. 이 입장권으로 소수서원, 소수박물관, 선비촌을 모두 둘러 볼 수 있다. 관람시간 09:00~22:00. 전화 054-638-7114, 홈페이지 www.sunbitown.com

|소수박물관|

소수서원과 선비촌 사이에 들어선 소수박물관은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 2만여 점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하는 공간으로 모두 4개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제1전시실은 고인돌, 선돌, 바위그림 등 청동기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문화유적 등 다양한 유물을 전시한 공간이다. 남한 유일의 고구려식 벽화고분으로 꼽히는 순흥읍 내리 벽화고분(사적 제313호) 모형도 전시되어 있다.

제2전시실은 유교의 형성에서 근본이념, 전개의 공간이고, 제3전시실은 명현, 충절로 이름 높은 위인들을 받들어 모시고 배움을 익히던 사학기관인 서원과 지방의 인재를 양성하던 향교에 대하여 서술한 공간이다. 제4전시실은 숙수사지와 소수서원, 주세붕의 업적과 소수서원 창건이야기, 사액의 경로, 소수서원에 배향된 인물 등 소수서원과 함께 한 역사를 알 수 있는 공간이다.

|순흥향교|

순흥면 청구리에 있는 순흥향교(順興鄕校)는 고려 후기의 향교다. 원래 순흥부 북쪽 금성에 창건했으나 단종복위운동으로 고을과 함께 향교가 혁파됐다가 1683년(숙종 9)에 다시 세워졌다. 1718년 순흥부 동쪽 위야동에 이건했고, 1790년(정조 14) 지금의 자리로 다시 옮겨 세웠다.

건물은 전면 영귀루를 지나면 동재와 주사가 명륜당 앞에 놓여 있고, 그 뒤 별도의 일곽 전면에 내삼문을 두고 북쪽에 대성전이 자리 잡고 있다. 대성전 앞에는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동무, 서무가 마주보고 있다. 강학 공간인 명륜당과 제향 공간인 대성전이 앞뒤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다.

|수도리 전통마을|

문수면 수도리에 있는 마을로서 무섬마을이라고도 한다. 이는 물 위에 떠 있는 섬을 뜻하는 수도리(水島里)의 우리말 지명. 수도리는 내성천이 동쪽 일부를 제외한 3면을 휘돌아 흐르는 안쪽에 펼쳐진 모래톱 위에 터를 잡고 있다. 풍수지리학 상으로는 매화가 피는 매화낙지, 또는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 형국의 길지라 한다.

17세기 중반에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처음으로 들어와 살았고, 그의 증손녀 사위인 선성김씨가 영조 때 들어왔다. 이 무렵부터 두 집안이 함께 세거해 오늘날까지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모두 48가구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다. 이중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김규진 가옥, 김위진 가옥, 해우당 고택, 만죽재 고택 등 9점이 도문화재자료와 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전화 054-639-6062.

|희방사|

풍기읍 수철리 소백산 기슭에 있는 희방사(喜方寺)는 643년(신라 선덕여왕 12) 두운조사가 창건한 사찰이다. 1953년에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바로 밑에 높이 28m의 희방폭포가 있다. 1568년(선조 1)에 새긴 월인석보 1·2권의 판목을 보존하고 있었는데, 한국전쟁으로 법당과 훈민정음 원판, 월인석보 판목 등이 소실됐다. 경내에 희방사 동종(도유형문화재 제226호)이 있다. 전화 054-638-2400.

