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월간산 2024년 5월호
  • 655호

[르포라이터 민병준의 향토기행] 아산

월간산
  • 입력 2007.02.06 16:41
  • 수정 2007.02.12 09:1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당신의 그림자만으로도 온 강산이 빛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잠들어 계신 온천 고을<br>아산, 어떤곳인가<br>길에서 만난 별미<br>일정별 길라잡이

한반도에서 손꼽히는 큰 만(灣) 가운데 하나인 서해의 아산만(牙山灣)은 바다와 호수의 아름다움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조석간만의 차가 최대 9.6m로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곳답게 썰물 때 드러나는 갯벌은 눈길을 거둘 수 없을 정도로 널따랗다. 그래서 바다를 끼고 나란히 달리는 해안도로와 아산만 안쪽의 방조제(아산만·삽교천)를 잇는 도로는 아산만이 간직한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혀왔다. 여기에 2000년 아산만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서해대교가 건설되면서 아산만은 다양한 모습의 서해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최고의 드라이브 대상지로 떠올랐다.

▲ 영인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아산만 전경. 왼쪽으로는 삽교천방조제, 오른쪽으로는 아산만방조제가 보인다.
▲ 영인산 정상에서 내려다본 아산만 전경. 왼쪽으로는 삽교천방조제, 오른쪽으로는 아산만방조제가 보인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아산으로 가려면 반드시 아산호나 삽교호를 지나야 한다. 1973년 아산만방조제를 건설하면서 생긴 아산호는 충청도와 경기도 사이의 아산만에 형성된 인공호수다. 충남 서북부의 당진·홍성·예산·온양·천안 지역의 수계인 삽교천 본류를 막아 생긴 게 삽교호라면, 경기 남부의 수원·용인·화성·오산·안성·평택 등의 수계인 안성천을 가로막아 생긴 게 바로 아산호다. 요즘 경기도 사람들은 이 호수를 평택호(平澤湖)라 따로 부르고 있다. 아산호기념탑이 서있는 곳에 새로 정자를 지어놓고 ‘평택호정’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 아산호에 대한 경기도민들의 애정을 읽을 수 있다.

▲ 아산만 갯벌에서 갯일을 하고 있는 어부들 뒤로 서해대교가 보인다.
▲ 아산만 갯벌에서 갯일을 하고 있는 어부들 뒤로 서해대교가 보인다.
한쪽 옆구리에 아산만을 끼고돌면서
바닷가 풍경을 훔쳐본다. 갯바위에서 굴을 따는 사람들, 관능적(?)인 몸매를 지닌 갯바닥에 비스듬히 누워있는 빈 배들…. 그런데 이런 바다 풍광이 아무리 좋다 해도 아산만을 지날 때라면 ‘조개구이’를 하는 포장마차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참새가 방앗간 그냥 지나갈 순 없는 법. 길손 일행도 남들처럼 바다가 보이는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 조개구이를 주문했다. 포장마차 안은 가족과 연인들이 떠드는 소리로 왁자지껄해 정작 바닷소리를 들을 순 없었지만, 막 바닷가에서 따온 듯한 굴을 비롯해 싱싱한 돌조개, 민돌조개, 맛, 소라, 키조개 등은 바다를 끼고 있는 고을을 돌아다니는 즐거움을 상기시켜 주기에 충분한 별미다.

식탁 옆에 선사시대인들처럼 ‘패총’을 만들어놓고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포장마차를 빠져나와 삽교호와 아산호를 오가며 저녁노을을 기다리는 일은 정해진 코스다. 동해의 화진포호, 경포호 등에선 일출을 곁들여야 제 맛이 나듯, 서해에선 일몰을 감상해야 구색을 갖추는 게 아닐까?

방조제엔 휴일이면 바다를 구경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콘크리트 방조제로 올라서서 삽교호와 서해를 번갈아 바라본다. 바다는 썰물 때라 갯벌이 다 드러나 있고, 호수는 꽁꽁 얼어있다. 아이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야, 갯벌이다” 하며 신나서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28년 전의 일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다.

삽교천방조제 건설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던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26일 삽교호 준공식에 참석해 한글로 ‘삽교호’라는 휘호까지 썼다. 그는 방조제 위를 당당하게 걸어가며 국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지만, 그게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였다. 그날 저녁, 박대통령은 궁정동 만찬장에서 김재규의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던 것이다.

삽교천방조제 덕에 내포의 농경지도 늘어났고, 충남 서북부 일대의 농지에 물을 공급하는 일도 원활해졌다. 또 서울~당진 간 육로 거리도 40km나 단축시켰으니 당시로선 꽤나 획기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에 해로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가, 20세기 들어 육로가 발달하면서 조금씩 소외되던 아산이 다시 교통의 요지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두 개의 방조제에서 일몰과 조개구이를 즐겼으면 이젠 아산의 내륙으로 들어갈 차례다. 우리 현대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잠시 짬을 내서 산속의 절집을 찾곤 한다. 아마도 부처님 계신 대웅전 들러 삼배를 올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풍경 소리 들려오는 절집의 고즈넉한 풍경을 즐기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 굳이 종교를 따지지 않더라도 우리는 절집에서 자그마한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어디 절집뿐일까? 종소리 들려오는 교회는 어떻고, 찬송가 울려 퍼지는 성당이면 또 어떤가. 가서 조용히 쉴만한 공간만 있다면 굳이 예배를 올리지 않아도 잠시만 기웃거려도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산에는 큰 규모의 절집은 없다. 연꽃 좋은 신창면의 인취사나, 들어가는 진입로의 솔밭이 좋은 송악면의 봉곡사라는 작은 절집이 있으나, 요즘 같은 계절에는 아무래도 썰렁하다. 그나마 중세의 사원처럼 고즈넉하면서도 종교적인 분위기 물씬 풍기는 성당이 있다는 것은 다행이다.

아산만방조제를 건너면 국도가 갈리는 삼거리 맞은 편 언덕에 성당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바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히는 아산 공세리 성당이다. 봄에는 붉은 영산홍이 언덕을 수놓고, 여름이면 상사화가 눈길을 끌고, 가을이면 오색의 단풍…. 뿐만 아니다.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겨울 설경도 아름답다. 그러나 눈이 내리지 않았다 해도 실망할 필요가 전혀 없다. 300년 수령의 아름드리 나목들 빈 가지 너머로 보이는 성당 건물은 어디서 보든지 중세풍의 유화를 감상하는 것만 같다. 이렇듯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는 굳이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해준다.

▲ 성당 둘레의 산책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 성당 둘레의 산책길에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성당 둘레로는 수녀님이나 신부님의 산책코스로
쓰일 듯한 한적한 오솔길이 마련되어 있다. 한 바퀴 도는 데 겨우 5분도 채 안 걸리는 짧은 거리지만, 온갖 수목으로 둘러싸여 있어 참 포근하게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 여기엔 예수의 수난을 묵상할 수 있는 14처마다 수난 상징의 조형물이 조성되어 있어 종교적인 분위기를 한껏 돋워준다.

이런 덕에 성당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소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드라마 ‘모래시계’를 시작으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불새’ ‘고스트맘마’, 그리고 이런 저런 뮤직비디오 등에서의 성당 배경은 이곳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가수 안치환이 성당의 은행나무 아래서 썼다는 노랫말도 궁금하다.

