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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산 2024년 4월호
  • 654호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충남예산

월간산
  • 입력 2006.12.28 18:52
  • 수정 2006.12.29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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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여, 백제 부흥군의 마지막 함성을 들었 는가"
금북정맥이 감싸고 있는 내포지방의 보물

예산은 금북정맥 분수령이 동쪽과 서쪽, 그리고 남쪽을 U자로 감싸고 흐르면서 빚어놓은 널찍한 분지에 터를 잡은 고을이다. 서쪽으론 금북정맥의 맹주인 가야산과 덕숭산이 불쑥 솟아 있으나 전체적으론 골격이 부드러운 편으로, 내포지방의 여느 고을과 마찬가지로 비산비야의 들판이 넉넉하게 펼쳐져 있다. 금북정맥 덕에 제법 수량이 있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있으나 물살의 흐름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한가롭다. 인간이 자연의 영향을 받고 언어와 성격도 그렇게 형성된다는 가설이 옳다면 예산 사람들의 말씨가 느리고 인심이 넉넉한 것은 모두 이 때문이리라.

예산 기행의 첫 방문지는 추사고택(秋史古宅)이다. 내포평야의 얄망얄망한 언덕들이 펼쳐진 용산(龍山·94m)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은 내포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풍수전문가들은 ‘추사고택은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운(書卷氣)이 감도는 명당’이라고 말한다. 즉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대신 부드러운 언덕이 집터를 에워싸고 있어 문기(文氣)가 무르녹는다는 것이다.

▲ 내포평야의 얄망얄망한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
▲ 내포평야의 얄망얄망한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

조선 후기의 탁월한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내포지방, 그중에서도 예산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켜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추사는 서예를 통해 예술의 정수를 널리 떨쳤다. 또 추사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석(考釋)하였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이전에 알려진 것처럼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파(白坡) 선사와 논쟁을 벌이며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추사 집안은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명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1720-1758) 때부터 해미에서 현재의 자리인 예산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다. 당시 추사 집안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한양 장동에서 살았을 때인데, 천연두가 유행하여 모친이 용궁리로 내려와 추사를 낳았다고 한다.

▲ 덕숭산 정혜사 뜰에서 내려다본 내포 풍경.
▲ 덕숭산 정혜사 뜰에서 내려다본 내포 풍경.

명문가답게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나중에 잘 풀리지 않았다. 55세인 1840년(헌종 6)에 풍양조씨의 득세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겨우 풀려났다.

그럼에도 월성위가 이 고택을 지을 때 충청도의 53군현이 모두 1칸씩 부조하여 53칸짜리 집을 지었다는 일화는 당시 월성위 집안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는 정적들이 영조에게 한양 장동에 있던 월성위의 집이 너무 크다고 상소하자 이 집을 뜯어다가 건립한 것이라 한다. 현재 추사고택의 총 면적은 80.5평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을 뿐이다. 명문가의 저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이유는 1968년 추사고택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는데, 1976년 충청남도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매수하여 복원할 때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버린 왜곡된 건축 형태가 나왔기 때문이라 한다.

사랑채 앞에는 오래 묵은 모란이 눈길을 끄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앞에는 1m 정도 높이의 돌 사각기둥이 있다. 이는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보는 해시계의 한 종류로서 추사가 직접 제작했다 한다. 그 한쪽 면에 ‘석년(石年)’이라 새겨진 글씨는 추사의 글씨. 그러나 직접 쓴 게 아니라 나중에 집자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랑채 큰방에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도 걸려있으나 무엇보다 추사고택에서 눈에 띄는 건 주련(柱聯)들이다. 서예의 대가 집답게 수많은 주련들이 대문 옆, 현관 앞, 기둥, 바람벽 등에 주저리주저리 걸려 있다. 추사고택에서 천천히 이 주련들만 음미해도 그야말로 문자향과 서권기에 취할 듯하다. 역시 주련 읽는 재미는 빼놓을 수 없다. 다행히(?) 각 시구들을 번역해 놓은 조그만 설명문이 붙어 있어서 한문에 익숙지 않은 일반인들도 거칠게나마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모두가 해동제일의 명필 추사가 남긴 유묵이지만, 이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대팽두부과강채 고희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예서체 글귀는 유명하다. 해석하면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의 만남이라’는 뜻. 이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절 71세로 세상을 떠나기 두세 달 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작이다. 떵떵거리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온갖 풍파를 겪어온 추사가 인생의 의미는 소박하고 평범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다.

또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라는 글귀도 인기 있다. 그 뜻은 이렇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

추사의 묘소는 고택 왼쪽의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번잡스러운 석물로 치장되어 있지 않고 다만 생전에 남긴 글씨를 집자한 비석 하나만 있을 뿐인 묘소는 그의 글씨만큼이나 깔끔하다. 과천에 있던 것을 1930년대에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300m 정도 거리에 있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추사가 손수 심은 나무다. 1809년(조선 순조 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묘 옆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백송(白松)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 빛이 되므로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한반도에서 드물게 자라는 백송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다. 그런데, 백송은 세월이 제법 지나야 색이 하얗게 되는데, 우리나라 기후와 풍토에서는 색이 변할 때까지 자라기 어렵다고 한다.

추사 고택을 찾을 때의 즐거움은 또 있다. 바로 길가에 즐비한 사과밭을 지나는 일이다. 빨간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린 늦가을도 괜찮지만, 새하얀 사과꽃이 피어나거나 꽃잎이 바람결에 흩날리는 봄날이라면 더더욱 즐거움은 곱절이 된다. 백두대간 기슭의 사과 산지와 달리 나지막한 사과 언덕이 고향처럼 한층 정겨운 풍경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추사고택을 벗어나면 멀리 서쪽에서 가야산(伽倻山·678m)이 부른다. 백두대간의 속리산(1,058m)에서 뻗어나와 금강 이북 지방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금북정맥이 서해로 빠져 세력을 다하기 전에 남은 힘을 쏟아 예산과 서산 사이에 빚은 산이 바로 가야산이다. 비록 600m급의 산일 뿐이지만, 서해 가까운 내포평야에 솟았기 때문에 상대적 해발고도가 높아 보인다. 그뿐만이 아니라 내포의 중심이란 위상도 대단하다. 신라 때 나라에서는 산 동쪽에 가야사를 짓고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 현감이 이곳에서 봄·가을로 제를 올리기도 했다.

▲ 덕숭산 기슭에 자리한 수덕사 전경. 수덕사는 한국 불교계의 명가인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고 있는 절집이다.
▲ 덕숭산 기슭에 자리한 수덕사 전경. 수덕사는 한국 불교계의 명가인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고 있는 절집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가야산 자락에는 100여 개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알려진 절은 가야사 개심사 수덕사 보원사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 보원사와 가야사는 폐사가 되었고, 개심사와 수덕사는 남아있다. 폐사된 가야사와 국보인 대웅전을 품고 있는 수덕사가 예산 고을에 주소를 두고 있다.

가야사(伽倻寺)는 언제 누가 창건했는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한때는 인근의 수덕사보다 규모가 큰 절집이었다 한다. 1799년(정조 23)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이 절에 금탑(金塔)이 있는데, 매우 빼어난 철첨석탑으로 탑의 사면에는 감실을 만들어 석불을 봉안하고 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절터는 예부터 2대에 걸쳐서 왕손이 나온다는 대명당으로 알려져 왔다. 불행은 여기서 시작한다.