|비로사|

풍기읍 삼가리 소백산 비로봉 남쪽 기슭에 자리 잡은 비로사(毘盧寺)는 통일신라시대에 진정이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 말 고려 태조 왕건이 방문해 진공의 법문을 듣고 그를 매우 존중했다. 1126년(인종 4) 인종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불아(佛牙)를 이 절에 봉안하도록 했고, 1468년(예종 1)에는 김수온이 왕실의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석불상 2구만 남고 모두 불타버린 뒤 몇 차례 중창이 있었으나 1908년 법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렸고, 1919년 법당을 중수했다. 현재 9세기 통일신라 화엄불교의 특징을 보여주는 영풍비로사석아미타와 석비로자나불좌상(보물 제996호)을 비롯해 진공대사보법탑비(도유형문화재 제4호)와 석조당간지주(도유형문화재 제7호) 등 중요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전화 054-638-5033.

|초암사|

순흥면 배점리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에 있는 초암사(草庵寺)는 의상이 부석사터를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수도하며 임시 기거하던 곳이다. 부석사를 지은 후 이곳에 다시 절을 세웠는데, 우람한 거석 축대와 주춧돌 등으로 미루어 규모가 큰 절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6·25전쟁으로 파괴되어 다시 지은 법당이 남아 있으며, 통일신라 하대에 조성한 삼층석탑(도유형문화재 제126호)과 동부도(도유형문화재 제128호), 서부도(도유형문화재 제129호) 등을 소장하고 있다. 전화 054-633-2322.

|성혈사|

순흥면 덕현리 소백산 기슭에 있는 성혈사(聖穴寺)는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다. 절 이름은 절 아래 30m 지점에 있는 바위굴에서 성승(聖僧)이 나왔다고 해서 붙여졌다. 현재 대웅전과 나한전,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중 나한전(羅漢殿·보물 제832호)은 1553년(조선 명종 8)에 세우고, 1634년(인조 12)에 중창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 건물로 배흘림기둥과 꽃창호문이 매우 아름답다. 앞문의 창에 조각을 만들어 장식했는데, 특히 가운데 칸에서 물고기·게·동자상·연꽃·새 등의 뛰어난 조각과 공예기술을 엿볼 수 있다. 유물로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을 지닌 석조비로자나불상 등이 전한다.

|흑석사|

이산면 석포리에 있는 흑석사(黑石寺)는 신라 때 의상이 창건했으나 임진왜란 이전까지의 연혁은 전하지 않는다. 사찰 인근에 검은 빛깔의 바위가 있어 흑석(黑石)이라 불리는 마을의 이름을 따와 흑석사라 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세가 기울었고,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에는 폐사됐다는 기록이 나온다. 1945년 초암이 중건했다.

유물로는 아미타불좌상과 복장유물,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1950년 법천사에서 옮겨온 아미타불좌상은 효령대군이 왕실에 부탁해 만든 것으로,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목조불상으로 손꼽힌다. 이 불상 안에서 금동사리함과 사리 등의 복장유물이 나왔다. 보물 제681호로 지정된 흑석사 석조여래좌상은 통일신라 때인 9세기 유물로 불상과 광배·대좌가 분리된 채 놓여 있다. 전화 054-637-1900.

|죽계구곡|

순흥면 배점리에서 초암사에 이르는 계곡을 죽계구곡이라 한다. 퇴계 이황이 계곡의 절경에 심취하여 물 흐르는 소리가 노랫소리 같다 하여 경치가 빼어난 곳마다 이름을 짓고 죽계구곡이라 불렀다. 화려하고 웅장한 계곡은 아니지만, 안축·안향·주세붕·이퇴계 등 큰 인물들의 발자취가 굽이마다 새겨져 있다.

구곡의 옛 경치는 세월이 흐르면서 메워져 조금 실망스럽지만, 아담한 폭포와 소로 이뤄진 제4곡(용추비폭)부터 초암사 위쪽의 제1곡(금당반석)까지는 바위와 계류, 느티나무 고목들이 어우러져 제법 아름다운 경치가 이어진다. 죽계란 대나무가 많았다 해서 붙은 이름. 고려 때 이 고을 출신 안축이 지은 경기체가 죽계별곡은 바로 이곳을 소재로 한 노래다.