원래 이 언덕은 일찍이 조선조 때 아산·서산·한산을 비롯해 멀리 청주·문의·옥천·회인 등 충청도 지방 39개 목·군·현에서 거둬들인 조세(租稅)를 쌓아 두던 공세(貢稅) 창고가 있던 곳으로서 ‘공진창’이 처음 명칭이다. 1478년(성종 9) 모든 제도가 정비되면서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은 모두 이곳으로 모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도록 하였는데, 처음에는 창고가 없어 밖에 쌓아두다가 1523년(중종 18)에 비로소 80칸짜리 창고를 건축하였다. 이곳에 조세로 바친 쌀을 모아 두었다가 수로 500리 길을 따라 선박으로 옮겼다.

그러다 고종 때 이 제도가 폐지되자 1895년 당시 마을 신자의 집을 임시로 사용하여 복음을 전파하던 파리 외방 선교회 드비즈(에밀리오) 신부가 창고 건물을 헐고 구 본당과 사제관 건물을 세웠다. 1897년의 일이다. 지금도 성당 주변으로는 조선시대 성의 흔적이 680m 정도 희미하게 남아 있고, 성당 입구의 인주농협 앞에는 6개의 해운판관비가 서있다.
▲ 고딕 양식의 공세리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 고딕 양식의 공세리성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 중 하나로 꼽힌다.
지금의 고딕 양식 성당은
프랑스 출신의 드비즈 신부가 1922년에 중국인 기술자를 데려와 지은 것이다. 설계는 드비즈 신부가 직접 한 것이라 하니 그는 건축학에도 일가를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건축 당시에 아산 지방의 명물로서 이름을 날리며 멀리서부터 많은 구경꾼을 불러왔다고 한다.

공세리 성당의 초대 주임을 지냈던 드비즈 신부는 2대 기낭 신부가 1년 만에 전임하자 다시 3대 주임으로 부임해 1930년까지 무려 34년 동안이나 머물며 성당의 기반을 굳건히 다졌다.

드비즈 신부는 지역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등에 많이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자신이 직접 조제한 한방의술을 활용해 백성들을 살폈는데, 유명한 ‘이명래 고약’은 드비즈 신부가 제조한 것이라 한다. 이 고약은 처음에는 드비즈 신부의 한국 이름을 따서 ‘성일론(成一論) 고약’이라 했고, 나중에 드비즈 신부의 심부름꾼이었던 이명래에게 전수되면서 ‘이명래 고약’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공세리 성당은 천주교 신자들에겐 순교성지다. 조선 후기의 4대 박해에서 희생당한 총 순교자는 1만 명 정도라 한다. 이중 아산,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등 내포를 비롯한 충청권의 희생자가 무려 60~70% 정도나 된다고 한다. 공세리 성당 출신의 순교자도 28명에 이르고, 이중 박의서(사바스)·원서(마르코)·익서(미상) 3형제 순교자의 묘가 성당 옆에 남아 있다.

아산호와 삽교호 사이에 부드럽게 솟아 있는 영인산(364m)은 아산만 전체를 굽어볼 수 있는 요지 중의 요지다. 영인산은 청일전쟁 때 일본군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바다를 건너온 청나라 군사들이 아산만 갯벌로 상륙하는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으니 아산만이 겪어온 영욕의 역사를 지켜본 산 증인이기도 하다. 정상엔 백제 초기의 성으로 추정되는 영인산성이 있다.

▲ 영인산자연휴양림에서 영인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널찍해서 어린이들도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다.
▲ 영인산자연휴양림에서 영인산 정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널찍해서 어린이들도 안전하게 다녀올 수 있다.
정말로 영인산은 비록 나지막하긴 해도 너른 내포 들판과 아산만을 지키는 지킴이로서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산 남쪽의 광덕산이 충청남도 내륙과 바다의 경계로서 역할을 했다면 서쪽의 영인산에선 아산만을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시 내포, 그중에서도 삽교천방조제와 아산만방조제를 한눈에 담고 내포의 너른 들판을 감상하려면 반드시 이 영인산을 올라야 한다. 휴양림에서 올라가는 능선길은 널찍하고 완만해 코흘리개 아이들과도 함께 걸을 수 있다. 왕복 2시간의 산책이 큰 행복으로 다가오는 곳, 바로 영인산이다.

영인산을 다녀왔다면 이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1545-1598) 장군을 뵈올 시간이다. 영인면 소재지에서 628번 지방도를 타고 동쪽의 음봉면을 향하여 10여 분만 달리면 이순신 장군 묘소가 나온다. 임진왜란 당시 절체절명의 위기에 닥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대승으로 극복한 이순신 장군은 두말이 필요 없는 우리 겨레의 영웅이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 고택. 한양에 살던 충무공은 8세 때 부친을 따라 외가가 있는 염치면 백암리 현재 현충사 자리로 낙향하였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 고택. 한양에 살던 충무공은 8세 때 부친을 따라 외가가 있는 염치면 백암리 현재 현충사 자리로 낙향하였다.
충무공은 문관의 집안에서 1545년(인종 1)
3월8일 아버지 이정(李貞)과 어머니 초계(草溪)변씨(卞氏) 사이에 4형제 중 셋째아들로 한양 건천동(지금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충무공의 조부 이백록(李百綠)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부친이 벼슬에 나가지 못하고 매우 궁핍하게 살아가 가세가 기울어 처가가 있는 아산 백암리로 낙향하게 되었다. 충무공의 나이 8세 때였다. 이후 충무공은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그를 기리기 위해 1706년(숙종 32)에 사당을 세우고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현충사에서 시오리 정도 떨어진 음봉면 국사봉 기슭에 자리 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는 주변이 널찍하고 솔숲도 잘 가꿔져있어 가족단위나 연인들의 산책코스로도 꽤나 인기 있다. 임진왜란 당시 23전 23승 무패로서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면서 겨레의 신화가 된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1598년 11월19일에 운명하여 20일 뒤인 12월10일에 고향인 아산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고, 16년만인 1614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게 된다.

사람들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소에 관심이 많다. 묘소의 주산인 국사봉(222.5m)은 금북정맥의 성거산(579m)에서 서쪽으로 분기한 산줄기에 솟은 산이다. 산의 모습이 마치 장군이 머리에 쓰는 투구와 같다 하여 투구봉이라고도 불리는 국사봉을 주산으로 하고 있는데, 무의식에 빼어난 명당일 것 같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렇지 않다는 게 풍수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이곳을 장군대좌형(將軍大座形)이라고 하는데, 비록 주변 형세는 장군대좌형의 형태를 갖추었다고는 하나 풍수지리에서 제일 중요한 용혈이 약하고, 주변 산과 물이 이곳을 잘 감싸주지 못했다. 좌청룡은 일자로 쭉 뻗어나갔고, 우백호는 잘 감싸주기는 했지만 어깨에 해당되는 부분이 푹 꺼져있다. 특히 방위가 건해방(乾亥方)이어서 서북풍이 혈을 치고 들어오고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서북풍의 침해를 받는 것을 매우 꺼린다.”