젊은 시절 안동김씨의 세도에 밀려 파락호 시절을 보낸 야심가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이 명당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절이 있었고, 지관이 점지해준 묏자리에는 금탑이 서있었다. 누구보다도 풍수지리를 굳게 믿었던 흥선군은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불을 질러 폐사를 만들고는 아버지 남연군(南延君·?-1822)의 묘를 이곳에 옮기고 때를 기다렸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고,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아들이 실제로 왕이 되자, 불태운 가야사에 사죄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1865년 남연군묘 맞은편에 보덕사(報德寺)를 세우고 원당 사찰로 삼았다. 당시 이장 때 썼던 상여(중요민속자료 제31호)는 남은들 주민들에게 하사했는데, 그 동안 광천리에 보관하던 남은들 상여를 얼마 전 남연군묘 옆으로 옮겨놓았다.

1868년 4월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의 도굴사건이 터졌다. 그는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자 대원군과 흥정을 위하여 남연군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 했다. 아산만에서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와 덕산 구만포에 상륙한 오페르트 일당은 덕산군청을 습격해 무기를 탈취하고, 민가에서 발굴도구를 약탈하여 남연군묘를 파헤쳤다. 그러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했고, 날이 밝아오자 철수하였다. 이는 대원군이 쇄국양이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도 심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과거에도 그랬고, 요즘도 대권을 노리는 이들은 조상의 음택에 집착한다는 기사를 접하고 보면, 아무래도 풍수에 대한 믿음이 조선 말기보다 떨어진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풍수의 힘으로 권좌를 차지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 과정에서 이하응처럼 하늘의 뜻을 거역한다면 불행한 자리가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가야산을 뒤로 하고 덕숭산(德崇山·495.2m) 기슭의 수덕사(修德寺)로 간다. 수덕사에는 두 분, 곧 조선 후기 침체된 불교계에 새로운 중흥조로 출현하여 무애의 생활 속에서 전등의 법맥을 이으며 선불교(禪佛敎)를 진작시킨 경허 성우(鏡虛 性牛·1849-1912) 선사, 경허의 제자로서 스승의 선지를 충실히 계승하여 선풍을 진작시킨 만공 월면(滿空 月面·1871-1946) 선사가 덕숭산처럼 우뚝 솟아 있다.

만공은 일제강점기 선학원의 설립과 선승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에 지도자로 참여한 스님이다. 또한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미나미 총독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 불교정책을 힐책해 치욕스러운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 불교계의 명문가인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만공의 문하에는 비구 보월·용음·서경·혜암·전강·금오·춘성·벽초, 비구니 법희·만성·일엽 등 뛰어난 제자들이 많았다.
▲ 수덕사 대웅전 측면. 절제미와 비례미가 돋보인다.
▲ 수덕사 대웅전 측면. 절제미와 비례미가 돋보인다.
일주문으로 들어서기 전에 만나는 수덕여관
. 지금은 임자를 잃어버려 마당엔 낙엽만 뒹굴고 있으나, 이곳에 전해오는 애틋한 이야기는 책 한 권 분량으로도 다 풀지 못할 만큼 사연이 넘친다. 이제는 어쩌면 전설이 되어버린 옛 이야기들을 간략하게나마 옮겨본다. 사연은 수덕여관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김일엽(金一葉·1896-1971) 스님은 출가 전인 1920년에 잡지 ‘신여자’를 창간하고 여성해방을 주장하며 자유연애를 구가하던 신여성이었다. 이후 결혼에 실패하고,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그처럼 꽃답던 사랑도 단지 하루의 먼지처럼’ 털어 버리고 1928년 나이 33살에 속세를 접고 산문에 들었다. 글은 차마 버리지 못하였으나 나중에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는 만공선사의 질타를 받아들여 붓마저 꺾어버린다.

또 다른 한 여자,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1896-1949)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김일엽과 더불어 당대를 풍미하던 신여성이었다. 1922년부터 32년까지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여러 차례 입선과 특선을 했으나 그녀는 단순한 화가 이상이었다. 동경 유학에서 귀국 후 3ㆍ1운동에 참여했다가 5개월 동안 옥살이를 겪은 민족주의자요, 파리에서 수업한 최초의 한국 서양화가요, ‘여자도 사람이외다’라고 외치며 인간평등에 기초한 주장을 생활 속에서 온몸으로 실천해 나간 진보적인 여성해방론자였다.

너무 일찍 핀 매화는 꽃샘추위에 얼어버린다 했던가. 1931년 봄 결혼 10여 년만에 이혼 당한 그녀는 거리로 쫓겨난 부당함을 고발하였으나 당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녀는 사회의 냉대를 피해 방랑생활을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그녀는 1934년 친구인 김일엽을 찾아와 수덕사 아래의 수덕여관에 여장을 풀었다. 일찍이 신여성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여인은 찻잔을 놓고 마주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여성을 억압하는 현실이 한없이 버거운 이혼녀요, 또 한 사람은 그것조차 초월한 여승이었다.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었다.

나혜석은 머리를 깎고 싶어 만공 스님을 만나 빌었으나 “임자는 중노릇을 할 사람이 아니야”라는 말로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지 않고 5년간 수덕여관에 머물며 그림을 그리거나 찾아오는 예술가를 만나며 소일했다. 이때 또 다른 인물,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1904-1989)가 등장한다. 예산이 고향이던 미술 청년 이응로는 선배 화가 나혜석을 만나기 위해 수덕여관을 자주 찾아오곤 했다. 1944년 나혜석이 수덕여관을 떠나자 그는 아예 수덕여관을 인수해 이곳서 작품 활동을 한다.

그사이 나혜석은 공주 마곡사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잠시 머물렀지만, 마곡사에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와 정처 없이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안양양로원을 거쳐 청운양로원에 기거했다. 그러다 결국 길거리에서 배고픔과 추위에 쓰러져 1948년 12월10일 서울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눈을 감았다. 일찍 피어난 매화의 처참한 마지막이었다.

10년 뒤인 1958년, 이응로는 20년 연하의 여제자와 함께 그림 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이때 홀로 남은 부인은 조용히 수덕여관을 지키며 고암을 기다렸다. 고암의 귀국은 뜻밖의 사건으로 이루어진다. 유럽에서 활동하던 많은 지식인, 예술인, 대학생들이 간첩협의를 썼던 이른바 1967년의 동백림사건으로, 국내로 강제 연행된 이응로는 2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옥살이를 했다. 고암은 출옥 후 수덕여관에 머무르다 바위에 추상 그림을 남기고 독일로 훌쩍 떠나버린다. 이후 유럽에서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고암은 가슴 부푼 귀국전시를 앞두고 1989년 파리에서 눈을 감고 만다. 그리고 고암이 떠난 후에도 본 부인은 수덕여관을 변함없이 지키다 2001년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수덕사 일주문에 들어서기도 전에 사연이 너무 길었나 보다. 이젠 쓸쓸한 기운만 감도는 여관을 나서면 다행이 일주문은 코앞이다. 금강문, 사천왕문, 황하정루를 차례로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올라 대웅전(국보 제49호) 앞마당에 선다.