|죽령옛길|

백두대간의 죽령(689m)은 영주와 단양을 잇는 큰 고개로 2,000년에 가까운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10년대까지만 해도 문경새재, 추풍령과 함께 서울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었다. 일제강점기까지 이용하던 옛길은 청운의 뜻을 품은 과거길의 선비, 공무를 띈 관원들, 장사꾼들로 붐비면서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주막과 마방이 죽 늘어서 있어 사시사철 번잡했다.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기 위해 희방사역에서 죽령 고갯마루까지의 옛길(2.5km)을 자연탐방로로 복원했다. 돌담만 남은 옛주막터, 느티정 주막거리, 고갯마루 주막거리 등이 있다. 왕복 2시간 소요.

|풍기 인삼|

풍기는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인삼 생산지다. 삼국사기에는 소백산에서 산삼이 많이 자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이 있는데, 산삼을 조정에 바치는 데서 폐단이 생기자 조선조 중종 때인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산삼 종자를 채취해 풍기 주변에서 재배하면서 명성을 떨쳤다.

영주시 풍기읍 일원에서 해마다 10월 초가 되면 풍기인삼축제가 열린다. 풍기역 앞에 인삼시장이 있다. 풍기인삼협동조합 054-636-2714~6.

|영주사과 |

영주사과는 전국 제1의 사과 주산지로서 백두대간 동남쪽 기슭에 위치한 산지과원에서 생산된다. 2,872ha 재배면적에 생산량 55,000톤으로 전국 생산량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풍부한 일조량과 깨끗한 공기,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 덕택에 맛과 향이 뛰어나고, 성숙기 일교차가 커서 당도가 높다.

특히 쓰가루는 품질의 우수성이 입증되어 농산물 도매시장에서 인기를 누리고 있는 품종이다. 풍기농협 공판장 전화 054-636-3209, 영주농협 공판장 054-636-8594.

|풍기온천|

지하 800m에서 용출하는 소백산풍기온천은 수온 26∼27.8℃, 유황 2.1ppm, Ph 10.2, 불소 12.4ppm, 중탄산 158ppm으로 일본 온천 기준보다 유황 성분은 2배, 불소 성분은 3~6배 정도가 높은 우수한 보양온천이다. 만성관절염, 신경통, 금속중독, 동맥경화증, 당뇨병, 만성 기관지염, 피부미용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앞으로 온천장 주변에 상가, 숙박시설, 운동 오락시설, 휴양문화시설 등을 설치해 숙박휴양 거점지역으로 육성할 예정이다.

|소백산|

충북 단양군 가곡면과 경북 영풍군 순흥면 경계에 있는 소백산(1,440m)은 옛부터 신성스럽게 여겨온 산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조선 명종 때 학자인 격암 남사고의 말을 밀어 ‘사람을 살리는 산’이라고 평하고 있다. 그는 이어 소백산은 웅대하지만 살기가 없고, 덕이 있으며, 풍광이 뛰어나다고 극찬했다. 그래서인지 소백산 부근은 옛부터 산삼을 비롯한 약초가 많고, 지금도 가끔 산삼이 발견되기도 한다.

5월 말의 철쭉과 겨울의 설원, 그리고 거센 바람이 유명하다. 비로봉 정상 초원께 있는 500년생 주목 군락지는 소백산의 특이한 승경을 보여준다. 죽령휴게소~제2연화봉~천체관측소~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 코스는 3시간20분 소요, 희방사 입구~희방폭포~희방사~연화봉~제1연화봉~비로봉 코스는 3시간10분 소요, 삼가동~비로사 입구~달밭재~비로봉 코스는 2시간20분 소요. 소백산관리사무소 전화 054-638-6796.

|옥녀봉 자연휴양림|

죽령 남쪽 영주시 봉현면에 위치한 옥녀봉 자연휴양림은 삼림욕을 즐기기에 좋은 휴양시설이다. 산막, 야영장, 취사장, 샤워장, 숲속교실 등 편의시설도 부족함이 없는 편이며, 휴양림 시설지구 뒤편에 조성된 작은 오솔길을 따라 산책하기도 좋다. 휴양림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이 일품이다.