다른 자료를 뒤적여 보아도 평가는 다 비슷하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영웅이 이런 자리에 잠들어 계시다니 대체 어찌된 일일까. 전후의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누가 이 무덤자리를 본 것일까. 놀랍게도 충무공의 첫 번째 무덤자리를 봐준 이는 다름 아닌 두사충(杜師忠)이란 당대 최고의 명나라 풍수가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1598년 11월19일 충무공이 운명하자 아산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고, 16년만인 1614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 노량해전이 벌어졌던 1598년 11월19일 충무공이 운명하자 아산으로 시신을 옮겨 장사를 지냈고, 16년만인 1614년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먼저 충무공과 두사충의 인연을 짚어보자.
두사충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조선에 들어오면서 대동한 지리 참모다.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지형을 모르고서는 전쟁을 치를 수가 없는데, 두사충은 주위의 지형을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 주는 임무인 수륙지획(水陸地劃) 주사(主事)를 맡았다. 당시 지리 참모 대부분은 풍수지리가들이 담당하였다.

또 그는 사사로이는 명나라 수군 도독 진린(陳璘)의 처남이었다. 진린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자주 만났는데 이때 두사충도 이순신 장군과 친교를 맺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두사충은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진린과 함께 다시 조선으로 왔다. 이때 두사충과 재회한 충무공은 그에게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라는 한시를 지어주며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함께하고 /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하네 / 성 남쪽 타향의 달빛 아래 / 오늘 한잔 술로써 정을 나누세(北去同甘苦 東來共死生 城南他夜月 今日一杯情)’

시 내용을 보면 충무공과 두사충은 제법 친했던 것 같다. 그리고 충무공의 인품에 매료됐던 그는 충무공이 전사하자 직접 아산에까지 와서 음봉면 산정 마을 뒤에 무덤 자리를 잡아준다.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 군대는 본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철군 길에 오른 두사충은 압록강까지 갔다가 진린을 배웅한 후 자기는 조선에 귀화해 대구에 정착했다. 나중에 두사충 신도비는 이순신 장군 7대손인 삼도통제사 이인수가 찬(撰)했는데, 임진왜란 당시 맺은 충무공과 두사충의 인연이 후손들에게까지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당대 최고의 풍수가가 자리 잡은 충무공의 무덤은 그로부터 16년 뒤 그곳에서 약 1km 떨어진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고, 훗날 그 자리는 충무공의 손자가 들어갔다. 명당을 마다하고 굳이 이장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나 16년만의 이장에 대해서는 구구한 억측만 있을 뿐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다. 다만 두사충이 무덤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왕실에서 영웅 집안의 명당발복이 두려워 은근히 이장 압력을 넣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았다.

‘16년만의 이장’이란 사실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쟁 때 죽지 않고 은둔했었다는 은둔설이 호사가들의 입을 통해 떠돌았다. 이는 충무공의 죽음에 관해서도 일부러 왜군의 총에 맞았다는 ‘의도적 자살설’과 맞물려 늘 관심을 끌고 있는 설이다.

이순신 장군은 오늘날로 하면 해군 참모총장이라는 삼도수군통제사의 지위에서 대역 죄인으로 몰려 일개 병졸로 백의종군하다가 다시 복귀해 12척의 배로 10배가 넘는 적을 무찌르는 극적인 삶을 살았다. 이런 여러 설이 나도는 배경은 당시 소심한 선조가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 충무공에게 민심이 쏠릴까 매우 경계했을 것이라 믿는 데 있다. 왜구의 침입에 시달리던 고려 왕조에 이성계라는 영웅이 등장하면서 민심이 쏠렸고,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가 멸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해서 조선이 탄생하긴 했지만, 그 탓에 조선에서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무장(武將)들은 늘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었다. 또한 당시 대신들도 야전에 있던 전쟁영웅이 조정의 실세로 등장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충무공 역시 당시 임금이나 조정 대신들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충무공은 자신이 누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릴 개연성이 충분하다는 사실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는 자기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집안 전체가 멸족 위기에 처할 수도 있는 심각한 일이었다. 전승의 신화를 가진 장군은 지략과 상대방의 심리파악에 귀재인 만큼 자살이나 은둔으로 가장해 위기를 극복했다는 것이 이런 설을 믿는 사람들의 주장이다.

▲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건물이었던 온주아문(溫州衙門). 온주는 신라 시대 온양군의 이름이었다.
▲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건물이었던 온주아문(溫州衙門). 온주는 신라 시대 온양군의 이름이었다.

아산은 작은 고을임에도 세 군데에서 온천이
솟을 정도로 온천으로 유명한 고을이다. 그중에서도 온양온천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온천의 하나다. 백제 때는 온정(溫井), 고려시대에는 온수(溫水), 조선시대 이후에는 온양(溫陽)이라고 불렸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역사가 길다. 조선시대에는 태조·세종·세조 등이 이곳을 자주 찾았고, 특히 세조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지 신천(神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조·정조도 온궁(溫宮)이라는 별장을 지어놓고 이곳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어쨌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뵙기 전후에 온천욕까지 했다면 이번엔 외암 민속마을로 가보자. 온양 시내에서 39번 국도를 타고 공주 방면으로 달리다 고개를 하나 넘으면 읍내동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조선시대 온양의 중심지였던 현이 있던 마을이다. 온양향교, 온주아문과 동헌 등은 이곳의 위상을 잘 설명해주는 문화유산이다. 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그 옆의 당간지주도 이곳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을은 현이 있던 곳이 중심이 되어 발전하는데, 이곳은 ‘읍내동’이란 이름만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온양온천 주변으로 큰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어 비교적 한적한 마을로 남아있다.

읍내동에서 승용차로 10여 분 거리에 있는 외암마을은 아산의 보배다. 충무공 모신 현충사를 아산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아산에 외암마을이 없었다면 정말 허전했을 것이다. 길손이 처음으로 이 마을을 찾았던 어느 해 늦가을 풍광은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장승과 솟대가 반겨주는 동구를 지나면 정겨운 기와집과 초가가 나오고, 고샅길을 따라 오르면 나지막한 담장에 매달린 늙은 호박 하나 따가운 가을 햇살에 여물어가고 있었다. 사립문 한쪽의 늙은 감나무엔 주렁주렁 매달린 감이 점점 익어가고, 두엄밭을 뒤지던 씨암탉들의 꼬꼬댁 소리….

이렇듯 외암마을은 잃어버린 옛 고향을 느껴볼 수 있는 전형적인 마을이다. 이 길손도 고향 가는 길에 고속도로 정체가 심하면 외곽으로 빠져나와 이 마을을 들렀다 가곤 하면서 어느새 정이 들어버렸다.

▲ 설화산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 설화산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외암마을의 주산은 금북정맥에서 뻗어나온
지맥이 광덕산(698.4m)을 지나 서북쪽으로 뻗은 산줄기의 솟은 설화산(447m)이고, 조산은 서남쪽에 솟은 금북정맥의 봉수산(535m)이다. 설화산은 뾰족한 산봉우리가 다섯이 솟아있어 오봉산(五峯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배방산(排方山)이라는 이름도 있다. 주산인 설화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외암골이란 이름을 얻어 마을을 남쪽을 감싸돌면서 마을 입구에 이르러 광덕산에서 발원한 강당골 물줄기와 어우러져 북류하다 곡교천을 만나 아산만으로 흘러든다.

이 외암마을은 약 500년 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그러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將仕郞)을 지낸 이정(李挺)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예안이씨(禮安李氏) 세거지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이 번창하고 인재를 배출하여 반촌(班村)의 면모를 갖추었다.