▲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꼽힌다.
▲ 수덕사 대웅전은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꼽힌다.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꼽히는 수덕사 대웅전은 세 건물 중 유일하게 건립연도(1308년)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건물이다. 고려시대 건물이지만 건축 수법이 부드럽고 세련된 미학을 보여주는 백제계 양식이니 석탑이나 무열왕릉의 부장품 등을 제외하고는 현존하는 유산 중에서 백제의 미학을 유일하게 느낄 수 있는 건물인 셈이다. 무엇보다 목조건물이 700년 이상을 견딜 수 있었던 이유는 재료구성 기법이 탄탄한 덕이다. 물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도 내포지방에 외적의 말발굽이 지나치지 못한 지리적인 요인도 크다.

건축 전문가들은 수덕사 대웅전을 볼 때 다음과 같은 감상 포인트를 제시한다. 첫째가 절제미(節制美)다. 이 건물이 장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나 세련되고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건물이라는 것이다. 우선 기둥은 건물이 복잡하지 않고 단아한 인상을 주는 주심포식이고, 지붕 앞면과 뒷면이 단순히 맞닿아 있는 맞배지붕은 경건한 느낌이 잘 표현되어 있다.

또 단청이 거의 없는 담백한 목재의 질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아 시원한 느낌의 창살, 그리고 목조를 짜 맞추는 구조 수법의 탄탄함 등도 절제미가 잘 살아있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소꼬리 모양의 우리량은 백미로 꼽는다.

두 번째는 비례미(比例美). 수덕사 대웅전은 기둥 간격이 넓어 건물이 답답하지 않고 개방적이다. 기둥의 높이와 지붕 크기의 비례는 지붕에 짓눌린 인상이 아니라 날아갈 듯 사뿐히 올린 느낌을 준다. 처마의 돌출 길이도 일반적인 경우보다 훨씬 긴데, 날렵한 백제 건축비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특히 대웅전 옆면은 황금비례 그 자체다.
많은 이들은 수덕사 대웅전을 들렀다 환희대와 견성암을 기웃거리곤 잰걸음으로 수덕사를 빠져나가지만. 덕숭산 산길을 절대 놓칠 수 없다. 대웅전 왼쪽 관음바위쪽으로 이어진 산길은 돌로 잘 다듬어놓은 계단길이다. 가파르지 않고 그렇다고 완만하지도 않아 적당한 긴장감을 주는 돌계단은 모두 1,080개.

108번뇌를 5번쯤 내려놓으면 호젓한 오솔길 오른쪽으로 초가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만공 선사가 참선을 위해 거처하던 소림초당이다. 이어 만나는 향운각 옆에는 만공 스님이 세웠다는 7.5m의 거대한 관음불입상이 있다. 여기서 다시 산길을 걷다 남아있는 108번뇌를 연거푸 지워버리면 스님들의 참선도량인 정혜사(定慧寺)가 반긴다.

정혜사의 널찍한 앞마당은 덕숭산에서 제일의 조망터다. 먼발치로 수덕사 전경이 내려다보이고, 그 너머 멀리 해미읍내가 아련하다. 저 유명한 영주 부석사에 안양루가 있다면, 수덕사에는 정혜사가 있다. 부석사에서는 영남으로 흘러내리는 백두대간의 첩첩 산줄기를 품에 안을 수 있다면, 여기서는 금북정맥 주변으로 펼쳐진 내포지방의 널찍한 평야를 두 눈에 담을 수 있다. 마침 앉아있기 좋은 널찍하고 평평한 바위도 있으니 엉덩이가 한없이 무겁다.

수덕사 아래의 덕산(德山)은 지구유(地球乳)라고 불리는 오래된 온천수로 잘 알려진 고을이다. 예산 기행에서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한번쯤 이 뜨뜻한 온천수에 몸을 담가야 하겠지만, 설혹 이런 여유를 즐기지 못하더라도 절대 빼놓지 않고 만나 뵈어야 할 인물이 있다. 바로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다.

매헌은 1930년 3월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비장한 유서를 남기고 망명길에 올라 32년 4월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일본 국왕의 생일인 천장절과 상해전투 승리축하식을 겸한 기념식이 있었던 중국 상해의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바로 4·29의거다. 당시 상해 일본 거류민단장 가와바타와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리카와 대장 등을 살해하고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에우다 주중공사 시게미스 등에게 중상을 입혔다. 윤봉길 의사는 바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그해 12월19일 25세의 나이로 짧고 의로운 생을 마감했다.일본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매헌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바로 덕산이다. 덕산 읍내에서 수덕사 방향으로 2km 정도 떨어진 시량리에는 매헌을 모신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이 유적지는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뉘는데, 널따란 주차장이 마련된 쪽에 기념관 지역과 본전 지역이 있고, 국도 건너에 생가 지역과 성장가 지역이 따로 있다. 굳이 관람 순서를 꼽자면 우선 사당에 들러 향을 사르고 난 후, 유품을 볼 수 있는 전시관에 들른 다음, 생가 지역과 성장가 지역을 여유롭게 거닐면서 국가의 의미와 윤 의사의 일생을 짚어볼 수 있으면 좋다. 육교를 통해 길을 건너야한다는 아쉬움이 있으나 제법 짜임새 있게 펼쳐져 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휴식삼아 즐길 수 있는 산교육 장인 셈이다.

▲ 덕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생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의사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덕산에 있는 윤봉길 의사 생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의사는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방으로 냇물이 흘러 섬처럼 보이는 생가 지역은 윤봉길 의사가 도중도(島中島)라고 명명하였다. ‘한반도 가운데 섬’이란 뜻이다. 여기에는 윤봉길 의사가 출생하여 4세 때까지 살던 광현당(光顯堂)과 망명 전에 야학을 운영하던 부흥원 등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 중심이다. 윤봉길 의사는 4세 때부터 망명 전인 23세 때까지 여기서 기거하며 농촌 계몽과 부흥에 힘썼다. 야학회와 독서회를 조직해서 농촌의 문맹퇴치운동을 벌이기도 하였으며, 1929년에는 농촌 발전을 위하여 월진회를 조직하였다.

보부상 유품전시관은 충의사 성역 안에서는 성격이 조금 다른 듯이 보이는 공간이다. 이곳에는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보부상 관련 유품 28점이 있으며, 인감 6개 도장 1개 유건 3개 을람상자 보 1장 청사초롱 1쌍 공문 15권이 있다. 이는 예덕상무사 보부상의 조직과 기능을 설명해 주는 것들이다. 예덕상무사는 조선시대 예산 인근 고을의 삽교, 당진, 홍천시장을 아우르던 보부상 집단이다.

여기서 잠깐 보부상(褓負商)에 대해 살펴보자. 보부상은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교환경제를 매개한 전문적인 행상인(行商人)을 말한다. 원래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의 두 개의 상단(商團)으로 구분되었고, 취급하는 물품도 서로 달랐다. 조선시대엔 부보상(負褓商)이라 했다.