산막 이용료는 8평형이 45,000원, 13평형 65,000원, 복합산막은 전체 사용료 200,000원, 방 1실은 100,000원, 식당은 30,000원이다. 연립산막은 모두 11평형인데, 각 55,000원이다. 야영데크는 5,000원, 원두막형 초막은 7,000~10,000원이다. 입장료는 일반(개인/단체) 1,000원/700원, 청소년 500원/300원, 어린이 300원/200원. 주차료는 중소형 3,000원, 대형 5,000원. 전화 054-636-5928 www.oknyeobong.com.


◆ 길에서 만난 별미

|순흥 묵조밥|

영주에 들러 순흥전통묵집의 묵조밥을 맛보지 않았다면 영주를 제대로 둘러본 것이라 할 수 없다. 묵조밥은 묵과 조밥의 합성어. 묵은 흔히 도토리묵과 메밀묵이 있는데, 순흥전통묵집에서는 메밀묵을 재료로 삼는다.

가마솥에 장작을 때는 전통 방식으로 메밀묵을 쑤어 상을 차린다. 처음에는 묵만 올렸으나 그 맛이 점차 소문나면서 몰려든 손님들이 공기밥을 찾는 경우가 잦아지자 아예 조밥을 곁들인 묵조밥으로 상을 차린다.

깨소금, 잘게 썬 김치, 고추, 파, 무생채, 구운 김을 버무려 만든 양념을 넣고 멸치 등으로 우려낸 국물을 부은 묵사발이 나온다. 여기에 조밥을 넣고 말아 먹으면 푸근한 고향의 맛이 전해져 온다. 쫀득쫀득하면서도 부드러운 메밀묵과 노란 좁쌀이 박힌 조밥이 어우러져 빚어낸 맛도 별미다. 여기에 깍두기, 김치, 나물류 등 3~4가지의 반찬이 딸려 나온다. 1인분에 4,000원이다. 순흥 읍내리에 있다. 전화 054-634-4614.

|풍기 인삼갈비탕| 

영주 서쪽 소백산 기슭에 자리 잡은 풍기는 남한에서 내로라하는 인삼의 고을일 뿐만 아니라 육질 좋은 한우로도 유명하다. 그래서 풍기를 비롯한 영주엔 인삼과 한우를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집이 수두룩하다. 그중 풍기인삼갈비(054-635-2382)는 토박이들이 주저 않고 추천하는 식당이다.

인삼갈비 맛은 특별한 비법으로 만든 양념장에 있다. 갈비를 재우는 양념은 인삼은 물론 여러 가지 한약재를 넣어 만든다. 이렇게 만든 양념에 소갈비, 돼지갈비를 재워 구우면 고기 특유의 냄새가 없어지고 맛이 담백하면서도 부드러워진다. 한우인삼왕갈비(500g 40,000원)는 인삼이 충분히 들어간 양념이 적당하게 배어 있어 은은한 인삼향이 입맛을 돋운다. 고깃살은 아주 부드럽다. 얇게 썰어 갈비 사이사이에 끼워둔 인삼을 살짝 구워 먹어도 괜찮다.

가볍게 식사를 하려면 인삼갈비탕(1인분 7,000원)을 시키면 된다. 인삼과 버섯이 푸짐한 인삼갈비탕은 육수가 걸쭉하게 우러나 진하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고소하다. 인삼주 한 잔이 덤으로 딸려 나온다. 아이들을 위해서는 인삼튀김(14조각 10,000원)이 준비되어 있다. 통째로 반죽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 인삼을 꿀에 찍어 먹는데, 인삼 특유의 쌉쌀한 맛이 튀기는 동안 고소해져 어린이들이 좋아한다. 풍기 나들목에서 931번 지방도를 타고 순흥 방향으로 7km쯤 가면 도로 좌측에 있다. 전화 054-635-2382.