외암마을이란 이름의 유래는 후손인 이간(李柬)에 의해서다. 그는 설화산의 우뚝 솟은 형상을 따서 호를 높을 외 자를 쓴 외암(巍巖)이라 지었는데, 그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렸다. 그런데 한자는 언제부터인지 획수가 적은 외암(外岩)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마을 안에는 민가 주택이 밀집되어 있고, 그 주변 산야에는 농경 전답이 넓게 퍼져 있다. 이들 중 넓은 마당과 정원을 갖추고 여러 채의 목조기와집을 가진 큰 규모의 고가(古家)들이 20여 채에 이르고, 그 사이사이엔 작은 규모의 주택들이 섞여서 모두 60채에 이르는 민가가 모여 있다. 주민은 400여 명인데, 이 중 예안이씨 집안은 절반이 넘는다.

▲ 정겨운 풍경의 외암마을을 둘러보고 있는 관광객들.
▲ 정겨운 풍경의 외암마을을 둘러보고 있는 관광객들.
외암마을의 특징은 정겹다는 데 있다.
집의 규모나 격식에 있어서도 집안의 세를 과시하려는 듯한 영남지방 등의 전통가옥과 달리 낮고 펑퍼짐한 뜰과 마당의 수목이 잘 어우러져 담백한 맛이 있다. 이렇듯 거부감이 들지 않고 정겹게 다가오는 마을 풍경은 어쩌면 내포 사람들의 품성을 그대로 빼다 닮았는지 모른다.

마을은 젖줄인 설화산 계류를 끌어들인 수로가 모든 집들을 연결해 수로와 나무들이 어울려 마을 전체가 큼직한 정원처럼 보인다. 이는 설화산이 품고 있는 화기(火氣)를 다스리고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수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을의 반가에는 참판댁·병사댁·감찰댁·교수댁·참봉댁·국사댁 등 주인의 관직명을 따서 부르는 택호와, 재직하던 고을명이나 출신지명을 따서 영암댁·신창댁·양성댁 등의 택호가 붙여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건재고택과 교수댁·감찰댁은 사람이 거주하는 살림집으로서 현재 일반에 개방되지 않는다.

▲ 도고면 시전리의 성준경가옥.
▲ 도고면 시전리의 성준경가옥.
이 마을의 자랑거리는 또 있다.
바로 ‘선비의 향기’로 불리며 지금도 세월의 맛을 이어가고 있는 연엽주(蓮葉酒)다. 이는 예안이씨 가문에서 대대로 빚어온 가양주로서 참판댁이라 불리는 고택에서 이득선씨 내외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국가중요민속자료 제195호로 지정된 이 집은 조선 고종 때 하사받은 집으로 창덕궁의 낙선재를 본떠지었다. 연엽주는 이씨의 고조부인 이원집(1829-1879)이 직접 개발해 빚은 술로서, 해마다 봄이 되면 고종에게 진상됐다. 이원집은 고종 때 왕실 비서감승을 지낸 사람으로 당시 궁중음식의 제조법을 기록한 치농이라는 요리책을 저술할 정도로 다방면에 능력을 보인 인물이다.

그는 1850년 연엽주의 제조비법 등을 치농에 상세히 기록해 부인에게 전했고, 이때부터 연엽주 제조비법은 예안이씨 가문의 종부들을 통해 대대로 전해졌다. 현재 연엽주를 빚고 있는 최황규씨는 이득선의 부인이다. 연잎을 재료로 사용하는 연엽주에는 180여 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연엽주는 빼어난 맛과 효능에도 불구하고 타지에서 맛을 보는 게 쉽지 않다. 임금을 위해 만든 술이다 보니 진상용이나 집안의 제수용으로밖에는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참판댁에서 술을 빚고는 있지만, 그 양이 많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곳 외암마을까지 와서 어찌 연엽주 한 잔 들지 않을 수 있으랴. 애써 길을 묻지 않아도 길손의 발길은 스스로 알아서 연엽주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윽한 연향과 솔향을 따라서.

글·사진 민병준 sanmin@empal.comx

충청남도 북부에 있는 아산시(牙山市)는 동쪽은 천안시, 서쪽은 당진군, 남쪽은 예산군·공주시, 북쪽은 아산만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 평택시와 접한다. 남동쪽에는 금북정맥이 지나면서 광덕산(廣德山·699m)·망경산(望京山·600m)·봉수산(鳳首山·534m)·설화산(雪華山·441m) 등이 산지를 이루고 있으며, 북부에는 영인산(靈仁山·364m)·고용산(高勇山·294m) 등을 중심으로 저산성 구릉이 발달했다.

북서부에는 아산만이 내륙 깊숙이 만입해 있고, 아산만으로 유입하는 삽교천·안성천 하구에 삽교호·아산호가 조성되어 있다. 또 곡교천(曲橋川)이 남쪽의 금북정맥에서 발원해 북류하며 중앙을 관통하여 아산만으로 흐르고, 무한천(無限川)이 선장면(仙掌面)과 예산군 신암면(新巖面)의 경계를 따라 흘러 삽교천에 합류해 삽교호로 들어가며, 둔포천이 시 북부 경계를 따라 서쪽으로 흘러 아산호로 유입한다. 이들 하천유역에 탕정평야 등 넓은 퇴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아산은 백제의 아술현(牙述縣)으로 신라의 삼국통일 후 757년(경덕왕 16)에 음봉현(陰峰縣)으로 개칭, 탕정군(湯井郡·溫陽)의 영현이 됐다. 고려 초인 940년(태조 23) 음봉현을 인주(仁州)로, 기량현(祈梁縣)을 신창현(新昌縣)으로, 탕정군을 온수군(溫水郡)으로 각각 개칭했다. 1018년(현종 9) 천안군에 속현으로 병합됐다가 뒤에 아주(牙州)로 고치고 감무를 두었다. 1413년(태종 13) 아주를 아산으로 개칭했고, 1414년 온수군을 신창군과 병합, 온창현(溫昌縣)이라 했다가 1416년 다시 온수현을 분리했다. 1442년(세종 24) 온수현을 온양군으로 승격시켰으며, 1458년(세조 4) 아산현을 온양·평택·신창으로 나누었다가 1464년 다시 복귀시켰다. 1895년 아산현은 홍주부 아산군이, 온양군은 홍주부 온양군이 됐으며, 1896년 각각 충청남도에 소속됐다.

1914년 군면 폐합 때 아산군·온양군·신창군을 아산군으로 통합하고 12개면을 두었다. 1941년 온양면이 읍으로 승격됐으며, 1986년 온양읍이 온양시로 승격되어 아산군에서 분리됐으며, 1995년 시군 통합에 따라 온양시와 아산군이 아산시로 통합됐다. 현재 1읍 10면 6동을 관할한다.

기후는 여름과 겨울의 구분이 뚜렷한 대륙성기후로 연평균기온 12℃, 1월 평균기온 -2.1℃, 8월 평균기온 24.9℃이며, 연강수량은 약 1,200mm이다. 기후가 온화하며, 수리시설이 잘 정비되어 일찍부터 농업이 발달했다. 농촌과 어촌을 동시에 형성하고 있으며,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서해안 지역발전의 입지조건이 양호한 곳으로 아산항 종합개발, 고속철도 역세권 개발, 현충사·도고온천·아산온천·광덕산·삽교호 등 유수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현충사

염치면 백암리에 있는 현충사(사적 제155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무과에 급제하기 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1706년(숙종 32), 임진왜란 당시 큰 공을 세운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1707년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 이름 지었다. 그 뒤 200년간 사당을 잘 운영해 오다가 한때 일제의 탄압으로 쇠퇴했다.