역사적으로 먼저 발생한 부상은 나무그릇·토기 등과 같은 비교적 조잡한 일용품을 지게에 지고 다녔기에 ‘등짐장수’라고도 했다. 보상은 필묵이나 금·은·동 등 비교적 값진 제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며 판매하였으므로 ‘봇짐장수’라고 했다. 신라시대에는 부상으로 하여금 성을 쌓을 때 필요한 돌을 운반하였다든가, 고려 공양왕 때에는 소금을 운반케 하였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조선 말기에 들어서 비로소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들은 정치 참여도 활발히 했다. 특히 나라에 일이 발생할 때마다 통치권자 입장에서는 보부상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 국가에서는 그 대가로 시장의 전매권을 주었다. 임진왜란 때는 상병권을 조직하여 운송, 가설, 축성, 통신 등 온갖 군무에 협조해 조선의 전쟁 승리에 크게 기여했고, 병자호란 때도 군비와 식량을 모아서 전투에 가담하기도 했다. 병인양요 때도 강화도 보부상들이 나서서 전령, 운반 등의 일을 완수하여 정부군에 도움을 주었다. 몇 해 뒤 오페르트 일당이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 하자 예산의 보부상들은 이를 막기 위해 긴급히 출동하기도 했다. 반면에 동학혁명 당시에는 정부군에 가담해 동학군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고, 궁중 수구파가 세운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에도 이용당해 보부상들이 중심이 되어 테러행위를 자행하는 등 독립협회와 충돌을 일으키기도 했다.

매헌의 매운 정신과 보부상의 양면성을 생각하며 충의사를 벗어난다. 삽교읍 신리 수암산 중턱에 위치한 예산삽교 석조보살입상(보물 제508호), 봉산면 화전리 산기슭에서 발견된 예산 사면석불(보물 제794호)을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예산 읍내에서 1913년 5월21일 창립된 한국 최초의 지방은행인 호서은행(湖西銀行), 대술면 상항리에선 한말의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이남규 선생의 고택도 살필 수 있다.

이렇게 돌아서 도착한 예당저수지(禮唐貯水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저수지라는 예당저수지는 붕어찜과 소주 한 잔이 아니더라도 예산 여정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어찌 예당저수지에서 건져 올릴 게 민물고기뿐이랴.

▲ 예산 대흥동헌 앞에 세워진 '의좋은 형제'상. 이 마을엔 에전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 예산 대흥동헌 앞에 세워진 '의좋은 형제'상. 이 마을엔 에전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대흥면 사무소 근처의 대흥동헌 앞엔 오래된 비석이 하나 서있다. 바로 ‘이성만 형제 효제비’. 이제는 교과서에서 빠진 모양이지만 형제의 이야기는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벼를 나르다 서로 만나는 ‘의좋은 형제’로 각색되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또 한 명의 매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최익현 선생의 묘소를 들렀다 예당 임존성(사적 제90호)에 오른다. 예당저수지 서남쪽의 봉수산(483.9m)에 있는 임존성은 백제 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한 성이다. 성벽에 서면 동북쪽으로는 무한천에서 예당저수지를 거쳐 삽교천과 아산만으로 이어지는 물줄기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으로는 홍성 시가지와 들녘, 그리고 공주 청양 부여로 이어지는 금북정맥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와 그 옛날 전략적 요충지였음을 실감할 수 있다. 특히 북에서 내려오는 적으로부터 공주와 부여를 방어하려면 아산만쪽에서 해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적을 살피는 데 아주 중요한 지점에 있다.

▲ 임존성 동쪽 망루 풍경. 임존성은 아산만 쪽에서 해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적을 살피는 데 아주 적합한 지점에 있다.
▲ 임존성 동쪽 망루 풍경. 임존성은 아산만 쪽에서 해로를 이용해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적을 살피는 데 아주 적합한 지점에 있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주류성과 더불어 백제 부흥군이 활동했던 곳으로, 사비성을 되찾기 위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였다. 그렇다. 임존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시작과 끝을 장식한 성이었던 것이다.

서기 660년 7월18일, 사비성에서는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이 열렸다. 신라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당상에 앉고 의자왕과 그의 아들 융은 당하에 앉아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하니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목이 메어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의자왕과 함께 당에 항복했던 흑치상지는 이를 본 후 사비성을 탈출하여 임존성에서 의자왕의 사촌인 복신, 승려 도침과 함께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불을 밝혔다. 이후 임존성은 주류성(한산, 부안, 홍성 등 다양한 설이 있음)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부흥운동의 중심 세력들은 주류성과 임존성을 거점으로 해서 한때 크게 기세를 떨쳐 부여 200여 성을 회복하기도 했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왕자 풍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고, 사비성과 웅진성 등을 포위하여 주둔하는 당군을 괴롭혔으며, 여러 차례 나당연합군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풍이 또 복신을 죽이는 내분이 생기자 부흥군은 와해되고 말았다. 나당연합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주류성을 공격했다.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임존성을 지키던 흑치상지가 당에 투항하자 임존성은 결국 663년 11월에 함락되고 말았다.

▲ 봉수산 정상에 있는 임존성은 백제 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맡았다.
▲ 봉수산 정상에 있는 임존성은 백제 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맡았다.

임존성은 주차장에서 차를 대고 가파른 경사를 1시간쯤 올라야 하지만, 내포지방 최고의 전망을 선사한다. 망루였음직한 동쪽 성벽에 서면 예당저수지와 예당평야, 그리고 이것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금북정맥의 산줄기들이 한눈에 내려다본다. 저 아래 벌판에서 나당연합군의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백제 부흥군을 옥죄어오던 그 마지막 날, 아마 성안에서는 끝인 줄 알면서도 항전을 불태우던 부흥군의 함성이 울려 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아우성이 멈추며 부여는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뜻을 이루지 못하여 죽어서도구천을 떠도는 부흥군의 넋일까? 성벽을 넘어온 칼바람에 길손의 옷깃이 펄럭펄럭 나부낀다.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

예산, 어떤 곳인가

충청남도 중부에 있는 예산군(禮山郡)은 동쪽은 공주시, 서쪽은 홍성군과 서산시, 남쪽은 청양군, 북쪽은 당진군과 아산시와 접한다. 지형은 일반적으로 구릉과 산맥이 연결되어 있으며, 특히 동부와 서부 군계는 금북정맥을 중심으로 산이 겹친다. 군의 중앙부는 금북정맥에서 발원한 무한천·삽교천 2개의 하천이 북으로 흐르며, 그 유역엔 기름진 예당평야가 펼쳐져 쌀의 주산지를 이룬다.

백제 때는 오산현(烏山縣)이라 했고, 삼국통일 뒤 757년(경덕왕 16)에 고산현(孤山縣)으로 되었다가 919년(고려 태조 2) 예산현(禮山縣)이 됐다. 1018년(현종 9)에는 천안부(天安府)에 속했다가 1895년(조선 고종 32)에 홍주부 예산군·대흥군(大興郡)·덕산군(德山郡)으로 개편됐다. 1914년 덕산군·대흥군이 통합되어 예산군으로 개편됐고, 1940년 예산면이 읍으로 승격됐으며, 1973년 삽교면(揷橋面)이 읍으로 승격됐다. 2006년 현재 예산·삽교읍과 고덕·광시·대술·대흥·덕산·봉산·신암·신양·오가·응봉면 총 2읍 10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의 중앙부에 삽교천과 무한천이 있고 예당저수지가 있어 농산물이 풍부하다. 예당평야에서 생산되는 예산쌀은 밥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농가는 군 전체 세대의 42%를 차지하고, 동서의 구릉지대에서는 양잠이 활발하며, 젖소·닭 등의 축산도 이루어지고 있다.