◆ 일정별 길라잡이

영주시 전체 면적은 그리 넓은 편은 아니지만 소백산이라는 덩치 큰 명산이 솟아있고, 오랜 전통과 역사를 지닌 고을이라 구석구석마다 명소가 많아 권역을 여러 곳으로 나눌 수 있다.

●북부권 영주의 북쪽으로 소백산과 전통 깊은 순흥을 끼고 있다. 소수서원을 비롯해 소수박물관, 선비촌 등의 볼거리가 있다. 또 금성대군이 유배를 왔던 위리안치지와 금성단, 향교 등이 반경 1km 안에 있다. 꽃창호문이 예쁜 성혈사와 초암사도 순흥에서 접근한다. 무량수전으로 유명한 부석사도 이 권역에 있다. 단종을 모시는 산신각이 있는 고치령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중부권 인삼으로 유명한 풍기가 중심에 있다. 풍기 읍내에는 인삼시장, 인견시장, 풍기온천 등 먹고 쉴 거리가 충분하다. 죽령 옛길을 포함해 소백산 기슭의 희방사와 비로사도 이 권역에 속한다.

●남부권 영주 시내를 중심으로 남부를 포함한 권역이다. 동쪽의 이산면에는 흑석사와 마애삼존불상이 눈길을 끈다. 남쪽의 문수면에는 서천과 내성천이 만나 빚은 물돌이동인 수도리 전통마을이 있다.

일정짜기


# 일정짜기

●당일 중앙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웬만한 지역에서는 영주로 접근하는 데 3시간 이내가 걸리므로 아침 일찍 출발하면 당일로도 여러 명소를 둘러볼 수 있다. 풍기 나들목~풍기 인삼시장~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소수서원~소수박물관~선비촌~금성단~부석사~귀가.

●1박2일 당일의 일정에 더해 소백산 기슭에 있는 사찰들 답사도 가능하다. 가능하면 죽령 국도를 넘는 코스를 선택하는 게 동선을 잡는 데 수월하다. 추천 일정은 다음과 같다. 단양 나들목~5번 국도~죽령~희방사~풍기 인삼시장~죽령 옛길~풍기온천~숙박~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성혈사~소수서원~소수박물관~선비촌~금성단~부석사~수도리 전통마을~귀가.

●2박3일 전체적으로 여유가 있는 일정이다. 소백산 산행도 곁들일 수 있다. 희방사 코스, 비로사 코스, 초암사 코스 등이 있는데, 아쉽게도 원점회귀산행으로는 코스가 마땅치 않다. 승용차를 가지고 갔다면 올라갔던 코스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교통


# 교통

●접근드라이브코스 

수도권  영동고속도로→만종 분기점→중앙고속도로→풍기·영주 나들목 <서울에서 3시간 소요>

영남권  대구→중앙고속도로→영주·풍기 나들목 <1시간10분 소요> / 부산→부산-대구 고속도로→대구→중앙고속도로→영주·풍기 나들목 <2시간30분 소요>

호남권  광주→88올림픽고속도로→대구→중앙고속도로→영주·풍기 나들목 <4시간 소요> / 전주→호남고속도로→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대구→중앙고속도로→영주·풍기 나들목 <4시간 소요>

충청권  대전→경부고속도로→대구→중앙고속도로→영주·풍기 나들목 <3시간 소요>

강원권  춘천→중앙고속도로→풍기·영주 나들목 <2시간 소요>

●고속·시외버스 

서울→영주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38회(06:15~20:45) 운행. 3시간30분 소요, 요금 12,800원.

인천→영주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13회(06:40~19:20) 운행. 4시간 소요, 요금 17,000원.

부산→영주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9회(07:00~19:10) 운행. 5시간 소요, 요금 16,000원.