광복 후 1967년 국가에서 현충사 성역사업을 마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주요시설로는 이순신의 초상화를 모셔놓은 본전을 비롯해 이순신이 자란 옛집, 활을 쏘며 무예를 연습하던 활터, 정문인 홍살문, 셋째 아들 이면의 무덤이 있다. 유물관에는 난중일기를 비롯한 많은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묘소

1598년(선조 31)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자 조정에서는 조문 사절을 파견했고, 아산시 금성산에 장사했다. 그 후 1614년(광해 6)에 현재의 아산시 어라산 기슭으로 다시 모셨다. 묘역은 9,583㎡이며, 묘 1기 외에 비석 1기, 상석 1기, 장명등 1쌍, 석상 1쌍이 있다. 묘소 주변이 널찍하고 숲도 잘 가꿔져있어 가족 단위나 연인들의 산책코스로도 인기 있다.

아산맹씨 행단

배방면 중리에 있는 아산맹씨 행단(牙山孟氏 杏壇·사적 제109호)은 조선 전기 청백리로 유명한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1438) 가족이 살던 집인데, 원래 고려 후기에 최영 장군이 지은 집이라고 전한다. 맹사성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최영 장군의 손자사위다. 고려 우왕 12년(1386)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 전의시승 등을 지내고, 조선 태조 때에는 예조의랑, 이조참의, 예문관대제학, 우의정의 벼슬을 했다.

사람됨이 소탈하고 조용하며, 효성이 지극했으나, 조정의 중요한 일을 의논할 때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했다. 행단(杏壇)이란 선비가 학문을 닦는 곳이라는 뜻인데, 이곳은 우리나라 일반 백성이 살던 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마당에는 600년 된 은행나무 2그루가 서 있고, 뒷동산에는 느티나무, 전나무, 감나무들이 넓은 숲을 이루고 있다. 또한 집 앞 개울가에도 느티나무, 버드나무 등이 많이 자라고 있다. 담장 안마당에는 채소밭도 만들어져 있다. 이 집을 통해 조선 전기 민가의 모습을 잘 살필 수 있다.

어의정

온천동에 있는 어의정(御醫井)은 세종대왕이 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에 왔을 때 치료했다는 우물로 어천(御泉), 어정수(御井水) 등으로 불린다. 1989년 공주대 발굴조사 결과 우물의 기본 시설은 변형되어 있으나 원래 우물에 설치했던 상부 구조의 석조물이 주위에 흩어져 있어서 이 석재를 모아 재구성했다.

복원된 우물 시설은 사각형 구조이며, 화강석으로 만든 너비 107㎝, 길이 120㎝, 높이 50㎝ 규모의 우물 상부시설이다. 이 시설은 규모나 설치 방법이 일반 우물보다는 특별히 크고 독특하다. 주민들 사이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우물의 석재에 ‘어천’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고 하는데, 그 명문은 확인되지 않았다. 

외암리 민속마을

설화산 기슭 경사지에 위치한 외암마을은 약 500년 전에 강씨와 목씨 등이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조선 명종 때 장사랑을 지낸 이정이 이주해 오면서 예안이씨가 대대로 살기 시작했다. 그 후 이정의 후손들이 번창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점차 양반촌의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정의 6대손인 이간이 호를 외암이라 지은 후 마을 이름도 외암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이 마을에는 영암댁·참판댁·송화댁 등의 양반주택과 50여 가구의 초가 등 크고 작은 옛집들이 상당부분 원래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 있다. 양반집은 조선시대 상류 주택의 모습을 잘 갖추고 있으며, 넓은 마당과 특색 있는 정원이 당시 양반의 생활모습과 풍류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초가 역시 예스러운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고, 돌담으로 연결된 골목길과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마을 경관을 더욱 고풍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한 마을에 전통적인 수법의 상류·중류·서민 가옥이 함께 남아있어 마을 형성이나 전통가옥 연구에 매우 가치 있다. 또 설화산에서 시작된 냇물이 마을을 통과하며 이루어낸 정원은 매우 특색 있고 운치 있어 마을 전체가 귀중한 가치를 간직하고 있다. 전화 041-541-0848, 홈페이지 www.oeammaul.co.kr

아산 외암리 참판댁

외암마을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참판댁(중요민속자료 제195호)은 19세기 후반 규장각의 직학사와 참판을 지낸 이정렬이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아 지었다고 한다. 큰집의 사당과 작은집의 대문채·사당은 20세기 초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큰집은 솟을대문을 낸 一자형 대문간채 안에 ㄴ자형의 사랑채와 곳간채가 ㄱ자형의 안채와 안마당을 감싸면서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대문간채는 사랑채가 정면으로 보이지 않도록 약간 서쪽으로 틀어져 있다. 안채의 서북쪽 뒷편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으며, 대문 앞으로 돌담을 쌓아서 깊이 있는 진입로를 마련하고 있다.

큰집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집은 서남향을 하고 있으며, 큰집과 비슷하게 튼 ㅁ자의 배치를 하고 그 앞에 대문간채가 一자형으로 있다. 안채와 사랑채의 평면구성은 큰집과 비슷하며, 사당은 안채의 동북쪽 뒤편에 있다. 대문간채는 초가지붕으로 평대문을 냈으며, 큰집과 달리 사랑채를 향하도록 동쪽으로 틀어서 배치했다. 큰집의 대문 앞으로 돌담을 쌓아 공간을 연출한 것이 특이하다. 이 집은 돌담을 쌓아 아름다운 공간을 구획하고 있으며, 집안의 살림살이가 잘 보존되어 옛 생활방식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전통가옥이다. 

아산 건재고택

외암마을의 중심부에 자리 잡은 아산 건재고택(중요민속자료 제233호)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이간(李柬·1677-1727)이 태어난 집을 현 소유자의 증조할아버지인 건재 이상익(1848-1897)이 고종 6년(1869)에 지금 모습으로 지었다고 한다. 옛집으로 영암집이라고도 한다.

문간채·사랑채·안채를 주축으로 하여 안채의 오른쪽에 나무광, 왼쪽에 곳간채와 안채, 뒷편 오른쪽에는 가묘(家廟)를 배치했다. 안채와 사랑채는 ㄱ자형 집으로 마주하여 튼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또 사랑채 앞은 넓은 마당으로 연못과 정자 등으로 구성된 정원을 꾸몄다.

우리나라 전통 정원은 사랑채 앞마당을 빈 공간으로 두거나 화단을 꾸며 나무를 심었는데, 이 집은 자연경관을 위주로 한 정원을 꾸몄다. 소나무·은행나무·감나무 등의 수목을 마당 전체에 자연스럽게 심고, 일본 정원의 기법인 거북섬을 꾸며 전통과 외래 조경이 섞인 조선 후기 절충형 정원을 이루고 있다. 또한 설화산 계곡에서 흐르는 명당수가 마당을 거쳐 연못으로 흐르게 하는 특이한 조경을 보이고 있다. 연못자리에는 원래 별당이 있었다고 한다. 정원에 있는 2동의 정자는 원래 초가였던 것을 기와지붕으로 개조한 듯하다. 집 주위에는 돌담을 둘렀고, 담 밖에는 초가로 지은 하인집이 있다.

집안에는 도자기·낙관·서화·현판·생활용구 등 대대로 물려오는 유물 300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사랑채에 보관되고 있는 이간의 교지는 입향조(入鄕祖)의 근거자료가 된다.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건축으로, 건물의 배치와 규모·기법으로 보아 외암리 민속마을을 대표할 만한 주택이다. 