특산물인 예산사과는 연간 35,400t을 생산, 425억 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과수원은 주로 삽교읍·고덕면·오가면에 형성되어 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성장작목 종합시범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외에도 한과·꽈리고추·팽이버섯·오이·토마토·수박·전통옹기 등의 농특산물이 있다. 그 외에 무연탄·활석 등이 산출되며, 신례원(新禮院)을 중심으로 섬유공업이 발달해 있다. 농업용수·생활상수도·공업용수 등은 예당저수지와 삽교호 등에서 공급받아 이용한다.

예산읍이 중심지가 되어 온양 방면, 당진 방면, 홍성 방면, 공주 방면 등 네 갈래의 교통로가 이곳으로부터 펼쳐져 있어 충청남도 북서부지역 도로교통의 중심이자 분기점 역할을 한다.

군에는 3개의 국도가 개설되어 있는데, 서산시 해미면에서 진입해 덕산면·삽교읍·오가면·예산읍을 거쳐 아산시 도고면으로 향하는 국도, 당진군 합덕읍에서 진입해 신암면·예산읍·대술면·신양면을 거쳐 공주시 유구읍으로 향하는 당진∼공주 간 국도, 아산시 도고면에서 진입해 예산읍·오가면·응봉면을 거쳐 홍성군 홍북면으로 향하는 아산∼홍성 간 국도가 있다. 이 세 국도는 모두 예산읍에서 교차하며, 군내 교통의 중심 역할을 한다. 이밖에도 군에는 5개 지방도와 16개 노선의 군도가 개설되어 있다.

철도의 경우 1931년에 개통된 장항선이 군의 중앙부를 지난다. 고속도로의 경우 군을 직접 통과하지는 않아도 서쪽으로는 서해안고속도로, 동쪽으로는 경부고속도로와 천안-논산간 고속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접근성이 비교적 좋은 편이다.

|수덕사|
덕숭산(德崇山·495.2m)에 있는 수덕사(修德寺)는 백제 위덕왕(威德王·554-597) 때 고승 지명이 처음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제30대 무왕(武王) 때 혜현(惠顯)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강설하여 이름이 높았으며,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 나옹(懶翁·혜근)이 중수했다. 일설에는 599년(신라 진평왕 21)에 지명(智命)이 창건하고 원효(元曉)가 중수했다고도 전한다. 조선 후기인 1865년(고종 2)에 만공(滿空)이 중창한 후로 선종 근본도량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속 암자로 비구니들의 참선도량인 견성암(見性庵)과 비구니 김일엽(金一葉)이 기거했던 환희대(歡喜臺)가 있으며, 선수암(善修庵)·극락암 등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특히 견성암에는 비구니들이 참선 정진하는 덕숭총림(德崇叢林)이 설립되어 있다.


|수덕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상을 모셔 놓은 수덕사의 대웅전(국보 제49호)은 1936년에서 1940년에 걸친 중수시 대들보에서 나온 묵서에 의해 1308년(고려 충렬왕 34)에 건립됐음이 밝혀진 건물이다. 건축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으며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과 함께 조형미가 뛰어난 고려시대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이다.

앞면 3칸, 옆면 4칸,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계통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은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특히, 소 꼬리 모양의 우리량은 그 중 백미로 꼽으며, 연등천장과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은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로, 앞면 3칸에는 모두 3짝 빗살문을 달았고, 뒷면에는 양쪽에 창을, 가운데에는 널문을 두었다.


|수덕사 노사나 괘불탱|
이 괘불은 노사나불을 중심으로 하여 12대보살, 10대제자 등 여러 무리들이 그려진 그림이다. 원만보신노사나불(圓滿報身盧舍那佛)이란 명칭이 머리광배에 기록되어 있으며, 신체에 비해 두 손을 크게 강조하여 노사나불이 주존임을 뚜렷이 나타내주고 있다. 보관과 가슴에 달린 장식, 옷의 문양, 매듭 등이 화려함을 보여준다. 12대보살은 중단과 하단에 걸쳐서 배치되어 있으며, 아난과 가섭을 비롯한 십대 제자상은 자유로운 표정과 동작을 보이며 상단에 배치되어 있다.

1673년(조선 현종 14)에 제작된 이 괘불은 노사나불을 단독으로 나타낸 독특한 형식의 그림으로, 적색과 녹색을 주로 사용하고 공간을 오색의 광선으로 처리해 화려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며, 화기에는 괘불도 제작에 사용된 탱·포·바탕시주와 주황·황금 등 안료시주, 식염의 공양시주 등의 시주자 명단이 명기되어 있고, 화사는 응렬, 학전, 석릉 등 신원사 괘불도와 같다. 보물 제1263호.


|고암 이응로 선생 사적지|
덕산면 사천리 수덕사 입구의 이응로 선생 사적지(李應魯先生事蹟地)는 동양 미술의 우수성을 세계 속에 드높인 화가 이응로(1904-1989)가 작품 활동을 하던 곳이다. 호는 고암(顧菴). 수덕여관은 이응로가 1944년 구입해 한국전쟁 때 피난처로도 사용했으며,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으로 옮긴 곳이기도 하다. 또한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했던 곳이다. 수덕여관 앞 바위조각은 1969년 동백림 사건으로 귀국했을 때 고향산천에서 삼라만상의 성함과 쇠함을 추상화해 표현한 작품이다.


|수덕사 목조삼세불좌상| 
수덕사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목조 삼세불좌상(보물 제1381호)은 수덕사의 중흥조인 만공(滿空) 선사가 전북 남원에 있는 만행산 귀정사(歸淨寺)로부터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약사불, 왼쪽에는 아미타불이 자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은 주존으로서 굽어보는 듯한 자세에 당당한 어깨와 넓은 무릎을 하여 안정되어 보인다. 옷은 양어깨를 다 덮는 통견(通肩) 형식으로 오른팔이 드러나게 함으로써 17세기 불상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손 모양은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고 있다.

약사불과 아미타불 또한 머리 모양, 얼굴 형태와 귀·눈·입·코의 표현, 양 손과 옷주름선의 사실적 묘사 등이 본존불과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불상 안에서 발견된 조성기에 의해 1639년(조선 인조 17)에 수연(守衍) 비구를 비롯한 7명의 화원(畵員)들이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석가모니불이 앉아 있는 대좌형 수미단(須彌壇)은 금강저(金剛杵)·삽화병(揷花甁)·목단(牧丹)·운파(雲波) 등 안상(眼象) 조각에서 고려시대 불탁의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조성시기는 대웅전 건립연대(1308)와 같을 것으로 추정된다. 불상 안에서 나온 복장유물은 발원문을 비롯해 묘법연화경·대방광원각수다라료의경·불설관세음경 등의 경전과 진언문 및 다라니로서 17세기 초반에 간행된 목판본이 주를 이루는 전적류, 5색의 사각형 직물 안에 원형, 금강저, 삼족(三足)과 육족(六足)의 번(幡)을 의미하는 형태의 직물이 들어 있던 후령통(喉鈴筒), 조선 중기 직물사 및 염색에 관해 살펴볼 수 있는 복식 등이 있다. 


|추사 고택|
신암면 용궁리의 김정희 선생 고택(시도유형문화재 제43호)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실학자이며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옛집이다. 안채와 사랑채 2동짜리 건물로 조선 영조(재위 1724-1776)의 사위이자 김정희의 증조할아버지인 김한신이 지은 집이라고 한다. 건물 전체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는데, 안채는 서쪽에 있고 사랑채는 안채보다 낮은 동쪽에 따로 있다. 사랑채는 남자 주인이 머물면서 손님을 맞이하던 생활공간인데, ㄱ자형으로 남향하고 있다. 각방의 앞면에는 툇마루가 있어 통로로 이용했다.