대구→영주 북부터미널에서 매일 20여 회(06:30~20:20) 운행. 직통 1시간30분, 직행 2시간30분 소요. 요금 8,200원.

대전→영주 동부터미널에서 매일 6회(07:10~17:40) 운행. 4시간 소요, 요금 18,500원.

*영주 시외버스터미널 054-631-5844

●시내버스 

영주→부석사 매일 24회(06:10~19:20) 운행. 직통 40분, 풍기 경유 50분 소요. 요금 일반 1,000원, 좌석 3,600원.

영주→소수서원 매일 17회(06:20~19:20) 운행. 직통 30분, 풍기 경유 40분 소요. 요금 일반 1,000원, 좌석 2,000원.

영주→풍기 매일 수시(06:00~21:40) 운행. 30분 소요, 요금 일반 1,000원, 좌석 1,300원.

영주→수도리 매일 8회(06:15-18:40) 운행. 40분 소요. 요금 일반 1,000원, 좌석 1,300원.

*영주시내버스 054-633-0011~13

●철도

서울→영주 청량리역에서 매일 9회(06:50~23:30) 운행하는 중앙선 열차를 이용해 풍기·영주역에서 하차. 새마을호(09:00, 19:05) 요금 17,000원, 3시간10분 소요. 무궁화호 11,500원, 3시간40분 소요.
*영주역 054-633-7788


# 숙식(지역번호 054)

●북부권 부석사를 중심으로 숙식할 곳이 많다. 부석사 입구의 시절지구엔 부석사종점식당(633-3606), 자미가식당(632-3454), 무량수식당(634-6770) 등 산채정식과 산채비빔밥을 차리는 식당과 민박집이 여럿 있다. 산채정식 6,000원.

부석면 소재지엔 코리아나호텔(054-633-4445), 명성여인숙(633-3262), 평화여인숙(633-3014), 장미여인숙(633-3259)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소수서원이 있는 순흥면 읍내리에 동인모텔(633-9605), 순흥여관(633-2124), 순흥전통묵밥(634-4614) 등의 숙식할 곳이 있다. 배점리의 금다래산장(634-5282)은 오리구이 전문이다. 민박도 친다.

고치령 올라가는 길목인 단산면 좌석리에 고칫재민박(638-4544), 좌석농장(638-4529), 연화동민박(638-4535) 등 몇 집이 민박을 친다.

●중부권 풍기 읍내를 중심으로 풍기인삼관광호텔(637-8800), 고려장(636-6202), 소백모텔(636-5681), 풍기여관(636-2110) 등의 숙박시설과 풍기인삼갈비(635-2382), 유명불고기식당(636-8585), 황토골인삼불고기(635-6088), 풍기소백산맥식당(633-8177) 등 갈비살, 한우불고기, 갈비탕 등을 차리는 식당이 많다.

희방사 입구의 수철리에도 희방모텔(638-8000), 모텔2010(638-2010)과 오리구이·탕을 차리는 용바위산장식당(638-7770) 등이 있다. 봉현면 두산리의 옥녀봉 자연휴양림(639-6543)도 인기 있는 휴양시설이다.

●남부권 영주 시내를 중심으로 소백파크관광호텔(634-7800), 영주호텔(632-4000), 신라궁전호텔(634-1600), 하얏트모텔(632-5181), 모텔테마(631-0960) 등 숙박시설이 가장 많다. 시내엔 소백산생고기(632-6784) 등 소갈비를 차리는 식당도 많다. 중앙분식(635-7367)의 쫄면도 영주 시민들에게 인기가 있는 메뉴. 수도리 전통마을 주변은 숙식할 곳이 마땅치 않다.

*영주시 홈페이지 www.yeongju.go.kr / *영주시 문화관광과 054-639-6391~2
*소수서원관광안내봉사실 054-639-6259 / *부석사 관광안내소 054-638-5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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