아산 연엽주

외암마을에 살고 있는 예안이씨 가문에서 익혀 내려온 양조기술로 제조된 술이다. 이 마을에는 대대로 예안이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득선의 고조인 이원집(1829-1879)이 쓴 ‘치농(治農)’이라는 필사본에 연엽주의 제조방법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 양조법이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연잎을 곁들어 쌀로 빚는 술로, 연꽃잎을 넣어 독특한 향기를 내므로 연엽주(蓮葉酒)라고 한다.

멥쌀 7.2㎏과 찹쌀 1.8㎏을 섞어 술밥을 만들어 식힌 후 누룩 4.5㎏을 버무린다. 항아리를 불길로 바싹 말린 후 항아리에 먼저 연잎 500㎎을 넣은 다음 버무린 술밥을 넣고 깨끗한 지하수 18ℓ를 붓는다. 술을 만든 지 30일 지난 후 용수를 받아 술을 뜨는데, 약 대두 한 말의 술을 얻을 수 있다. 연엽주를 빚을 때는 생수를 써서는 안 되고 또 날이 더우면 쉴 염려가 있으므로 반드시 서리가 내리기 전 잎이 마르지 않았을 때 빚어야 한다. 이렇게 빚으면 봄과 여름에도 술이 변하지 않는다. 아산 연엽주는 현재 최황규씨에 의해 전승되고 있다. 

여민루

영인면 아산리에 있는 여민루(慮民樓)는 조선시대 아산현의 문루로 지어졌다. 1415년(태종 15)에 아산현감 최안정(崔安正)이 빈객이나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세웠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2층 목조건물로 동향한 낮은 기단 위에 사각형의 초석을 갖춘 주형(柱形) 초석을 배열해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워 누마루를 설치했으며, 하층은 정면 3칸에 각각 문을 달아 통로로 사용했다.

아산현 관아는 원래 저습지에 있어서 사신을 접대하는 데 불편해 객사 동쪽에 누각을 지었는데, 이것이 태종 때의 건물인지 그 뒤에 다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누각 명칭은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누기(樓記)의 ‘취위민지의(取爲民之意·백성을 위하는 뜻을 취하여)’를 따서 조선 숙종 때 지중추원부사인 임홍망(任弘望)이 여민루라 했다고 전해진다.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송악면 평촌리 산기슭에 있는 석조약사여래입상(보물 제536호)은 거대한 화강암을 다듬어 조각한 고려시대 불상이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길어 다소 불균형하지만 얼굴이나 옷주름의 조각솜씨가 돋보인다.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약합(藥合)을 받쳐들고 있는 수인은 중생들이 앓고 있는 심신의 온갖 병마를 없애 주는 자비로운 의왕(醫王)인 약사여래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사실적 표현에 충실한 얼굴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요소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좌우대칭으로 규칙적인 옷주름, 짧은 목과 움츠린 듯한 어깨, 꼿꼿이 서 있는 자세 등에서는 다소 형식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고려 초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아산읍 내리 당간지주

아산시 읍내동에 있는 당간지주(보물 제537호)는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받침부분인 기단이 땅속에 묻혀 있어 마주 세운 두 기둥만 드러나 있다. 지주는 높이 410cm이며, 기둥의 너비는 55cm, 두께가 35cm이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이 파여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닳아 다른 조각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으며, 기둥 바깥쪽 두 모서리를 깎아내어 마치 세로줄무늬를 새긴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위·아래 기둥의 굵기가 별 차이 없이 다듬어져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이 일대에서 석재와 기와편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절터였던 듯하다. 

성준경 가옥

도고면 시전리의 성준경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94호)은 울창한 나무숲으로 둘러싸인 곳에 북향으로 자리 잡은 기와집으로 1825년(순조 25)에 지었다고 한다. 집의 진입로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있고, 바깥마당에는 무지개처럼 휜 소나무 줄기가 대문을 대신하고 있다.

ㄷ자형 안채와 一자형 중문간채가 튼 ㅁ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ㄱ자형의 사랑채가 있어 전체적으로 日자형의 배치를 했다. 안채 왼쪽으로는 3칸의 광채가 있고, 사랑채 오른쪽 앞에는 초가로 2칸의 헛간채와 4칸의 바깥채가 있다. 안채는 5칸 겹집에 양쪽을 홑집으로 꺾어 덧붙여 ㄷ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대청 앞쪽에는 후대에 시설된 듯한 유리문이 있고, 대청 왼쪽으로 제사에 쓰인 곳으로 보이는 2칸의 찬방이 있다. 사랑채는 앞면에 툇마루를 두었고, 모두 덧문을 달았는데, 이것은 북향집이기 때문에 비바람을 막기 위해 후대에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안채와 사랑채를 가로막고 있는 중문간채는 중문을 들어서서 곧바로 안마당을 향해 있지 않고 꺾어들어 가도록 했다. 특별한 정원시설은 없지만 지형에 따라 적당히 축대를 쌓아서 전통가옥에서 흔히 보는 매화, 비자, 소나무, 향, 감나무 등이 울창하게 심어져서 집의 외부공간을 아름답게 조성하고 있다. 

아산 공세곶 고지

인주면 공세리에 있는 아산 공세곶 고지(牙山 貢稅串 庫址)는 조선시대 곡식을 운반하기 전에 쌓아두던 창고터로 ‘공진창’이 처음 명칭이다. 1478년(성종 9) 경국대전에 의해 모든 제도가 정비되면서 충청도에서 세금으로 거둔 곡식은 모두 이곳으로 모았다가 일정한 시기에 서울의 창고로 운송하도록 했다. 지금은 창고터 주변에 만든 성터가 약 680m 정도 남아 있는데, 겨우 터만 알아볼 정도다.

처음에는 창고가 없어 한데 쌓아 두었으나, 중종 18년(1523)에 비로소 창고 80칸을 건축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충청도 지방 39개 목·군·현의 조세로 바친 쌀을 모아 두고 배로 수도까지 운반했다. 문화관광과 041-540-2546.

아산향교

영인면 아산리에 있는 아산향교는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고, 1575년(선조 8) 아산리 동쪽 향교골에서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지었고, 1864년(고종 1)에 수리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외삼문 등이다. 대성전은 제사지내는 공간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인 맞배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해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에는 공자를 비롯해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명륜당은 학생들이 모여 공부하는 강당으로, 앞면 3칸 옆면 2칸에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 노비 책 등을 지원받아 학생들을 가르쳤으나, 지금은 교육 기능은 없어지고 제사 기능만 남아 있다.

아산 공세리성당

인주면 공세리 언덕에 있는 천주교 성당은 130여 평 규모에 본당·사제당·피정의 집·회합실 등의 건물이 있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본당은 1층 적벽돌 건물로, 정면에는 높은 첨탑이 있고, 내부에는 무지개 모양의 회색 천장이 마련되어 있다. 사제관은 2층 벽돌 건물로, 정면이 팔(八)자 계단으로 2층을 오르게 되어 있으며, 계단 아래에 1층 입구를 두었다.

1894년 교회를 설립했고, 1897년에 사제관을 세웠으며, 1922년 연와조 고딕양식의 근대식 성당을 완성했다. 수백 년 된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주위 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천주교 성지라 할 수 있다.