안채는 가운데의 안마당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힌 ㅁ자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살림살이가 이루어지던 안채는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지 않도록 판벽을 설치하여 막아놓았다. 대청은 다른 고택들과는 달리 동쪽을 향했고 안방과 그 부속공간들은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 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며, 지형의 높낮이가 생긴 곳에서는 사람 인(人) 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층을 지게 처리했다. 입장료는 어른 500원, 청소년 300원, 어린이 300원. 주차는 무료. 전화 041-332-9111


|예산 김정희 종가유물|
이것은 추사 김정희 종가에 대대로 내려오는 추사의 작품과 유물이다. 유물로는 생전에 지니던 인장, 염주, 벼루, 붓의 유물류와 습작부터 편지, 달력, 필사본, 대련 등에 이르는 유묵, 그리고 독립된 서첩인 금반첩과 심경첩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총 54점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관리되고 있다. 1857년(철종 8) 이한철이 그린 김정희 영정(가로 57.7cm, 세로 131.5cm)도 함께 지정·보관되고 있고, 모두 일괄적으로 보물 제547호로 지정됐다.


|예산 백송|
백송(白松)은 나무껍질이 넓은 조각으로 벗겨져서 흰 빛이 되므로 백골송(白骨松)이라고도 한다. 중국이 원산지로서 한반도의 백송은 조선시대에 중국을 왕래하던 사신들이 가져다 심은 것이라고 전한다.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 근처에 있는 백송(천연기념물 제106호)은 추사가 1809년(조선 순조 9) 10월에 부친 김노경을 따라서 중국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돌아올 때 백송의 종자를 필통에 넣어가지고 와서 고조부 김흥경의 묘 옆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김정희 선생의 서울 본가에도 영조(재위 1724-1776)가 내려 주신 백송이 있어 백송은 김정희 선생 일가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다.

이 백송은 수령이 약 2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4.5m, 가슴높이 둘레 4.77m이다. 줄기가 밑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두 가지는 죽고 한 가지만 남아 빈약한 모습이다. 나무껍질은 거칠고 흰색이 뚜렷하며, 주변의 어린 백송들과 함께 자라고 있다. 


|충의사|
덕산면 시량리는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사적지에는 의사가 태어난 집과 성장한 집이 있는데, 태어난 집은 광현당(光顯堂)이라 하며,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집은 ‘한국을 건져내는 집’이라는 뜻의 저한당(狙韓堂)이라 한다.

윤봉길 의사의 사당인 충의사는 크게 4개 구역으로 나뉜다. 본전 지역은 의사의 영정을 모신 사당과 충의문, 홍살문 등이 있고, 기념관 지역은 기념관, 어록탑을 비롯해 보부상전시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유품(보물 제568호) 28종 56점이 전시되어 있고, 의사의 짧은 일대기를 매직비전 11대와 각종 영상과 디오라마로 보여주고 있으며, 영상관, 11경도실 등이 있다.

성장가 지역은 의사가 4세 때부터 망명 전 23세 때까지 기거하던 저한당과 의거기념탑, 동상이 있다. 생가지역은 윤봉길 의사께서 사방으로 냇물이 흘러 ‘한반도 가운데 섬’이란 뜻으로 도중도(島中島)라고 명명했다. 여기에는 의사가 출생하여 4세 때까지 살던 광현당과 야학을 운영하던 부흥원 등이 있다. 요금 어른 1,000원, 청소년 700원, 어린이 500원. 전화 041-330-2552


|윤봉길의사 유품|
1932년 4월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  의사가 남긴 유품(보물 제568호)들이다. 의사는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했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했다.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해 1931년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그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충의사 유물전시관에는 1 선언문 2 윤봉길 의사 이력서 3 회중시계 4 지갑 5 도장 6 손수건 7 안경집 8 일기(日記) 9 월진회 창립취지서 10 농민독본 11 형틀대 12 편지 13 월진회 통장 14 월진회기 15 편지 16 부흥원 대들보 17 선서 사진 18 연행 사진 19 벼루 20 모팔통 21 책상 22 친필 24 위친계 취지서 25 연상 26 담배합 27 주발, 대첩 28 수저 29 놋대야 30 등잔대 총 30종 58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보관되어 있다.


|삽교 석조보살입상|
삽교읍 신리 수암산 중턱에 위치한 예산삽교 석조보살입상(보물 제508호)은 2개의 돌을 이어서 조각한 석불이다. 머리에는 두건 같은 관을 쓰고 있고, 그 위에 6각으로 된 갓 모양의 넙적한 돌을 올려놓았다. 왜소한 어깨의 윤곽은 아래로 내려가면서 조금씩 넓어지지만 양감이 전혀 없이 밋밋하여 마치 돌기둥 같다. 왼손은 몸에 붙인 채 아래로 내리고 있고, 오른손은 가슴까지 올려 돌지팡이 같은 것을 잡고 있는데, 양발 사이까지 길게 내려오고 있다. 거구이면서 불륨 없는 돌기둥 형태, 간략한 신체표현 방법 등이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8호),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보물 제217호)과 유사한 양식을 가진 지방적인 특징이 보이는 고려시대 작품이다.

|예산 사면석불|
1983년 봉산면 화전리 산기슭에서 발견된 예산 사면석불(보물 제794호)은 돌기둥 4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는 백제시대 유일의 사면불(四面佛)이다. 사면불은 일명 ‘사방불’이라고도 하는데, 동서남북의 방위에 따라 사방 정토에 군림하는 신앙의 대상인 약사불, 아미타불, 석가불, 미륵불을 뜻한다.

남면에는 본존불로 생각되는 여래좌상이 있고, 나머지 면에는 여래입상이 각각 1구씩 새겨져 있다. 머리 부분은 많이 훼손된 채 서향과 북향만이 남아있고, 따로 끼울 수 있도록 되어있는 손은 모두 없어졌다. 4구의 불상은 모두 양 어깨에 옷을 걸치고 있으며, 가슴부분에 띠매듭이 보인다. 옷주름이 매우 깊고 가슴 아래에서 U자형으로 겹쳐 있다. 머리광배는 원형으로 불꽃무늬·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백제 특유의 양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조 사방불로서 서산 마애삼존불보다 힘차게 조각됐다. 041-337-1304


|대흥 임존성|
대흥면 상중리 봉수산(483.9m)에 있는 임존성(사적 제90호)은 백제 때 수도 경비의 외곽기지 역할을 한 성이다. 대흥산성이라고도 한다. 봉수산 꼭대기에 있는 둘레 약 3㎞의 산성으로,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해 쌓은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는 성문터와 성문 밑으로 개울물이 흐르게 하던 수구문, 그리고 우물터·건물터가 남아있다. 성벽의 바깥쪽은 돌을 다듬어 차곡차곡 쌓고, 안쪽으로는 흙을 파서 도랑처럼 만들어 놓았다. 또한 성의 네 모퉁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해 다른 곳보다 약 2m 정도 두껍게 쌓았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주류성과 더불어 백제 부흥군이 활동했던 곳으로, 사비성을 되찾기 위한 부흥군의 마지막 근거지다. 이 성에서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백제의 부흥을 꾀했으나 실패했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는 고려 태조 왕건과 견훤이 전투를 벌였다고도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예덕 상무사|
덕산면 시량리 충의사 내에 있는 예덕 상무사(중요민속자료 제30호)는 조선시대 예산지방의 시장 운영에 큰 몫을 맡아왔다. 유품 28점이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인감 6개, 도장 1개, 유건 3개, 을람상자 보 1장, 청사초롱 1쌍, 공문 15권이 있다. 이는 예덕 상무사 보부상의 조직과 기능을 설명해 주는 것들로, 유물보호각 바로 앞으로 별도의 건물을 지어 역대 선생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현존하고 있는 임원들의 명단도 함께 보존하고 있다. 예덕 상무사는 조선시대 말엽 예산과 덕산 지방의 시장에서 상품의 중개와 시장세의 징수 등을 맡으려는 한편 정치에도 관여하는 등 보부상의 조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덕산 도립공원|
덕산 도립공원은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사천리, 둔리, 상가리, 광천리 등을 포함한 지역으로 1973년에 지정됐다. 2개 지구로 분리되어 독자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교통이 편리하고, 주변의 관광자원 및 관광지와 연계가 용이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 덕산 도립공원에는 국가지정 문화재 5점, 지방지정 문화재 4점, 문화재자료 7점이 위치하고 있으며, 덕숭산지구에는 고려시대 목조건물인 천년고찰 수덕사가 있으며, 가야산지구에는 도지정기념물 제80호로 지정된 남연군묘가 위치하고 있다. 수덕사~등산로~덕숭산 정상~정혜사~견성암~수덕사(4.9km) 코스는 2시간40분, 수덕사~정혜사~덕숭산 정상~한치고개(5km) 코스는 2시간 소요. 덕산도립공원 041-330-2557.

|남은들상여|
남은들상여(중요민속자료 제31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이 이장 때 사용한 후 남은들 마을에 주고 간 것이라고 전한다. 남은들은 광천리의 옛이름이다. 남연군이 죽은 것은 1822년으로 초장지는 경기도 광주이며, 후에 예산군 덕산면 현재의 묘로 이장했다. 상여의 제작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크기는 위 난간 길이 196cm, 나비 76cm, 장강채 길이 596cm이다. 외관상으로는 현대의 상여에 비해 장식이 덜 호화롭고 많이 낡았지만, 재료나 기교적인 면으로 보면 큰 차이가 있다. 좋은 목재로써 실용적이고 견고하게 만들었으며, 부분적인 장식도 4cm 두께의 두꺼운 목재를 사용했고, 그 위에 단청을 입혔다.

구조는 상단인 보개(寶蓋), 중간부인 여동(輿胴), 하단인 장강목(長?木)의 3부분으로 되어 있으며 완전 조립식이다. 보개 위에 있는 용마루의 중간 부분에 꽂힌 나무로 조각한 꼭두각시는 높이 25cm로 앞을 향해 서 있는데 특이한 양식이다. 원래 덕산면 광천리에 있었으나 상가리 가야산 기슭의 남연군묘 앞으로 옮겨놓았다.


|향천사|
예산읍 향천리 금오산 향로봉 아래에 있는 향천사는 656년(의자왕 16) 당대의 고승인 의각 스님에 의해 창건됐으나 임진왜란 당시 전소됐다가 면운 스님에 의해 중건됐다. 그러나 현재 옛 극락전과 천불전이 철거되고 새 불전이 들어서 중건 당시의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다. 041-331-3556


|한국고건축박물관|
덕산면 대동리의 한국고건축박물관은 우리 민족 고유의 건축미를 응집 표현해 고건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세계인들에게 그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서 건립된 국내 최초 유일의 건축박물관이다. 문화재 수리기능 17개 직종인들의 혼과 노력으로 한국의 건축기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공간으로서 정문도 강릉의 객사문을 그대로 옮겨 놓았고, 제1, 2전시관은 고려시대 건축양식으로 축조했다.

제1전시관에는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국내의 대표적인 사찰, 탑, 불상 등 17종의 축소 모형 100여 점이 전시되고 있으며, 제2, 3전시관은 국보급 문화재 축소 모형이 전시되고 있다. 관람료 일반 2,000원, 청소년 1.500원, 어린이 1,000원. 하절기 08:00~18:00, 동절기 08:00~17:00 개장, 매주 월요일 휴관. 전화 041-337-5877, www.ktam.or.kr


|이성만 형제 효제비|
대흥면 동서리에 있는 이성만형제 효제비(도유형문화재 제102호)는 고려 초 효자로 이름난 이성만과 이순 형제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던 것으로 예당저수지로 수몰될 위기에 놓여 있던 것을 대흥면사무소 앞에 이전시켜 놓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이성만과 이순 형제가 모두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모셨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도 성만은 어머니 분묘를, 순 또한 아버지 분묘를 지켰다. 3년의 복제를 마치고도 아침에는 형이 아우 집으로 가고 저녁에는 동생이 형의 집을 찾았으며, 한 가지 음식이 생겨도 서로 만나지 않으면 먹지 않았다 한다. 또한 이들은 부모가 살아 계실 때에는 맛있는 음식으로 봉양하고 봄, 가을에는 떡을 하여 부모님께 드리고 기쁘게 친척들과 나누어 먹었다 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1497년(연산군 3) 지신사(知申事) 하연(河演)의 주청에 의해 가방교 옆에 세웠다.

이 비는 조선 초기 양식의 화강암 비석으로 이성만 형제의 갸륵한 행실에 대해 왕이 정문을 세워 표창하고 자자손손에게 영원히 모범되게 하라는 173자가 기록됐으며, 형은 아우의 볏단에, 아우는 형의 볏단에 밤중에 벼를 나르다 서로 만나는 내용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에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전화 041-333-2388.


|덕산온천|
내포지방의 중심축인 가야산 동쪽 기슭에 자리한 덕산(德山)온천은 수백 년 전부터 내포지방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아주 오래 전 상처 입은 학이 논에서 솟는 따뜻한 물을 찍어 바르며 치료하는 것을 본 주민들이 약수로 이용하면서 병을 고쳤다고 한다. 또 동국여지승람 등 옛 기록에도 이런 연유를 설명하며 온천이 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조선 말기엔 약수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피부병, 위장병, 신경통 환자들이 몰려들어 병을 치료했다고. 따라서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18년에 목욕탕이 들어섰고, 1947년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수온은 43~52℃ 안팎으로 약알카리성 단순방사능천이다. 이 온천수는 어머니의 젖과 같은 효능을 지녔다고 해서 지구유(地球乳)라고도 불린다. 1984년엔 도에서 문화재자료 제190호로 지정했다.


길에서 만난 별미

|예당저수지 붕어찜|
예산군에서는 얼마 전 설문조사 등을 통해 추천받은 20여 가지의 먹거리를 놓고 심의해 전통 소갈비, 민물어죽, 예당 붕어찜, 수덕사 산채정식, 삽다리 곱창을 ‘예산 5미(味)’로 선정했다. 이중 민물어죽과 붕어찜은 맑고 깨끗한 예당저수지에서 잡아 올린 민물고기로 요리한 별미다.