세계꽃식물원

도고면에 있는 세계꽃식물원은 2004년 유리온실을 리모델링해 세계 유명 꽃 1천여 종을 한데 모은 초대형 실내 식물원이다. 1만5천 여 평의 화훼단지 내에 다양한 테마별 꽃과 식물을 관람할 수 있도록 식물원을 꾸며 1년 내내 20가지 테마의 꽃 축제를 개최하는 식물원으로서 동백, 튤립, 베고니아, 백합 등을 테마로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꽃들을 매달 새롭게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아직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유럽의 다양한 꽃들이 최초로 선을 보임으로써 꽃 애호가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온주아문·동헌

읍내동에 있는 온주아문(溫州衙門)과 동헌(東軒)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다. 아문은 1871년(고종 8)에 다시 세워진 건물이다. ‘온주아문(溫州衙門)’이라는 현판은 신라시대 온양군의 이름이 온주였던 것을 따서 붙인 것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이며, 아문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2층의 문루 건물이다. 아래층은 통로로 사용하고 윗층은 누마루로 이용하도록 했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동헌은 아문에서 북으로 50m 떨어진 곳에 있다. 아문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 온양군의 동헌으로 쓰이다가 1928년부터 주재소로 쓰였다. 광복 후에는 파출소로 쓰이다가 1986년 시 승격에 따라 1988년까지 2년 동안 동사무소로 쓰였다. 그 후 1993년에 수리·복원됐다. 앞면 6칸 옆면 2칸이고, 지붕은 아문과 같은 팔작지붕이다. 여지도서의 온양군 공해조에는 동헌 10칸, 아사 23칸, 객사 37칸, 무학당 3칸, 향청 12칸 등 건물 이름과 칸수가 기록되어 있으나, 여러 차례 변형된 결과 지금은 2동의 건물만 남아있다.

온양향교

온양향교(溫陽鄕校)는 원래 아산시 법곡동(法谷洞·능뫼)에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610년(광해군 2)에 지금의 읍내동 자리로 옮겨 세웠다. 향교 건물은 내삼문, 외삼문, 명륜당(明倫堂), 대성전(大成殿)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에서는 중국의 4성(聖) 5현(賢)과 2철(哲), 그리고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에 제향을 올린다. 향교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 홍살문, 솟을대문 형식의 외삼문이 있는데, 정면에 명륜당이 자리 잡고 있다.

광덕산

광덕산은 산세가 부드러운 육산이다. 외암마을에서 시작하는 강당골 주차장~철마봉~정상~이마당약수~멱시~강당골 회귀코스가 걷는 데만 3시간 정도 걸리니 쉬는 시간까지 합하면 3시간30분~4시간쯤 소요된다. 이마당약수코스가 아니라 장군바위를 거쳐 멱시로 하산하면 30분이 더 걸린다. 강당골에서 광덕사로 넘어가는 강당골~철마봉~정상~장군바위~광덕사 코스도 걷는 데만 3시간 소요. 산길은 부드럽지만 겨울엔 워킹용 아이젠을 준비하는 게 좋다.

해운판관비

공세리는 조선시대에 아산 서산 한산을 비롯해 청주 옥천 등 39개 고을의 조세를 조운선을 이용해 서울의 경창으로 보내던 공세곶 고지가 있던 곳이다. 미곡을 다시 경사(京師)로 수로 500리 길을 선박으로 조운했으며, 해운판관을 두었다. 현재 공세리성당 근처 인주농협 앞에는 6개 해운판관비가 서있다. 비 전면에 삼도해운판관비라고 쓰여 있다. 

삽교호

충남 아산시와 당진군 사이에 자리 잡은 삽교호(揷橋湖)는 삽교호방조제를 건설하면서 만들어진 인공담수호다. 높이 12~18m, 길이 3,360m, 최대 너비 168m에 달하는 삽교호는 총저수량 8천만 톤에 달하는 국내 최대 간척지형 저수지다. 1976년 12월에 착공한 후 1979년 10월26일 완공된 이 공사는 168억 원의 사업비와 연인원 33만6천 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

삽교호방조제가 완공된 후 이 일대의 아산, 당진, 예산, 홍성 22개면 24,700ha의 농지에 물 공급이 해결됐을 뿐만 아니라, 충남 서북부 지역의 농경지 4,982ha를 확장해 매년 75,000톤의 쌀을 증산하게 됐다. 또 서울~당진 간의 육로거리도 40km나 단축시켜 충남 서북부로 접근하는 교통로로 각광을 받았으나 지금은 서해대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아산호

안성천 하구에 있는 아산호(牙山湖)는 인공담수호로 평택호라고도 한다. 충남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와 경기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사이에 아산만방조제를 건설하면서 생겼다. 평택지구 대단위 농업개발사업의 용수원을 조성하고, 역류하는 서해 조수의 염해와 연안 침식을 방지하기 위해 1971년 3월부터 1973년 3월까지 시행한 사업으로, 총 377억 원의 공사비가 들었다.

방조제 길이 2,564m, 높이 8.5m(수심 최대 17m), 배수갑문 연장 150m, 갑문의 철문 12연(連·10m×6m), 제방 위 도로 너비 12m. 연평균 필요용수 1억8백만 톤을 공급하고 남는 물은 화성과 평택 사이 인공담수호인 남양호(南陽湖)에 송수한다. 저수량 1억 2,300만t.

방조제가 건설된 후 생긴 아산호는 경기도 평택시에는 농업용수로, 아산시 임해공업단지에는 공업용수로 이용한다. 경기, 충남에 걸친 지역의 홍수와 한발의 피해를 줄이게 됐고, 농지확장 4,674ha, 쌀 증산 5만4,983톤의 효과를 가져왔다.

영인산 자연휴양림

영인면 아산리의 영인산 자연휴양림은 삽교호, 아산호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영인산 기슭에 자리 잡은 휴양시설이다. 1997년 개장했으며, 구역면적은 130만㎡, 1일 수용인원은 2,800명이다. 산 정상에 ‘민족의 시련과 영광의 탑’이 건립되어 있고, 주변에 백제 초기의 석성인 영인산성과 여민루 등의 문화재 7종이 있다.

휴양림에는 야영장, 사계절 썰매장, 산막, 삼림욕장, 수영장, 어린이놀이터, 자연관찰원, 민속놀이터, 체력단련시설, 물놀이장, 야외교실, 전망대, 등산로 등의 시설이 있다. 전화 041-540-2479.

인주 장어촌

46번 국도인 경춘국도를 타고 춘천 방향으로 달리아산만방조제와 삽교천방조제 사이에 있는 인주면 일대는 오래 전부터 장어구이촌으로 유명하다. 간장소스와 고추장을 발라 맛깔스럽게 구워낸 장어구이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각각 집안마다 전해오는 비법에 따라 소스를 만들기 때문에 식당마다 맛에 조금씩 차이가 있다.

10여 식당이 줄지어 있는데, 옛날돌집(041-533-2241), 꽃동네원조장어(041-533-2561) 등이 잘 알려져 있다. 1kg(40,000원)이면 성인 2~3인이 충분히 먹을 수 있다. 

산과들 묵집

아이들과 함께 여행할 때 먹거리를 선택하는 데 마땅치 않을 때가 많다. 장어구이는 아무래도 아이들보다는 어른들 입맛에 맞췄기 때문에 적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럴 때는 송악면 외암마을 근처에 있는 ‘산과 들 묵집(041-541-7762)’으로 가보자. 이 집은 들깨를 뿌린 도토리묵과 사골 육수에 밥을 말아먹는 묵밥이 일품이다. 공기 좋은 광덕산과 설화산 주변에서 거둔 도토리로 묵을 쑤기 때문에 고소하고 담백하다(1인분 5,000원. 시골보리밥 5,000원).

외암마을 앞에서 39번 국도를 타고 공주·유구 방면으로 700m 정도 올라가면 오른쪽에 식당이 보인다. 마당도 널찍해 주차하기 좋다.

아산시는 면적도 넓지 않고 지형도 평탄해 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는 편이라 여행 일정을 짜기에 수월하다. 권역을 아기자기하게 여럿으로 나눌 수 있다. 권역별 거리도 가까운 편이다.
아산만권  아산시 서쪽의 바닷가 지역으로서 서해안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어 접근이 쉽다. 아산만방조제와 삽교호방조제는 드라이브 코스로 좋다. 아산만방조제 남쪽에는 공세리성당이 있다. 성당 근처에 있는 삼도해운판관비도 한번쯤 살펴보면 역사 공부도 된다. 영인산 자연휴양림과 세심사, 아산만 조망이 빼어난 영인산의 가벼운 산행도 괜찮다. 아이들과 손잡고 천천히 걸어도 2~3시간이면 충분하다. 스파로 유명한 아산온천과 충무공 묘소, 윤보선 생가와 묘소 등이 이 권역에 있다.

온양시내권  이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가 중심이다. 온양온천을 비롯해 온양민속박물관, 온양향교, 온주아문, 당간지주 등의 볼거리가 있다.

외암마을권  500년 전통이 살아 숨쉬는 외암마을을 주변으로 약사여래좌상, 봉곡사 등의 볼거리가 있다. 아산 시민들에게 인기 있는 광덕산도 이 권역에 속한다. 설화산 동쪽의 맹사성 고택인 맹씨행단도 이 권역에 넣을 수 있다.

도고온천권  도고온천을 비롯해 세계꽃식물원, 성준경 가옥 등의 볼거리가 있다. 인취사는 작은 절집이지만 여름에는 연꽃으로 유명하다.

# 일정짜기

당일  접근하는 데 1~2시간 걸리는 수도권을 비롯해 같은 충청권, 호남 북부권은 당일로도 여유 있게 웬만큼은 둘러볼 수 있다. 서해안고속도로를 이용해 아산에서 8시간쯤 머물 수 있다고 보았을 때의 추천 코스는 다음과 같다. 서해안고속도로→서평택 나들목→아산만방조제→공세리성당→아산스파비스→충무공 묘소→현충사→맹씨행단→외암마을→귀가

1박2일  이 경우 숙박은 아산 시내의 온양온천, 아산스파비스, 도고온천 주변이나 외암마을에서 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갔을 경우 외암마을에서 숙박하는 것을 기준으로 일정을 짜면 다음과 같다. 서해안고속도로→서평택 나들목→아산만방조제→공세리성당→영인산 산행→아산스파비스→충무공 묘소→현충사→외암마을(숙박)→민속박물관→온주아문→맹씨행단→귀가

2박3일  3~4시간쯤 걸리는 광덕산 산행을 곁들일 수 있다. 또한 현충사 등에서 여유로운 산책을 즐기거나 공세리성당 미사에 참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 교통

접근 드라이브코스

수도권  서해안고속도로→서평택 나들목→38번 국도→포승→아산만방조제→39번 국도→아산 / 경부고속도로 천안 나들목→1번 국도(대전 방면)→4km→21번 국도→아산 <서울에서 1시간30분 소요>

영남권  대구→경부고속도로→남천안 나들목→1번 국도(천안 방면)→3km→21번 국도→아산 <2시간30분 소요> / 부산→남해고속도로→대전-통영간 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남천안 나들목→1번 국도(천안 방면)→3km→21번 국도→아산 <4시간 소요>

호남권  광주→호남고속도로→논산 분기점→논산-천안간 고속도로→남천안 나들목→1번 국도(천안 방면)→3km→21번 국도→아산 <광주에서 2시간30분, 전주에서 1시간30분 소요>

강원권  영동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남천안 나들목→1번 국도(천안 방면)→3km→21번 국도→아산 <춘천서 3시간30분 소요>

충청권  경부고속도로→남천안 나들목→1번 국도(천안 방면)→3km→21번 국도→아산 <대전에서 1시간30분 이내 소요>

열차

용산역→온양온천역 서울의 용산역에서 매일 약 1시간(05:30~20:55)마다 운행하는 장항선 열차를 타고 온양온천역에서 하차. 1시간30분 소요. 요금 무궁화 6,600원, 새마을호 9,700원.

고속·시외버스

서울→아산(온양)  동서울터미널에서 매일 20~30분마다 36회(06:00~21:50)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6,800원 / 남부터미널에서 매일 11회(07:20~17:40) 운행. 1시간30분, 요금 5,400원 /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매일 30분(06:30~21:00) 간격으로 운행. 1시간30분 소요. 요금 일반 5,400원, 우등 7,800원.

인천→아산(온양)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30분(06:00~21:00)마다 33회 운행. 2시간 소요. 요금 7,600원.
천안→아산(온양)  종합터미널에서 매일 20분(06:15~21:30)마다 수시 운행. 20분 소요, 요금 1,600원.
대전→아산(온양)  동부터미널에서 매일 17회(07:00~20:50) 운행. 1시간30분 소요, 요금 5,500원.

# 숙식(지역번호 041)

아산만권  아산만 해안도로 중간 중간에 있는 모텔 등의 숙박시설이 있으나 아산시쪽으로는 마땅치 않은 편이니 스파로 유명한 아산온천타운의 시설을 이용한다. 영인산 자연휴양림(540-2479)에서 숙박이 가능하다.

온양시내권  온양 시내에 온양관광호텔(545-2141), 온양그랜드호텔(543-9711), 온양팔레스호텔(547-2500), 뉴코리아관광호텔(542-8151) 등 호텔급 숙박시설이 많다. 그랜드파크(543-9711) 등 온천을 겸할 수 있는 숙박시설이 많은 온양온천 주변으로 가면 된다. 염치읍 방현리 염치저수지 주변에 팜프라자여관(541-6545), 모빈파크(549-6681), 대성파크여관(546-9293), 방수농원여관(548-3503), 충무여관(544-2155), 용천여관(544-0904), 엘에이파크(549-2038) 등 숙박시설이 많으나 가족나들이에서 이용하기엔 마땅치 않다.

외암마을권  외암마을 안에 민박집이 여럿 있다. 외견은 전통 초가지만 내부는 샤워·취사·화장실이 현대식으로 완비되어 있다. 요금은 6인 이하 1실 기본 40,000원, 10인 이하 60,000원. 개별 예약이 아니라 공동관리시스템으로 민박을 운영하므로 대표전화(041-541-0848)로만 예약할 수 있다. 민박집에서 매식이 가능하다. 한 끼에 5,000원.

외암마을이 있는 강당골에 숙박할 수 있는 집이 있다. 버스종점에 있는 강당골가든(041-544-1695)은 소머리국밥을, 좀더 상류의 출렁다리 앞에 있는 강당골휴게소(041-543-4407)는 청국장, 잔치국수, 토끼탕 등을 차린다. 강당골에 산새들펜션(041-543-3887 www.sansedul.com), 엘림랜드(041-544-4114 www.elrim.co.kr) 등이 있다.

도고온천권  도고그린호텔(544-7766) 등의 숙박시설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숙식할 곳이 많은 편은 아니다.

저작권자 © 월간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