우선 예당저수지의 자랑은 저수지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붕어찜이다. 바닥에 무를 깔고 펄펄 뛰는 살아있는 큼직한 붕어를 잘 손질해 올린 다음 잘 말린 무청(시래기) 등을 넣고 양념장을 1시간 이상 끼얹어 막 쪄내온 붕어찜은 담백하고 쫄깃한 맛이 좋다. 민물고기가 동면 준비를 마친 요즘에는 탱글탱글한 육질이 한층 살아있다.

예당저수지 주변에는 전문 식당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도 예당저수지 하류인 대흥면 노동리 수문 근처에 자리한 예당가든(041-333-4473)이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하다. 대(4마리) 35,000원, 중(3마리) 28,000원, 소(2마리) 20,000원. 남자 성인 1명이 1마리 분량이다.

간단하게 요기하려면 어죽을 주문하면 된다. 각종 민물고기를 뼈째 푹 삶아서 살만 골라내고 고추장이나 된장을 풀어 끓인 다음 쌀과 수제비를 넣으면서 대파·생강·마늘·깻잎 등의 양념을 첨가하여 차리는 어죽 맛도 일품이다. 1인분 5,000원.

일정별 길라잡이

● 덕산온천권 대체적으로 덕숭산과 가야산을 끼고 있는 덕산 도립공원 구역으로서 예산 관광의 중심지라 할 수 있다. 가야산 기슭에는 남연군묘와 보덕사, 멀지 않은 곳에 화전리 사면석불이 있다. 덕숭산 주변에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을 볼 수 있는 수덕사를 비롯해 이응로 선생 사적지, 한국고건축박물관 등이 있다. 윤봉길 의사 사당인 충의사와 생가 등도 이 권역에 속한다.

● 예산읍권 추사의 옛집이 중심이다. 추사고택 주변으로 추사 묘소, 백송, 화순옹주 홍문, 화암사의 추사 암각문, 일산이수정 등의 볼거리가 있다. 예산 읍내에는 예산향교, 호서은행, 향천사 등이 있다.

● 예당저수지권 마음 편하게 예당저수지 드라이브와 조망을 즐기며 입맛도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다. 은행나무가 좋은 대흥향교, 의좋은 형제 조형물, 최익현 선생 묘소 등이 이 권역에 있다. 임존성에서 내려다보는 예당저수지와 예당평야 일대도 장관이다.

일정짜기

● 당일  수도권에서 2시간~2시간30분 정도면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당일로도 웬만큼 둘러볼 수 있다. 수도권 지역을 기준으로 예산 여행 추천 코스는 다음과 같다.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수덕사~충의사~추사고택~예당호(붕어찜)~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나들목.
● 1박2일 숙박은 덕산온천 주변서 해결하는 게 가장 무난하다. 수덕사 일대를 둘러본 후 여러 암자를 거쳐 조망을 즐길 수 있는 덕숭산 산행(왕복 2시간 소요)을 곁들여도 충분하다. 예산 읍내권의 호서은행, 이남규 고택 등도 둘러볼 수 있다. 추천일정은 서해안고속도로 해미 나들목~수덕사~덕숭산 산행~덕산온천 숙박~충의사~남연군묘~추사고택~예산 읍내~임존산성~예당호(붕어찜)~서해안고속도로 당진 나들목.
● 2박3일 1박2일의 일정에 예산의 대표적인 산인 덕숭산과 가야산 산행도 곁들일 수 있다. 예당저수지 주변에 조성해놓은 예당관광지는 호수를 따라 걷기 좋은 산책로가 있다.


교통

● 접근드라이브코스 
충청남도 중앙에 자리한 예산은 서해안고속도로(송악·당진·서산·해미 나들목)와 경부고속도로(천안 나들목) 사이에 있어 접근이 수월한 편이다.
수도권 서해안고속도로→당진 나들목→32번 국도→예산 / 서울→경부고속도록→천안 나들목→21번 국도→예산 <서울서 2시간30분 소요>
영남권 대구→경부고속도로→회덕 분기점→호남고속도로→유성 나들목→32번 국도→유구→공주→32번 국도→예산 <4시간 소요> / 부산→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간고속도로→대전남부순환고속도로→서대전 분기점→호남고속도로→유성 나들목→32번 국도→유구→공주→32번 국도→예산 <4시간30분 소요>
호남권 광주→호남고속도로→논산 분기점→논산-천안간고속도로→남공주 나들목→공주→32번 국도→예산 <광주 3시간, 전주 2시간 소요>
충청권 대전→유성→32번 국도→유구→공주→32번 국도→예산 <1시간30분~2시간 소요>
강원권 영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천안 나들목→21번 국도→예산 <춘천서 3시간30분 소요>

● 고속·시외버스
서울→예산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8회(07:00~19:05) 운행. 2시간20분 소요, 요금 6,700원.
인천→예산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8회(07:55~18:40) 운행. 2시간50분 소요, 요금 8,000원.
대전→예산 동부터미널에서 매일 27회(07:00~19:10) 운행. 2시간10분 소요, 요금 8,100원 / 서부터미널에서 매일 30회(06:51~19:03)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8,600원.
천안→예산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20분 간격(06:15~21:30) 운행. 1시간 소요, 요금 3,900원.
*예산종합버스터미널 041-333-2921~2

● 시내버스
예산→수덕사 터미널에서 매일 20분 간격(06:25~19:00) 운행. 1시간 소요, 요금 1,450원.
예산→추사고택 터미널에서 매일 7분 간격(07:50~21:05) 운행. 30분 소요, 요금 550원. 예산→예당저수지 터미널에서 매일 20분 간격(06:20~20:25) 운행. 25분 소요, 650원.

● 철도
서울→예산 용산역에서 예산역까지 매일 17회(05:30~20:50) 운행. 새마을호 1시간50분, 무궁화호 2시간 소요, 새마을호 12,000원, 무궁화호 8,200원.
*예산역 041-335-7788


숙식(지역번호 041)

● 덕산온천권 예산에서 숙식을 해결하기 가장 무난하다. 수덕사 입구에 청암회관(돼지갈비·337-0085), 장어마을(장어구이·338-0101), 자연식당(산채정식·337-6060), 수덕골미락(산채정식·337-0606) 등 수십 개의 식당이 있다. 
덕산온천 주변에는 온천장 7개소와 관광호텔 2곳, 일반호텔 1곳 등 50여 개의 숙박업소 및 각종 음식점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덕산면 사동리에는 덕산온천관광호텔(338-5000), 덕산싸이판대온천(338-8862), 덕산스파캐슬(www.oceancastle.com·330-8000), 신평리에는 덕산온천관광타운(338-6000), 뉴가야관광호텔(337-0101), 삽교읍 신리에는 세심천온천호텔(338-9000) 등이 있다.

● 예산읍권 추사고택 주변에는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다. 예산 읍내에 귀빈장(332-2085), 황금여관(334-5678), 청운여관(332-5364) 등의 숙박업소가 있다. 예산읍의 소복갈비(331-2401)는 소문난 맛집이다.

● 예당저수지권  예당저수지 주변에 임페리얼모텔(334-1311), 예당파크(333-4362), 라노스모텔(332-8801) 등의 숙박시설이 있다. 저수지 주변으로 예당가든(333-4473), 줄포회관(333-9000) 등 붕어찜과 어죽, 매운탕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이 여럿 있다.
*예산군 관광안내소 041-330-2759
*예산군청 041-330-2114(대), 관광사업담당 330-2316~8 
*예산군청 홈페이지 www.yesan.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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